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여자를 그리는 화가 / 이규현의 ‘아트토크’

2015. 10. 4. 18:34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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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현의 ‘아트토크’ - 여자를 그리는 화가

 

 

⊙ 피카소의 28살 연하 애인의 누드 그림은 1117억원에 낙찰된 기록도

⊙ 현대 화가들은 왜 여성 누드화를 도외시할까

 

이규현

⊙ 연세대 국문과 졸. 뉴욕 크리스티 에듀케이션 대학원, 뉴욕 포댐 경영대학원 MBA 졸업.

⊙ 前 조선일보 미술 담당 기자. 現 아트마케팅사 ‘이앤아트’ 대표.

⊙ 저서: 《그림쇼핑1,2》 《안녕하세요? 예술가씨!》 《미술경매이야기》 《도시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

 

 

Nude, Green Leaves And Bust - Pablo Picasso Painting

피카소가 애인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그린 <누드와 푸른 잎사귀와 흉상>.

 

 

“모든 화가가 그렇지만, 나 역시 결국에는 여자를 그리는 화가다.”

 

이는 전통적인 미술에서 획기적으로 벗어났던 입체파(cubism)로 20세기 초반 서양미술사의 궤도를 바꾼 세기의 화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한 말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모든 화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백 년 전부터 화가들이 가장 즐겨 그렸던 소재는 ‘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이 말의 주인공인 피카소는 그야말로 여자를 많이 그린 화가다. 그는 수많은 여자들과 사귀고 함께 살 정도로 깊은 관계를 가지곤 했는데, 사귀는 여자들마다 초상화를 그려 여자 초상화를 아주 많이 남겼다. 그리고 여자가 바뀔 때마다 피카소의 작품세계는 확 달라지곤 했다.

물론 피카소는 평생 어느 순간에도 한 작품 스타일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는, 창작욕이 넘치는 작가였다. 그리고 1, 2차 세계대전을 겪는 20세기 초반 유럽의 화가로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작품도 예민하게 바뀌었다. 피카소 작품 스타일이 끊임없이 바뀐 것이 꼭 여자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준 여러 요소들 중 ‘여자’는 분명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피카소 작품세계에 중요했던 ‘여인’

 

 

“Dora Maar avec chat”

9500만 달러의 낙찰기록을 가지고 있는 피카소의 유화 <고양이와 있는 도라 마르>.

 

 

피카소는 사실 1907년부터 시작한 ‘입체파’의 선구자로서 가장 중요하다. 입체파 이전인 1901~1904년은 우울한 파리 뒷골목 삶을 투영했던 시기라 ‘청색시대’로, 청색시대 직후엔 장밋빛 희망이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한 때라 ‘장미시대’로 나누어 부른다. 둘 다 피카소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즉, 1901년 청색시대에서 시작해 한창 입체파의 작품을 만들던 1910년 초반까지의 작품이 피카소의 작품 중 가장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하지만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많이 좋아하고 시장에서도 초고가에 팔리는 피카소의 그림 중에는 정작 ‘여자를 그린 그림’이 많다. 그중에서도 그의 스물여덟 살 연하 애인이었던 마리-테레즈 월터를 그린 것은 특히 인기다.

 

마리-테레즈는 피카소가 마흔다섯 살이었을 때 만난 열일곱 살 소녀였는데, 피카소에게 대단한 영감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피카소의 훗날 애인이었던 프랑수아즈 질로조차 자신의 저서에서 “마리-테레즈 월터의 외모는 놀라웠다. 그녀가 파블로(피카소)에게 조형적인 영감을 준 여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고 찬사를 날렸을 정도다. 피카소는 아내 몰래 마리-테레즈와 동거했기 때문에 처음엔 마리-테레즈를 기타, 물병, 과일접시 같은 물건으로 빗대어 그렸다. 하지만 머잖아 보란듯이 마리-테레즈의 누드를 직접적으로 그려댔다.

그중 하나인 <누드와 푸른 잎사귀와 흉상>(1932년)은 201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600만 달러(약 1117억원)에 낙찰돼 피카소의 미술경매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피카소는 마리-테레즈를 만나고 사귄 지 13년 되었을 때 도라 마르라는 새로운 여성을 만났다. 마리-테레즈는 스포츠를 좋아했던 나이 어린 소녀였기에 둥글둥글하게, 그것도 늘 잠자는 모습으로 그렸지만, 도라 마르는 지적인 사진작가였기에 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매우 날카롭게 그렸다.

 

같은 여인 초상이라도 마리-테레즈를 그린 것과 도라 마르를 그린 것은 확연히 다르다. 피카소가 도라 마르를 그린 <고양이와 있는 도라 마르>(1941년)는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9500만 달러(999억원)에 팔려 유명해졌는데, 각지고 모난 얼굴이 인상적이다. 손톱도 길고 날카로워서 강인하고 공격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피카소는 마리-테레즈를 통해 여신처럼 이상적인 여성미를 표현했다면, 도라 마르를 통해서는 손에 잡히지 않는 어려운 여성성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이후 다른 여자들을 만날 때에도 피카소는 이렇게 그 여자들의 특성에 따라 작품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내를 모델로 그린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Seated Nude on Divan. 1917. Oil on canvas. 100 x 65 cm

모딜리아니의 유화 <침대의자에 앉아 있는 누드>(1917).

 

 

피카소만 이런 게 아니다. 역사상 유명했던 많은 남성 화가들에게 ‘여자’는 영감을 주는 중요한 존재가 되곤 했다. ‘여성 누드’ 하면 모딜리아니(Amedeo Modiglani, 1884~1920)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감각적이면서도 차분한 여운을 주는 여인 누드화로 동서양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는다.

 

모딜리아니는 피카소처럼 여자를 많이 사귄 사람은 아니었다. 아내 잔 에뷔테른과의 애틋한 사랑이 늘 화제가 되는데,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의 단골 모델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인체에 대한 관심 때문에 여성 누드를 많이 그렸다. 그는 원래 조각가로 시작했다. 하지만 어려서 결핵을 앓아 몸이 약했기 때문에 무거운 조각작품을 다루는 것이 힘들어 나중에 회화를 하는 것으로 바꿨다. 그런데 그는 조각가로서도 두상 등 인체 조각을 많이 했고, 화가로 전업한 뒤에도 주로 인물화를 그렸다. 긴 타원형 얼굴에 사슴처럼 긴 목을 하고 있는 모딜리아니의 여성 모델들은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이렇게 모딜리아니는 과거의 이상적 여신이 아닌 평범한 동시대 여성을 당돌한 모습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앞서나가는 화가였다.

 

모딜리아니가 활동했던 20세기 초반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누드는 논란이 될 수 있는 시대였다. 1917년 열었던 모딜리아니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개인전은 누드 논란으로 빛을 못 봤다.

그 전시장 창가 쪽에 걸린 여성 누드화가 문제가 되어 경찰이 출동하는 바람에 전시 오픈하고 몇 시간 만에 전시장 문을 닫은 것이다. 결국 창가 쪽에 걸린 누드 그림을 내린 뒤 전시를 재개할 수 있었다.

 

 

현대에는 여성 누드 도외시 분위기

 

 

현대 작가로는 드물게 여성 누드화를 그리는 김형곤 작가의 유화 <제니퍼>(76.2cmX60.96cm, 린넨에 유화, 2007).

 

 

100년 전만 해도 여성 누드화는 전위적인 소재라 이렇게 논란거리였는데, 정작 현대에 와서 여성 초상, 여성 누드는 진부하다는 취급을 받는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래서인지, 요즘 현대미술 화가들은 오히려 여성 누드를 많이 그리지 않는다.

요즘 젊은 작가로는 드물게 여인의 초상과 누드를 그리는 화가 김형곤(44)은 “인체 누드는 회화의 시작이며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화가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정확한 눈과 내면의 감정을 화면에 표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런 것을 모두 담아 내는 게 인체이기에, 인체를 그리면 모든 미술 분야를 다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체는 그리기가 가장 어렵고, 그래서 가장 매력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유명한 그림 중에는 남성 초상이나 누드보다는 여성 초상이나 누드가 훨씬 많을까.

 

김형곤 작가는 자신이 여성을 많이 그리는 이유에 대해 “나 같은 경우 동양화로 그림을 시작해 서양화로 갔는데, 동양화에서 선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 선을 아직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여성의 인체는 남성의 인체에 비해 선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림의 소재로 더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실 유명한 그림 중 여성을 그린 게 많은 건, 과거의 이름난 화가들이 대부분 남자였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아무래도 동성보다는 이성에 끌리니, 남자 화가들은 여자를 그리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모델과 염문 뿌린 클림트

 

여자에 대한 관심으로 여자를 그린 화가 하면,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여성만 그린 대표적인 화가다. 뉴욕의 오스트리아 전문 미술관인 노이어 갤러리가 소장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I>이 최근 몇 년 사이 그의 여성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해진 그림이다.

 

 

Adele Bloch-Bauer I, which sold for a record $135 million in 2006, Neue Galerie, New York

 

 

Decorative patterns were often used by Gustav Klimt in his paintings. Detail fron the Palais Stoclet in Brüssel, Die Umarmung, The hug.

 

 

이 그림의 모델인 아델레가 원래 그의 여성 모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인 데다가 이 그림이 1000억원 넘게 팔리는 과정의 스토리가 극적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의 모델 아델레는 클림트의 후원자이자 컬렉터였던 페르디난드 블로흐-바우어의 아내다. 블로흐-바우어 씨가 아델레를 그려 달라고 주문 제작해 모두 두 점을 그렸는데, 그러면서 클림트는 아델레와 스캔들을 낳았다. 클림트는 사실 아델레만이 아니라 당시 자신이 활동하던 오스트리아 빈의 수많은 사교계 여인들 및 모델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인물이다.

클림트는 “나는 내 자신에게는 별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 관심이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사실 많은 화가들은 ‘남’에게 관심이 있다. 다른 사람 및 외부세계를 관찰하고, 그 관찰과 고민의 결과를 풀어 낸 게 화가들의 그림이다. 클림트는 보수적인 기존 미술계에도 반기를 들었고, 20세기 초반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사조와도 따로 놀았던 ‘난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진보적인 작가들과 함께 ‘분리파’를 창설하기도 했다. ‘여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아주 독특하고 개성이 강한 그림으로 나타났고, 이는 후세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화가들의 개성에 따라, 시대에 따라 화가들이 그린 ‘여자’ 그림은 바뀌었고, 이는 미술사의 흐름을 보여주기도 한다.⊙

 

 

/ 월간조선

 

 

 

 

 

 

 

Amedeo Modiglani  

 

 

modigliani, nudo sdraiato su cuscino bianco, 1917-18,

 

 

 

 

 

Modigliani-Nudodifiancosinistro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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