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冠岳山의 그늘

2012. 12. 31. 11:32알아두면 조은글


 

冠岳山의 그늘에는


冠岳山(관악산)은 서울의 진산이요 경기의 진산이다. 우리 산을 말할 때 흰 바위가 드러나 있는 산을 악산이라 한다. 관악산도 대표적인 악산이다. 가뭄이 들 때 과천현감이 山神靈에게 비를 구하는 의식을 치렀던 산이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초겨울에 산 마당에서 굿을 올려 그 마당을 禱堂(도당)이라한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화가 서예가인 申緯(신위)는 자하산장도에 스스로 써서 熊雲(웅운) 객에게 부치다(自題紫霞山莊圖 寄熊雲客:자제자하산장도 기웅운객)는


冠岳來自俗離山, 萬馬奔騰三百里.

관악래자속리산, 만마분등삼백리.


一馬北首逝?  ?,   銀 ?玉鞭盤旋止.

일마북수서침침, 은등옥편반선지. 침:말달릴 침 등:등자 등 


관악산은 속리산에서부터 왔으니

일만 필 말이 삼백 리를 달려오다가

한 마리 말이 북쪽으로 기세 좋게 가서는

은 등자에 옥 채찍으로 느긋하게 서성이는 듯.

※銀? 玉鞭(은등 옥편) :관악산의 흰 바위



유서 깊은 三幕寺(삼막사)는 관악산줄기가 끝나는 삼성산(三聖山)에 있는데, 신라 文武王(문무왕)17년에 원효·의상·윤필 세 성인(聖人)이 막(幕)을 치고 수도했다는 일화가 절의 근본을 이룬다. 삼성산이란 이름도 그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성인들의 인품은 산 이름도 낳는구나 싶다. 그런가 하면 조선의 정조대왕이 이 삼막사의 종소리를 듣고, '-구름에 가리웠으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구나(雲藏古寺難藏聲)'하였다. 이에 수행하던 신하가, '빗줄기가 강 마을을 젖게 했으되 연기조차 적시지는 못했다(雨濕江村不濕煙)'고 대구하였다 한다.


三幕寺(삼막사)는 대웅전이 수려한 절로 양녕대군이 군주를 그리워한 곳이라는 戀主臺가 있다. 조선 말기 의병장 柳麟錫(유인석:1842-1915)은 관악산에 올라(登冠岳山)이란 시는


行??到白雲間, 坐見長空鳥影閒. 공:대이름공

행공주도백운간, 좌견장공조영한.


對誓中國連平海, 拱北王城冠衆山.

대서중국연평해, 공북왕성관중산.


五江舟楫春馮遠, 列郡人烟夕照還.

오강주즙춘풍원, 열군인연석조환.


俯仰乾坤知廣大, 胡爲庸碌作羞顔.

부앙건곤지광대, 호위용록작수안.


지팡이 짚고 흰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긴 하늘에 한가로운 새 그림자를 바라본다.

서쪽으론 중국과 평평한 바다로 이어지고

북쪽으로 서울을 공읍하여 뭇 산 가운데 으뜸이다.

한강의 다섯 강에는 배들이 봄바람에 멀리가고

주변 고을들 인가에선 석양에 밥 연기 피어난다.

천지를 부양하여 그 광대함을 알겠나니

어찌 용렬하게 부끄러운 얼굴을 지으랴.


관악산 왕후묘(王后墓)의 전설

관악산(冠岳山)의 산 중턱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것을 왕후묘(王后墓)라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傳說이 전해져 온다.

조선시대의 열 번째 임금인 연산군(燕山君)은 숲이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관악산(冠岳山)으로 사냥을 즐겨 다녔다.

하루는 임금이 내시 몇 사람을 데리고 사냥을 나섰는데, 막 산 기슭을 올라 냇물을 건너려 할 때였다. 연산군(燕山君)은 어찌된 일인지 내를 건널 생각은 않고 저쪽 편에 있는 빨래터만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기다리다가 지친 내시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전하, 어인 일로 내를 건너지 않으시옵니까?

갑자기 사냥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가셨도다.

일기가 화창하여 사냥하기가 더없이 좋은 날씨인데 어인 일로 사냥을 하고 싶지 않으시옵니까?

내시는 상감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연산군(燕山君)은 저쪽 빨래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들의 눈에는 저기서 빨래하는 처녀가 어떻게 보이느냐? 미인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박색으로 보이느냐? 어서 말해 보렷다.

전하, 비록 촌락의 처녀이오나 천하의 절색인 줄 아뢰오. 역시 과인(寡人)의 눈이 틀림없구나.

연산군(燕山君)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돌았다. 한편, 빨래하던 처녀는 웬 사냥꾼 대여섯 명이 자기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무엇인가 심상치가 않아,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하던 빨래를 주섬주섬 챙겨가지고 급히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마침 멀리서 그것을 본 연산군(燕山君)은 신하들에게, 저 처녀의 뒤를 따라가 집을 알아보고 오렷다. 과인(寡人)이 오늘밤은 호적한 촌락에서 아리따운 처녀와 더불어 회포를 풀어 보아야겠다하고, 처녀를 유심히 눈여겨보는 것이었다.

한편,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는 딸을 본 처녀의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얘야, 왜 빨래를 하다 말고 이렇게 급히 뛰어오느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어머니, 저기 웬 사냥꾼 서너 명이 제 뒤를 따라오고 있어요. 저것 보세요.

이 때 요란히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가 처녀의 집 앞에서 멈추며 사냥꾼 차림의 장정 서너 명이 처녀의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부인, 당신이 저 처녀의 모친 되시오 ?예 그러하옵니다만 어린 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나는 상감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오.

이 말에 여인은 깜짝 놀라며 얼굴에는 걱정스런 빛이 감돌았다.

예? 상감마마의 …

오늘 상감이 이 곳으로 사냥을 오셨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여기서 유숙하고 가실 것이니 방 하나 깨끗이 마련하도록 하오

상감께서 이렇게 누추한 저의 집에 머무르시다니 … 아무튼 상감의 영(令)이니 그대로 하도록 하시오. 너무나도 갑작스런 일에 여인은 놀랄 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아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저 처녀가 오늘밤 상감을 모실 것이니 깨끗이 목욕하고 몸단장을 하여 상감의 침소에 들여보내도록 하시오.

제 딸을요? 어린 것이 어떻게 상감을 모시오리까? 더구나 산중에서 철없이 자란 것이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지를지 모르옵니다. 어린 게 실수라도 하면 …

처녀의 어머니는 사나이들의 옷자락을 잡고 울며 사정했다.

그러나 사나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명이오, 어서 빨리 준비되도록 서둘러야 하오. 정말로 하늘이 알면 노할 일이었다.

두 모녀는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흐느끼며 어머니, 만약 이 사실을 만우가 알면 날 죽이고 자기도 죽을 거예요. 이 처녀는 아랫마을의 만우라는 사나이와 정혼을 했던 것이다.

이윽고 밤이 되자 단장한 처녀는 연산군(燕山君)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랫목에 누워서 처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연산군은,

이런 산골에 너 같은 천하제일의 여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도다. 어서 이리로 가까이 오너라.

하며, 처녀의 손을 잡아끌려고 할 때 처녀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울긴 왜 우느냐?

연산군은 호통을 쳤다. 이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던 처녀는 이 말에 살며시 머리를 들며 상감께 조용히 아뢰었다.

상감마마, 소녀는 이미 백년가약을 약속한 자가 있는 몸이옵니다. 약혼자가 아니라 지아비가 있다 해도 괜찮다. 나는 만인의 어버이요, 만인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거역할 수 없도다. 그러니 어서 자리에 들라. 어서

한편, 처녀의 약혼자 만우는 뒤늦게야 이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달려와서 처녀의 집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문 앞에 지켜선 병정들이 떠밀며 막아서는 바람에 도저히 처녀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처녀와 연산군이 단꿈에 취해 있는 방을 보기 위해서 그 방이 보이는 바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고 통곡을 했다.

제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지만, 남의 아녀자를 빼앗다니 에잇, 정말로 더러운 놈의 세상이다. 국왕이면 남의 계집도 마음대로 한단 말이냐

정말로 원통한 일이었다. 만우는 터져 나오려는 울분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당장에 임금에게로 달려들고픈 심정이었다.

그러한 일이 있은 뒤 슬픈 상처를 안은 채 처녀와 만우는 혼인을 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은 그 뒤로도 이따금씩 관악산(冠岳山)으로 사냥을 나왔다가는 처녀를 만나고서 환궁을 하곤 하였다.

이러한 일로 처녀는 남편을 마주 대할 때마다 가슴깊이 자책감을 느꼈다.

나는 무슨 낯으로 오늘밤도 서방님을 대하나?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자 그리고는 뒷산 오동나무에 목을 매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만우는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만우는 아내의 시체를 바위 밑에 묻고는 가슴 아픈 상처를 안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뒤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연산군(燕山君)이 처녀의 집에 들러 그 이야기를 듣고서 괘씸한 것들, 아니 내가 저희들 꾀에 속아 넘어갈 줄 아느냐? 그래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는 자기들끼리 멀리 가서 살려고? 고약한 놈들

그는 화가 치밀어 신하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저 무덤을 파서 시체를 확인해 봐라

그런데 이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임금의 명(命)에 따라 병정들이 막 무덤을 파려 할 때 임금을 부르는 처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상감마마, 상감마마 …

아니 처녀의 목소리가 …

연산군(燕山君)은 깜짝 놀랐다. 상감마마, 이부종사를 한 죄 많은 소녀, 죽음으로써 지아비에게 사죄함을 얻으려고 이렇게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마마는 어찌하여 소녀를 괴롭게 하시옵니까? 원하옵건대 차후로는 소녀를 괴롭히지 마시옵소서.

처녀의 목소리는 슬프게 멀리멀리 퍼지더니 차츰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놀란 연산군(燕山君)은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쳤다.


너희들은 그 처녀의 혼을 못 보았느냐?

못 보았사옵니다. 상감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여봐라! 그 무덤을 다시 전과 같이 덮고 곱게 다듬어서 비석을 세운 다음 왕후묘(王后墓)라 부르도록 하여라.

그러한 일이 있은 뒤, 연산군(燕山君)이 폐위되자 왕후묘(王后墓)는 임자 없는 무덤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자료(경기도『전설지(傳說誌)』)




관악산(冠岳山) 정완영


향가새 인사


내가 단장(短杖)을 이끌면

한 시간 이십 분 길


단장(短杖)이 날 이끌면

두 시간의 길이란다.


잘 잤니!

향가새보고도

인사하는 내 산책 길.



아내의 노을


산 아래 살자하니

그도 산을 닮는 걸까


오늘은 약수터에

물 길으러 간 아내가


흡사 그

원추리꽃 같은

산 노을을 입고 왔다.



염주대(念珠臺) 구름


산 너머 또 산 너머

그 너머를 난 몰라도


하루 해 고쳐 앉아

염주대(念珠臺)를 바라보니


늘 보던

구름인데도

저리 눈이 부시다.

 

연주대(戀主臺)


京畿道 果川市 중앙동에 있는 관악산(冠岳山) 연주봉(戀主峯:629m) 절벽 위의 있는 新羅時代의 절로서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보광사에서 소유하고 있다. 관악산(冠岳山) 최고봉인 연주봉(戀主峯)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절벽이 솟아 있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약간의 석축을 쌓아 올린 곳에 있다. 新羅時代 677년(문무왕 17)에 의상(義湘)이 관악사(冠岳寺:지금의 연주암) 창건과 함께 세워 의상대(義湘臺)라 이름 붙이고, 이곳에서 좌선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후 조선 1392년(태조 1)에 중건하였다. 연주대란 이름은 조선 초에 개칭한 것으로, 태조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뒤 고려의 충신 높은 벼랑위에 자리한 연주대(戀主臺)인 강득룡(康得龍)·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의 유신(遺臣)들이 이곳에서 멀리 송경(松京:개경) 쪽을 바라보며 두문동(杜門洞)에서 순국한 72인의 충신열사와 망국 고려를 연모하며 통탄하였다 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라고 전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전설도 전한다. 태종이 셋째 왕자 충녕대군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눈치 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왕궁을 빠져 나와 발길 닿는 대로 방랑의 길을 떠나 이산 저산을 헤매다가 며칠 만에 문득 발을 멈춘 곳이 관악산(冠岳山)이었다.



冠岳山 三幕寺(관악산 삼막사) 민속으로 본 性이야기

자료[세계일보 2004-06-08]

 

                              남근석과 여근석

 

삼막사(三幕寺)는 신라시대 유명한 승려인 원효와 의상, 윤필 등이 창건한 절이다. 세 사람이 이 곳에서 막(幕)을 치고 수도를 했기 때문에 삼막사라고 하는 유래담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듯하다. 또 다른 전설에는 원래 이곳 주위에 일막사, 이막사, 삼막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 막사와 이 막사는 폐사가 되어 터만 남고, 삼막사만이 명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삼막사가 주목을 받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 사찰의 칠보전에 모셔진 磨崖三尊佛(마애삼존불)의 앞에 세워져 있는 男根石(남근석)과 女根石(여근석) 때문이다. 이처럼 기자신앙의 대상물로서 산신각이나 칠성각에 해당되는 칠보전과 남·여근석이 한곳에 모여 있는 사례는 三幕寺(삼막사)가 유일하다. 이런 지형적 특징 때문인지 몰라도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기도 처로서 전남 돌산의 向日庵(향알암)과 함께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이 남·여근 석은 1983년에 경기도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어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三幕寺(삼막사)의 남·여근석에 관련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금실이 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자식이 없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시어머니는 씨받이라도 들이라 난리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꿈에 웬 할머니가 나타났다. 그 할머니는 삼막사의 남·여근석 을 문지르면서 소원을 빌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하였다. 부부는 그 바위를 찾아 근처에 움막을 짓고 지극 정성을 드렸다. 하늘이 감응했는지 과연 아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자손이 번창하고 잘 살았다는 소문에 자식을 낳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렸으며, 지금도 사월 초파일과 칠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삼층석탑 앞에 놓여 있는 무수한 동자상도 삼막사라는 사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석탑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칠보전 안에 모셔진 마애불의 코가 완전히 납작해질 정도로 갉아낸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왜 코를 그렇게 갉아냈을까. 이것은 장승과 같이 나무도 아닌 화강암이기 때문에 코를 갉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를 갉아낸 것은 자식을 얻고자 하는 여인네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코를 갉아낸 돌가루를 물에 삶아 먹으면 바위가 지닌 뛰어난 생산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사정은 줄다리기에 사용되는 수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창녕 영산의 줄다리기는 지름이 50㎝ 이상이 될 정도로 굵다. 그런데 이곳의 줄은 수줄과 암줄을 비녀목이라는 굵은 막대기로 연결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수줄의 머리통이 바로 남근 모습을 띠고 있다. 그래서 줄다리기가 끝나면 사람들은 수줄의 머리를 베어간다. 이것을 지붕에 올려놓으면 잡귀가 근접하지 못한다고 믿는다. 또 아기를 낳지 못한 사람은 이 줄로 삶아 먹으면 잉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삼막사를 찾을 때마다 묘한 인연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항상 여근석 가운데 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누군가 물을 뿌려놓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이것은 전날 비가 내렸기 때문에 고인 물이다. 너무나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관심을 끌었던 것은 물이 조금 고인 여근석 안에 누군가 백 원짜리 동전을 넣어 놓았다는 점이다.


동전이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을 보면 한 사람의 소행은 아니다. 누군가 치성을 드리고는 그 안에 백 원을 넣은 것임이 분명하다. 삼막사의 여근석에는 백원짜리와 같은 동전을 문지르는 특징이 있다. 10년 전에 찾았을 때도 백 원짜리 동전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던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래서 치성이 끝나고 그 돈을 던진 듯하다. 아들을 낳기 바라는 마음에서 그 안에 돈을 넣은 것은 마치 음양의 교합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료 <김종대·문학박사·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관악산(冠岳山)은 태고 이래로 과천시(果川市)의 변천 모습을 묵묵히 지켜온 명산(名山)이다

관악산(冠岳山)은 또 서울의 조산(朝山)이다. 내룡은 경상도 태백산맥으로 마이산(馬耳山)에서 갈라져 충청도 속리산으로 중조(中祖)가 되어 역으로 치달아 한강을 지계선(地界線)으로 과천 벌판에 우뚝 솟아 삼각산과 마주하고 있다.

그 형상이 마치 관(冠)처럼 뾰족하다 하여 관악(冠岳)이라 이름한 것이다.

관악산은 역사적으로 풍수지리학상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쳐다보기조차 꺼려했던 산이었다.

조선 초기에 왕궁터[宮基]를 정하는 데, 관악산을 정남(正南)으로 하면 궁성(宮城)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않다는 무학(無學)의 주장과 남면(南面)에 한강이 있어 무방하다는 정도전(鄭道傳)의 주장이 양립되었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아무튼 관악산이 불산(火山)인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불의 산인 관악산과 삼성산의 불기(火氣)를 끊는다는 풍수설에서 서울 숭례문(崇禮門:현 남대문) 바로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연못 뿐만 아니라 모든 성문의 액명(額銘)이 가로로 되어 있음에 비하여 숭례문의 액명이 세로로 되어 있음도 이 불의 산에서 옮겨 붙을 서울의 화기를 막는다는 뜻에서였다. 예(禮)는 오행(五行)으로 따져 화(火)에 해당하고, 오방(五方)으로 따져서는 남(南)에 해당한다.

숭(崇)은 불꽃이 타오를 상형문자이기에 숭례(崇禮)는 세로로 붙여야 불이 타오를 수 있고, 또 타오르는 불로 불산(火山)에서 옮겨 붙을 불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알았다.

대원군 집정시에 경복궁을 재건할 때 관악의 화기(火氣)를 극복하기 위하여 물짐승인 해태 조각상을 궁전에 안치했다고 하며, 또 관악산 꼭대기에다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龍)을 그 우물에다 넣어서 화기를 진압했는가 하면, 관악의 주봉(主峰)인 연주봉(戀主峰)에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묻은 것도 그 때문이다.

풍수는 믿을 만한 게 못된다. 그렇지만 풍수를 믿음으로써 빚어진 구체적인 형상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실례로 서울 양반촌인 북촌(北村)에서는 이 관악산과 마주보는 집에서 자라난 딸과는 혼인을 거절한 실례가 있는가 하면, 주민들이 관악산과 마주 보이는 곳을 피한다든지, 또는 친정으로 가 아이를 낳는 풍습까지 있었는데, 이는 불의 문화적 해석으로 열정적이고 반체적이기에 요망스럽고, 음탕하여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할 수 없다는 풍수의 숙명 때문이었다.

(『傳說誌』, 경기도)



명칭의 유래


한남정맥이 수원 光敎山(광교산 582m)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오른 산이 冠岳山(관악산)이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冠岳山(관악산)은 옛 지도에는 ‘관악’으로 많이 나온다. 악(岳) 자체가 산(山)을 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 뒤에 다시 ‘산’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雲岳(운악)·北岳(북악)·稚岳(치악) 등이 모두 그와 같은 예들이다. 이렇듯 관악의 산 이름은 그 형상이 마치 관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처음의 산 이름은 주위 산세에서 으뜸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강감찬(姜邯贊 948∼1031)과 관악산에 얽힌 전설


관악산 북쪽 기슭 낙성대(落星臺)에서 출생한 고려의 강감찬(姜邯贊)과 관련한 전설에 해마다 여름철에 하늘에 벼락이 못마땅하여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그만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이 산의 칡을 모두 뿌리째 뽑혀져 없다는 전설도 있고, 그때 체구는 작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에 오르는 곳마다 발자국이 깊게 패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들을 뒷받침해 주듯 冠岳山(관악산)에서는 여느 산보다 칡덩굴을 별로 볼 수 없고, 곳곳의 바위에 아기 발자국 같은 타원형 발자국들이다 라고 한다.



강감찬 금와훤(姜邯贊 禁蛙喧) 전설


고려 때의 명장 강감찬(姜邯贊)이 경주 도호사로 있을 때,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너무 소란스럽게 울어 강감찬이 돌에다 명령서(命令書)를 써 개구리 왕에게 보냈더니, 그 이후부터는 경주성 내의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는 전설이다.


강감찬 출생의(姜邯贊 出生) 전설


어느 날 밤 어떤 사신이 길을 가다가 큰 별이 어느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찾아갔더니 그 집 부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그가 곧 강감찬이었으며, 후에 중국 송(宋)나라 사신이 와서 만나보고는 강감찬(姜邯贊)이 문곡성(文曲星)의 화신임을 확인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낙성대(落星臺) 설화로서 《世宗實錄(세종실록》과 《東國與地勝覽(東國與地勝覽)》에 실려 있다. 대부분의 口傳說話(구전설화)는 좋은 태몽을 꾼 강감찬(姜邯贊)의 아버지가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한 끝에 여우 여인과 관계를 맺고 낳은 아들이 강감찬(姜邯贊)이라고 한다.

성장시 일화 중 대표적인 것은 곰보가 된 것과 귀신을 물리친 일이다. 강감찬(姜邯贊)은 원래 얼굴이 잘생겼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 없다고 하여, ??神(마마신,天然痘천연두)을 불러 얼굴을 얽게 하여 추남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혼인식에 참석하여, 사람으로 둔갑해서 신랑행세를 하는 귀신을 물리침으로써 그의 비범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감찬(姜邯贊)이 한성판윤으로 부임했을 때, 삼각산에 사는 늙은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여 많은 사람을 해친다는 말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 크게 꾸짖고는 다른 산에 가서 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밖에도 그의 이인적인 여러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런 설화들은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도가가 우리 생활에 깊숙이 숨쉬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풍수로 본 冠岳山(관악산)


冠岳山은 서울 경복궁의 조산 또는 외안산(外案山)이 되는데,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火山)이 된다. 따라서 이 산이 바라보는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어 그 불을 누른다는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파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옆 양쪽에 불을 막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태조는 화환(火患)을 막기 위해 무학의 말에 따라 이 산에 연주(戀主)·원각(圓覺) 두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서울의 숭례문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과 관악산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게 해서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한 것 등은 불기운을 막기 위한 풍수적 의미라고도 한다. 관악산의 한 봉우리인 호암산 능선에는 통일신라 때 판 것으로 추측되는 산상 우물(한우물)도 있는데, 이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관악산은 풍수로 보아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왕도남방지화산)’이다. 조선이 개국되자 왕궁터를 정하는데 관악산을 정면으로 하면 궁성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못하다는 무학과, 남쪽에 한강이 있어 무방하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양립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불산’이라는 데는 같은 의견이다. 그래서 불의 산인 관악산의 불기운을 끊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숭례문(崇禮門) 바로 앞(남대문로 5가 1번지로 추정됨)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연못뿐만 아니라 서울의 모든 성문의 현판이 가로인데 반하여 숭례문崇禮門)은 세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불의 산에서 옮겨 붙을 서울의 화재를 막기 위함이었다. ‘예(禮)’는 오행의 ‘화(火)’가 되고, 또 오방(五方)으로 보면 ‘남(南)’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崇’은 불꽃이 타오를 상형문자이기에 ‘崇禮(숭례)’는 세로로 세워야 불이 타오를 수 있고, 또 타오르는 불을 막아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처 : 재령이씨 인자 조 후손
글쓴이 : 운봉(雲峰:밀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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