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綾紹(능소)의 아픈 사랑의 전설과 芙蓉(부용)의 숨결이 숨어 있는 천안(天

2012. 12. 31. 11:35알아두면 조은글


                                                  천안삼거리 야경 
 

綾紹(능소)의 아픈 사랑의 전설과 芙蓉(부용)의 숨결이 숨어 있는 천안(天安)


천안은 충청남도 북동부에 있는 시. 면적 636.57㎢. 인구 44만 5485(2002). 동쪽은 충청북도 진천군·청원군, 북쪽은 경기도 안성시·평택시, 남쪽은 충청남도 연기군·공주시, 서쪽은 충청남도 아산시와 접하고 있다.

우리는 천안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은 '천안삼거리'와 '흥타령'에 나오는 능수버들과 호두과자이다.

옛부터 삼남(三南:忠淸道, 全羅道, 慶尙道)의 요로였던 천안삼거리(천안시 삼룡동)는 민요 '興打令(흥타령)'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옛날 번성된 모습을 요즘은 찾을 수 없지만 전라도 고부 고을 선비 박현수와 기생 능소(綾紹)와의 애틋한 사랑이 얽힌 전설은 천안삼거리에 있는 능수버들의 유래를 잘 말해주고 있다. 요즘처럼 봄이 시작되면 어느 나무들 보다 먼저 녹색을 띠며 휘휘 타령춤이라도 추듯 가지를 늘이는 능수버들엔 능소와 관련 된 아픈 전설이 있다.


능소(綾紹)의 전설


옛날 홀아비 한 사람이 능소(綾紹)라는 어린 딸과 가난하게 살다 변방의 수자리로 뽑혀가게 되었다 한다. 그는 변방으로 가다 천안삼거리에 이르러 더 이상 어린 딸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주막에 딸을 맡겨 놓는다.

홀아비는 딸 능소(綾紹)에게 '이 나무에 잎이 피어나면 다시 너와 내가 이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라며 버드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은 뒤 홀로 떠났다.

어린 능소(綾紹)는 이곳에서 변방에 수자리로 떠난 아비를 기다리며 곱게 자라 기생이 되었는데 미모가 뛰어난데다 행실이 얌전해 그 이름이 인근에 모르는 이가 없이 널리 알려졌다. 이때 마침 과거를 보려 가던 전라도 선비 박현수라는 사람이 주막에 들렸다 능소(綾紹)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박현수는 그후 장원급제하여 삼남어사(三南御使)를 제수 받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이곳에서 능소(綾紹)와 다시 상봉한 기쁨을 못 이겨 '천안삼거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 하고 춤을 추며 기뻐했다고 한다. 변방의 군사로 나갔던 능소 아버지도 별 탈 없이 돌아와 곱게 성장한 딸을 다시 만나게 되니 경사가 아닐 수 없어 잔치가 벌어지니 그곳에서 흥타령이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능수버들과 수양버들

천안삼거리 공원엔 유달리 버드나무가 많다. 이렇게 버드나무가 많은 것은 능소와 헤어질 때 능소의 아비가 꽂았던 버드나무 지팡이가 자라서 퍼진 것이라 한다. 천안삼거리에 휘휘 가지를 느리고 있는 버드나무들은 이래서 능소버들 또는 능수버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가지가  아래로 운치 있게 늘어지는 큰 버드나무에는 능수버들과 수양버들이  있다. 봄에 새가지가 나올 때 적갈색인 것은 수양버들, 황록색인 것은 능수버들이다. 두 나무는 너무 비슷하여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구분이 어렵다.  어느 쪽인지 정확한 판별은 전문가의 몫이고 우리는 늘어지는 버들을 수양버들보다는 더 낭만적인 능수버들로 알고 있어도 크게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천안 삼거리 시비
 
 

天安途中(천안도중 천안 가는길) 강백년(姜栢年)


强策羸?作倦遊 겉마 참(馬+參)            

강책리참작권유

 

山店小扉臨斷岸

산점소비임단안


石溪懸棧截深流        

석계현잔절심류

白沙紅樹依依近

백사홍수의의근


金谷靑烟淡淡浮

금곡청연담담부


自笑詩囊能幾大       

자소시낭능기대


萬林風景欲全收       

만림풍경욕전수


가을 깊어 몸의 허로(虛勞)한 기운 조금 나은듯해

파리한말을 채찍질하여 힘들여 길나서 고보니

산주막 사립문은 언덕 끝을 향하여 있고,

계곡에 걸린 다리 깊은 물길을 가로 질렀네.

흰 모랫가의 홍수(紅樹)는 짙푸르게 다가오고

금곡(金谷)의 푸른 안개 맑고도 엷게 어리우도다.

홀로 웃어보나니, 내 시(詩)의 주머니 크게 할수 있다면

이 가득한 모든 풍경을 남김없이 담아보련만!

           

지은이; 강백년(姜栢年)(조선 선조36(1603)~숙종7(1681))

본관(本貫); 진주(晋州) 자호(自號);숙구(叔久), 설봉(雪峰), 한계(閑溪), 청월헌(聽月

軒)시호(諡號); 문정(文貞) 저서(著書); 한계만록(閑溪漫錄).설봉유고(雪峰遺稿)등이 있다


 

                   흥타령시비
 

天安 三巨里(천안 삼거리)1

원제는 '興打令(흥타령)'이다


에루화 좋다 흥 성화로구나


천안 삼거리 흥 능수 버들은 흥 제 멋에 겨워서 휘늘어졌구나

에루화 좋다 흥 성화로구나 흥


발그레한 저녁 노을 돋는 저 곳에 흥 넘어가는 낙일이 물에 비치네

에루화 좋다 흥 성화로구나 흥


은하 작교가 흥 꽉 무너졌으니 흥 건너갈 길이 망연이로구나

에루화 좋다 흥 성화로구나 흥


엊그제 자랑턴 흥 옥빈흥안 흥 모진 세파에 다 망가지노나

에루화 좋다 흥 성화로구나 흥


소리/안비취,이은주,묵계월· 반주/장고:장덕화,해금:김영재,피리:허용업,대금:이생강·녹음날짜/1983년2월21일

(1)옥빈흥안(玉?紅顔):아름다운 귀밑머리와 불그레한 얼굴, 곧 젊은이의 모습.


天安 三巨里(천안 삼거리)2


1. 천안삼거리 흥~

능수나 버~들은 흥~

제멋에겨워서~~

휘느러젓구나 흥~


2.이내사창에에~

달~이 밝아서 흥~

눈물로 에이니~

생각이그리워 흥~


3.현월은 앞산에 흥~

반~만 걸리고 흥~

은은한 물결은~

은파로도누나 흥~

후렴: 에루화 좋~다 흥~

성화로구나 흥~


興打令 天安三巨里라고도 한다. 신조(新調)와 구조(舊調)가 있으며 한말에 평양감사 조성하(趙成夏1845-1881)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원망한 데서 비롯된 노래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갑오개혁 이후 명창 보패(寶貝)가 불러 유명해졌으며 “천안삼거리 흥, 능수야 버들은 흥, 제 멋에 겨워서, 휘늘어졌구나 흥…”으로 시작되는 사설(辭說) 사이사이에 ‘흥 흥’하는 조흥(助興)이 끼었기 때문에 흥타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부른다.



비내리는 천안삼거리ㅡ박일남

비내리는 천안삼거리

찾아와서 내가 왜 우나

능수버들 추억 남겨진

그사람은 가고 없는데

제멋에 겨워 축늘어진

버들잎 같은 내 사랑

아~~옛시인이 남겨놓은

천안삼거리 무정도 하다

 

                               하숙생 시비
 

하숙생 - 최희준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천안 광덕사
 

金芙蓉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廣德寺(광덕사) 옆으로 200m즘 산을 향하여 들어가면 황진이(黃眞伊),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 3대명기(名妓) 중의 한 사람이라는, 부용상사곡(芙蓉想思曲)의 주인공 김부용(金芙蓉)의 시비가 서 있고, 거기에서 7-800m즘 산으로 올라간 곳에 부용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초라한 한기의 부용의 무덤이  있다.

성천(成川) 기생이었던 부용(芙蓉)은 얼굴도 아름다웠지만 시문에도 능해서 명성이 높았고, 그의 문집인 ‘부용집(芙蓉集)’에 150편의 시가 실려 전해 오고 있다.

정조 때 판서를 지낸 연천 김이양(淵泉 金履陽)이 77세일 때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인연을 맺었고 김이양이 죽은 후에 기생의 몸으로 어렵게 수절하다가 그의 묘 옆에 묻히고 싶어 이곳까지 찾아와 죽었지만 끝내 그 옆에는 묻히지 못하고  같은 산자락인 이곳에 누웠다는 애틋한 사연이 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절개를 기려 그의 묘를 ‘초당마마의 묘’라고 불러 온단다.

 


                                                     부용의 시비 (시비 그림을  보시는 느낌은?)
 

芙蓉堂

連花蓮葉覆紅欄  綺閣依然泛木蘭

연화연엽복홍란  기각의연범목란


潑潑游魚偏戱劇  有時跳上錄荷盤

발발유어편희극  유시도상녹하반


朝起芙蓉宿雨滋  乍晴高館燕差池

조기부용숙우자  사청고관연차지


灑落珠璣千萬顆  徵風傾瀉碧琉瑀

쇄락주기천만과  징풍경사벽류우


淸歌一曲海天?  十二紅爛泛月華 외상으로살사(貝+余)

청가일곡해천사  십이홍란범월화


雲母屛頭銀燭下  佳人步步出蓮花

운모병두은촉하  가인보보출연화





연꽃 연잎은 붉은 난간 뒤엎고

단청 좋은 정자에 놀잇배 떠있네

펄펄뛰는 고기는 연못이 놀이마당

때때로 연잎위로 솟구친다네.

새벽의 부용당은 간 밤비에 함빡 젖고

비개인 높은 집엔 제비가 오락가락

맑디맑은 이슬방울 구름인양 천만 알이

산들바람 불때마다 유리알로  떨어지네.

맑은 노래 한 곡 불러 하늘가에 닿는 듯

열두 난간 붉어 있고 달빛은 출렁인다.

운모병풍 퍼져 있는 은촛대 아래에선

미인이 사뿐사뿐 연꽃인양 나타나네.


哭淵泉老爺(곡연천노야;연천낭군곡함)


風流氣槪湖山主  經術文章宰相材 

풍류기개호산주  경술문장재상재


十五年來今日淚  峨洋一斷復誰裁

십오년래금일루  아양일단복수재


풍류 있고 기개 높아 충청지방 으뜸이요

경술 깊고 문장 빛나 재상의 재질이네

십오 년을 함께 살다 지금에야 눈물지니

갈라진 산과 바다 그 뉘가 다시 맺나


경산에서 신세 한탄 - 김부용


강나루 숲 우거져 임은 안 보여

그리는 정 흡사이 갈리는 기러기 때로다

계절은 신의 있어 갔다가 오는데

사람일은 애닯게도 만났다간 헤어지네

소낙비에 홍조는 물에 잠기고

새는 날아 푸른 산 위 구름이런가

이내 몸 짝지어 살 연분이 엷고

밤속의 종소리만 듣고 즐기네


봄은 가고 꽃이 지니 야위는 얼굴

다시금 다듬어도 꽃답지 않네

못내 잊어 이 상사(想思) 못 버린다 해도

상봉보다 상사가 오히려 나은 것을

만났던 옛 정보다 그리는 정이 더 좋아


먼저 세상을 떠난 늙은 남편 김이양(金履陽)을 그리는 시인 듯 하다.  차가운 바람을 가르고 미끄러운 산길을 오르면서, 황진이 무덤을 찾아서 시 한 수를 읊느라고 부임 길이 늦어져 파직까지 당했던 백호 임제(白湖 林悌)의 고사가 생각나서 고소를 금치 못했다.


조선시대의 시기(詩妓) 김부용(金芙蓉;생몰연대는 미상)고향은 평안도 성천 시명(詩名)은 운초(雲楚).초당마마, 별호는 추수 추낭이며 작품집 운초집(雲楚集) 작품으로는 憶家兄(억가형) 五江樓小集(오강루소집) 待黃岡老人(대황강노인) 등이 전하고 있다.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시대 3대 詩妓(시기)로 불리운다. 어려서 문장가인 숙부에게 어려서 글을 배워 16세에 성천군 백일장에서 시로 장원을 하였으며, 정조 때 성천 부사로 유명한 시인이며 판서 였던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1755∼1845)의 소실로 들어가 양처가 되었으며, 거문고를 타고 시문을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운초의 시는 일반적으로 기녀시가 갖고 있는 병적 요소가 적고, 표현이 밝으며 청량감이 있다고 한다.


김이양(金履陽)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되자 김이양(金履陽)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芙蓉)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고, 그런 다음 정식 부실로 삼았으나,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갔다.

생이별을 한 운초 부용(雲楚 芙蓉)은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멀리 있는 님을 생각하니 때로는 보고도 싶고, 때론 잊지나 않았나 의심도 하고, 때론 걷잡을 수 없는 이별의 슬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부용(芙蓉)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이 시가 부용(芙蓉)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일자이구(一字二句)로 시작하여 십팔자이구(十八字二句)로 끝나는 장편의 층시(層詩)다



당대의 시인 강참판은 일찍부터 부용(芙蓉)의 시를 감탄하여 오던지라 부용(芙蓉)을 직접 만나자 기쁨에 취해 밤늦도록 시로 화답하였다. 그러나 헤어질 때가 되자 그는 연모의 정이 솟구쳐 떠나가는 부용(芙蓉)을 배웅하며,


魂逐行人去

혼축행인거


身空獨依門

신공독의문


나의 혼은 그대를 좇아가고

빈 몸만 문에 기대어 섰오     라 읊었다.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는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솔직히 노래한 것이다.

그러자 부용도 화답하기를,


驢遲疑我重

려지의아중


添載一人魂

첨재일인혼


나귀 걸음 느리기에 내 몸 무거운가 했더니

남의 혼 하나를 함께 싣고 있었오.



그녀는 임종 전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

라고 하고 다시 못 올 불귀의 객이 되었다 고 한다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부용은 어느 날 꿈에서 그리운 님을 뵙고 다정한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시를 읊었는데


二十年前夢裡人  海天相對白頭新

이십년전몽리인  해천상대백두신 


從此無心傷歲暮  一樽談笑別生春   

종차무심상세모  일준담소별생춘


20년간 그리던 님을 이제사 꿈에 보니

서로간 상대하니 백발이 새로 났네

이제라도 헤어진다면 서러워 말고

잔 들어 담소하며 봄을 보내소서



춘풍(春風)


垂楊深處依開窓  小院無人長綠苔

수양심처의개창  소원무인장록태


簾外時聞風自起  機回錯認故人來

렴외시문풍자기  기회착인고인래


수양버들 창가에 기대어서니

임 없는 빈 집엔 푸르른 이끼

주렴 밖엔 봄바람 절로 이나니

임 오시나 속은 게 몇 번이던고


조선 시대의 명기 김부용(金芙蓉)의 대표작 춘풍(春風)이다



대황강노인(待黃岡老人;황강 노인을 기다리며)-김부용(金芙蓉)


前江夜雨漲虛沙  萬里同情一帆斜

전강야우창허사  만리동정일범사


遙思故園春已到  空懷無賴坐天涯

요사고원춘이도  공회무뢰좌천애


앞 강에 밤비 빈 모랫벌에 넘치고

만리 물길을 같은 마음로 돛단배 비껴간다

아득히 고향을 생각하니 봄은 벌써 와 있어

허전한 마음 무뢰하여 하늘 가에 앉아본다



회가형(懷家兄 오빠 생각)-김부용(金芙蓉)


月正當樓夜更寒  古園秋思在雲端

월정당루야갱한  고원추사재운단


蒼?水闊音書斷  直到天明獨倚欄 가갈대 가 

창가수활음서단  직도천명독의난


달은 바로 누대에 비치고 밤은 더욱 차가워

그리운 내 고향은 저 머리 구름 끝에 있도다

갈대는 푸르고 강물은 넓은데 고향소식 끊어져

홀로 난간에 기댄 채로 날은 벌써 밝아오는구나

 

                             능수버들과 석양
출처 : 재령이씨 인자 조 후손
글쓴이 : 밀양 (雲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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