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19. 13:10ㆍ나의 이야기
◈조선왕조 역대 왕, 수명과 사망 원인◈
* 제1대 태조
태조는 왕자의 난 사건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죠
정종마저 2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동생 이방원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힘이 없어지고 동생 이방원의 힘이
갈수록 세지자 방원을 왕세자에 책봉하고
개경으로 다시 천도를 하자
왕세제였던 이방원이 이를 구실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납니다.
태종이 즉위하자
성석린을 보내
서울로 모셔 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1402년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아
태종이 무학대사를 차사로
보내 겨우 서울로 오게 하죠
1401년 한성부로 돌아온 태조는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지병으로 있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능은 건원릉 동구릉 안에 있다.
* 제2대 정종
'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달인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 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중 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종조때의 정 치는 거의 정안군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63세에 승하
(상왕으로 물러난 후 편안하게 살면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임)
조선역대왕중 유일하게 북한에 있는 후릉
(경기도 판문군 영정리)
* 제3대 태종
1398년부터 1400년까지 둘째 형인 정종이 재위하는 동안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그가 셋째 아들 충녕대군에게 선양한 뒤에는 1418년부터 1422년까지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과거 급제 후 명나라의 사신으로 이색을 수행하였으며,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정몽주를 제거하고, 반대파들을 제거하여 조선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그러나 조선 개국 이후, 개국에 기여한 전비 한씨 소생 자녀들은 외면하고 신덕왕후 소생 아들 중 세자를 정한 부왕과 정도전의 처사에 반발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여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
(元敬王后)이다. 공신들을 추방하고 자신의 처남과 사돈 등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태조 이후 아직 왕권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던 조선의 기틀을 다져서 사실상 조선의 창업 군주로 불린다.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왕이 된 신의왕후 소생의 다섯째 왕자인 태종 이방원은,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 자신의 소생인 어린 막내를 왕세자로 내세운 신덕왕후를 태조 사후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 초 자신이나 동복 형제를 제치고 이복 동생인 의안대군 등을 세자로 세운 것에 불만을 품은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능에 분풀이를 한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자 자신의 신후지지도 미리 옆에 마련하고 한성부의 중심에 안장하고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몹시 애통해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다시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의 능을 경기도 양주군 구리에 안장하고,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은 도성 밖으로 이장을 명한다. 이장하면서 흥천사(興天寺)를 폐쇄했고, 신덕왕후의 능에 있던 석상과 석물을 철거하고 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한다.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을 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했고, 묘에는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또한 신덕왕후 능의 석상과 석물을 다리 교각으로 만들었다. 능침 앞에 세워진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그녀의 묘소가 훼철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정릉을 도성 밖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천장하라 명했다."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의정부의 주청을 가납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태종의 의지였다.
태종은 삼사와 언관들에게 비밀리에 신덕왕후의 왕릉이 도성 밖에 있는 것이 옳은가를 묻기도 했다. 파헤쳐진 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에 쓰였으며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사용되었다.신덕왕후의 능 앞에 세워진 원찰 역시 붕괴되어 재목으로 쓰인다.
이러한 곡절은 기록으로 전해져오다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그 사실이 밝혀졌다. 사한리 골짜기에 있는 정릉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72년만인 1581년(선조 14년)이었다. 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 격쟁한 것이다.
“ | 저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를 봉사하는 사람들은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주소서 - 연려실기술 | ” |
당시 태조의 부모를 비롯한 4대 조상의 묘가 함흥에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정해 묘를 돌보게 하고, 그 사람의 신분을 국묘봉사자(國墓奉祠者)라 하여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즉 조선 최초의 왕비 묘를 돌보고 있으니 군역을 면제해달라는 조심스러운 복위 제청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불거진 신덕왕후 복위 문제는 왕대를 이어가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1669년(현종 10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마침표가 찍혔다.
코끼리 일화
재위 11년인 1411년 2월 22일, 일본왕 원의지(源義持, 실제로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코끼리를 바쳤다. 이는 기록 상으로 한반도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였다. 태종은 이를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했다.이듬해 12월 10일, 전 공조전서 이우(李瑀)가 코끼리를 보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이우를 밟아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1413년 병조판서 유정현(柳廷顯)이 진언을 올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를 전라도 해도(海島)에 두길 청하니,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다귀양 간 코끼리가 풀을 먹지 않고 날로 수척해진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1414년 5월 3일 태종은 코끼리를 다시 육지로 불러오게 했다.
이 코끼리는 세종 때까지 살았는데, 상왕이었던 태종은 1420년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가 코끼리를 기르는 것이 어렵다는 계를 올리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이를 돌아가며 키우도록 했다.이듬해인 1421년에는 충청도 공주에 가 있던 코끼리가 기르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또 발생했는데, 이후에는 이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태종 우
《연려실기술》에는 태종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태종 말년에 큰 가뭄이 닥쳤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논은 갈라졌고 밭은 타들어 갔으며 백성들은 풀뿌리로 먹을 것을 대신했다. 오랜 가뭄으로 민심은 날로 더욱 흉흉해져 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태종도 각 고을 관찰사들을 불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을 꾸짖었으나 오랜 가뭄으로 곡식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괴질까지 번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 태종은 가뭄 속 땡볕 아래 종일토록 앉아 하늘에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죽기 전까지도 기우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승하하기 직전에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만이라도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 우(太宗 雨)라고 불렀다.
상왕으로 물러난 후 태종은 폐렴으로 56세에 승하
부인 민씨도 학질로 56세졸 능은 헌릉
* 제4대 세종
대식가로 당뇨병으로 54세에 승하
(고기를 매우 즐긴 왕.. 식단에 항상 고기가 있었음,
그래서 종기가 많이 났음)
(그리고 여러 부인을 둔만큼 성병도 있었다고 함)
소형왕후 심 씨와 합장함으로써 조선최초 합장 능은 영릉
* 제5대 문종
등창으로 39세에 승하, 아버지 세종을 닮아 몸이 허약했음
능은 현릉
* 제6대 단종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으로 17살때 서인(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 포에서 사사됨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 능은 장릉
* 제7대 세조
악업으로 문둥병과 불면증으로 52세에 승하 능은 광릉
* 제8대 예종
20세에 복상사 하여 승하 안순왕후 한 씨
정사를 즐기다 승하했으며,
형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 덕종)도
20세에 급사 능은 창릉
* 제9대 성종
등창과 폐병으로 38세에 승하 28명의 자식을 두었고
주색을 즐긴 카사노바였다.
능은 선릉이며, 임진왜란 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에 태워지는 수모를 겪는다
* 제10대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유배 강화도에서 괴질로 31세졸
아들 넷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묘는 서울 방학동
* 제11대 중종
거머리로 등창을 치료하다,
울화병과 노환으로 57세에 승하
재위 39년 능은 정릉
* 제12대 인종
이질로 31세 승하(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
하늘이 낳은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사가 없다. 능은 효릉
* 제13대 명종
지나친 방사로 34세에 승하 문정왕후의 아들로
마마보이 로 성장 하였으며,
무수리출신 장씨와 지나친 방사로 인한 졸지에 승하
어머니 문정왕후한테 회초리도 맞았다고 함.
능은 강릉
* 제14대 선조
임진왜란 이후 중풍으로 57세에 승하
영조 다음으로 41년간 재위
능은 목릉
* 제15대 광해
가장 불운한 왕,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유배 그 뒤
십 수 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67새로 졸
( 유배 생활 중에 시중드는 사람이
'영감'이라고 불러도 꿋꿋하게 견뎠다 함)
이때 담배가 일본에서 들어옴
* 제16대 인조
청나라에게 항복한 후, 화병 걸림 신하들 손아귀에서
울화병으로 55세에 승하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한(?) 왕으로 보고 있으며,
재위 중 늘 그 것 때문에
신하들에게 시달려 왔으며 능은 장릉
* 제17대 효종
봉림대군 수전증 있는 어의의 실수로 출혈사로 41세에 승하
강한의지의 북벌정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승하했으며,
능은 영릉
* 제18대 현종
청 황제에게 벌금형을 받은 임금으로 학질과
과로로 34세에 승하
'하멜'에 의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능은 숭릉
* 제19대 숙종
어릴 적 천연두후유증, 노인병, 등창 심한 당파
싸움으로인 한
스트레스로 60세에 승하(인현왕후,
장희빈과의 문제도 있었을 듯)
풍류를 즐겼던 숙종은 봄이면 3000 후궁을
거느리고 큰잔치 별러다한다
능은 명릉
* 제20대 경종
게장을 먹다 급사하여 37세에 승하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 전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거절하다 인정에 끌려 세자를
데려오자 갑자기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성기능을 잃어 내시와 같았다 한다.
능은 의릉
* 제21대 영조
장수하였으며 치매로 83세에 승하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을 강등 한 후 뒤주 속에 가둬 굶어죽게 한 일과
늙어 노망 부린 것이 오점으로 남았으며,
일본에! 서 '조엄'이 고구마를 처음 가져왔다.
능은 원릉
* 제22대 정조
개혁적인 군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
등창으로 49세에 승하(독살설도 있지만,
최근 자료로 보아 등창으로 승하한 게 맞는다고 봄)
안경을 처음 쓴 임금 능은 건릉
* 제23대 순조
매독3기로 45세에 승하 이때 나라는 콜레라가 창궐했으며,
안동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능은 인릉
* 제24대 헌종
23세에 술과 여자로 보내다 폐결핵으로 승하 능은 경릉
* 제25대 철종
세도정치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33세 폐결핵으로 승하
강화도를 그리워하며,
안동김씨 그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살았다.
능은 예릉
* 제26대 고종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67세에 승하 능은 홍릉
* 제27대 순종
몸이 허약했고, 남성 구실을 못했다 함.
1926년, 라디오 들으면서
심장마비로 53세 승하 능은 유릉
*의친왕
독립운동을 했던 고종의 아들,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형
그의 아들 이우 왕자가 얼짱 왕자로 유명해졌다.
현재 의친왕의 아들과 손자들이 다수 생존해 있다.
1955년, 6.25전쟁 중에 걸린
영양실조로 79세로 서거
묘는 홍유릉 내의 의친왕 묘(합장묘)
*의민황태자 영친왕
어릴 때 일제에 볼모로 잡혀간 비운의 황태자다.
1963년 뇌혈 전증으로 귀국해
7년간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70년 74세의 나이로 서거
[출처] ♣,조선왕조 역대 왕, 수명과 사망 원인|작성자 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