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1:23ㆍ한시
왈소군의 묘
비운의 삶을 산 궁녀 王昭君(왕소군 ?~?)
35살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품에 차례로 안겼던 여인 세 남자를 떠나보낸 비운의 여인-왕소군(王昭君)을 이태백은 昭君出塞(소군출새)에서
昭君拂玉鞍 上馬涕紅頰
소군불옥안 상마체홍협
今日漢宮人 明朝胡地妾
금일한궁인 명조호지첩
소군이 옥안장을 떨치며
말을 타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흘러
오늘날 한나라 궁녀가
내일 아침 오랑캐의 첩이 되는도다.
왕소군(王昭君)의 이름은 장(? ·檣 ·牆). 자 소군. 왕명군, 명비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태어나 서시(西施), 초선(貂嬋),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서한(西漢)시대 남군(南郡) 자귀( 지금의 호북성 자귀) 출신으로 이름은 장이고 자가 소군(昭君)이다. 자귀는 장강삼협에 속하는 곳으로 전국시기의 유명한 시인 굴원(屈原)의 고향이기도 하다.
왕소군(王昭君)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나 말 위에서 비파를 뜯으며 원한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때 금(琴)을 연주하며 부른 노래의 내용이 '왕소군원가(王昭君怨歌)'라는 가사로 전해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유명해졌으며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고 하여 왕소군(王昭君)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왕소군(王昭君)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 후한서(後漢書) 남흉노전(南匈奴傳)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王昭君)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소설로는 동한(東漢) 채옹(蔡邕)의 금조(琴操), 진인(晋人)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 대만 작가 고양(高陽)의 왕소군(王昭君), 희곡으로는 원대의 저명한 극작가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秋), 곽말약(郭沫若)의 역사극 왕소군(王昭君), 조우(曹? )의 역사극 왕소군(王昭君) 등이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왕소군(王昭君)의 형상은 더욱 풍부함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니, 즉 문학속의 왕소군(王昭君)은 역사속의 왕소군(王昭君)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王昭君)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王昭君)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王昭君)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王昭君)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王昭君)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王昭君)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왕소군(王昭君)은 궁중의 잡다한 일을 맡으면서도, 많이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독서와 서예, 가무(歌舞), 그림 등을 익히면서 항상 내실을 다지고 자신을 가꾸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방에서 홀로 고독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꽃다운 나이를 이렇게 흘려보내고 나면, 언제나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지, 언제나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낙엽이 지고 풀벌레 슬피 우는 가을이 찾아와 차가운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면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없는 그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비파를 타면서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 유명한 <오경애원곡(五更哀怨曲)>에는 바로 그녀의 이러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왕소군(王昭君)이 이렇게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마침내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 찾아왔다.
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58~ BC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던 것이다. 당시 흉노에는 내란이 발생하여 호한야의 형 질지골도(支骨都)가 북흉노를 세워 남흉노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때 한나라의 서역도호(西域都護) 감연수(甘延壽)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질지골도를 죽이자, 호한야는 황급히 원제에게 글을 올려 알현을 청하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呼韓邪)를 환대하자, 호한야(呼韓邪)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呼韓邪)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呼韓邪)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呼韓邪)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呼韓邪)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王昭君)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리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王昭君)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王昭君)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毛延壽)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王昭君)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王昭君)과 못 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王昭君)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王昭君)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소군(昭君)에는 한나라 왕실을 빛내고 황제를 대신하여 흉노를 빛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왕소군(王昭君)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王昭君)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 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王昭君)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 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王昭君)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王昭君)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왕소군(王昭君)은 결국 긴 여로에 시달려 병이 나고 말았다.
며칠을 쉬면서 요양을 한 후 안문관(雁門關)을 나서자 흉노의 여러 장수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 보이는 건 평평한 사막과 부옇게 날리는 먼지,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로 뛰노는 소와 양떼들뿐이었다.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호한야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천막마다 등롱을 달고 아름답게 장식을 하여 왕소군(王昭君)과 혼례를 치렀다. 그리고는 흉노족에게 안녕과 평화를 가져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왕소군(王昭君)을 영호알씨(寧胡閼氏)에 봉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슬픈 피리소리와, 달리는 준마, 비릿한 음식, 이역의 풍경 등은 왕소군(王昭君)에게 고국의 그리움만 더해 줄 뿐이었다. 왕소군(王昭君)이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지 3개월 후, 한 원제는 왕소군(王昭君)에 대한 그리움을 못 잊어 신음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년 후, 즉 한 성제(成帝) 건시(建始) 원년, 왕소군은 호한야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 하였다. 이도지아사는 후에 일축왕(日逐王)이 되었다. 다시 1년이 지난 후 노쇠해진 호한야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왕소군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이미 3년간 흉노땅에서 생활한 왕소군은 점점 흉노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대알씨(大閼氏)의 장자 복주루(復株累)가 선우의 직위를 계승하자, 흉노의 예법에 따라 왕소군은 복주루의 아내가 되었다. 젊은 선우 복주루는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 왕소군은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장녀의 이름은 운(雲)이고, 차녀의 이름은 당(當)인데, 후에 이들은 모두 흉노의 귀족에게 시집갔다.
한 성제(成帝) 홍가(鴻嘉) 원년, 복주루는 왕소군과 11년의 부부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왕소군의 나이 35세였다. 왕소군의 형제는 후작(侯爵)에 봉해졌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칙명을 받들어 흉노의 사신으로 가서 왕소군을 만났다. 왕소군의 두 딸도 장안으로 와서 입궐하여 태황태후(太皇太后)를 모신 적이 있다. 이 태황태후는 바로 원제의 황후였다. 태황태후에게는 왕망(王莽)이라는 조카가 있었는데, 후에 왕망은 서한 정권을 찬탈하고 신(新)나라를 세웠다. 이에 흉노의 선우는 유씨(劉氏)의 후손이 아닌 왕망을 중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다시 중국의 변방을 자주 침범함으로써 전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립된 화친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강제로 시집을 갔고, 그가 죽자 흉노의 전통에 따라 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그곳에서 한없는 원망과 절망 속에 쓸쓸히 생을 마쳤다고 한다.
비운의 삶을 산 그녀의 역사적이고도 드라마틱한 슬픈 이야기는 오랑캐들을 달래기 위한 화친정책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비운의 미녀, 왕소군(王昭君)의 묘
왕소군의 묘가 있는 내몽골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의 ‘칭종(靑塚)’에는 왕소군과 호한사단우가 나란히 함께 말을 타고 있는 동상이 서 있다
청총(靑塚)은 왕소군의 무덤으로 백초(白草)가 자라는 호지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중국의 무덤처럼 푸른 풀이 났다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렇게 유명한 왕소군의 묘는 사실 어이없게도 말만 무덤이지, 그 규모가 너무 커 작은 동산만 하고 무덤 위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어 정말 그의 무덤인가 하는 의심이 생길 정도다.
또 가을이 되어 모든 풀들이 누렇게 변해도 이 무덤의 풀만은 파랗게 그대로 있어서 '청총(靑塚)'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오랫동안 분쟁을 반복하고 있던 흉노와 한(漢)나라는 왕소군이 흉노에게 시집간 후 60여 년 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그녀를 양국 화목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역사에서는 왕소군을 명비(明妃)라고도 칭하는데, 그 이유는 서진(西晋) 시기에 사마소(司馬昭)의 휘를 피하여 소군(昭君)을 명군(明君)으로 개칭했다가 후에 점점 "명비"라고 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아들 축일왕 계열은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진 후 동한(東漢)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두헌(竇憲)의 추격을 피하여 모두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계속하여 총령(蔥嶺)을 넘어 유럽으로 들어가 고딕인(Gothic)을 점령하고 그것을 토대로 로마제국의 붕괴를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유럽대륙에 강대한 흉노제국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후세의 헝가리이다
王昭君에 대한 시(詩)
昭君怨(소군원) 李白 1
漢家秦地月 流影照明妃
한가진지월 유영조명비
一上玉關道 天涯去不歸
일상옥관도 천애거불귀
漢月還從東海出 明妃西嫁無來日
한월환종동해출 명비서가무내일
燕地長寒雪作花 娥眉憔悴沒胡沙
연지장한설작화 아미초췌몰호사
生乏黃金枉畵工 死遺靑塚使人嗟
생핍황금왕화공 사유청총사인차
한나라 시절 진나라 땅에 떠 있던 달은
그림자를 내려 명비를 비추네.
한 번 옥관도에 올라
하늘가로 떠나간 후 다시 못 오네.
한나라 달은 돌아와 동해를 따라 오르건만
명비는 서쪽으로 시집가고 돌아올 날이 기약 없네.
연나라 땅의 긴 겨울에 눈이 꽃을 만들었으니
고운 아미는 초췌해져 오랑캐 모래에 쓰러졌도다.
살아서 황금이 없어서 화공을 굽히었으니
죽어서 청총을 남겨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케 하네.
昭君怨(소군원) 동방규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자연의대완 비시위요신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자연히 옷 띠가 느슨해지니
이는 허리 몸매 위함이 아니었도다.
昭君墓(소군묘) 상건(常建:708-765)
漢宮豈不死 異域傷獨沒
한궁기불사 이역상독몰
萬里馱黃金 娥眉爲枯骨
만리타황금 아미위고골
廻車夜黜塞 立馬皆不發
회거야출새 입마개불발
共恨丹靑人 墳上哭明月
공한단청인 분상곡명월
어찌하여 한나라 궁궐에서 죽지 못하고
다른 나라 땅에서 홀로 죽음을 슬퍼하노라.
만리 길에 황금을 실어 보냈지만
고운 모습은 바른 뼈가 되었네.
밤에 수레를 돌려 변방을 나오려 하지만,
모두 말을 세우고 떠나지 못하며,
그림 그린이를 원망하며
밝은 달 아래에서 무덤에 곡을 하노라.
* 이밖에도 송나라 왕안석의 [명비곡(明妃曲)]과 구양수의 [명비곡(明妃曲)] 등이 있다.
* 明妃 :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明妃曲1 왕안석(王安石)
明妃初出漢宮時 淚濕春風빈脚垂
명비초출한궁시 누습춘풍빈각수
低回顧影無顔色 尙得君王不自持
저회고영무안색 상득군왕불자지
歸來却怪丹靑手 入眼平生未曾有
귀래각괴단청수 입안평생미증유
意態由來畵不成 當時枉殺毛延壽
의태유래화불성 당시왕살모연수
一去心知更不歸 可憐著盡漢宮衣
일거심지갱불귀 가련착진한궁의
寄聲欲問塞南事 只有年年鴻雁飛
기성욕문새남사 지유년년홍안비
佳人萬里傳消息 好在氈城莫相憶
가인만리전소식 호재전성막상억
君不見咫尺長門閉阿嬌 人生失意無南北
군불견지척장문폐아교 인생실의무남북
명비가 처음으로 한나라 궁궐을 나올 때
눈물은 봄바람에 젖고 귀밑머리는 밑으로 드리웠다.
고개 떨어뜨려 그림자 보고 안색이 형편없어
오히려 군왕이 자제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도다.
돌아와서 도리어 그림 그린 사람 괴이하게 여겼나니
평소에 눈에 듦이 어찌 일찍 없었을까.
의태는 원래 그림으로 이루어짐이 아니거늘
당시 모연수를 죽임이 잘못이었도다.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마음으로 알아
가련하도다. 한나라 궁궐 옷을 끝까지 입었구나.
소리 전하여 변방 남쪽(장안) 일을 물으려 해도
단지 해마다 날아가는 기러기뿐이로다.
가인이 만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기를
성안에 잘 있으니 서로 생각 말자고.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지척인 장문궁에 아교를 유폐한 것을
인생 뜻을 잃음이 남북이 따로 없도다.
明妃曲(王昭君) 명비곡 <其二> 王安石 宋
明妃初嫁 與胡兒
명비초가 여호아
氈車百輛 皆胡姬
전차백량 개호희
含情欲語 獨無處
함정욕어 독무처
傳與琵琶 心自知
전여비파 심자지
黃金桿撥 春風手
황금간발 춘풍수
彈看飛鴻 勸胡酒
탄간비홍 권호주
漢宮侍女 暗垂淚
한궁시녀 암수루
沙上行人 ?回首
사상행인 각회수
漢恩自淺 胡恩深
한은자천 호은심
人生樂在 相知心
인생악재 상지심
可憐?? 已蕪沒
가련청총 이무몰
?有哀弦 留至今
상유애현 류지금
왕소군이 오랑캐에 시집갈 때
백여 대의 털가죽 수레는 모두 북방의 여인뿐
하고 싶은 말 있어도 호소할 길 없어
비파 줄에 그 마음 달래본다
황금간발 섬섬옥수
틈틈이 바라보는 날 기러기 호지(胡地)의 술로 달래는 시름
한궁에서 따라온 시녀들 돌아서서 눈물 흘린다.
사막에서 돌아온 사람 회고 하는 생각들
한나라 은혜 보잘 것 없고 호지의 은택은 깊구나.
인생의 즐거움 이란 서로 마음 알아 주는것.
가련타 청총(왕소군묘)엔 풀 한포기 없고
애끓는 비파소리 지금도 들리는 듯 하구나.
서기 766년 시인 두보(杜甫)는 王昭君의 고향이었던 흥산현 일대를 둘러보며 감회에 젖어 다음의 시를 남기고 있다.
詠懷古迹(영회고적) 두보(杜甫)
群山萬壑赴荊門 生長明妃尙有村
군산만학부형문 생장명비상유촌
一去紫台連朔漠 獨留靑塚向黃婚
일거자대연삭막 독유청총향황혼
畵圖省識春風面 環?空歸夜月魂
화도성식춘풍면 환패공귀야월혼
千載琵琶作胡語 分明怨恨曲中論
천재비파작호어 분명원한곡중론
수많은 산과 골짜기는 부단없이 이어져 형문에 까지 이르렀는데
자귀현엔 소군이 생장한 마을이 여전히 남아있구나
한나라 궁정을 이별하고 사막을 지나 흉노로 가게 되니
지금은 푸른 무덤만 남아 후세인들을 조문케 하는구나
화공이 그의 모습을 대충 그려내니
달 밝은 밤에 원혼이 되어 그 한이 끊이질 않는다
흉노의 언어로 된 비파의 곡조가 지금껏 내려오는데
소군의 원한이 노래 속에 숨어있는 게 분명하도다.
형문산(荊門山)은 지금의 호북성 형문현에 있는 산으로 산 형세가 문과 같다고 하며
시 중에 나오는 명비, 춘풍면, 환패 이 모두가 소군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왕소군의 묘는 청총(靑塚)이라고 불려지는데 지금의 수원성 귀수현 남쪽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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