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26. 11:13ㆍ사람과사람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먼저 인생을 바꿔야 한다."
이 말은 랭보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말일 것이다. 그는 프랑스의 엄격한 가톨릭 신자도, 무기밀매업자, 이슬람교 신자도, 파리꼬뮨에 참가한 맑시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랭보,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길고, 거대한 타락에 바탕을 둔 모든 감각을 통해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
( 폴 드메니에게 1871년 5월 15일 보낸 편지 중에서 ) 쟝-니꼴라 악튀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
랭보는 가정에 무책임한 보병 대위 프레데릭(아버지 프레데릭 랭보는 다섯 아이를 버리고 영원히 가정을 버림.)랭보와 무척 독선이 심하고 신앙심이 깊은 소지주의 딸 비탈리 퀴이프 사이에서 1854년 프랑스의 아르덴느 지방의 샤를르빌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의 조숙함과 문학성은 선생들에게 인정받아 중등 3학년 과정을 면제받고 곧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라틴어에서 특출함을 보였는데 이 같은 사실은 그가 1869년에 그의 라틴어 시 세 편 중 한 편이 학술 대회에서 1등 상을 받은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그는 이렇게 문학적인 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런 자식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16세의 나이에 스스로 학업을 중단했다. 그 뒤 그는 시인의 길 :- 타락에 바탕을 둔 모든 감각을 통한 선지자(Voyant)가 되기 위해 그의 선생 이잠바르(Georges Izambard)의 권유로 라블레, 테오도르 드 방빌, 빅톨 위고에 심취하게 된다. 랭보는 특히 위고의 징벌(Les Ch timents), 웃는 사람 (L'Homme qui rit) 넘김.), 그리고 명상록 등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나 곧 자신만의 스타일과 시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바깔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를 포기하고 책을 팔아 파리로 가지만, 차표없이 무임승차하여 체포당한 뒤 감옥에 잠시 수감당한다. - 그는 보불전쟁의 패배로 나폴레옹 3세 전제왕권의 몰락하자 시작된 파리코뮨(Commune:프랑스 혁명정부)에 가담하고자 모친의 허락도 없이 파리에 상경하고자 했으나 그는 곧바로 붙잡혀 구치소에 감금되며, 자신의 담임 선생, 이잠바르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써 주십시오" 란 편지를 보내 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곳에서 빠져 나온다. - 가출에서 돌아온 뒤 그는 샤를르빌 시립도서관을 빈번하게 출입하며 사회주의 작가들: 프르동, 바뵈프, 루이블랑, 쌩 시몽 등과 역사 학자 미쉴레의 작품을 탐구 본격적으로 반 부르주아적인 자신의 시적 감정을 확인하고 내면화한다.
1871년 2월 25일 다시금 파리를 향해 무단 가출을 하게 되지만 수도의 거리를 2주일 정도 거닐다가 돈이 떨어지자 고향까지 도보로 되돌아오는 슬픔도 맞이한다.다시 그는 파리꼬뮨에 대해 우정어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귀가 후 그가 겪었던 체험을 충실히 옮긴 시가 <파리 전쟁의 찬가> Chant de guerre parisien, <다시 인구가 증가하는 파리> Paris se repeuple, <쟌 마리의 손> Les Mains de Jeanne-Marie 등으로 이런 시를 통해 반항과 저항의 자아를 표출한다.
"...,어머니는 필서(성경)을 덮으면서,(...) 추함을 쫓는 아들의 영혼은 못 본 채, 자랑스럽고 만족한 듯 자리를 떴다. 매일같이 그는 (랭보 ) 명령에 복종하느라 애썼다; 아주 총명스럽게; 그렇지만, 얼굴을 찡그리는 나쁜 습관은, 그 자신 속에 내재하는 신랄한 위선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 Les Po tes de sept ans 중에서 ) " 매독 환자들, 미친놈들, 왕들, 꼭두각시들아, (...) 당신네들의 영혼, 육체, 독 그리고 당신네들의 누더기 옷이 빌어먹을 파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시인은 너( 파리 )에게 말한다: {너의 미모는 황홀하구나 !" ( Paris se repeuple 중에서 )
첫 시에서 랭보는 자신의 이중적 자아와 모순: 부모에게 순종하는 맹목적 외적 자아와 위선에서 탈피하려는 내적 자아를 구체화하고 있다. 두 번째 시는 보불전쟁뒤 파리를 쥐고 흔들려는 부패한 집정자들을 질책하며, 다른 한편으로 파리에 대한 랭보 자신의 애정을 그려, 파리는 그 당시 그의 끝없는 정신적 지주이자 갈등의 장소임을 잘 들어내고 있다(랭보의 잦은 가출의 장소는 파리였다).
또한 가장 원초적인 언어 구사(신랄한 위선, 매독, 미친, 빌어먹을..., )를 통해 종교와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저항, 반항적인 그의 과도기적 사춘기를 자신의 시적인 세계로 끌어내려했다.
"열일 곱살 때엔, 사람들은 방탕을 한답니다
샹들리에가 빛나는 시끌벅적한 카페들의,
레몬수와 건초 내음나는 맥주를 대하는, 어느 멋진 저녁 !
푸른 보리수 나무 밑 산책길을 걷는다.
(...)
그날 저녁,..
당신들도 불빛이 작렬하는 카페에 들어가서, 맥주나 혹은 레몬수를 주문 하십시오....
산책로에 푸른 보리수가 있는, 열일곱살 때엔, 방탕을 한답니다. "
불과 17세의 나이에 랭보는 그의 모든 의지를 담아 시인으로서 새 출발 할 것을 선언하고 나선다.
"이제, 난 가능한 최대한도로 방탕하겠다. 왜냐고 ? 난 시인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난 선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당신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며, 나도 당신에게 설명을 하지 못하겠다. 모든 감각의 타락을 통해 절대자에게 도달하려는 것이다. 고통은 대단하지만, 시인으로 탄생하는데는 강해야만 한다, 그리고 난 내 자신이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또한 조금도 내 탓은 아니다. 난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사람들이 날 생각한다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 나는 타인이다 (...)." (1871년 이잠바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어머니의 독선적이고 지극한 신앙심과 샤를르빌의 답답함, 지적인 협소함으로 속작당하고 있던 지금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다는 의미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한다. 그에게 있어 부자연스런 부르주아의 도덕은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는데 거추장스런 짐이자 굴레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타락에 바탕을 둔 모든 감각을 통해 선지자, 견자(見者)가 되려는 야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시인으로서 [견자]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던 랭보는 샤를르빌의 세무서에서 근무하고 있던, 시를 좋아하는 브러탄뉴란 사람을 친구로 사귀게 된다.
샤를르 빌에서 파리까지 위대한 영혼의 행로
랭보는 브러탄뉴에게 당대의 파리의 일급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베를느를 소개 해주겠다는 제의를 받게 된다. 랭보는 몇 편의 시를 다시 작성하고 긴 사연이 담긴 편지를 베를렌느에게 보낸다. 베를렌느는 샤를르빌의 촌구석에서 날아온 랭보의 시 몇 편을 본 후 파리행의 기대에 가득찬 랭보 못지 않은 기대와 기쁨의 편지를 보낸다
"위대한 영혼이여,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을 부르고 있으니 오소서!".
그가 그토록 동경해 마지 않았던 파리. 1871년 9월 베를렌느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러 출발한 아르튀르 랭보의 가슴엔 <취한 배>가 있었다. 그 당시 랭보는 "아! 내가 그곳에서 어떻게 한단 말인가 ?" 라며 한편으론 부푼 꿈을 다른 한편으론 기다렸던 만남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한 심정을 지니고 파리에 갔지만 그곳에서 만난 시인들은 그에게 환멸과 실망만을 던져주었다. 더군다나 랭보를 만날 무렵 베를렌느는 한창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던 무렵이었기 때문에 랭보가 머물고 있던 베를렌느의 처가에서는 노골적으로 그에게 냉담했다. 결국 그 집을 나온 랭보는 베를렌느의 도움으로 허름한 다락방을 얻어 생활하게 된다.
1872년 랭보와 베를렌느가 소르본느 대학 근처, 캭티에 라텡지역의 카페들을 빈번하게 출입할 때, 베를렌느의 처, 마틸드 모테는 랭보와 같은 17세에 불과한 앳띤 소녀에 불과했다. 랭보의 파리 도착과 함께 베를렌느와 마틸드는 잦은 부부 싸움을 하게 되고 결국 별거까지 하게 되자, 랭보는 하는 수 없이 그의 고향 아르덴느 지방에 다시 내려 오게 되지만 베를렌느는 랭보에게 간절하게 파리로 다시 올라 올 것을 종용하자, 그해 7월 랭보는 벨기에의 브뤼셀에 갈 것을 결정하고 베를렌느에게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더 이상 우리들이 만나지 못할 것" 이라는 협박적인 편지로 아내와 그녀 부모에게 메인 베를렌느를 꼬여내 브뤼셀에 가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틸드는 악마로부터 남편을 구해야 한다며 그곳에 남편을 찾아오지만, 그들은 다시 영국 런던으로 뺑소니를 치고 만다. 그러나 베를렌느는 그의 사랑의 악동 랭보와 가정의 굴레 마틸드 사이에서 누구도 선택하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될 뿐 아니라, 그것이 그들 사이의 잦은 말다툼의 원인이 된다.-그런 1873년 7월 3일 심한 말다툼 끝에 베를렌느는 결별을 선언하고 랭보 곁을 떠난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랭보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돌아와 다오, 나의 소중한 친구여, 돌아와 다오..., 이런 결과를 맞으려고 우리가 2년을 같이 지냈단 말이오!... 내가 만약 다시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되다면 해군 혹은 군에 입대하겠소" 라고 베를렌느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베를렌느는 랭보에게 그의 확고 부동한 결심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만약 내가 3일 안에 내 아내와 완전한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면 분신 자살을 하겠네" 이에 대해 랭보는 비웃는 조로 "네 아내는 오지 않을 것이며, 온다 해도 3개월, 아니 3년후,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야? 그리고 자살 한다는 것은..., 난 너를 너무 잘 알고 있지" 란 조롱 섞인 응수를 했다.
결국 베를렌느는 5일 후인 7월 8일 브뤼셀의 랭보 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지만, 파리에 돌아가 아내에게 용서를 빌겠다는 그의 행동에 랭보는 격분을 하게 되고, 파리에 그도 같이 가겠다고 베를렌느를 위협하게 된다. 7월 10일 결국 둘 사이에 올 것이 오고야 만다. 말다툼 끝에 화가 난 베를렌느가 랭보에게 권총을 발사해 그 중 한발이 손 등을 관통하고 마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랭보가 고소를 취하했지만 이 사건으로 베를렌느는 2년형을 언도 받게 되고, 7월 20일 브뤼셀의 썡-장 병원으로부터 퇴원한 랭보는 어머니의 고향 로쉬로 돌아와 그간의 고통과 사랑, 갈등, 고뇌 등을 총망라해 그가 살아생전 발간된 유일한 작품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19세, 19세의 나이로 쓴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통해 그 동안 그가 겪은 사랑, 갈등, 위선, 환멸을 마음껏 세상에 알렸다.(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랭보의 겉 모습이 앳띠고 연약해보여서 그가 베를렌느와의 사이에서 여성 역할을 맡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그가 둘 사이의 동성애에서 남성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그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그의 감정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야망, 동성연애, 베를렌느에게 기대어 산 삶 - 이 모든 것이 둘이 살면서 느끼고 또 빼앗긴 그의 삶이란 걸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을 때는 거기에 그 자신이 이미 포로로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뿐 아니라, 그것들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속에 머물고 있는 그를 지배하는 주인으로 둔갑했음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고백하듯이 밝히고 있다.
꿈의 세계에서 평범한 농부의 세계로 진입한 19세의 나이에 [아디유]을 끝으로 붓을 놓게 된다. 이 이별은 시인 랭보와 꿈의 세계와의 이별이자, 물질 세계로 또 다른 환상의 신기루를 쫓아가는 전환점이었다.
지금껏 물질 세계, 부르주아와 관료주의의 부패를 누구보다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저주하던 그가 베를렌느와 별거를 선언한 그 해 말 파리 서클 쥬디크에서 만난 제르맹 누보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1874년 3월 영국에 같이 가게 되며 곧 그와 헤어진 랭보는 그 때부터 새로운 방랑 길을 시작한다; 작품에 대한 방랑이 아닌 삶과의 전쟁,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그의 천성적인 방랑벽이 그를 독일-스위스-밀라노 등으로 이끌었고, 아프리카에 가보고 싶은 욕망으로 1876년 5월에 19일 네덜란드 해군에 지원 6월 10일에 배를 탔으나 몇 주일 후 탈영, 영국 상선을 타고 유럽 땅에 다시 돌아와 그해 12월 고향 샤를르빌에 도착하기도 한다. 고향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의 방랑벽은 정체된 과거의 꿈과 새로운 물질 세계를 추구하는 현실적 자아 사이에 갈등과 번민을 오가는 것이었다.
"모든 기쁨과 영화보다 더 높은, 오 종려나무여 ! 다이아몬드여 !- 사랑, 힘이여 !- 어쨌든, 어디에나,- 악마, 신은 있고, - 이런 존재의 젊음이; 나다 !(...) 바다와 싫증나는 공기를 가로질러 상처투성이로; 살인적인 공기와 잔잔한 물결을 가로지르는 형벌로; 그들의 고요한 엄청난 파고 속에서 고문을 비웃으며, 떠돌아다니련다." ( 시 번뇌 중에서 )
불과 17세의 나이로 오토데스트뤽시옹(Autodestruction: 자기 파괴 작업)을 시작한 랭보.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은 부류에 속해 있었다고 생각한 랭보, 그러면서도 그 뿌리를 져 버리지 못하고 물을 떠난 물고기가 며칠을 살지 못하는 것처럼 항상 방랑 끝엔 고향인 샤를르빌이나 어머니의 고향인 로쉬에 되돌아와야 했던 랭보. 파괴와 타락으로 이어지는 자아와의 이별을 무수히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현하지 못한 채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란 베를렌느의 말처럼, 바람을 벗삼아 19세에 붓을 꺾고 37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방랑의 포로로 진흙길을 걸어야 했다.
무기상인이 된 랭보, 세상과 절교하다
브뤼셀, 로테르담, 지브롤터, 나폴리, 아덴(아라비아 남단), 키프러스, 이집트, 그리고 하라에서 바르디란 무역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하라와 아덴을 자주 왕래하던 랭보, 1885년부터는 본격적인 무기 밀매상으로 변신 퇴폐와 방탕으로 물질 세계에 흠뻑 젖어 들어가게 된다. 그러던 1891년 아덴까지 들것으로 실려 온 랭보는 오래 전부터 앓아 오던 매독 증세가 오른쪽 무릎에 종양 암으로 나타나면서 죽음에 적신호를 스스로 깨닫게 되고 그의 가족에게: "난 뼈만 남았다: 날 보면 놀라게 될 것이다 " 라고 3월 15일 편지를 쓴다.
5월 9일 배를 타고 아덴을 떠나 13일 만인 22일 마르세이유에 도착, 25일 오른쪽 다리 절단 수술을 받게 되고 절망과 슬픔에 잠긴 랭보는 절규를 하게 된다. "우리 인생은 불행이다, 끝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라고 6월 23일 피력한다.
그가 죽기 전까지 병원과 샤를르빌을 왕래하던 탕아, 신동, 저항 시인 혹은 방랑아라 불리던 시인 랭보는 11월 10일 원점으로 돌아와 카톨릭의 성체배령과 함께 37세란 극히 짧은 나이에 그의 신화를 뒤로한 채 숨을 거두었다고 독실한 신자이며 가끔은 거짓말을 잘하던 그의 여동생 이자벨은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 성채배령을 받았다는 이자벨의 주장이나 파리 이슬람 사원의 교구장, 체이크 시 함자 부바쾨르의 주장처럼 랭보는 임종 당시 회교도로 개종했다는 억측이나 혹은 루이 아라공이 주장한 랭보의 공산주의는 모두가 랭보의 단면만을 스케치해 논 오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죽기 전 성채배령을 받을 수 없었다 "많은 욕설을 퍼부었고", 그뿐만 아니라 "간호원이나 그의 여동생들에게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욕설을 했다." 주장이 어쨌든 그의 작품과 그가 이끈 그의 삶은 모든 종교에 대해 혐오감뿐만 아니라 반발감의 시위였다;
1865년 그의 첫 성채배령 이후 카톨릭을 경멸했고 베를렌느는 그의 " 저주스런 언어들 때문에...," 몇몇 시를 그의 시집에서 제거하기도 했다.
랭보에게 있어 크리스트는 "영원한 에너지 도둑"에 불과 했고 그의 회교도 개종설은 아프리카 남단에서 장사할 때 사용하던 가명 아브도 랭보(Abdoh Rinbo), 즉 이슬람교에서 신을 섬기는 사람 아브달라 (Abdallah)의 추종자란 말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예수도, 알라도 마르크스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든 신화의 벽을 부수고 "브알라 ! 쎄 르 시에클 당페르!"(자! 지옥의 세기여!) 라고 외친 그에게서 어떤 신앙심을 찾는다는 것보다는 랭보가 끝없이 돌출구를 찾기 위해 신비 세계를 추종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참한 죽음은 예견된 그의 탕아적 기질에서 비롯되었다고 베를렌느의 친구였던 에드몽 르펠르티에는 그의 삶을 이렇게 회상했다.
"랭보의 인생은 그의 리듬과 같이 격동적이었고, 기분 나쁜 날의 그의 생각처럼 부조리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현대인의 형상이었다. 난 그런 그를 알고 있었다. 그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을 뿐만 아니라, 식탁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도 몰랐다. 그는 오랜 시간을 경멸스런 침묵으로 지내다가, 역설과 욕설을 퍼부어 댔다. 유머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인간이었다.
소심한 사람들은 그의 면전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시골 마을의 어린 셰익스피어 보다는 트로프만(그 당시에 악명 높던 죄수.)을 상기했다. 우리들은 그에 대한 점성술 결과를 바탕으로 그가 이십년 전에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진 않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그의 머리가 치욕의 바구니 속에 후광으로 장식된 영광과 함께 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1891년 11월 17일자 <레코 드 파리>에 기고한 에드몽 르펠르티에의 기사 내용 )
그러면 치욕과 영화의 후광을 한고 삶을 등진 랭보, 격동적 리듬과 부조리한 사고를 아무데서나 토해 내던 랭보,죽기 전 적어도 15년 전에 이미 붓을 팽개친 랭보, "오만이 잃어버린 자비보다 낫다" 라고 그의 시 {천재}에서 밝힌 랭보, 그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한 1871년에서의 1874년까지 약 3년간 지닌 그의 지고한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도덕관념은 그의 야망을 채우기엔 거추장스런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의 선생 이잠바르에게 보낸 서신에서 17세때 "모든 감각의 타락을 통해서 절대자에게 도달하겠다" 라고 이미 선포했던 랭보;- 탕아적이고 반항적인 천재의 기질, 예술인이 가진 끼를 누구보다도 밀도 있게 갖춘 시인이란 점을 감안 한다면 그가 지닌 천재적 오만은 보이는 세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통념적인 오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세계에서 도덕과는 무관하게 누릴 수 있는 자유인으로서 오만일 것이다. 마지막으론 그의 뮤티즘(함구무언)에 있다; 17세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 지은 랭보. 불과 3년여의 짧은 시간 속에 모든 것을 쏟아 버리고 침묵으로 답한 그의 행동은 그의 신화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불과 37년의 삶을 악동, 천재 시인, 선지자, 탕아 그리고 무기 밀매자로서 수많은 상징을 낳은 랭보. 스스로를 "난 타인이다" 라고 외친 랭보, 거센 방랑벽, 베를렌느와의 사랑과 갈등, 알코올과 마약에 몰입, 감옥 그리고 그의 삶을 앗아간 매독(최근에는 그의 병이 매독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다.)
"그녀를 다시 찾았다. 무얼 ?- 불멸. 그것은 태양과 함께 떠나 버린 바다다.
...........................................
수호 혼이여, 보잘것없는 밤, 그리고 불 바다를 이룬 대낮의, 고백 아래 사라집시다." ( 시 [불멸] 중에서 )
랭보는 불과 몇 년의 짧은 기간에 섬광 같은 문학을 완성한다. 그 후 아프리카와 중동의 여러 나라를 방랑하면서 상인으로 10년을 보낸다. 1891년에 37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 마르세유에서 사망한다. <취한 배>로 상징주의의 하늘에 혜성처럼 나타나 20세가 되기 전 문학과 완전히 절연한 천재 시인 랭보.
그가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랭보의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랭보 이후의 거의 모든 시인이 그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파블로 네루다, 뽈 엘뤼아르를 비롯해서 많은 시인들이 그의 자장권 내에 있는 시인들들이기 때문이다
1854 10월 20일 샤를르빌에서 태어남.
그의 아버지는 직업군인, 어머니는 농촌 출신의 절실한 가톨릭 신자로 엄격했다.
1855 6월 15일 여동생 비탈리 랭보가 태어남.
1860 6월1일 둘째 여동생 이자벨 랭보 출생
1869 「고아들의 선물(Les Etrennes des Orphelins)」을 <la Revue pour tous>지에 투고하여 1870년 1월에 발표 된다.
1870 8월 25일 파리 꼬뮌에 호응하여 가출 파리 북부역에서 체포. 9월 5일 감옥에서 이잠바르 교수의 신원보증으로 석방 Douai로 향함. 9월 25일 <La Libral de Bords>지에 글을 발표. 10월 2일 다시 가출 브뤼셀로 간다.
1871 2월 25일가출하여 파리로 감. 5월 15일 그의 친구 Paul Demeny에게 <견자(見者)의 편지>를 씀 그리고 그의 대표작 「취한 배」를 써 베를렌느에게 보내고 베를렌느는 랭보를 파리로 초대 한다. 그래서 파리로 가 그와 같이 살게 된다. 벨기에, 영국으로 간다.
1872 12월 런던으로 갔다가, 다음해에 다시 만시 만난다.
1873 7월 베를렌느가 그에게 권총을 쏜다. 10월 그는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발표한다.
1874 7월 고향으로 돌아간다
1880 아프리카로 떠나 무기밀매상이 된다
1891 11월 10일 마르세이유에서 사망한다
<출처>
http://windshoes.new21.org/literature/rimbaur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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