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1. 15:19ㆍ草書
김생의 글씨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1’
석야 신웅순
김생의 자유자재한 광초풍 글씨 이백의 시 ‘송하빈객귀월’
김생의 이백의 시, ‘하빈객이 월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이다. 물이 흐르듯 행서·초서로 썼다. 16세기 탁본첩 『해동명적(海東名跡)』의 첫 장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는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그를 중국의 왕희지와 함께 ‘신품제일’로 극찬했다. 이동국 학예사는 “석굴암의 미학과 동급 차원의 글씨 미학”이라며 “우리 글씨 역사를 토대로 중국 서예를 녹여낸 혼융미학의 결정체”라고 말했다.
김생의 글씨에서 필신, 시성 외에 그 어떤 더 이상의 말은 사족일 것 같다.
경호의 맑은 물은 봄이 되자 출렁이고,
미친 나그네(하지장)가 배를 저으니 고상한 흥취가 많구나.
산음의 도사를 만난다면,
황정경(黃庭經)을 써주고 거위와 바꾸리.
- 이백의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
鑑湖流水春始波,
狂客移舟逸興多,
山陰道士如常見,
應寫黃庭換白鵝.
서성, 왕희지는 평소 거위를 사랑했다. 거위의 헤엄치는 모습에서 서체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우아하며 탄력있는 목 근육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에 감동하여 힘 있고 아름다운 필체를 완성했다.
산음에 도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거위를 기르고 있었다. 한번은 황희지가 거위를 팔으라고 했다. 도사는 황정경(黃庭經)을 써주면 팔겠다고 했다. 왕희지는 반나절 동안 경전을 써주고 그 답례로 거위를 받았다. 왕희지가 쓴 황정경을 거위와 바꾼 것이다. 손해본 듯하나 거위를 보고 서법의 묘를 찾으려 했던 왕희지로서는 어느 것 보다 큰 것은 없었을 것이다.
황정경은 ‘환아첩’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의 경서로 양생과 수련의 원리를 담고 있는 선도 수련의 주경전이다.
여기에서 미친 나그네는 하지장을 말한다. 하지장은 일찍부터 문명을 얻은 시인으로 글씨에도 명성이 높았으며 이백, 장욱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읊기도 했다. 그는 장욱과 어울리면서 남의 깨끗한 담장이나 휘장을 보면 흥분을 하며 휘호를 했다고 한다. 그는 글씨를 쓰기 전에 종이가 얼마나 남았는가 물은 다음 글씨를 쓰다 종이가 떨어지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붓을 놓았다고 한다.
장승업의 ‘관아도’
이후 사자환아의 고사에서 ‘환아’는 ‘글을 청하여 받음’이라는 뜻으로 쓰였고 화가들의 고사 인물화의 소재로도 널리 쓰였다.
위 그림은 조선 말기 화가 장승업의 「관아도」이다. 화면에는 19세기 화가 춘방 김영의 화제가 적혀있다.
두 마리 거위가 목을 빼며 다가오자
가슴 속의 묘한 생각 저절로 어우러지네
아득히 천년 후에 벗을 숭상하니,
뜻을 아는 이 황정경 뿐이라네
오원이 그리고 춘방이 보다
照眼雙鶂引頸來,
胸中妙思與之偕.
寥寥尙友千年後,
秖有涪翁識比懐
사모관대를 갖춘 선비가 흐믓한 표정으로 물가에서 노는 거위를 바라보고 있다. 더벅머리 동자도 조심스레 함께하고 있다. 황정경과 바꿔온 거위를 바라보는 왕희지 모습을 그렸다.
정철의 「관동별곡」의 가사에도 왕희지의 황정경 일화가 언급되고 있다.
솔 뿌리 베고 누워, 선잠을 얼핏 드니
꿈에 한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이
그대를 내가 모르겠는가? 하늘나라의 신선이었다는 것을
황정경 글자를 어찌 잘못 읽어서
인간 세계에 내려와서 우리를 따르는가?
잠깐 가지 마오. 이 술 한 잔 먹어 보오
그림이나 글에서 사자환아의 고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김생은 부모가 미천하여 집안 내력을 알 수 없다. 경운 2년(서기 711)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평생 동안 다른 기예는 닦지 않았으며 나이 80세가 넘도록 붓을 놓지 않았다. 예서와 행서, 초서 모두 입신의 경지여서 지금까지도 왕왕 진필이 남아 있는데 배우는 이들이 전해오면서 이를 보물로 여겼다.
다음은 삼국사기 권 48 열전 제 8 김생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숭녕 연간에 학사 홍관이 진봉사를 따라 송에 들어가서 변경에 묵고 있었는데, 이때 한림대조 양구, 이혁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객관에 와서 족자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홍관이 그들에게 김 생이 쓴 행초 한 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오늘 왕우군(王右軍, 명필 왕희지)의 친필을 보게 될 줄 몰랐다.”
홍관이 말했다.
“아니오. 이것은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이오.”
두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천하에 왕우군 말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홍관이 여러 번 말하였지만 끝내 믿지 않았다.(김생,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8.20., 한 국인문고전연구소)
중국에 왕희지가 있다면 한국엔 김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왕희지가 이전 시대의 전서·예서를 토대로 위·진 시대 이래 서법을 세웠다면, 김생은 통일신라 이전의 삼국 글씨를 토대로 왕희지의 서법과 당나라 서법까지 하나로 녹여 우리나라 글씨의 법을 일으켰다. 그 이후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한석봉·김정희 같은 명필이 등장, 한국 서예는 중국 서예와 같고도 다른 궤적을 걸어왔다
[출처] 김생의'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1’-석야 신웅순|작성자 석야
'草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草書란 (0) | 2017.06.01 |
---|---|
신사임당 초서 병풍(草書 屛風) (0) | 2017.06.01 |
[스크랩] 두보 절구이수 (0) | 2017.06.01 |
[스크랩] 안평대군의 글씨 (0) | 2017.06.01 |
[스크랩] 양사언 초서 (0) | 2017.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