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庭堅(황정견) 清平樂외

2017. 8. 2. 09:14

黃庭堅(황정견)【清平樂】
봄은 어디로
春歸何處(춘귀허처)...봄은 어디로 갔을까
寂寞無行路(적막무행로)...적막하여 찾을 수 없네

若有人知春去處(약유인지춘거처)...그누가 봄 간곳 알고있다면
喚取歸來同住(환취귀래동주)...돌아오라 불러서 함께머물리
春無蹤跡誰知(춘무종적수지)...종적없는 봄 누가알리
除非問取黃鸝(제비문취황리)...저노란 꾀꼬리에게 묻지않는다면
百囀無人能解(백전무인능해)...아무리 지저귀어도 아는 이 없어
因風吹過薔薇(인풍비과장미)...바람타고 날아서 장미 가지 지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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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견 (黃庭堅 1045∼1105)

 

중국 송(宋)나라 시인,서예가로,
장시성(江西省) 펀닝(分寧:분녕) 출생이며,
자는 노직(魯直),
호는 산곡도인(山谷道人),부옹,
1066년 진사에 급제,
국자감 교수 등을 지낸 뒤
1085년 교서랑(校書郞)이 되어
《신종실록(神宗實錄)》 편찬에 종사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이 기용되면서
신법을 비난하였다는 죄로
1095년 쓰촨성(四川省) 치안저우(黔州:검주)로 유배되었다.


1100년 사면, 복직되었으나
1102년 다시 광시성(廣西省) 이저우(宣州:선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소식(蘇軾)에게 시를 배우고
두보(杜甫),도연명(陶淵明)의 시에 영향을 받았으나
서정성을 억제하고 대상을 이지적으로 파악하는
독자적 시풍을 개척하였다.


소식과 함께 소황(蘇黃)으로 불리는 송나라 대표적 시인으로
북송(北宋)말에서 남송(南宋)초에 걸쳐
그의 시풍이 널리 유행하였으며
강서파(江西派)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글씨도 뛰어나 채양(蔡襄),소식,미불과 함께
북송4대가의 한사람으로 불린다.


문집으로
《예장황선생문집(豫章黃先生文集, 30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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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庭堅
 황정견
 
송(宋)나라 후기(後期)의 시인ㆍ서가. 호는 산곡(山谷). 소 식(蘇軾)의 문하생(門下生) 중(中)의 일인자임. 자재농염(自在濃艶)한 시풍으로 기이(奇異)하고 파격적(破格的)인 용법(用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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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다취 - 황정견(黃庭堅)과 쌍정차(雙井茶)
 

 
강서 수수현은 강서, 호남, 호북의 삼성이 교차하는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있어 풍경이 수려하고, 땅 좋고 사람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한 쌍정녹차(雙井綠茶)가 바로 수수현 쌍정촌에서 생산되는데, ‘차나무가 산야에 즐비하고, 집집마다 차향이 넘치는’ 곳이다. 쌍정녹차는 차잎이 봉황의 발톱처럼 생겼고, 하얀 솜털이 덮여있다. 차색은 밝고 맑은 색이며, 차잎은 옅은 녹색을 띄고 있다. 차향은 청아하며, 차맛은 신선하고 상쾌하다. 쌍정녹차는 송나라 때부터 이름을 날렸으며, 송대의 걸출한 시인이자 서예가인 황정견에 의해 유명해졌다.


황정견은 자는 노직이고, 호는 산곡도인이며, 강서 수수현이 그의 고향이다. 당시에는 홍주 분녕이라 불렸다. 황정견은 평생 동안 차를 좋아했고, 제다 기술을 연구했으며, 팽차의 도를 노래하였다. 그가 지은 ‘전차부(煎茶賦)’에는 팽차(烹茶)의 과정, 품차(品茶)의 격조, 음차(飮茶)의 효과 등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있다.


황정견은 고향의 쌍정차를 매우 좋아하였다. 원우연간, 그가 수도에서 관직을 담당할 때, 경내의 사대부들과 문인들에게 자주 쌍정차를 추천하였다. 품차 전문가였던 황정견의 적극적인 추천덕분에, 쌍정차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 수도에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어느 날 황정견은 고향에서 부쳐준 ‘쌍정차’를 받게 되었다. 기쁜 나머지 차잎 일부를 친구인 소동파에게 보내주고, ‘쌍정차송자첨(雙井茶送子瞻)’이라는 시를 한 수 지었다.


“사람들은 해와 바람이 도처에 없다고 묻지만, 천상 옥당에는 귀한 책이 가득하네. 오랜 거사인 동파가 보고 싶어, 붓을 들어 백곡에 명주를 쏟아내네. 내 고향 강남에서 차잎을 따고 있으니,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라도 이에 비할 소냐. 님에게 황주몽을 일깨워주러, 홀로 배를 타고 오호로 향하네.

 

人問風日不到處...사람들은 해와 바람이 도처에 없다고

天上玉堂森寶書...천상 옥당에는 귀한 책이 가득하네

想見東坡舊居士...오랜 거사인 동파가 보고싶어

揮毫百斛瀉明珠...붓을 들어 백곡에 명주를 쏭아내네

 

我家江南摘天腴...내 고향강남에서 차잎을 따고 있으니

落磑霏霏雪不如...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라도 이에 비할소냐

爲君喚起黃州夢...님에게 황주몽 일깨워주러

獨載扁舟向五湖...홀로 배를 타고 오호로 향하네


이후 쌍정차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황제에 납품하는 공차가 되었으니 그 인기가 가위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 일은 남송 엽몽득의 ‘피서녹화’에 생생히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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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다취 : ‘분녕다객(分寧茶客)’ 황정견(黃庭堅)
 

 
[대기원] 황정견은 북송의 저명한 시인이자 서예가로, 그의 서법은 소식, 미불, 채양과 더불어 ‘송 사대가’로 불린다. 그는 홍주 분녕(分寧, 현 강서 수수)사람으로, 송대 ‘강서시파’의 창시자이다.


송대에는 차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여, 문인, 묵객들은 모두 다도와 다예를 추구하는 품차의 고수들이었다. 황정견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분녕다객(分寧茶客)’으로 명성이 높았다. ‘분녕다객’이라는 칭호는 ‘송패류초’에 기록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승상이었던 부필(富弼)은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그는 황정견이 박학다식하고, 시사와 수법에 모두 정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매우 질투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생겼다. 무슨 이유인지 부필은 황정견을 좋아하지 않았고, 모임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후 부필은 사람들에게 “나는 일찍이 황정견이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분녕의 다객 한 사람(分寧一茶客)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부필은 황정견을 폄하하려고 ‘분녕일다객’이라고 말했지만, 품차, 팽차에 정통한 황정견에게 오히려 그의 칭호는 고상한 의미로 불리게 되었고, 삽시간에 유명해졌다.


황정견은 ‘분녕다객’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인 분녕에서 ‘쌍정차’라는 명차가 생산되고, 그 역시 다도, 다예의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황정견은 젊어서는 술을 좋아했지만, 중년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끊고 차를 더욱 즐기게 되었다. 그가 지은 시를 보면 그가 차에 대해 얼마나 정통했고, 차를 얼마나 즐겼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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