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 /고서화 1

2012. 9. 5. 17:16詩書藝畵鑑賞

당인 궁악도(唐人 宮樂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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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 618-907)    작가미상
당인 궁악도(唐人 宮樂圖)

족자(軸), 비단에 채색, 48.7 x 69.5 cm

 
이 그림은 궁중의 빈비(嬪妃) 열 명이 커다란 사각형 탁자 주위에 둘러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차(茶)를 마시거나 돌아가며 시를 읊거나 독특한 동작을 취하도록 하는 유희를 통해 흥겹게 술을 마시고 있으며, 가운데 위치한 네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여 흥을 돋우고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피리(篳篥), 현악기인 비파(琵琶), 고쟁(古箏), 그리고 관악기인 생(笙) 등의 악기를 각각 연주하고 있다. 왼쪽에 서 있는 2명의 시녀 중, 한 사람은 가볍게 박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어 주고 있다. 화면 속 인물들의 도취된 표정이나 탁자 밑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강아지의 편안한 자세를 볼 때 이 자리에서 무척 아름답고 우아한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화가의 낙관이 없으며, 본래 첨부된 쪽지에는 원나라(1279-1368) 사람의 궁중악사, 즉 ‘원인 궁악도(元人宮樂圖)’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의 머리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머리를 빗어올려 한 쪽으로 묶어 늘어뜨렸고 일부는 귀 옆에 공모양으로 쪽을 찌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극히 화려한 화관형식의 머리장식을 하였다. 이것은 모두 당대(唐代) 여성들의 전형적인 머리 치장 모습이다. 이 밖에도 대나무를 짜서 만든 긴 사각형의 탁자와 초승달 모양의 의자라던가 술잔의 모양, 비파를 옆으로 안고 손에 발을 쥐고 튕겨 연주하는 방식 등은 모두 당나라 말기의 유행과 관련이 있다. 현재 이 그림은 그 이름을 ’당인 궁악도(唐人 宮樂圖)’라고 바꿔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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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암총수도(層巖叢樹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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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五代)    거연(巨然, 10세기 후반에 활동)
층암총수도(層巖叢樹圖)

족자(軸), 비단에 수묵, 144.1 x 55.4 cm

 
거연은 중국 남당(南唐) 종릉(鍾陵) 사람으로 개원사(開元寺)의 승려였다. 남당(南唐)이 송(宋)에 멸망한 후(975년) 거연은 이후주(李後主: 이욱(李煜))를 따라 송에 투항하여 변량(汴梁)으로 옮겨온다. 산수화에 능했으며 동원(董源)의 화법을 익혔다. 그 스승의 피마준법(披麻皴法, 마의 올을 풀어놓은 듯한 실 같은 모습의 붓질 방법)을 계승하여 산세가 울창한 수직적인 산수화 정경을 표현하는 화풍을 창조해내었는데 훗날 “조화(造化)의 신”이라고 찬양되었다.

이 그림에서 산길은 구불구불 휘돌아 나무숲을 지나 산중으로 깊이 들어간다. 무성한 숲과 산봉우리 위의 속칭 “난석(卵石)” 또는 “반두(礬頭)”라고 불리는 군석들 외에 산석은 피마준법으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고 붓질마다 습윤한 뜻을 지니고 있다. 산은 위부터 아래까지 울창한 숲이 어울려 교묘하게 깊고 깊은 산의 경관을 표현해내고 있다. 동기창(董其昌) ‘거연의 진적 신품(巨然眞跡神品)’이라는 제문이 알려주듯이 거연의 그림 중 가장 훌륭한 명작으로 칭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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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의 첫 눈(江行初雪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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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 남당(五代 南唐)    조간(趙幹, 10세기에 활동)
강변의 첫 눈(江行初雪圖)

두루마리(卷), 비단에 수묵 채색, 25.9 x 376.5 cm

 
강변의 첫 눈’은 산수와 인물이 똑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화폭을 펼치면 먼저 남당(南唐) 후주(後主, 왕조의 마지막 임금을 지칭함)였던 이욱(李煜, 937-978)이 쓴 “강변의 첫 눈, 남당 한림도화원 학생(학생: 한림원 관직 명칭) 조간 작품(江行初雪南唐學生趙幹狀)”이란 글이 있는데, 바로 이 열 한 개의 글자로 이 작품의 주제와 작가를 알 수 있다.

조간(趙幹)은 강소(江蘇)성 강녕(江寧)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강남 지방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가 그린 산수화는 대부분 강남의 풍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화면의 구도 배치가 탁월하다. ‘강변의 첫 눈’은 긴 두루마리 형식으로 강변에 사는 어부의 생활상을 묘사한 작품으로, 흰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 강에서 일하는 어부의 수고로움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강 언덕에는 나그네들이 길게 뻗어있는 앙상한 나무 사이로, 눈 덮인 둑길을 지나고 있는데 일행들과 나귀의 모습에서 추운 겨울 여행의 어려움이 드러나 있다. 화법을 살펴보면 먼저 연한 묵으로 전체 화폭을 적신 뒤, 흰 가루를 뿌려 눈내리는 풍경을 표현했다. 추운 겨울 숲 속 마른 나무들의 윤곽선은 붓의 중봉(中鋒)의 둥근 필체를 사용하여 굽은 쇠처럼 단단하게 그리고 있으며, 나무 줄기는 마른 붓질로 선염하여 묘사되어 있는데 그 방법이 후대에 산을 그릴 때 사용하는 준법(皴法)과 비슷하여 입체감이 있다. 갈대꽃은 적갈색 먹에 가루를 뭍혀 점을 찍어 한 번에 그려낸 것으로 매우 창의적이다. 준법을 사용하지 않고 작은 구릉과 둔덕을 옅은 먹으로 칠해서 표현한 것은 후대 화가들의 그림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독특한 점이다. 그림에는 인장이 많이 찍혀있는데, 이런 인장들을 통해 이 그림이 송, 원, 명, 청까지 1 천 년 세월 동안, 여러 왕조의 황실과 개인에 소장되었던 명작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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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지나는 여행자(谿山行旅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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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범관(范寬, 10세기에서 11세기 초 활동)
계곡을 지나는 여행자(谿山行旅圖)

족자(軸), 비단에 엷은 채색, 206.3 x 103.3 cm

 
범관(范寬)은 섬서(陜西)성 화원(華原)(오늘날 요현(耀縣))사람으로 수도인 개봉(開封)과 낙양(洛陽) 일대를 자주 왕래하였다.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했으며 행동거지가 솔직하고 술을 즐겼다고 한다.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처음에 오대(五代, 907~960)산동(山東)의 화가 이성(李成)의 그림을 배웠으나 훗날 깨달음을 얻고 나서 “옛 사람들(前人)의 방법은 사물을 가까이하여 관찰해서 취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을 스승으로 삼는 것보다는 사물(物)을 스승으로 삼는 것만 못하고, 사물(物)을 스승으로 삼는 것보다는 마음(心)을 스승으로 삼는 것만 못하다. (前人之法,未嘗不近取諸物,吾與其師於人者,未若師諸物也;吾與其師於物者,未若師諸心.)” 라는 말을 남기고 화산(華山)에 은거하면서 산과 숲 속에서 연기와 구름이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 비바람이 치는 것과 해가 개이는 모습, 또 비바람이 거치는 모습 등 여러 가지 변화하는 형용하기 어려운 풍경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산의 모습을 그리는데 뛰어나다(善與山傳神)”라며 크게 칭송하였는데 이 그림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범관의 유일한 작품이다.

그림 속에는 높고 큰 산이 가운데 우뚝 서 있다. 산머리는 관목이 빽빽하게 자라 마치 그 형태가 버섯과도 같으며, 양 옆으로 큰 산을 수행하듯 높은 산이 둘러싸여 있다. 누각 건물이 숲 사이로 살짝 드러나 보이고 작은 언덕과 바위 사이로 등에 짐을 싣고 가는 한 무리의 행렬이 분주히 길을 재촉하고 있다. 현악기의 줄과 같이 가느다란 폭포는 수직으로 흘러내리고 계곡물 소리가 메아리 치는 듯 경물의 묘사가 지극히 웅장하면서 사실적이다. 그림 전체의 산과 돌은 빗방울 같이 빽빽한 묵 흔적과 톱날과 같은 암석의 주름 문양으로 산석의 소박하면서 중후하고 고아하고 힘이 있는 느낌을 그려내고 있다. 화폭 오른쪽 모서리의 나무 그늘 사이에「范寬」이라는 두 글자의 서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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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早春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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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곽희(郭熙, 11세기에 활동)
이른 봄(早春圖)

족자(軸), 비단에 엷은 채색, 158.3 x 108.1 cm
 
곽희(郭熙, 11세기에 활동)는 하남(河南)성 온현(溫縣) 사람으로 신종(神宗, 재위1067-1085)때 궁정 화사(畫師)가 되었다. 일찌기 수도 개봉(開封)에 있는 몇 곳의 중요한 궁전과 사원을 위해 대형 병풍화와 벽화를 그린 것이 황제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훗날 한림도화원(翰林圖畫院, 북송시대의 화원. 화원화가는 주로 궁정용, 외국 사신들에게 증여하기 위한 회화, 궁정 사관 관공서에 필요한 장식화 등을 제작하였다.) 최고 직위인 “대조(待詔)”에 올랐고 큰 폭의 대형 산수화를 많이 제작하였다. 곽희는 커다란 소나무나 연기와 구름이 변화하고 사라지는 풍경을 그리는데 뛰어났다고 한다. 산석(山石)은 ‘권운준’(卷雲皴, 새털구름 모양으로 바위의 주름을 표현하는 화법의 하나)을 사용하고 수목(樹木)은 ”해조(蟹爪, 게의 발)” 모양으로 그리는데 이러한 화법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화파가 형성된다.
이 그림은 신종(神宗) 희녕(熙寧) 5년(1072)에 그려진 것으로 현재까지 전해오는 곽희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그림 위에 ‘조춘(早春)’이라고 곽희 자신이 제목을 썼는데 이름 그대로 이른 봄, 서설(瑞雪)이 녹고 대지가 깨어나며 초목이 가지를 뻗는 활기찬 광경을 그리고 있다. 주요한 경물들은 중심축 선 상에 집중되어 있는데 근경(近景)의 큰 바위와 높고 큰 소나무는 중경(中景)의 S자형의 산석과 맞물리고 운무(雲霧)에 의해 나뉘어 졌다가 다시 두 개의 봉우리로 일어난다. 가운데 주봉(主峯)이 위치하고 아래로는 깊은 못이 있어 산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시내는 골짜기 사이로 졸졸 흘러내리고, 깊은 산 속에 장엄한 전당(殿堂)과 누각(樓閣)이 있고, 절벽 위에는 초당(草堂) 너머로 먼 산이 보인다. 좌측의 평평한 비탈은 구불구불 멀리 이어져 그 끝이 천리 너머 먼 곳에 있는 듯 한데 필묵이 맑고 윤이 나며 구도는 고원(高遠), 심원(深遠), 평원법(平遠法)을 종합하여 갈 수 있고(可行), 볼 수 있으며(可望), 머무를 수 있고(可居), 노닐 수 있는(可游) 이상적인 산수를 구현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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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새와 참새(山鷓棘雀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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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황거채(黃居寀, 933- 993년 이후)
자고새와 참새(山鷓棘雀圖)

족자(軸), 비단에 채색, , 97 x 53.6 cm

 
황거채는 사천성 성도(成都) 사람이다. 자는 백난(伯鸞)이라고 하며 오대(五代, 907~960 ) 화조화로 유명한 황전(黃筌)의 아들로 아버지의 쌍구전채법(雙鉤填彩法) 양식을 이어받았다. 송나라 초기, 도화원(圖畫院.한림원)에서는 황전 부자의 그림이 회화 예술의 우열을 비교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 그림 안에는 움직임(動)과 멈춤(靜)이 모두 있는데 이 둘이 그 안에 잘 조화되어 있다. 바위 위에 올라 앉은 자고새가 목을 구부려 시냇물을 마시려 하는 자세의 묘사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또 참새들은 어떤 것은 날고 또 어떤 것은 소리를 내어 짖어대고, 아래를 바라다 보고 있는 등 매우 동적인 동작과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는 대나무나 고사리, 근경의 잡초 덤불은 바람도 불지 않는 듯 조용하고 느긋한 분위기를 표현해내고 있다. 하단의 큰 바위 위에 서 있는 자고새의 몸은 주둥이부터 꼬리까지가 거의 그림의 전체 화면을 가로지르고 있다. 배경을 보면 큰 바위와 흙더미가 참새와 조화를 이루고, 가시덤불과 고사리, 대나무가 전체 화면을 덮고 있다. 화면의 중심이 화폭의 중간에 위치하여 중앙 축을 중심으로 하는 북송(北宋) 산수화의 구도 방식에 가깝다. 도안적인 의미가 있는 배치는 장식적인 효과를 주는데 작가가 의도적으로 당대(唐, 618-907) 화조화의 고졸함과 화려함을 표현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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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의 까치(雙喜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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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최백(崔白, 11세기 후반에 활동)
두 마리의 까치(雙喜圖)

족자(軸), 비단에 채색, 193.7 x 103.4 cm

 
최백은 호량(濠梁: 오늘날 안휘(安徽)성 봉양(鳳陽)동) 사람이다. 불교와 도교 주제의 그림과 인물화, 산수화, 꽃과 나무그림, 날짐승이나 길짐승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화조화에 능했다.

이 그림은 까치 두 마리가 한 마리 산토끼를 향해 짖어대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까치는 까마귀과에 속하는 새로, 천성이 영리하고 무리를 짓는 것을 좋아하며 영역을 보호하는 습성이 있다. 그림 속에서 한 마리 까치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지원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한 마리는 나무 가지에 앉아 아래를 향해 짖어대면서, 침입자를 향해 날개를 펴고 위협의 동작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산토끼는 이들이 그렇게 위협적인 새들이 아니며, 또 매를 만나게 되었을 때처럼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그 자리를 지킨 채 머리만 쳐들고 그들을 바라보며 마치 “왜? 나는 여기로 지나가면 안돼?” 하고 대꾸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삼자 간의 움직임과 호응 관계는 “S”자 형태를 만들어 내며 율동감이 느껴진다. 나뭇잎과 대나무, 풀잎 모두 바람에 위를 향해 날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활발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속의 풍경은 화가의 작업실이나 집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훌륭한 그림 솜씨를 지닌 화가가 자신이 자연 속에서 관찰하고 목격한 생동감 넘치는 재미있는 장면을 다시 화폭에 옮겨 생생하게 다시 재현해 낼 때 이러한 작품의 완성이 가능한 것이다. 이 그림은 송 인종(仁宗) 가우(嘉祐)연간인 신축년(辛丑, 1061년)에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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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계곡의 솔바람 (萬壑松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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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이당(李唐, 약1049~1130/1070~1150이후)
깊은 계곡의 솔바람 (萬壑松風圖)

족자(軸), 비단에 수묵담채, 188.7 x 139.8 cm

 
이당(李唐, 약 1049~1130이후,일설에는 약1070~1150이후)은 하양(河陽) 삼성(三城)사람으로 자(字)는 희고(晞古)이며 북송(北宋) 휘종(徽宗, 1101~1125재임)시기에 한림도화원(翰林圖畫院)에 임직하였다. 정강(靖康)의 변 이후 중원이 혼란스럽자 건염(建炎)연간 이당은 항주(杭州)로 넘어왔다가 고종(高宗) 소흥(紹興) 연간(1131~1162)에 화원(畫院)이 중건되자 다시 화원에 들어가 성충랑(成忠郎)을 제수 받고 화원의 대조(待詔)가 되었으며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주봉 옆의 먼산에 ‘皇宋宣和甲辰(1124)春河陽李唐筆’이라고 된 제문(題文)이 있으며, 고령의 이당이 표현한 산석에는 여전히 넘치는 힘이 느껴진다. 주봉의 배치는 화폭의 중앙에 위치하고 좌우로 고저가 들쑥날쑥한 구름을 뚫고 솟은 봉우리가 있다. 그림 중의 연이어진 산등성이와 절벽은 마치 막 도끼 날에 잘린 흔적 같은데 이것은 전형적인 부벽준법(斧劈皴法)으로, 돌로 이루어진 산의 단단한 느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산 허리 부분의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흰 구름은 마치 유유히 떠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 편으로는 군산(群山)의 전후의 순서감을 구분해내고 있으며 또한 화면으로 하여금 소밀(疏密) 번갈아 섞이는 효과를 내어 전체적인 분위기에 부드럽고 조화로우며 너무 빡빡하거나 너무 꽉 찬 것으로 인해 감상자가 압박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산꼭대기의 수풀과 가까운 소나무 숲, 감춰지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는 돌길은 화면의 깊고 고요한 정취를 더한다. 좌측 중경(中景)에는 폭포가 한 줄로 떨어져 내리고 몇 차례 구부러진 후 한 줄기 계곡 시냇물로 바뀌어 물은 돌 사이로 지나가고 있는데 마치 그 소리가 들리는 듯 한데, 그림 안에 소리가 있는 한편의 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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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정원에서 노는 아이들(秋庭戲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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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소한신(蘇漢臣, 12세기 중반에 활동)
가을날 정원에서 노는 아이들(秋庭戲嬰圖)

족자(軸), 비단에 채색, 197.5x 108.7cm

 
소한신은 북송 말 변량(汴梁) 사람으로 정강(靖康)의 변 이후, 송황실을 따라서 전당(錢塘)으로 옮겨와 살았다. 자세한 생졸연도는 고증할 수 없지만 대략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중반까지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민간 화공이었다가 선화(宣和) 연간 휘종(徽宗)의 궁정 화원(畫院)에 뽑혀 들어갔다. 불상과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특히 어린이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은 정원에 놓여진 작은 둥근 의자 주위에서 정신없이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누나와 동생을 그리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둥근 의자 하나가 있고 풀밭 위에는 회전판과 모형 불탑, 바라 등 정교한 완구가 놓여있다. 배경 부분에는 커다란 죽순 모양의 태호석(太湖石)이 높이 서있고 견고하게 우뚝 선 태호석 주위를 활짝 핀 부용과 소국이 에워싸고 있어 태호석의 강한 기운을 누그러뜨리면서 가을이라는 계절감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그림 안의 누나와 동생 두 사람이 가지고 놀고 있는 대추는 중국 북방의 작물로 당시 양자강이남에서는 생산이 되지 않던 것이다. 지극히 세밀하고 사실적인 그림의 묘사는 북송 말기 궁정 화원의 특징에 부합하며, 이러한 단서를 근거로 볼 때 이 작품은 휘종의 선화화원(宣和畫院)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양지
글쓴이 : 양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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