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20. 09:11ㆍ한문상식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완적(阮籍) , 혜강(嵆康) , 산도(山濤) , 상수(向秀) , 유령(劉伶) , 완함(阮咸) , 왕융(王戎)을 가리킨다.
정치 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을 주고받고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들이다.
그들의 근본 사상이었다.
“언제나 죽림 아래 모여
거칠 것 없이 술을 마셔, 죽림 7현이라고 불렀다”라고,
6조 송의 유의경(劉義慶)이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7인을 한 그룹으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 사상적 중심은 혜강과 완적의 두 사람이며,
다시 산도와 상수, 유령과 완함·왕융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죽림이란
방외(方外)의 땅, 즉 자연이란 뜻이다.
조씨의 위(魏)에서 사마(司馬)씨의 진(晉)으로의 정권 항쟁기에
스스로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죽림과 술에 자기도회(自己韜晦)하려고 하였다.
혜강은
반사마(反司馬)의 거병(擧兵)을 하려 했고,
완적은
혜강이 사마소 때문에 형사(刑死)한 다음해에 죽고,
그 다음해에야 사마씨의 진왕조가 정식으로 성립된다.
산도는
이 정권교체기에 79세의 장수를 누리다가,
진나라 원훈(元勳)으로서 죽었다.
《장자》의 주서(註書)를 쓰고
은일의 뜻을 보인 상수도 사마소에 사관(仕官)을 구했다.
완적에게서 속물이란 평을 받은 왕융은
진나라 시대까지 장수했으며,
인색하여 밤낮 돈계산을 했다고 전해진다.
〈주덕송(酒德頌)〉을 쓰고,
언제나 술을 휴대하고,
종자(從者)에게 괭이를 가지고 따르게 하여,
“내 죽은 곳에 나를 묻어라” 하고
기이한 말을 토한 유령의 과대한 도가적 언사는
자기도취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들은 정치적 계절(季節)에 명철보신(明哲保身)하지 않으면 안 된
중국의 사군사(士君士)들에게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전해 내려온 사람들이다.
자는 사종(嗣宗), 진류(陳留=허난성) 사람이다.
부친인 완우(阮瑀, ?~212)는 조조를 섬긴 건안칠자의 한 사람이었다.
완적은 형인 혜희에 대해서는
아첨하는 선비에 대한 백안(白眼)으로 대했으나,
아우인 혜강에게는 청안(靑眼)으로 대하여,
여기서 죽림 교유의 중핵이 이루어진다.
원래 제세(濟世)의 뜻이 있었다고 하는 그의 유가적 지조는,
위진 사이를 전변(轉變)하는 경박한 군자들을 외면하려는
도가적 ‘과장된 언사’로서 자기도회하려고 했다.
〈도덕론(道德論)〉, 〈통로론(通老論)〉, 〈달장론(達莊論)〉이나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 등의 노장적 세계를 그린 것이 그것이다.
또한 감음을 일삼고,
차바퀴가 다하는 곳에서 통곡했다고 하는 완적의 심정은
〈영회시(詠懷詩)〉에서 볼 수 있다.
5언시 82수의 이 연작은
미인을 찾아서 원유하면서도
옛 고향을 생각하는 굴원의 《초사》의 세계와 유사하나,
보다 개인적 감회에의 경향이 강하다.
당나라 초의 진자앙(陳子昻)의 〈감우시(感遇詩)〉 38편이나,
성당(盛唐)의 이백의 〈고풍(古風)〉 59편 등에 계승되는 그의 시풍은,
중국 사인(士人)에게 하나의 자기표현의 형태를 제시했다.
죽림칠현 가운데서도 은자적 성격을 진하게 갖는 점에서
대표적 인물이다.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음악가 · 작가 · 시인으로, 자는 숙야(叔夜)이다.
죽림칠현 중 한 사람으로
《양생론》 · 《산거원》 등 수많은 철학 · 정치적 논문과 서간문을 썼다.
당시 위나라 공주(패목왕의 손녀)와 결혼했는데
정치적 반대 세력이던 종회에게 모함을 받아
젊은 나이에 처형을 당했다.
성무애락론은
음악에서 감정보다 이(理)가 중요하다는 이치를 대화 형식으로 풀어쓴 것으로
유교 사상에 나오는
'음악이 사람의 감정을 지배하기 때문에 음악을 가려서 들어야 된다'
라는 이론을 반박한 것으로 후세에 평가된다.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문인으로, 자는 거원(巨源)이다.
하내군(河內郡) 회현(懷縣) 사람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 산요(山曜)를 잃은 이후,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위나라 말에 선조랑(選曹朗)을 지냈으며,
이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승진하자
자신의 후임으로 같은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혜강(嵆康)을 추천하였으나,
혜강은 산도가 사마씨(司馬氏)를 섬기는 것을 질책하면서 절교서를 보냈다.
조상(曺爽)이 병권을 장악할 당시에 은거하였으나,
사마의(司馬懿)의 쿠데타로 조상이 처형된 이후에 다시 관직에 출사하였다.
사마소(司馬昭)가
종회(鍾會)의 모반을 진압하기 위해
낙양(洛陽)을 떠나게 되자,
산도를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임명하여
업(鄴)의 관할과 업에 연금된 조씨(曺氏) 일족의 감시를 맡았다.
산도의 부친 산요의 고모가 장왕(張汪)에게 시집갔으며,
둘 사이에 낳은 딸인 장춘화(張春華)가
사마의의 정실부인이 되어
사마씨와의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서진 대에 이부상서, 태자소부(太子少傅)를 역임하였고,
79세 때 사도(司徒)가 되었다.
또한, 종회에게 모함을 받아 처형당한 혜강의 아들인 혜소(嵆紹)를 천거하였다.
상수(向秀, ? ~ ?)는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문인으로, 자는 子期(자기)이다.
하내군(河內郡) 회현(懷縣) 사람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이며,
노장(老莊) 사상을 숭상하여
도가서인 《장자(莊子)》에 주석을 단 《장자주(莊子洼)》를 저술하였으며,
《주역(周易)》에 주석을 달기도 했다.
경원(景元) 4년 혜강과 여안이 처형을 당하자,
군(郡)의 초빙을 받아 상계리(上計吏)에 올랐으며,
이후 산기시랑(散騎侍郎) · 황문시랑(黄門侍郎) ·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하였다.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사구부(思舊賦)》가 있다.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시인으로, 자는 백륜(伯倫)이다.
패국(沛國) 사람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으로,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따르면 신장이 약 140cm로 작았다.
죽림칠현 중 가장 술을 즐겼으며,
이와 관련된 수많은 일화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주덕송(酒德頌)》이 있다.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정치가 · 장군으로, 자는 준충(濬沖)이다.
서주(徐州)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사람이며,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지낸 왕웅(王雄)의 손자이자
양주자사(涼州刺史)를 지낸 왕혼의 아들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져
명제(明帝) 조예(曹叡)와 같은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완적(阮籍)의 인정을 받았다.
양주자사(涼州刺史)를 지낸 아버지 왕혼이 죽자, 관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사마소(司馬昭)의 초빙을 받았고,
이후 위나라와 서진에서 관리를 지냈으며,
이부황문(吏部黄門), 산기상시(散騎常侍), 하동태수(河東太守),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며
승진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역인(役人)을 사적인 용무로 사용하여 면직될 위기에 처했으나,
벌금을 내는 것으로 끝났다.
이후 예주자사(豫州刺使)가 되었으며,
건위장군(建威將軍)을 겸직하였다.
함녕(咸寧) 5년 (279년), 서진이 오나라를 정벌하자
무창(武昌)을 공격하여,
왕준(王濬)과 함께 오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양양현후(安豊亭侯)로 책봉되었다.
이후 오의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시중(侍中)이 되었으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사마염(司馬炎)은 그를 감쌌다.
그 뒤 작위가 광록대부(光祿大夫) ·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어머니의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을 그만두었다.
무제(武帝) 사마염의 사망 후,
그의 아들인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이 즉위하였지만,
정치는 양준(楊駿)과 무제의 황후 양씨 일족이 독식하게 되었고,
왕융을 태자대부(太子太傅)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와 동안공(東安公) 사마요(司馬繇)가
양준과 그 일당들을 죽였으며,
사마요가 제멋대로 행동하자 이를 충고하였다.
얼마 뒤 사마요는 죄를 지어 실각하였고, 왕융은 광록대부(光祿大夫) ·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왕융은 관리 임용제도인 '갑오제'(甲午制)를 주창하여 실시하였으나,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씨(賈氏) · 곽씨(郭氏)와의 인척관계를 형성하여 자신의 작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297년 관직이 삼공(三公) 중 하나인 사도(司徒)에 이르렀으나,
혜제의 황후였던 가씨(賈氏)와 그의 일파를 죽였는데,
왕융의 사위 배위(裴頠)가 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왕융 또한 이에 연좌되었지만, 죽지 않고 면직당하는 것으로 그치게 되었다.
305년 왕융은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왕만(王万)은 젊어서 요절하였고,
다른 아들 왕흥(王興)은 서자였기 때문에, 그의 친척이 대를 잇게 되었다.
* 완함 [阮咸]
비파에 능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당나라 때의 것은 둥근 몸통에 긴 자루(棹)를 박았는데,
이 자루에는 14개의 프렛(柱)이 있고 줄감개에 네 줄을 매었다.
이 밖에도 8각의 몸통에 자루가 짧은 것도 만들어졌으며
명 ·청에 이르러서는 월금(月琴)과 비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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