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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19. 16:10성리학(선비들)

안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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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남학파가 동인이 되고 기호학파가 서인이 됩니다.

동인에 대표적인 인물이 조식 이황 유성룡 이산해 유성룡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 등, 기호학파의 서인은 별탈없이 계속 유지가 됩니다.

하지만 동인은 정철의 세자책봉사건 과, 정여립의 모반사건 등을 배경으로, 서인을 강력하게 처벌해야한다는 북인과, 좀 봐주자는 입장의 남인으로 분열하게 됩니다.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하고 서인은 그내로 흘러갑니다. 남인과 북인이 공존하던 시기는 광해군 때로 북인이 주로 정권을 잡고 있었으며 중립외교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중립외교를 납득하지 못하던 서인이 광해군의 정통성에 태클을 걸어 인조 반정을 일으키게 되고 성공하여 북인과, 광해군은 몰락하고 맙니다. 여기서 남은 조용히 따라갑니다.

북인이 몰락하고 정권은 서인이 잡게 됩니다. 서인들은 주로 주전론을 주장했으며, 친명 배금 정책을 주장합니다.

그 결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책임으로 정권에서 밀려나게 될까봐 효종 때 북벌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현종 때 와서 1차 예송논쟁(효종의 장례식 3년 상을 할 것인가 1년 상을 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으며, 여기서 1년을 주장한 서인이 이기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2차 예송논쟁 때(효종비) 남인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여기 까지만 하더라도, 붕당은 상호 견제와 비판 보완하면서 붕당의 옳은 기능을 잘 활용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숙종 때부터, 1당 전재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숙종때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경신환국 때 남인이 숙청되고 남인의 처벌문제를 두고 서인이 강경파의 노론과 온건파의 소론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기사환국때, 남인이 부활하고, 갑술환국때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권은 소론이 장악하게 되고, 정조때 이르러 사도사제의 죽음에 애도하는 소론이 시파, 죽는게 맞다는 강경한 입장의 노론이 벽파가 됩니다.

 

        기호학파-서인     영남학파가- 동인

정여립의 모반, 정철의 세자책봉-동인->남인 북인으로 분열

                            ↓

               서인                  남인  북인

       서인의 인조반정-광해군 북인 몰락

                            ↓

               서인                     남인

경신 기사 갑술 환국->남인 몰락 서인->노론 소론 분열

                            ↓

           노론   소론               남인

사도세자의 죽음 애도, 정당-> 노론-> 벽파, 소론->시파

                            ↓

           벽파   시파

 

 

 가 되는것 입니다.

 

그리고 이후 정조때 탕평의 일환으로 수령향약이 시행되고

정조가 죽은후 수령향약이 변질되어 세도 정치로 이어지게 됩니다.

성리학의 발달

 

성리학의 두 흐름

고려 말기의 신진 사대부들의 자기 역사에 대한 성찰과 현실 극복의 이념적 지표로 삼은학문적 기반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사회 개혁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조선 왕조의 개창이라는 역사적 변화에 대하여, 성리학을 공부하는 지식인들이 모두 찬동한 것은 아니었다. 즉, 개혁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적극적인 역성 혁명에 참여한 쪽과, 개혁에 소극적이면서 고려 왕조에 충성을 표시하는 의리와 명분을 주장하는 쪽의 대립이 있었다.

 

전자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파 세력으로, 조선 왕조 성립 이후 정치 구도를 세웠으며, 유교 국가 운영에 학문적 이론을 제시하였다.

후자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으로, 조선 왕조의 건국을 반대하는 유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신 간의 충성 관계를 강조하는 의리와 명분을 사회 안정의 기틀로 주장하였다.

이들은 정치적 입장에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 성향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정도전 계통의 유학자 관료들은 사장을 중시하였고, 정몽주 계통의 유학자들은 경학을 중시하였다.

정도전과 권근 등은 성리학을 정치 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 개혁과 국가 운영의 기초로 삼았다. 이들 관학파들은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를 위해 노력하였다. 15세기 중엽의 관학파들은 불교, 도교, 풍수 지리 사랑,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면서 조선 왕조의 사회 안정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유교 이념에 토대를 둔 정책은 특히 세종, 세조에 의하여 주조되어, 성균관과 집현전 등을 통해서 수준 높은 근세 문화를 창조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일부 사대부들은 왕조의 개창을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면서 향촌에 내려가 교육과 향촌 건설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정몽주, 길재 등에서 김종직, 김굉필로 그 학통이 이어지는 사림 세력이었다. 사학을 통해서 양성된 사림은 성종 때를 전후하여 중앙 정계에 활발히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일어났다.

성리학의 융성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은 관념적인 이기론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당시의 철학적 조류는 크게 두계통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서경덕을 선구자로 하면서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론이며, 다른 하나는 이언적을 선구자로 하면서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하는 주리론이다. 이 두 학자의 뒤를 이어 조선 성리학을 대성한 사람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지어,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 철학을 확립하였다. 그의 사상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리 철학은 대체로 향촌에서 중소 지주적 경제 기반을 가진, 생활이 비교적 안정된 사림들이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경험적 세계의 현실 문제보다는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요시하여,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 규범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황의 학통은 김성일, 유성룡 등의 제자에 의하여 영남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이는 주기론의 입장에서 관념적 도덕 세계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경험적 현실 세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철학 세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주자와 이황의 이기 이원론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원적인 이기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현실 문제의 개혁을 과감히 주장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들이다. 그의 학통은 조헌, 김장생 등으로 이어져서 기호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이, 16세기에 이르러 사림은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심오한 이기 철학을 성립시키고, 왕도적 정치 철학을 확립하여 정치의 활성화에 공헌하였으나, 지나친 도덕주의로 현실적인 부국 강병책에는 소홀하였다.

 

예학과 보학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왕실 위주의 국가 질서론과 주자가례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 인하여 예학(禮學)이 발달하게 되었다. 예학은 도덕 윤리를 기준으로 하는 형식 논리를 중시하였고, 명분 중심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사림들이 신분 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 형식을 중요시함으로써, 상장 제례에 관한 예학이 발달하였다. 가정의 의례는 주자가례를 모범으로 하였는데, 김장생, 정구 등이 이를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시키면서 이에 관한 많은 저술들이 이루어졌다.

예학은 가족과 종족 상호간의 상장 제례의 의식을 바로잡고, 유교주의적 가족 제도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점도 있으나, 지나치게 형식에 사로잡힌 감도 있고, 또 사림 간에 정쟁의 구실로 이용되는 폐단도 있었다.

또, 사림 양반들은 가족과 친족 공동체의 유대를 통해서 문벌을 형성하고, 양반으로서 신분적 우위성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필요에서 그들은 족보를 만들어 종족의 내력을 기록하고, 그것을 암기하는 것을 필수적인 교양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보학(譜學)이다.

 

종족 내부의 의례를 규제하는 것이 예학이라면, 보학은 종족의 종적인 내력과 횡적인 종족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족보를 통해서 안으로는 종족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종가와 방계를 구별하여 위계를 정하였으며, 밖으로는 다른 종족이나 하급 신분에 대해서 문벌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다.

또, 족보는 결혼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족보의 편찬과 보학은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 속에서 종족의 사회적 위상을 지키려는 양반들에 의해 더욱 성행하였다. 

 

성리학 (性理學)

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로서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줄임말이다.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BC 213년과 BC 212년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이(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이(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태극이라는 말은 성리학 이전에도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데, 그것에 의하면 태극을 만물의 근원, 우주의 본체로 보고 “태극은 양의(兩儀:음양)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를 낳고 팔괘에서 만물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우주관을 계승하고 여기에 오행설(五行說)을 가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수립한 것이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태극도설》은 만물 생성의 과정을 ‘태극―음양―오행―만물’로 보고 또 태극의 본체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그 본체는 무성무취(無聲無臭)한 것이므로 이를 무극이라 하는 동시에 우주 만물이 이에 조화(造化)하는 근원이므로 태극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자는 이것을 해석하여 태극 외에 무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만일 무극을 빼놓고 태극만을 논한다면 태극이 마치 한 물체처럼 되어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고, 반대로 태극을 빼놓고 무극만을 논한다면 무극이 공허(空虛)가 되어 역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같이 무극과 태극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유(有)가 즉 무(無)이며, 절대적 무는 절대적 유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소옹은 태극이 곧 도(道)라 하였다. 만물의 근원적 이치가 도 또는 도리(道理)라 한다면 태극은 곧 태초부터 영원까지, 극소에서 극대까지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치라 하였으니, 다시 말하면 공간적으로 대 ·소가 있을 수 없고, 시간적으로 장(長) ·단(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자는 천지도 하나의 태극이요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태극이라 하였고, 이 태극에서 음양으로의 이행(移行)은 태극의 동정(動靜)에 의하는 것이며 동정은 곧 음양의 두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 만물의 근원적인 생성(生成)이 전개된다고 하였다.

성리학의 이기설은 우주 ·인간의 성립 ·구성을 이(理)와 기(氣)의 두 원칙에서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 이 ·기라는 말은 성리학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있었으니, 《역경(易經)》에서는 천지만물을 음양 2기의 활동에서 성립된 것이라 하여 이 ·기의 개념을 말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주돈이는 그의 《태극도설》에서 모든 근원인 태극이 2기를 낳고, 2기에서 수 ·화 ·목 ·금 ·토의 5행을 낳고, 5행에서 남 ·녀가 생겨 거기에서 만물이 화생(化生)하였다고 논하였다.

장재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 하였고 그 작용으로서 음양의 2기가 있어 여기에서 천지만물이 만들어졌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폈으며, 정호도 기의 통일체로서의 건원(乾元)을 내세웠으나 그의 아우 정이는 기의 세계에서 출발하면서도 기와는 별도로 이의 세계를 생각하여 이와 기를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단서를 열었다.

《역경》에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정이는 이 도를 ‘음양의 원인이 되는 것이 도’라고 보았다. 즉, 형이상(形而上)의 도를 형이하의 기에서 구별하여 도를 기의 현상(現象) 속에 존재하는 원리로 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세운 것이다. 이 도가 곧 이이다. 그러나 이와 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어, 그 어느 것이 빠져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기 양자는 동시존재이며 다만 그 질(質)을 달리할 뿐, 경중(輕重)의 차는 없는 것이나, 기는 항상 변화하는 데 대하여 이는 법칙성을 지니고 부동(不動)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연히 경중이 부여된다. 특히 그것이 윤리(倫理)에 관련될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천(天)은 이(理)이다’ ‘마음은 이이다’라고 하는 이면(裏面)에는 이가 법칙적 성격이 부여된 데 대하여 기는 항상 물적(物的)인 것, 그리고 자칫하면 이의 발현(發現)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내재하게 된다. 이것을 일방적으로 말하자면 종래의 성선설(性善說)에 명확한 설명을 붙이는 결과가 되었으니, 즉 ‘성은 이이다(性卽理)’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정이의 이기철학은 주자에게로 계승되어 이 ·기의 성격은 더욱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주자는 이에 ‘소이연(所以然: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과 ‘소당연(所當然:법칙론적 의미를 가진다)’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은 기의 내부에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가 형질(形質)을 지니고 운동하는 것에 대하여, 이(理)는 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고, 그 실재는 기를 통하여 관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기가 형질을 갖고자 할 때, 또는 운동을 일으키려 할 때, 이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의 이러한 작용은 전혀 불가능하며, 기의 존재 자체도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자는 이것을 윤리에 적용시켰을 때, 이 ·기에 경중을 두면서도 기를 악(惡)으로만 단정하지 않고, 기의 청탁(淸濁)에 의한 결과에서 선악을 인정하려 하였다. 인간의 신체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은 기에서 성립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善)한 성(性)은 이(理)가 마음에 내재화(內在化)된 것으로 보았다. 이 이기설은 그 후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윤리적 입장에서 기에 중점을 두느냐, 이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일 뿐, 우주관 자체는 부동의 것이 되었다.

 

성리학의 이기설이 우주를 논한 것이라면 심성론은 인생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인간은 우주 내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기설과 심성론은 상호 관련성을 갖게 된다. 중국 유학에서는 맹자 이후 인간의 성(性)이 선(善)이냐 악(惡)이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분규를 거듭하였고 오랫동안 중국 철학의 큰 문제로 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순자(荀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으나 송대에 이르러 순자의 성악설은 배척되고 성선설은 당시 새로 대두된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다시 의리(義理)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나누어져, 전자는 본래 완전한 선이라 하고 후자는 기질의 양부(良否)에 따라 선악으로 갈린다는 성리학설이 정립되었다.

즉, 정이는 이(理)가 인간에 들어와 성(性)이 되고 기는 인간에 들어와 재(才)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만물의 본체이므로 순선(純善)하고, 따라서 사람의 성은 모두 선하여 악한 것이 없으며, 기에서는 청탁과 정편(正偏)이 있다 하였고, 그 때문에 사람의 재에는 지혜(智慧)와 우둔(愚鈍)이 있고, 현명(賢明)과 불초(不肖)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정호는 《주역》을 인용하여 형상(形狀)이 없는 것을 도리(道理)라 하고, 형상이 있는 것은 기(器)라 하여 하늘의 도리는 음 ·양이요, 땅의 도리는 유(柔) ·강(剛)이요, 인간의 도리는 인(仁) ·의(義)라 하여, 비록 천 ·지 ·인의 삼재(三才)가 음양 ·강유 ·인의로 다른 것 같으나 도리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귀일된다고 하였다.

 

주자는 인간의 심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본연지성은 이(理)요, 선(善)이라 하였고, 기질지성은 타고난 기질에 따라 청탁과 정편이 있어 반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악하게도 된다 하였다. 정(情)은 반드시 악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는 선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즉 기질을 맑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情)이 선하게 되지만 이것을 탁하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情)이 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에 따라 청탁 ·지우(智愚) 등 여러 차별이 있으나, 이 정은 불변이 아니므로 인간의 노력과 수양에 따라 우(愚)가 지(智)로도 변하고 탁함을 청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니 여기에 인간의 윤리성 및 도덕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성리학자들은 성(誠) ·경(敬)을 공통의 진리로 파악하였다.

인간이 자연의 진리와 진정한 자아를 추궁하여 근원적 도리에 도달하는 요체로서 주돈이는 이것을 정(靜)에 두었고, 정호는 성(誠)에 두었으며 정이와 주자는 경(敬)에 두었다. 정이는 “수양에는 경이 필요하며 학문의 발전에는 치지(致知)가 중요하다”고 하였으니, 이들 성리학자들의 정(靜) ·성(誠) ·경은 필연코 인(仁)과 의(義)로 귀일되는 것이다. 즉, 인 ·의의 인식 파악은 성 ·경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함을 말하였다.

성리학은 주자 생존시에는 이것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박해를 받았으나 송나라 멸망 후 원대(元代)에 이르러 관학(官學)으로 채택되고 과거(科擧)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고증학(考證學:實學)이 대두되면서 귀족의 학문이니 실속 없는 공론(空論)이니 하여 배척되었으나 교과 과목으로서의 성리학은 여전히 그 지위가 높았다

한편,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정도전(鄭道傳) 등을 들 수 있다.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는 데 그쳤고, 또 신왕조에 협력하지도 않았으나 정도전 ·하륜(河崙) ·권근(權近) 등의 성리학자는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교리(敎理) 자체를 논리적으로 변척(辨斥)하는 동시에 이태조를 도와 법전(法典)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통하여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는 조선조가 성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면서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어서였다.

즉, 이때 한국 유학의 쌍벽인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이 태어났으며, 서화담(徐花潭)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그리고 성혼(成渾) 등도 모두 같은 시대의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즉,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을 말한다.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이이(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내면적 도덕원리인 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 ·김장생(金長生) 등에 의하여 유교의 행동규범인 예설(禮說)로 발전하였다. 이퇴계와 이율곡에 앞선 서화담은 그 이론이 송나라 장재와 같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 할 수 있으니, 곧 “태허(太虛)는 맑고 무형(無形)이나 이름하여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가 바깥이 없으며, 거슬러 올라가도 시작이 없다”고 하며 기(氣)의 본체를 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화담은 이러한 기 가운데 “갑자기 뛰고 흘연히 열림이 있으니 이것은 누가 시키는 것인가? 저절로 그렇게 되며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이치(理致)가 시간으로 나타남인 것이다”라고 기의 작용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화담은 기라는 것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기만 있을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퇴계는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본 학자였다. 그는 정통 정주학의 계통을 따라서 항상 이우위설(理優位說)의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하였으며, 이의 구극성(究極性)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무릇 옛날이나 오늘날의 학문과 도술(道術)이 다른 까닭은 오직 이 이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허(虛)하지만 지극히 실(實)하고 지극히 없는 것(無) 같지만 지극하게 있는 것(有)이다. …능히 음양 ·오행 ·만물 ·만사(萬事)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기와 섞어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유(萬有)를 명령하는 자리요, 어느 것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퇴계는 이와 기를 엄격히 구별하여 그 혼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태극 또는 이로 표현되는 것을 다름 아닌 인간의 선한 본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리란 곧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확충하고 발휘함으로써 인간이 인간된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체적 ·물질적 조건에서 유래하는 것과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는 당시에 사화(士禍)가 연달아 일어나서 올바른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부조리한 사회현실에서 진실로 선악과 정사(正邪)를 밝히고 올바른 진리를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이 나아갈 바 표준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퇴계의 이같은 성리학설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퇴계보다 35년 후에 태어난 이율곡도 퇴계와 마찬가지로 정통 성리학파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위시한 제자(諸子)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 여러 학파의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은 유학의 본령(本領)을 들어 그 기본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문제에까지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는 논하기를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공자가 가르친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든지 인의(仁義)와 같은 일상적으로 인간이 행할 도리를 떠나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규범(規範:所當然)만을 알고 근본원리[所以然]를 알지 못하면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선행(善行)에 합치한다 하더라도 도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자애(慈愛)와 효도와 충성과 우애라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율곡성리학의 요령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경험성)에 근거하여 그 까닭을 추구함(논리성)에 있어 논리적인 모순이나 비약을 배제하고 그 본원성(本源性)을 체계적으로 나타내는 철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율곡은 진정한 학문이란 내적(內的)으로 반드시 인륜(人倫)에 바탕을 둔 덕성(德性)의 함양과 외적으로 물리(物理)에 밝은 경제의 부강(富强)을 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피폐한 현실을 역사적 갱장기(更張期)로 파악하고 국방력의 강화, 경제적 부강, 사회정의의 확립 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러한 실리를 주장하다 보면 의리(義理)에 어긋나고 의리를 추궁하다 보면 실리를 망각하기 쉬우므로 이러한 모순을 원만히 타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권능(權能)과 의리가 상황에 따라서 창의적으로 그 마땅함[宜]과 알맞음[中]을 얻는다면 의(義)와 이(利)는 그 가운데 융화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퇴계 ·율곡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허한 관념을 벗어나 역사적 ·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으며, 후세에 실학사상(實學思想)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거창대성중학교,대성고모임
글쓴이 : soddo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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