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臺對智異全面 -眞宰 金允謙

2017. 6. 6. 08:38한국의 글,그림,사람

         
조회 : 1,230  

 

지리전면.jpg

<국립중앙박물관/29.6x34.7㎝(그림)>

 

1.

 

위 그림은 진재 김윤겸(眞宰 金允謙 1711-1775) 『금대에서 바라본 지리산 전면도[金臺對智異全面]』이다. 어느 핸가 산정무한주에 배경으로 등장한 적이 있는 그림이다.

우리 옛 산수화 중에 지리산을 그린 그림은 거의 없다. 그런데 금강산 그림은 엄청 많다. 산수화 본래의 목적인 와유(臥遊)의 관점에서 본다면 금강산은 풍경이 기기묘묘하여 그림으로 그려 감상하기에는 최고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요가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하긴 정조임금이 김홍도에게 금강산을 그려 오라고 명한 적도 있었을 정도이니까. 또 지리산은 한양에서 멀고도 멀었다. 그래서 김윤겸의 지리산 그림은 더욱 귀하게 대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위 그림을 볼짝시면, 첩첩산이 오른쪽 위에서부터 왼쪽 아래로 대각선으로 완만하게 이어져 편안한 느낌을 주고, 산과 산 사이 수많은 골짜기는 안개로 싸여 신비감을 더하고, 물길은 내려오며 점점 넓어지고 벼랑 위 좁은 길은 골짝 깊숙이로 돌아 들어가고, 골짜기 솔숲 사이에는 군데군데 집들이 자리하였다.

푸르스름한 담채로 산을 그려 청신한 기운이 서렸고, 가는 선으로 능선과 주름을 잡아 밝고 깨끗한 기운을 풍기며, 작은 점들을 찍어 산모습을 깔끔하게 마무리하였다.

내려다보는 시각[부감법俯瞰法]과 미점(米點), 소나무와 집들의 표현기법 등은 겸재를 충실히 계승했지만 겸재풍의 압도적이고 강렬한 느낌보다는 부드럽고 포근한 육산의 느낌이다. 그야말로 지리산이다. 1765년 소촌찰방 부임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여 완숙기에 들었을 때의 솜씨이다.

 

2.

 

진재(眞宰)는 그의 호이며, 그는 노가재 김창업(1658-1721)의 서자이다. 몇몇 낮은 벼슬을 거쳐 마지막으로 소촌(*지금의 진주 옆 문산)찰방(*종6품)을 지냈다. 서자 출신이었지만 쟁쟁한 서인-노론 세도가문인 안동김씨 집안이라 벼슬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그림에 뛰어났던 것은 시‧서‧화를 늘 접할 수 있었던 환경과 삼촌 김창협과 친분이 두터웠고 그의 집안에 수시로 출입했던 겸재 정선(1676-1759)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그의 화풍은 겸재파로 분류된다.

 

중국의 산수도 아니고 관념 속의 산수도 아닌 조선의 산수를 그린 정선의 산수화를 진경(眞景)산수화라 부르는데, 대부분은 실제 경치와는 동떨어진 풍경이다. 실제 모습을 바탕으로 하되 보이는 것은 모두 환(幻)이요, 내 마음속에 형성된 이상적인 풍경을 진경이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 동양화에서 진경이라 함은 겉모습만 닮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과 정신을 나타내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진경산수화라 하지만, 이런 금강산이 실제로 있기나 했던가?

 


금강전도.jpg

<정선/금강전도 130.7×59㎝>

 

마찬가지로, 실제 금대에서 바라보면 칠선계곡이나 백무동계곡은 창암산에 가로막혀 전모를 파악하기 힘든다(*아래 사진 참조). 겸재 화풍을 일정 부분 계승한 김윤겸도 창암산을 화면에서 배제하였다. 그림과 실경이 사뭇 다른 모습이다. 물론 그림이 실물과 똑 같을 필요는 없다. 겸재 이후 실경에 훨씬 가깝게 그린 김홍도 등의 산수화를 실경산수화라 부르기도 한다. 어쨌든 창암산까지 그려 넣었다면 이렇게 멋진 지리산 그림은 탄생하지 않았으리라.

 


금대사진.jpg

<사진/철의 여인(사용허락에 감사드립니다^^)>

 

한편, 소촌찰방 시절 영남지방의 명승을 여행하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영남기행화첩》이 동아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거기에 지리산 관련 그림으로는 매우 드물게 『下용유담(下龍游潭)』이 수록되어 있다. 아래 그림이다. 지리산댐으로 곧 사라질지도 모르니 실컷 감상하시라!


용유담.jpg

3.

 

아래 글은 석농 김광국(石農 金光國 1727-1797)이 김윤겸의 『추강대도도(秋江待渡圖)』에 화제(畫題)로 붙인 글인데,《석농화원(石農畵苑)》(2015 눌와, 유홍준 김채식)에 실려 있다. 인생의 풍운과 세월의 무상함을 곡진하게 묘사한 글이라 약간 길지만 인용해본다.

 

「진재는 노가재의 아들로 나와는 양대에 걸친 교분이 있었다. 갑자년(1744)에 그가 호서로부터 백악산 아래로 나를 찾아왔는데, 당시 나는 어렸으나 서로 망년지교를 맺어 손을 잡고 친구의 정을 이야기하며 술을 실컷 마셨다. 이윽고 그가 종이를 달라고 하여 몇 폭의 산수화를 그렸는데, 호방한 기운이 미간에 넘쳤고 진(晉)나라 명사들의 풍류가 엿보였다.

그후로 진재는 사방으로 다니며 생계를 이었고, 나도 세상일에 얽매여 삼십여 년간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을미년(1775) 여름에 우연히 친구 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머리와 눈썹이 하얗게 셌고 어깨가 이마보다 높았으며 입으로는 캑캑 기침소리가 그치지 않아 지난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술을 마련해 주니 진재는 연거푸 서너 잔을 들이키고는 손뼉을 치며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가 금강산과 설악산의 승경과 동해와 남해의 장관에 이르자 갑자기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그 풍류와 운치는 늙어서도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그대는 삼십 년 동안 분주히 다니면서 그저 두 뺨에 흰머리만 얻었구려. 아, 그대가 이처럼 노쇠했으니 나도 늙은 것이오. 신기루 같은 풍경과 부싯돌 섬광 같은 세월이 참으로 슬픕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의 명승지를 두루 돌아보고 발이 미친 곳과 눈으로 본 것을 입으로 역력히 말씀하시니, 가슴속에 산과 바다의 일부를 간직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나를 위하여 손으로 그려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진재는 이미 약간 취했는데도 좋다고 대답하고서, 옷을 벗고 다리를 펴고 앉아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이윽고 붓을 휘두르자 원기(元氣)가 흘러 넘쳐 마치 신령이 그 사이에서 돕는 듯하였다. 이내 붓을 던지고 “기가 막히도다!”라고 하며 크게 웃고서 또 술 한 사발을 들이키고 해학과 호쾌함이 넘쳐 흠씬 취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기해년(1779) 봄에 내가 우울증이 생겨 문을 닫고 조용히 거처하는데, 어떤 객이 진재의 그림을 가지고 와 보여주었다. 지금은 진재의 무덤에 풀이 세 번 우거졌는데, 화권(畵券)을 어루만지며 지난날을 회상하니 창연히 슬퍼진다. 마침내 옛일을 이와 같이 기록하니 그림이 잘되고 못되고는 보는 자들이 스스로 알 것이므로 더 말하지 않겠다. 진재의 성은 김이고 윤겸과 극양은 그의 이름과 자이다. 일찍이 벼슬하여 관직이 기마(記馬 *찰방)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