목민심서 서문

2017. 11. 1. 18:32한문기초書

昔舜紹堯。咨十有二牧。俾之牧民。文王立政。乃立司牧。以爲牧夫。孟子之平陸。以芻牧喩牧民。養民之謂牧者。聖賢之遺義也。聖賢之敎。原有二途。司徒敎萬民。使各修身。大學敎國子。使各修身而治民。治民者。牧民也。然則君子之學。修身爲半。其半牧民也。聖遠言湮。其道寢晦。今之司牧者。唯征利是急。而不知所以牧之。於是下民羸困。乃瘰乃瘯。相顚連以實溝壑。而爲牧者。方且鮮衣美食以自肥。豈不悲哉。吾先子受知 聖朝。監二縣。守一郡。護一府。牧一州。咸有成績。雖以鏞之不肖。從以學之。竊有聞焉。從而見之。竊有悟焉。退而試之。竊有驗焉。旣而流落無所用焉。窮居絶徼。十有八年。執五經四書。反復研究。講修己之學。旣而曰學學半。乃取二十三史及吾東諸史及子集諸書。選古司牧牧民之遺迹。上下紬繹。彙分類聚。以次成編。而南徼之地。田賦所出。吏奸胥猾。弊瘼棼興。所處旣卑。所聞頗詳。因亦以類疏錄。用著膚見。共十有二篇。一曰赴任。二曰律己。三曰奉公。四曰愛民。次以六典。十一曰賑荒。十二曰解官。十有二篇。各攝六條。共七十二條。或以數條。合之爲一卷。或以一條。分之爲數卷。通共四十八卷。以爲一部。雖因時順俗。不能上合乎先王之憲章。然於牧民之事。條例具矣。高麗之季。始以五事。考課守令。 國朝因之。後增爲七事。所謂責其大指而已。然牧之爲職。靡所不典。歷擧衆條。猶懼不職。矧冀其自考而自行哉。是書也。首尾二篇之外。其十篇所列。尙爲六十。誠有良。思盡其職。庶乎其不迷矣。昔傅琰作理縣譜。劉彝作法範。王素有獨斷。張詠有戒民集。眞德秀作政經。胡大初作緖言。鄭漢奉作宦澤篇。皆所謂牧民之書也。今其書多不傳。唯淫辭奇句。霸行一世。雖吾書惡能傳矣。雖然。易曰。多識前言往行。以畜其德。是固所以畜吾之德。何必於牧民哉。其謂之心書者何。有牧民之心。而不可以行於躬也。是以名之。
當宁二十一年辛巳莫春。洌水丁鏞。序。

옛날에 순(舜) 임금은 요(堯) 임금의 뒤를 이어 12목(牧)에게 물어, 그들로 하여금 목민(牧民)하게 하였고, 주 문왕(周文王)이 정치를 할 제, 이에 사목(司牧)을 세워 목부(牧夫)로 삼았으며, 맹자(孟子)는 평륙(平陸)으로 가서 추목(芻牧)하는 것으로 목민함에 비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양민(養民)함을 목(牧)이라 한 것은 성현이 남긴 뜻이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사도(司徒)가 만백성을 가르쳐 각기 수신(修身)하도록 하고, 또 하나는 태학(太學)에서 국자(國子)를 가르쳐 각각 수신하고 치민(治民)하도록 하는 것이니, 치민하는 것이 바로 목민인 것이다. 그렇다면 군자(君子)의 학은 수신이 그 반이요, 반은 목민인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오래되었고 그 말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졌다. 요즈음의 사목(司牧)이란 자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하고 어떻게 목민해야 할 것인가는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병들어 줄을 지어 진구렁이에 떨어져 죽는데도 그들 사목된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의 선친께서 성조(聖朝)의 지우(知遇)를 받아, 두 현의 현감, 한 군의 군수, 한 부의 도호부사(都護府使), 한 주의 목사를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나의 불초로도 따라다니면서 배워서 다소간 들은 바가 있었고, 따라다니면서 보고는 다소간 깨달은 바도 있었으며, 뒤에 수령이 되어 이를 시험해 볼 때에도 다소간 증험이 있었지만, 이미 유락(流落)된 몸이 되어 이를 쓸 곳조차 없어졌다. 먼 변방에서 귀양살이한 지 18년 동안오경(五經)ㆍ사서(四書)를 되풀이 연구하여 수기(修己)의 학을 공부하였다. 다시 백성을 다스림은 학문의 반이라 하여, 이에 23사(史)와 우리나라의 여러 역사 및 자집(子集) 등 여러 서적을 가져다가 옛날 사목이 목민한 유적을 골라, 세밀히 고찰하여 이를 분류한 다음, 차례로 편집하였다. 남쪽의 시골은 전답의 조세(租稅)가 나오는 곳이라, 간악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농단하여 그에 따른 여러 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났는데, 내 처지가 비천(卑賤)하므로 들은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것 또한 그대로 분류하여 대강 기록하고 나의 천박한 소견을 붙였다.
모두 12편으로 되었는데, 1은 부임(赴任), 2는 율기(律己), 3은 봉공(奉公), 4는 애민(愛民)이요, 그 다음 차례차례로 육전(六典)이 있고, 11은 진황(賑荒), 12는 해관(解官)이다. 12편이 각각 6조(條)씩 나뉘었으니 모두 72조가 된다. 혹, 몇 조를 합하여 한 권을 만들기도 하고, 혹 한 조를 나누어 몇 권을 만들기도 하였으니, 통틀어 48권으로 한 부(部)가 되었다. 비록 시대에 따르고 풍습에 순응하여 위로 선왕(先王)의 헌장(憲章)에 부합되지는 못하였지만, 목민하는 일에 있어서는 조례가 갖추어졌다.
고려 말에 비로소 오사(五事)로 수령들을 고과(考課)하였고, 국조(國朝)에서는 그대로 하다가 뒤에 칠사(七事)로 늘렸는데, 소위 수령이 해야 할 대략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수령이라는 직책은 관장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여러 조목을 열거하여도 오히려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스스로 실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첫머리의 부임(赴任)과 맨 끝의 해관(解官) 2편을 제외한 나머지 10편에 들어 있는 것만 해도 60조나 되니, 진실로 어진 수령이 있어 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방법에 어둡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에 부염(傅琰)은 《이현보(理縣譜)》를 지었고, 유이(劉彝)는 《법범(法範)》을 지었으며, 왕소(王素)에게는 《독단(獨斷)》이, 장영(張詠)에게는 《계민집(戒民集)》이 있으며, 진덕수(眞德秀)는 《정경(政經)》을, 호태초(胡太初)는 《서언(緖言)》을, 정한봉(鄭漢奉)은 〈환택편(宦澤篇)〉을 지었으니, 모두 소위 목민에 관한 서적인 것이다.
이제 그런 서적들은 거의가 전해 오지 않고 음란한 말과 기이한 구절만이 일세를 횡행하니, 내 책인들 어찌 전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역(周易)》 〈대축(大畜)〉에 “전 사람의 말이나 지나간 행실을 많이 알아서 자기의 덕을 기른다.” 하였으니, 이는 본디 나의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이지, 하필 꼭 목민하기 위해서만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당저(當宁) 21년인 신사년(1821) 늦봄에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은 서(序)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