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양명학과 성리학

2017. 6. 19. 16:23성리학(선비들)

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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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국 명나라 중기에 태어난 양명() 왕수인()이 이룩한 신유가철학().

중국 송나라 때 주자()에 의해 확립된 성리학()의 사상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왕양명()이 주창한 학문이다. 성리학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육상산()의 철학과 함께 심학()으로도 불린다. 왕양명은 초기에 성리학()을 공부하다가 주자의 성즉리()와 격물치지설()에 회의를 느끼고

육상산의 설을 이어 심즉리() ·치양지() ·지행합일설()을 주창하고 나왔다. 즉 효는 배우고 익혀서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효심과 효행은 구분되지 않는 하나로 인식하여 이를 지행합일설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은 기()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라고주자의 견해에 대하여,

만물일체와 불교의 삼계유심()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이룩하는 이론적 방법으로도 대학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하고,

외재사물()을 문제삼으려면 이미 마음이 발동해야 하므로 물()을 마음이 발동하여 이룩한 사()로 해석하고,

밖에 있는 이치의 파악 이전에 파악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양명은 확정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습록()》 권2에 의하면 “앎의 진정한 독실처()가 곧 행()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이 제출된 것이다.

양명학은 중국에서는 귀적파() ·수정파() ·현성파()로 삼분()되어 발전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정주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계곡(谿) 장유(), 지천() 최명길(), 하곡() 정제두() 등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어 나카에 도쥬[]가 이를 연구 발전시켰다.

양명학은 맹자선천적인 도덕심과 마음의 발양을 통해

타인을, 나아가 인간세계와 우주를 성실하고 바르게 하자는 이상을 형이상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가적()인 색채 때문에 청대 실학자()들에 의해 비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연구 ·계승되는 유가철학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역참조항목
격물치지, 나여방, 사상마련, 사언교, 사학, 상산학파, 성즉리

[네이버 지식백과] 양명학 [陽明學] (두산백과)




양명학의 수용

교과단원국사, Ⅵ. 민족 문화의 발달, Ⅵ-4 문화의 새 기운

1. 교과서 속 주개념

양명학의 수용과 내용

양명학은 서경덕 학파와 종친을 중심으로 확산되다가 17세기 소론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성리학의 교조화 및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하며 치양지설과 지행합일을 주장하였다. 특히 정제두는 양명학을 연구하며 일반민을 도덕 실체의 주체로 상정하고, 양반 신분제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후 강화도에서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강화학파를 형성하여 소론 계열 학자의 집안을 중심으로 가학의 형태로 계승되었다. 양명학은 실학자(조선 후기)와 국학자(일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2. 확장 개념

1) 양명학의 전래

양명학의 전래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6세기 말 이미 양명학의 저술인 전습록()이 전해졌고, 이황이 이에 대한 비판을 한 바 있었다. 성리학의 열기로 그 연구가 뚜렷하지 못하였으나, 성리학의 교조성에 반발한 일부 학자들은 이에 관심을 보였으니, 남언경, 이요, 이항복, 이정구, 신흠, 최명길, 장유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드러내 놓고 양명학을 논하지는 못하고 은밀히 전승하였는데, 그것은 양명학이 정통 성리학자들로부터 사문난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양명학이 학문적 체계를 수립하고, 하나의 학파를 이룬 것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의 소론 출신 정제두에 의해서였다. 그는 맹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양명학적 심학관()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주자는 대립된 입장에서 심즉이설()을 제시하고, 일체의 학문이 양지()를 파악하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학설의 체계화와 아울러 후진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강화를 근거지로 하여 이광사, 정순일, 신위 등 많은 제자를 두어 강화학파를 형성하게 하였다. 이광사는 이영익, 이충익으로, 다시 이시원을 거쳐 19세기 말에는 이건창, 김택영, 박은식 등으로 그 학맥이 이어졌다. 그러나 양명학은 이론과 달리 그 실천성이 약했다.

2) 강화 학파의 형성

18세기 초에 정몽주의 후손인 정제두는 안산에서 강화도의 하곡으로 이사하여, 강화도 지방을 중심으로 양명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는 「존언」, 「만물일체설」 등을 저술하여 양명학의 이론적 체계를 세웠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정후일, 이광명, 이광사, 이긍익, 이충익 등의 양명학자들이 배출되어 강화 학파를 형성하였다. 정제두의 아들인 정후일의 학문은 그의 사위인 신대우와 외손자인 신작에게로 계승되었고, 정제두에게 20년간 사사한 이광명의 학문은 그의 아들인 이충익에게로 이어졌다.

또 이광명의 종형제인 이광사의 학문은 그의 아들인 이긍익에게로 계승되었다. 이들 이씨들은 모두 정종의 아들이었던 덕천군의 후손으로 종친 출신의 소론 계열에 속하였다. 이들의 양명학은 이충익의 손자인 이시원을 거쳐 그의 후손인 19세기 말의 이건창으로 계승되었으며, 한말 일제 시대의 국학자인 박은식과 정인보도 주로 양명학을 연구하였다.

3. 관련 지식

1) 심즉리

새로운 격물치지설을 주장하게 된 원리는 심즉리이다. 이는 육상산()에서 발견된 심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육왕학파). 그러나 심학은 왕수인에 의해 대성되었다. 그는 “심은 곧 이이다. 천하에 심외()의 일이 있고, 심외의 이가 있겠는가”라는 주체적인 자각에서 심즉리가 정립되었다고 했다. 심외에 사물이 없고, 심외에 일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객관적인 외계()의 사물은 마음을 떠나면 소멸해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남진() 땅에서 바위 위에 핀 꽃을 보고, “저 꽃은 스스로 피고 스스로 떨어지니 우리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질문했을 때, 왕수인은 “당신이 이 꽃을 보지 못했을 때는 이 꽃은 당신의 마음과 함께 고요했다. 그러나 당신이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이 꽃은 빛깔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꽃은 당신의 마음 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람에게 의식되지 않을 때 그 꽃은 고요히 그대로 있었지만, 사람이 의식했을 때 비로소 아름답다·분홍이다·빨갛다 등의 평가와 판단으로 인하여 꽃은 꽃 노릇을 하게 된다.

사물은 인간의 의식과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주어지고 세계질서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 외에 사물은 없다.’는 근본 뜻이다. 그러나 치양지설을 주장한 후부터 이보다 심에 중심이 옮겨졌다. 즉 심의 외화()가 곧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것으로 사물 현상은 심의 현상물이라 했다.

2) 지행합일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은 지()에 속하고 아름다운 꽃을 좋아하는 것은 행()에 속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는 이미 좋아하는 것이지 먼저 보고 난 뒤에 또다른 마음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왕수인이 지는 행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완성이라고 했던 까닭이다. 즉 우리의 지식과 실천은 본래 합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린()은 지행합일신론()에서 대략 “지는 의식활동이며, 행은 생리적인 활동이다. 지행이 비록 성질이 다른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합치한다. 우리의 의식활동은 생리적 조건과 물질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이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므로 지행합일이라고 한 것이다. 의식활동과 생리적인 활동은 동시에 발동되며, 시간적인 선후가 없다.”고 했다.

3) 치양지설

격물치지()의 지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양지이다. 왕수인은 49세 때에 치양지설을 주장했다. 치양지설이 창안된 뒤부터는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등의 수양 방법보다 오히려 양지의 실현이 중시된다. 양지를 실현한다면 모든 사사로운 폐단이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을 바룬다.’, ‘사욕을 버린다.’고 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치양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왕수인은 양지의 두 글자가 참으로 성인되는 학문의 바른 법이요 안장()이라고 했다. 치양지설 이후부터 사상마련설()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것이 치양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치양지는 일상 생활에서 때와 곳을 따라 정당한 실천이 요구된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일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양지에 따른 판단과 처리가 있어야 하고, 이러한 요구들은 즉결()을 요하는 것이니, 정좌하여 명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왕수인은 천군만마()의 전쟁터에서 즉결이 요구되는 실지 체험을 했기 때문에 사상마련이라고 하는 양지 발현의 수단 방법이 발상되었다. 치양지의 수단으로, 그의 만년부터 정좌에 의존하거나 독서에 의존하는 수양법을 버렸던 까닭에 사상마련법이 발견되었다.

또 대동()의 인()을 실현하기 위해 천지 만물 일체의 인인 본체가 내 본연이요, 양치인 것을 철저히 깨우쳐서, 공리()와 기능적 지식이 그것을 막고 어둡게 하는 줄을 알아서 이를 근본·근원부터 뽑아버리며 막자는 발본색원론()을 주장했다. 천하를 보되 한 집처럼 하고, 중국 보기를 한 사람과 같이 한다는 대동주의()는 왕수인의 가장 만년 저술인 〈대학문 ()〉의 간절한 주장이다.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사회탐구영역 연관목차 (315/775)

[네이버 지식백과] 양명학의 수용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청서출판)



출처 : 통화재정정책연구소
글쓴이 : 이칸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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