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2017. 6. 6. 09:00한국의 글,그림,사람

지리산 자락에서 가장 큰 편액을 남긴 [성당 김돈희]의 글씨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

1920년대 전후하여 해강 김규진, 석재 서병오과 더불어 한국 서예계를 이끈 인물이다.

 

전국적으로 해강 글씨의 편액이 많이 남아 있지만 성당의 글씨도 이에 못지 않게 우리나라 구석구석 많이 남아 있어 주변에서 손 쉽게 감상할 수 있다.

해강과 마찬가지로 성당의 글씨의 분포를 보면 그 당시 전국의 고택이나 고찰을 유람하며 오랫동안 가객으로 한 곳에 머물면서 밥값 삼아

글씨를 남겨준 자취가 있어 그 당시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성당의 글씨는 관지에 [惺堂]이라는 수결이나 혹은 낙관이 있고, [金敦熙]이라는 낙관이 같이 찍여 있어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지리산에 남겨진 성당의 글씨

 

 

문화예술품은 크기와 예술성이 비례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지리산 자락에 남겨진 문화재 중에서 화엄사 각황전과 석등처럼 크기도 장대하면서

작품성이 뛰어난 문화재가 많은데 그만큼 지리산이 품어 내고 있는 문화적 역량의 크기와 깊이를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편액이 중국 사진 주지번이 쓴 전주객사의 [豊沛之館(풍패지관)]임은 이미살펴 보았다.

큰 글씨임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장중한 맛과 고고한 힘이 느껴지는 [豊沛之館] 못지 않은 글씨가 지리산 자락에도 있으니 지리산의 관문

남사예담촌에 있는 성당 김돈희의 [泗陽精舍(사양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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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에담촌의 정씨고가에 있는 [泗陽精舍]편액

[사양정사]는 남사예담촌을 감싸 돌고 있는 하천의 이름이 [泗水(사수)]인데 사수의 남쪽 양지 쪽에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사양정사]는 석파 이하응의 글씨가 남아 있는 하씨고택 뒷문 바로 곁에 있다.

 

행서체로 써 내려간 큼지막한 글씨에 은근한 힘이 느껴지는 명필이다.

성당이 지리산 자락을 유람하는 도중에 정몽주선생의 후손이 살아온 고택에 머물면서 마침 완공된 건물에 편액을 써 달았을 것이다.

 

 

성당의 발길은 계속 이어져 지리산의 반대쪽 구례의 천은사까지 흔적을 남겼으니

천은사에 있는 예서체로 쓴 [方丈禪院(방장선원)]이다.

 

 

2 방장선원.jpg  

*천은사의 [方丈禪院] 편액

 

그러나 아쉽게도 예서체로 멋드러지게 쓴 이 편액은 일반 관광객은 볼 수가 없다.

방장선원이 관광객의 출입이 금지된 내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도 직접 찍지는 못하고 어느 블로그에서 빌렸는데 어디인지 놓쳤다.)

 

그렇다고, 천은사까지 온 나그네의 발길을 무심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천은사에는 이미 원교 이광사와 창암 이삼만의 글씨외에도 염재 송태회 등 명필의 일필휘지로 그윽할 뿐만 아니라, 원교의 글씨 편액을 달고 있는

극락보전의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들이 모두 성당의 글씨이니 [방장선원]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보상하고도 성당의 예서체 글씨의 깊은 맛을 즐기기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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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 극락보전 주련

극락보전 기둥에 걸려 있는 네개의 주련이 모두 성당의 글씨이다.

  

성당 글씨의 아쉬움은 구례 화엄사에도 있다.

화엄사 보제루에 보루재에 [慶祝門(경축문)]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석파의 [世尊舍利塔]과 마찬가지로 보제루에 걸려있던

모든 편액을 떼어서 수장고에 보관해놓아 볼 수가 없다.

 

 

 

곡성 태안사에 남겨진 성당의 글씨

 

 

이렇듯 당대 명필 성당도 지리산을 빠뜨리지 않고 그의 글씨를 남겼으며 지리산 유람의 다음 경유지 쯤으로 되어 보이는 곡성의 고찰 태인사에서도

원 없이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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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일주문에 걸려 있는 예서체의 [桐裏山泰安寺(동리산태안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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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예서체의 [禪院(선원)] 편액

태인사의 우측 위에 있는 적인선사탑 올라가는 입구 우측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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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행서체의 [海會堂(해회당]] 편액

적인선사탑 입구의 좌측 안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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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적인선사탑비

적인선사탑비는 적인선사탑과 함께 861년경에 세워졌으나 비신은 없어졌으나, 1928년에 남아 있던 귀부와 이수를 이용하여 비신을 세로 만들어 세웠는데 비신에 새겨진 글씨가 성당의 해서체 글씨이다.

 

 

 

 

순천 선암사에 남겨진 성당의 글씨

 

 

시인 묵객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선암사도 성당의 글씨로부터 시작한다.

선암사 입구에서 올라가며 보이는 강선루에 걸려 있는 [降仙樓(강선루)] 편액이 성당의 글씨이며, 강선루 안쪽에 걸려 있는 [降仙樓(강선루)]

성당과 비슷한 시기에 명필인 석촌 윤용구(石村, 石邨 尹用求·1853∼1937)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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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降仙樓(강선루)] 편액

 

 

김천 청암사와 대구 파계사에 남겨진 성당의 글씨

 

 

성당의 글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사찰이 김천 청암사와 대구 파계사다.

특히, 청암사의 경우 대부분 전각의 편액을 성당의 글씨로 도배하다시피 한 것을 보면 성당이 유람 도중 장기간 머물면서 일필휘지를 날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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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일주문의 [佛靈山淸巖寺(불령산청암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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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행서체의 [眞影閣(진영각)]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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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행서체의 [正法樓(정법루)]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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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행서체의 [六和寮(육화료)]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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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해서체의 [大雄殿(대웅전)]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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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진동루의 행초서체의  [八公山把溪寺(팔공산파계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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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행서체의 [彌陀殿(미타전)]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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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 행서체의 [寂默堂(적묵당)] 편액

 

 

기타 전국 사찰에 남아 있는 성당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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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금산사 미륵전의 [龍華之會(용화지회)] 편액

금산사 미륵전에는 [彌勒殿] [龍華之會] [大慈寶殿] 편액 3개가 줄줄이 걸려 있는데

모두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라는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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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천불전 용화당의 예서체 [龍華堂(용화당]]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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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증심사 지장전의 예서체의 [會心堂(회심당)]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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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숭림사 행서체의 [定慧院(정혜원)]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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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수덕사의 예서체의 [祖印精舍(조인정사)]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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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산내 암자인 정혜사에 있는 예서체의 [能仁禪院(능인선원)]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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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낙산사 예서체의 [義湘臺(의상대)]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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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봉선사 예서체의 [北斗閣(북두각)]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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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현등사 해서체의 [普光殿(보광전)]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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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현등사 해서체의 [保合太和樓(보합태화루)] 편액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성당의 글씨

 

 

서울에 성당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20년대 일제강점기 깨어있던 스님들과 문화계 인사들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역사적인 곳에

성당의 글씨가 걸려 있어 명필 글씨와 더불어 그 시절 문화적 풍속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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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각사 예서체의 [大覺聖殿(대각성전)] 편액

종묘 옆 골목에 있는 대각사는 일제감점기 때 백용성 스님이 불교계의 혁신과 민족자주성을 확김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한 곳인데

1930년에 대각성전을 건립하면서 성당이 편액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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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사 부속 암자 대원암의 행서체 [大圓庵(대원암)] 편액

 

고려대 담벼락에 붙어 있는 대원암은 개운사의 말사로서 일제강점기때 친일승들이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 원종에 병합시키려고 할 때 한용운 등과 함께

결사반대운동을 일으켜 조선불교를 지켜낸 석전스님이 주석하면서 당대 문화계의 거목들인 오세창 김돈희 정인보 최남선 등과 만나

담론을 즐겼던 곳으로 성당의 편액 글씨로 말미암아 그 시절 정취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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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住持羅請湖大禪師水害救濟功德碑(주지나청호대선사수해고제공덕비)] 비명

 

1925년 대홍수가 발생하였을 때 봉은사 주지 나정호 스님이 절의 재물을 모두 풀어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708명이나 구한 일을 기리기 위하여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웠는데 성당이 글씨를 썼다.

봉은사 일주문을 지나 우측에 비석들이 서 있는 맨 앞에 세워져 있다.

 

비석의 제액은 예의 전서체로 썼으나 비문은 통상적으로 해서체로 쓰거나 혹은 간혹 반듯한 예서체로 쓰는 것이 통례인데, 이 비석은

성당 특유의 예서체로 쓴 이채로운 비석이다.

 

 

정자에 걸려 있는 성당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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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피향정의 함벽루 행서체의 [涵碧樓]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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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 활래정 예서체 [活淶亭] 편액

활래정에는 사방으로 4개의 활래정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길 쪽의 편액이 해강의 글씨이며, 연못쪽이 성당의 글씨이다.

 

 

강릉 경포대에서 북쪽으로 100여미터 떨이진 곳에 경포대를 바라보며 경호정이 있는데

이곳에는 성당의 글씨가 예서체와 행서체의 서체를 달리하는 편액이 두개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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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경호정 예서체의 [鏡湖亭]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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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경호정 행서체의 [鏡湖亭]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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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천산정 예서체의 [芝艸珢玕(지초은간)] 편액

[지초은간]은 지초와 대나무를 가피키는 말로 선비의 품격과 절개를 상징적으로 은유한 말이다.

문경 천주산 아래 천산정에는 해강의 천산정 편액이 있고 그 옆에 성당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이 밖에도, 광주 월봉서원의 애일당, 화순 죽산사의 죽산사, 나주 계은정, 전주 학인당의 편액이 성당의 글씨이다.

 

  

가장 손쉽게 볼 수 있는 성당의 글씨

 

 

성당 김돈희의 글씨를 보려거든, 위에 나열한 사찰이나 시골 정자를 찾아가지 않아도 쉽게 볼 수 있다. 동아일보의 제호가 성당의 글씨이다.

일제강점기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앞을 다투어 창간할 때 조선일보는 위창 오세창의 글씨로 제호를 삼았으며, 동아일보는 성당의 글씨를 걸었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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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東亞日報) 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