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10. 17:15ㆍ나의 이야기
청자
중국에서 처음 만들었으며, 한국에도 전해져 고려시대에 꽃피웠다.
유약 가운데 미량의 철분이 있어, 환원염(還元焰)에 의해 구워지는 과정에서 청록색의 유조(釉調)를 띠게 된다. 대체로 환원이 불충분하거나, 또는 불순물이 함유되어 있으면 유색이 녹황색이나 회녹색, 때로는 산화되어 황갈색을 띤 것도 청자라 부른다. 다만 구리성분의 산화에 의한 녹유(綠釉)는 청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청자는 산지와 시대에 따라 갖가지 구별이 있다.
기원은 은(殷)·주(周)·전국(戰國) 시대 무렵에 중국 각지에서 만들어진 회채도(灰彩陶)에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 이것이 특히 중국 남부지방에서 발달하여 삼국·서진(西晉) 무렵에는 회녹색의 고월주요(古越州窯:古越窯)라 불린 원시적인 청자가 저장성[浙江省]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말기에 이러한 청자는 중국 북부에서도 제작되어 화려한 대작도 나타났다. 당대(唐代)에는 각지에 명요가 생겼고, 특히 웨저우요[越州窯]의 청자는 유명하였다. 당말오대(唐末五代)에는 질과 양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 제품은 비색청자(翡色靑瓷)라 하여 시문(詩文)에도 구가(謳歌)되었다.
송대(宋代)에는 웨저우요의 흐름을 이어받은 룽취안요[龍泉窯]나, 화북(華北)의 야저우요[耀州窯]에 아름다운 청자가 구워지고, 또 그 영향을 받아 각지에 청자요가 생겼다. 북송(北宋) 말기에는 수도인 변경(폣京:開封)에 관요(官窯)가 설치되었다 하나 제품은 불명이다. 오늘날 여관요(汝官窯)라 불리는 것이 그것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다.
남송(南宋)에서는 수도인 항저우[杭州] 근교에 관요가 설치되어 절묘한 청자를 구워냈다. 그 무렵 룽취안요에서도 침청자(砧靑瓷)라 불리는 분청색의 아름다운 청자가 양산되어 해외에 다량 수출되었다. 송대에서 원대(元代)에 걸쳐서 침청자의 색조는 녹색조가 강해지고, 천룡사청자(天龍寺靑瓷)로 바뀌었다. 명대(明代) 초기는 천룡사청자의 전성기이며, 명대 중기 이후 작조(作調)는 저하되고, 투명성이 강한 칠관청자(七官靑瓷)로 이행되었다. 이 밖에 청조(淸朝)가 되면서 징더전[景德鎭]의 어기창(御器敞)인 연요(年窯)라 불리는 담청색 청자에서 수작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고려 초기(10∼11세기), 강진요(康津窯)와 부안요(扶安窯)에서 독특한 청자를 만들어내었고, 급속도로 성장하여 12세기 무렵에는 비색청자(翡色靑瓷)라 불리는 중국의 청자를 능가하는 뛰어난 청자를 구워냈다. 또 백토(白土)·자토(裏土)를 밑바탕에 상감하여 청자유를 씌워서 굽는 상감청자(象嵌靑瓷)를 내놓았다. 그리고 유하(釉下)에 철회문양(鐵繪文樣)을 그린 회청자(繪靑瓷)도 있다.
고려는 상감청자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크게 발전하였다. 13세기에는 금채(金彩)를 가한 화금청자(畵金靑瓷), 진사(辰砂)를 시유한 청자진사채(靑瓷辰砂彩) 등 기교적인 청자가 나타난다. 13세기 후반부터 유조(釉調)·작풍(作風)이 점차 저하되어 고려 말기에는 쇠미해졌다. 이 밖에 일본·베트남·타이에서도 13세기 무렵부터 청자를 구웠으며, 특히 타이의 스왕카로크[宋胡錄窯]에는 유색이 아름다운 가작(佳作)이 있다.
분청사기
분청사기란 말은 1930년대 고유섭(高裕燮:1904~1944)이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시마[三島]’란 용어에 반대하여 새롭게 지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약칭(略稱)이다.
퇴락한 상감청자(象嵌靑瓷)에 그 연원을 두는 이 사기는 14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의 기반이 닦이는 세종연간(1419~1450)을 전후하여 그릇의 질(質)이나 형태 및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施文技法] 등이 크게 발전 ·세련되어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으며, 조선 도자공예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경기 광주 일대에 백자(白瓷)를 생산하는 관요(官窯)가 운영되면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자기의 공급은 광주분원(廣州分院)에서 맡게 되자 관장제수공업체(官匠制手工業體)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분청사기의 생산은 점점 소규모화되면서 민간용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더욱이 중앙관요의 영향이 지방으로 파급되면서 백자의 생산이 계속 증가되었으며,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분청사기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만이 남아 조선시대 도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하고 활력에 넘치는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粉粧技法), 그리고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켜 재구성한 무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분청사기가 유교(儒敎)의 사회기반 위에서 성장하였고 고려 이래의 불교와 함께 표면상으로는 크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지방마다 특색이 있는 전통의 영향이었다고 생각된다.
분청사기는 분장과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에 따라 7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표면을 선이나 면으로 판 후 백토나 자토(裏土)를 감입(嵌入)해서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기법, 둘째는 무늬를 도장으로 찍고 백토분장(白土粉粧)을 한 후에 닦아내서 찍힌 무늬가 희게 나타나는 인화기법(印畵技法), 셋째는 분장 후 무늬 이외의 백토를 긁어내 태토의 어두운 색과 분장된 백색을 대비시켜 무늬를 표현하는 박지기법(剝地技法), 넷째는 분장 후 선으로 무늬를 새기는 조화기법(造花技法), 다섯째는 분장 후 철분(鐵分)이 많은 안료(顔料)로 무늬를 그리는 철화기법(鐵畵技法), 여섯째는 귀얄로 분장만 하는 귀얄기법, 일곱째는 백토물에 담궈서 분장하는 덤벙기법이다. 이들 각각의 기법들은 시대성과 지역성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분청사기는 크게 4시기로 구분된다. 전기(발생기:1360~1420)는 고려청자 상감무늬의 퇴화된 여운과 그 변모 및 인화기법이 발생한 시기이고, 중기(발전기:1420~1480)는 상감 ·인화 ·조화 ·박지 등 다양한 기법의 분청이 생산된 시기이며, 후기(쇠퇴기:1480~1540)는 상감 ·인화 기법의 쇠퇴하고 철화 ·귀얄 ·덤벙분청이 성행한 시기이며, 말기(소멸기:1540~1600)는 귀얄 ·덤벙분청이 소멸된 시기이다.
분청사기에는 1417년(태종 17) 호조(戶曹)에서 관물(官物) 도용(盜用)의 폐단을 막고자 상소한 내용에 의거 분청사기를 사용한 관청이나 그 제작지 등에 관한 명문(銘文)이 있는 것들이 있다. 이들 관청 중에는 일정기간 존속되었다가 없어진 관청들도 있어 분청사기의 편년(編年)이나 당시 도자기의 제작양상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국보 179) ·분청사기인화문태호(국보 177)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국보 178) ·분청박지화문병(보물 287) ·분청사기모란문반합(보물 348) ·분청사기연화문편호(보물 268) ·분청사기철화어문호(보물 787) 등이 있다.
백자
백자는 고려 초기부터 청자와 함께 일부가 만들어졌으며, 그 수법은 계속 이어져 조선시대 자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자는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 물감(안료)의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순백자(純白瓷):그릇 표면을 싸고 있는 유약과 색조 및 그릇을 형성하는 선이 순백자의 생명이다. 순백자에는 두 가지 유형(類型)이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백자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부드러운 곡선의 기형(器型)을 이루고, 유약은 투명하여 바탕흙과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 유약이 떨어지는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원(元)나라 때부터 고려자기에 영향을 끼쳤던 유형으로 유약이 대체로 얇게 입혀져 백색으로 발색되며, 때로는 약간 청색을 띠고 있는 것도 있다. 그릇 모양은 풍만하여 양감이 있고, 유약은 은은하게 광택을 낸다.
순백자는 다른 빛깔로 장식하지 않으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주며 부분적으로 장식물을 첨가하거나 혹은 투각(透刻)수법으로 무늬를 표현하는 수가 있으며, 표현한 종류에 따라 ① 소문백자(素文白瓷), ② 양각백자(陽刻白瓷), ③ 음각백자(陰刻白瓷), ④ 투각백자(透刻白瓷), ⑤ 상형백자(象形白瓷)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소문백자:그릇 표면에 전혀 장식 무늬가 없고 백색의 단일색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그릇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들어졌으며, 대체로 포용력(包容力)이 있고 청초(淸楚)해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 항아리는 달걀색과 비슷한 순백색의 항아리이다. 얕은 입과 우묵한 받침, 부드럽게 벌어진 몸에서 무한한 품위를 느낄 수 있다. 그릇 일부에 가는 빙렬(氷裂)이 있으나, 조선시대 항아리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② 양각백자:순백자 위에 양각수법으로 무늬를 나타낸 것을 말한다. 무늬는 매(梅)·난(蘭)·국(菊)·죽(竹)의 사군자(四君子)가 가장 많고, 그 밖에도 약간의 무늬를 첨가하거나, 그림에 곁들여 문자를 양각하는 수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양각 매화무늬 장방형연적(長方形硯滴)은 네 귀를 안으로 접은 뒤 한쪽의 좁은 면에는 파도 무늬를 양각하고 그 위에 해태 모양의 물구멍이 있으며, 그 반대쪽과 뒷면에는 매화를 양각하였다.
③ 음각백자:순백자 위에 음각으로 무늬를 장식한 그릇이다. 부분적으로 음각 수법을 한 것은 있으나, 음각 수법만으로 표면을 장식한 예는 매우 드물다.
④ 투각백자: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무늬를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청화(靑華)를 칠하는 경우도 있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투각백자 연환문필통(連環文筆筒)은 푸른색이 감도는 유약을 칠하였으며, 밑으로 크게 처져서 가로대를 돌려 상하로 구분하고 위쪽에는 옆으로 고리 세 개씩을 연결하면서 고리는 물론이고, 고리와 고리를 연결한 십자형(十字形) 줄기의 공간도 투각하였다. 아래쪽은 사십자형(斜十字形) 무늬를 새겼으며, 그 때문에 생기는 사각형 공간도 투각하였다.
⑤ 상형백자: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떠한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만큼 다양하지 못하며, 조선시대의 도자기에서는 순백자에서보다 청화백자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청화를 이용하면 어떤 부분적인 형태를 더욱 효과 있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색을 좋아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때로 효과를 무시하고 백색만으로도 만들었다.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된 백자복숭아연적은 굵은 가지로 받침을 만들고 복숭아에 긴 잎이 붙어 있어 끝이 뾰죽하고 안으로 홈이 패어 있는 사실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2) 청화백자:백토로 기형(器型)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靑畵沙器)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 10)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다.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燔造)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 중국에서 회청(回靑)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세조 11)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전남 강진산(康津産) 토청(土靑:나라 안에서 생산된 청화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청화백자는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번조되었으며 이 일대에는 수많은 관요(官窯)가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듭 변천하였다.
대체로, 15·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껴 쓴 흔적과 사용하는 데 서툰 점을 볼 수 있으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 ·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球形)에 가까워져 양감(量感)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角甁)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 있어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筆線)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畵材)도 추초(秋草)무늬와 같은 15·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龍)·소상팔경(蕭湘八景)·십장생(十長生) 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조(釉調)는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의 안료는 서양에서 양청(洋靑)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표면을 메우다시피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안일하여 격을 잃고 있다.
청화백자의 기형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구에서 문인 계급에게 공급되었던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항아리·접시·사발·떡살 등의 생활용품과, 병·주전자·잔 등의 주기(酒器), 필통·연적·필세(筆洗)·필가(筆架) 등의 문방구, 묘지(墓誌)·인형 등의 명기(明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 각색의 그림이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동물·산수(山水)·십장생·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하하였다.
3) 철회백자(鐵繪白瓷):백토로 그릇을 만들어 낮은 온도에서 초벌구이를 해내고 그릇 표면에 산화철안료(酸化鐵顔料)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백색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백자에 다갈색, 흑갈색 계통의 무늬가 나타난 자기이다. 한국에서 백자에 철분안료로 무늬를 입힌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전기에는 주로 묘지(墓誌)에 쓰였으나 일반화되고 세련미(洗鍊美)를 띠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로 보인다.
철회백자는 대개 광주관요(廣州官窯)와 지방민요(地方民窯)에서 생산된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광주관요의 것은 잘 수비(水飛)된 백토와 양질의 백자유(白瓷釉)에 사실적인 무늬가 주로 시문(施文)되어 포도덩굴·대나무·운룡(雲龍)·매화 등이 세련된 필치로 나타나고, 지방민요의 것은 바탕흙과 유약이 각기 특색을 지니고, 반추상화된 초(草)·죽(竹)·용(龍) 무늬 등이 자유분방하게 묘사되어 있다. 철·철화(鐵畵)·철사(鐵砂)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붙여진 명칭이고, 원래 한국에서는 석간주(石間褓)라고 하였다. 가마터[窯址)로는 경기도 광주시 일대의 조선 중기 요지 및 북한산록, 용인·천안·괴산·철원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4) 진사백자(辰砂白瓷):도자기 바탕에 산화동(酸化銅:辰砂) 채료(彩料)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한 뒤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산화동 채료(진사)가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자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사기그릇을 주점사기(朱點沙器), 진홍사기(眞紅沙器)라고도 불렀으며 진사백자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사백자는 고려시대 중엽(12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가장 흔하게 쓰여진 것은 조선 후기인 18∼19세기 무렵이다. 진사백자의 가마터로는 광주시 분원리요(分院里窯)와 함남의 영흥(永興)일대가 알려져 있다.
청자는 처음 중국(은,주,춘추전국시대)때 만들어져 고려초기(10~11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답니다. 분청사기는 고려말에서 조선초(15세기초)에 만들어졌구요. 백자는 17세기 조선시대때 만들어졌습니다.
청자의 특징
자연스러운 선과 세련된 형태, 요란하지 않으면서 운치있는 문양, 은은하고 투명한 비취색 등이 고려청자의 특색이다. 청자가 투명한 비취색을 띠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말부터이며 이 시기부터 청자의 형태 또한 세련된 미적 감각을 보이고 있다. 고려청자는 12세기 전반기부터 맑은 비취색과 세련된 모습으로 그 미적, 기술적 수준이 최고 절정에 다다른다. 12세기 전체를 통틀어 순청자가 우수한 품질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으로 12세기 중엽에서는 상감기법과 문양에 있어서 가장 세련된 시기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4세기 중엽부터는 청자의 생산이 점차 줄어들게 되고 대신 분청사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분청사기의 특징
청자가 왕족과 귀족을 위한 장식적 귀족적,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한대 비해 분청사기는 기능적이며 소박 활달한 서민적 취향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투박한 느낌을 주는 질감 대담한 형태와 문양구도 추상의 세계를 향한 장인의 의지표현 등은 분청사기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백자의 특징
귀족들을 위한 우아, 섬세한 청자나 서민의 정서를 담은 분청사기와 달리 백자는 단정한 양식, 풍만한 양감을 지닌 자기이다.
순백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한 백자는 순백에 대한 조선인의 미감을 반영한 도자기였으며 조선 건국이래 세종연간까지만 왕실에서 적용하였을 뿐 그 이후 상하계층을 막론하고 백자를 사용하였다. 백자의 양식의장은 중국자기의 영향을 보이는 청화백자도 있고, 같은 시대에 유행하던 분청사기의 장식적 요소를 보이는 청화백자도 있다.
백자의 제작이 변화를 겪게되는 시기는 경기도 광주분원이 설치되는 1467~689세조 말 예종 초)년경이며 이때부터 분원관요시대에 들어가 백자는 대량생산. 분청사기는 쇠퇴하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100년 이상 백자침체기를 맞게 되었으나 숙종년간(1674~1720)부터 백자의 제작이 활발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청자의 종류 및 제작방법과 표현기법
1. 순청자(純靑磁) 및 陰刻, 陽刻, 透刻 청자
순청자는 문양이 없는 청자를 말한다.
(가장 많이 만들어 졌고 청자를 대표하며 색과 단아한 형태 그것이 순청자의 기본적 아름다움 이다.)
陰刻, 陽刻, 印刻, 透刻, 청자는 순청자를 기본으로 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모양을 새기거나 도드라지게 하거나 틀로 찍거나 꿇어서 표현하고자 한 것들에 의해 제작기법의 분류이다.
2. 상형청자(象形靑磁)
청자를 동식물형상을 기본으로 하여 만든 것들을 일괄해서 상형청자라 한다.
(상형청자에는 표주박, 연꽃, 죽순, 사자, 기린, 오리, 참외, 원숭이 등 종류가 다양하며 12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3. 상감청자(象嵌靑磁)
상감기법은 시문구로 자기표면에 나타내고자하는 문양을 나타내고자하는 문양을 새긴 후 그 안을 백토나 자토로 메운 후 유약을 입혀 구워내면 백토는 희게 자토는 검은색을 띠게 되는데 위와 같은 방법으로 표현하고자하는 문양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기법이다. (상감청자는 청자의 장식기법 중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려특유의 독창적 장식 기법이었다)
4. 동화청자(銅畵靑磁)
자기에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는 (酸化銅)안료로 문양을 그린 후 구워내면 문양이 주홍색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동화청자라 한다.
(12세기 고려인은 동화발색을 상감기법과 병행하면서도 붉은색이 필요한 부분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였으며 고화도의 자기그릇에 이 기법을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장인이 처음이었다)
5.철화청자(鐵畵靑磁)
자기표면에 철분을 주성분으로 하는 안료로 문양을 그린 후 유약을 입혀 구워내면 문양이 검게 나타난다.
(철화청자는 한원염변조를 기본으로 하는 청자에 속하나 산화염으로 변조되어 갈색을 띄는 예가 많다. 중국에서 그 전통이 계속되지 않은 것에 비해 고려초기부터 이기법이 나타나 지속적으로 발달, 독특한 시문기법이 되었다.)
6.퇴화청자(堆花靑磁)
문양시문기법은 철화청자 기법과 같으나 안료로 철분이 없는 백토를 사용한 점이 다르다
7. 금채청자(金彩靑磁)
청자를 구워낸 후 유약을 바른 표면 위에 금으로 문양을 표현한 청자
8. 연리문청자(練理文靑磁)
철분의 함량이 다른 청자로 백토, 자토를 섞어서 반죽 성형한 후 청자유약을 입혀 구워내면 각각의 흙이 회색, 백색, 흑색으로 나타나(대리석 문양과 같음) 목리문(木理文)이 나타나는 청자이다.(현존하는 예가 극히 적다)
분청사기의 종류 및 제작방법과 표현기법
1. 분청상감(粉靑象嵌)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을 계승한 것
(초기는 주로 버들, 물고기 등의 소재가 선(線)상감으로 시문되었다. 면(면)상감으로 발전 시문되었다.)
2. 분청인화(印花)
도장과 같은 시문구로 문양을 찍어내는 방법
(인화분청의 소재로는 작은 국화문이 꾸준히 시문되었으며, 다른 종류의 분청에 비해 황실용과 관청용이 많다)
3. 분청조화(彫花)
백토를 입히고 그 위에 문양을 선각한 것
4. 분청박지(剝地)
조화문에서 시문과정을 한단계 더 거친 것으로 바탕의 백토를 긁어내어 문양만이 백토로 남게 한 기법 (조화 박지 분청은 대부분 전라도 지방기마였다.)
5. 철화분청(鐵畵)
백토을 입힌 후 철사안료로 문양을 그린 것
6. 귀알분청
풀을 바를 때 사용하는 귀알이라는 도구로 백토를 입혀 귀알자욱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기법
7. 담금분청(분장분청)
백토물에 그릇표면을 담갔다가 꺼내어 구워내는 방식
(귀알문 및 분장문은 15세기말에서 16세기초까지 유행하기도 하였으나 대개의 경우에는 조화, 박지문, 철화문 등의 바탕문양이 되었다)
백자의 종류 및 제작방법과 표현기법
1. 순백자
백자를 만드는 태토와 유약 외에는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백색의 자기를 말한다.
(순백자에는 문양이 없는 소문 및 음각 양각 투각 등의 시문기법이 있다)
2. 상감백자(象嵌白磁)
백자표면에 문양을 음각하고 이 음각편부분에 자토를 매워 표면을 다듬은 뒤 시유변조한 자기이다. (고려시대의 상감기법을 계승 15세기에만 제작되었다.)
3. 청화백자(靑華白磁)
중국원명의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백자로 산화코발트(CoO)를 주성분으로 하는 안료로 문양을 그린 뒤 투명한 백자유약을 입혀 만든 자기다
4. 철화백자
백자표면에 철사안료로 문양을 그린 백자로 문양은 주로 갈색이나 흙갈색을 띈다.
(문양은 대담한 것, 치졸한 것, 추상적인 것, 해학적인 것 등. 시기와 가마에 따라 차이가 있다.)
5. 진사백자
백자표면에 산화동으로 문양을 그린 것으로 문양은 붉은색이다.
(진사백자는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그 이후 유행하였다)
6. 철채 진사체 청화채
백자의 태토에 전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철사안료를 칠한 철채.
산화동으로 칠한 진사채 코발트안료를 칠한 청화채 등이 있다
조선후기 위의 기법들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한 작품에 철채청화채, 진사채, 청화채, 철재 진사채 청화채 등이 혼용 제작되기도 하였다.
또는......
1) 순백자(純白瓷):그릇 표면을 싸고 있는 유약과 색조 및 그릇을 형성하는 선이 순백자의 생명이다. 순백자에는 두 가지 유형(類型)이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백자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부드러운 곡선의 기형(器型)을 이루고, 유약은 투명하여 바탕흙과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 유약이 떨어지는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원(元)나라 때부터 고려자기에 영향을 끼쳤던 유형으로 유약이 대체로 얇게 입혀져 백색으로 발색되며, 때로는 약간 청색을 띠고 있는 것도 있다. 그릇 모양은 풍만하여 양감이 있고, 유약은 은은하게 광택을 낸다.
순백자는 다른 빛깔로 장식하지 않으나, 형태 자체에 변화를 주며 부분적으로 장식물을 첨가하거나 혹은 투각(透刻)수법으로 무늬를 표현하는 수가 있으며, 표현한 종류에 따라 ① 소문백자(素文白瓷), ② 양각백자(陽刻白瓷), ③ 음각백자(陰刻白瓷), ④ 투각백자(透刻白瓷), ⑤ 상형백자(象形白瓷)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소문백자:그릇 표면에 전혀 장식 무늬가 없고 백색의 단일색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그릇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들어졌으며, 대체로 포용력(包容力)이 있고 청초(淸楚)해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 항아리는 달걀색과 비슷한 순백색의 항아리이다. 얕은 입과 우묵한 받침, 부드럽게 벌어진 몸에서 무한한 품위를 느낄 수 있다. 그릇 일부에 가는 빙렬(氷裂)이 있으나, 조선시대 항아리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② 양각백자:순백자 위에 양각수법으로 무늬를 나타낸 것을 말한다. 무늬는 매(梅)·난(蘭)·국(菊)·죽(竹)의 사군자(四君子)가 가장 많고, 그 밖에도 약간의 무늬를 첨가하거나, 그림에 곁들여 문자를 양각하는 수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양각 매화무늬 장방형연적(長方形硯滴)은 네 귀를 안으로 접은 뒤 한쪽의 좁은 면에는 파도 무늬를 양각하고 그 위에 해태 모양의 물구멍이 있으며, 그 반대쪽과 뒷면에는 매화를 양각하였다.
③ 음각백자:순백자 위에 음각으로 무늬를 장식한 그릇이다. 부분적으로 음각 수법을 한 것은 있으나, 음각 수법만으로 표면을 장식한 예는 매우 드물다.
④ 투각백자: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무늬를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청화(靑華)를 칠하는 경우도 있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투각백자 연환문필통(連環文筆筒)은 푸른색이 감도는 유약을 칠하였으며, 밑으로 크게 처져서 가로대를 돌려 상하로 구분하고 위쪽에는 옆으로 고리 세 개씩을 연결하면서 고리는 물론이고, 고리와 고리를 연결한 십자형(十字形) 줄기의 공간도 투각하였다. 아래쪽은 사십자형(斜十字形) 무늬를 새겼으며, 그 때문에 생기는 사각형 공간도 투각하였다.
⑤ 상형백자: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떠한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만큼 다양하지 못하며, 조선시대의 도자기에서는 순백자에서보다 청화백자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청화를 이용하면 어떤 부분적인 형태를 더욱 효과 있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색을 좋아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때로 효과를 무시하고 백색만으로도 만들었다.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된 백자복숭아연적은 굵은 가지로 받침을 만들고 복숭아에 긴 잎이 붙어 있어 끝이 뾰죽하고 안으로 홈이 패어 있는 사실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2) 청화백자:백토로 기형(器型)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靑畵沙器)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 10)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다.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燔造)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 중국에서 회청(回靑)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세조 11)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전남 강진산(康津産) 토청(土靑:나라 안에서 생산된 청화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청화백자는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번조되었으며 이 일대에는 수많은 관요(官窯)가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듭 변천하였다.
대체로, 15·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껴 쓴 흔적과 사용하는 데 서툰 점을 볼 수 있으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 ·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球形)에 가까워져 양감(量感)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角甁)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 있어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筆線)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畵材)도 추초(秋草)무늬와 같은 15·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龍)·소상팔경(蕭湘八景)·십장생(十長生) 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조(釉調)는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의 안료는 서양에서 양청(洋靑)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표면을 메우다시피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안일하여 격을 잃고 있다.
청화백자의 기형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구에서 문인 계급에게 공급되었던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항아리·접시·사발·떡살 등의 생활용품과, 병·주전자·잔 등의 주기(酒器), 필통·연적·필세(筆洗)·필가(筆架) 등의 문방구, 묘지(墓誌)·인형 등의 명기(明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 각색의 그림이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동물·산수(山水)·십장생·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하하였다.
3) 철회백자(鐵繪白瓷):백토로 그릇을 만들어 낮은 온도에서 초벌구이를 해내고 그릇 표면에 산화철안료(酸化鐵顔料)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백색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백자에 다갈색, 흑갈색 계통의 무늬가 나타난 자기이다. 한국에서 백자에 철분안료로 무늬를 입힌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전기에는 주로 묘지(墓誌)에 쓰였으나 일반화되고 세련미(洗鍊美)를 띠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로 보인다.
철회백자는 대개 광주관요(廣州官窯)와 지방민요(地方民窯)에서 생산된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광주관요의 것은 잘 수비(水飛)된 백토와 양질의 백자유(白瓷釉)에 사실적인 무늬가 주로 시문(施文)되어 포도덩굴·대나무·운룡(雲龍)·매화 등이 세련된 필치로 나타나고, 지방민요의 것은 바탕흙과 유약이 각기 특색을 지니고, 반추상화된 초(草)·죽(竹)·용(龍) 무늬 등이 자유분방하게 묘사되어 있다. 철·철화(鐵畵)·철사(鐵砂)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들어서서 붙여진 명칭이고, 원래 한국에서는 석간주(石間褓)라고 하였다. 가마터[窯址)로는 경기도 광주시 일대의 조선 중기 요지 및 북한산록, 용인·천안·괴산·철원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4) 진사백자(辰砂白瓷):도자기 바탕에 산화동(酸化銅:辰砂) 채료(彩料)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한 뒤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산화동 채료(진사)가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자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사기그릇을 주점사기(朱點沙器), 진홍사기(眞紅沙器)라고도 불렀으며 진사백자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사백자는 고려시대 중엽(12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가장 흔하게 쓰여진 것은 조선 후기인 18∼19세기 무렵이다. 진사백자의 가마터로는 광주시 분원리요(分院里窯)와 함남의 영흥(永興)일대가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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