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 / 고서화 4

2012. 9. 5. 17:15詩書藝畵鑑賞

한나라 궁전의 봄날 아침(漢宮春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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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구영(仇英, 1494-1552)
한나라 궁전의 봄날 아침(漢宮春曉)
두루마리(卷), 비단에 수묵담채, 30.6 x 574.1 cm
 
구영의 자는 실부(實父), 호는 십주(十洲)라고 한다. 원적은 강소(江蘇)성 태창(太倉)으로 훗날 소주(蘇州)로 옮겨 왔다. 생졸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근 저작과 연구 성과에 따르면 그의 생애를 대략 1494년에 태어나 1552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어릴 적에는 칠공예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장인이었으나 훗날 주신(周臣)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특히 임모에 뛰어나 아주 사실적으로 그대로 그렸는데, 그림이 정교하고 매우 아름다워 옛 대가들의 솜씨에 뒤지지 않았다. 산수와 인물, 건축물을 그린 계화(界畫)에서 입신의 경지를 보여준다. 명사대가(明四大家)의 한 명이다.

이 긴 두루마리 그림은 후궁 빈(嬪)들의 궁중에서의 생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 중의 정원과 궁전 건물은 호화롭고 화려하며, 계필(界筆)로 그려진 누각과 건물의 난간, 문과 담장은 정교함이 입신의 경지에 이른다. 인물은 가늘고 힘있는 필치로 그리고 있고, 청록 중채(重彩)의 균형잡힌 채색은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다. 이 그림은 비록 송나라 사람의 화풍을 모방하고 있지만 오히려 이를 뛰어넘는 탁월한 점이 있다.

한나라 유흠(劉歆)이 펴낸《서경잡기(西京雜記)》에 따르면, 서한(전한)의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48-33)는 아리따운 후궁들이 많았지만 일일이 다 볼 수가 없어서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보내어 초상화를 그려 바치도록 한다. 모든 궁녀들이 자신을 예쁘고 그려달라고 화공에게 뇌물을 주었지만 왕소군(王昭君)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황제는 왕소군의 아름다운 자태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림 속에 후궁의 빈을 위하여 초상화를 그리는 자가 있는데, 바로 모연수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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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대나무(花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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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서위(徐渭, 1521-1593)
꽃과 대나무(花竹)
족자(軸), 종이에 수묵, 337.6 x 103.5 cm
 
서위는 산음(山陰, 오늘날 절강(浙江) 소흥(紹興)) 사람이다. 자는 문청(文淸)이며 후에 문장(文長)으로 고쳤다. 호는 천지(天池), 만년에 청등도인(靑藤道人)이라고 하였다. 성격이 독특한데, 자신의 이름의 글자를 분해하여 “전수월(田水月)”이라는 낙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서위는 복건 도독 호종헌(胡宗憲)의 막료가 되어 한 때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으나 그에 연루되기도 하여 중년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 자살 기도를 몇 번이나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의처증으로 아내를 살해하였다는 혐의로 감옥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그림과 글씨를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서위는 중국 미술사에서 행적이 가장 특이한 예술가의 한 사람일 것이다.

서위는 시와 서화에 모두 능했으며 또한 당대 중요한 희곡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서예, 시, 문장, 그림 순으로 순서를 매겼다. 그는 그림에서 독특한 화풍으로 일가를 이루었는데, 산수, 인물, 화충, 대나무와 바위 모두 훌륭하였으며 특히 화훼화가 유명하였다.

이 작품은 수묵으로 대나무, 바위와 화훼를 그리고 있는데 서위 자신의 제발에는 16가지 종류의 꽃이 있다고 한다. 그림 중의 미세하고 다양하게 먹색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큰 붓질로 바위의 표면을 칠하고 백묘(白描)로 대나무를 그렸는데 꽃을 그린 필법은 빠르고 호방하여 구애됨이 없으며 선염과 수묵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먹의 순서의 변화가 매우 많으며, 화면은 활달하고 시끌벅적한 것이 생기가 있다. 화가에게는 붓질과 먹의 표현이 사물의 사실적인 묘사 보다 더 중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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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늘이 있는 여름풍경 (夏木垂陰)나무 그늘이 있는 여름풍경 (夏木垂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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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동기창(董其昌, 1555-1636)
나무 그늘이 있는 여름풍경 (夏木垂陰)
족자(軸), 종이에 수묵, 321.9 x 102.3 cm
 
동기창은 강소(江蘇) 화정(華亭) 사람이다. 자는 현재(玄宰), 호는 사백(思白)이다. 만력(萬曆) 16년(1588) 진사가 되어 관직이 예부상서(禮部尙書)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명말기 강남(江南)지역 문화계의 우두머리로 이론과 창작 모두에 뛰어났으며 역대 미술품을 다수 소장하여 감정에 능했는데 만약 어떤 역대 서화 작품이 동기창에 의해 논해지면 그 값어치가 바로 올라갔다한다. 서예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행초(行草)서를 잘 썼다. 고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가 그린 산수화에는 송대와 원대 명가들의 장점이 융합되어 있는데 주로 동원(董源)과 거연(巨然)의 전통을 따랐다. 필묵이 수려하면서 동시에 습윤하며, 밝고 시원시원한데 서예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드러내며 구도 역시 서예 이론인 “기세(勢)”이론의 개념을 받아 들이고 있다. 저작으로《화선실수필(畫禪室隨筆)》과 《용대집(容臺集)》등이 있다. 회화에 있어 남종화와 북종화 두 가지 갈래의 전통이 있다고 주장한 남북종론(南北宗論)은 그의 서화 양식과 함께 당대와 후대 300여 년간 화단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동기창이 쓴 제발에 의하면 이 그림은 동원(董源)의 그림을 본 후 이를 모방하여 그린 것으로 또한 황공망(黃公望)의 필의(筆意)를 담고 있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완전히 똑같이 모방한 것이 아니라 대가들의 특징을 집대성한 후 이를 소화하여 자신만의 양식으로 재정립하고 있는데 구도와 용필 모두에서 동기창의 개성적인 화풍이 드러나있다. 동기창의 필법은 서예에서 비롯된 것으로 먹의 농담의 변화와 붓의 움직임이 강조되어 있다. 이 작품은 특히 멀리서 보면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가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적인데, 주산(主山)위의 검은 선과 흰 부분의 대비가 강렬하여 입체적까지 보이지만 이것은 입체적인 효과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화면의 허(虛)와 실(實)이 서로 상생하는 정취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연꽃 핀 물가에 잠든 물오리(荷渚睡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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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여기(呂紀, 1439-1505사이에 활동) 연꽃 핀 물가에 잠든 물오리(荷渚睡鳧)
족자(軸), 비단에 수묵담채, 174.5 x 104.2 cm
 
여기는 절강(浙江) 영파(寧波) 사람이다. 자는 정진(廷振), 호는 낙우(樂愚) 또는 낙어(樂漁)라고도 부른다. 여기는 명대 중엽, 효종(孝宗) 홍치연간(弘治, 1488-1505)인지전(仁智殿)의 유명한 궁정 화조화가로 벼슬이 금의위지휘(錦衣衛指揮)에 이르렀다. 화조화는 처음에는 변문진(邊文進, 1403-1428사이에 활동)을 배웠고 훗날 당대와 송대의 명가들을 모방하였는데 공필(工筆)과 사의화법(寫意法)을 결합하여 다양한 종류의 면모를 나타냈으며 그 화풍이 매우 개성적이다.

짙은 안개가 낀 달밤에 네 마리 물오리가 연꽃과 갈대가 있는 모래밭에서 쉬고 있다. 구도상 근경(近景)과 중경(中景)만 있고 원경(遠景)은 생략하여 그리지 않았다. 본 그림은 비록 ‘여기’ 이름의 낙관이 있지만 붓질이 비교적 약하고 여기의 작품으로 보는데는 약간의 의문점이 있어 여기의 원작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경물의 배치와 분위기 조성이 본원 소장의 여기의 ”추저수금(秋渚水禽)”과 상당히 유사하여 여기의 화풍에 매우 충실한 방작(仿作)이라고 여겨지며 이 작품 중에서 여기의 사의 화조화 화풍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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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이 아이들이 버들의 꽃을 잡는 것을 바라보며” 구절의 뜻을 그리다. (畫閒看兒童捉柳花句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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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주신(周臣, 약 1460-1535활동)
“한가로이 아이들이 버들의 꽃을 잡는 것을 바라보며” 구절의 뜻을 그리다. (畫閒看兒童捉柳花句意)
족자(軸), 비단에 수묵담채, 116.6 x 63.5 cm
 
주신의 자는 순경(舜卿)이며 별호(別號)는 동촌(東村), 아장산인(鵝場散人)이다. 오군(吳郡, 오늘날 강소 소주(蘇州))사람이다. 산수화는 진섬(陳暹, 1405-1496)을 배웠으며, 이성(李成, 919-967), 곽희(郭熙, 약1001-1090), 마원(馬遠, 1189-1225활동), 하규(夏圭, 1180-1124활동)등 송나라 사람의 화법의 영향을 받았는데 용필이 정밀하고 능숙하였다. 또한 인물화에 뛰어나 어떤 모습의 인물화라도 사실적으로 잘 그려냈다. 당인(唐寅, 1470-1523)과 구영(仇英, 약1494-1552)은 모두 주신의 가장 걸출한 제자들이다.

백거이(白居易)〈별유지(別柳枝)〉:「誰能更學孩童戲,尋逐春風捉柳花。(그 누가 아이들처럼 즐길 수 있을까, 봄 바람에 날리는 버들의 꽃을 잡는 것 처럼.)」과 양만리(楊萬里)의 〈한거초하오후수기(閒居初夏午睡起)〉:「日常睡起無情思,閒看兒童捉柳花。(낮잠 자고 일어나 별 생각 없어, 한가로이 아이들이 버들의 꽃을 잡는 것이나 바라보네.)」

그림에서는 변각식(邊角式) 구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절파(浙派)와 마찬가지로 마원과 하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절파의 강한 필치는 없으며 곳곳에 남송 원체(院體) 회화의 서정적인 멋이 넘치고 있다. 주신의 제자 구영(仇英)의 공필(工筆) 인물화는 이 작품의 양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봄놀이 후 늦은 귀가(春遊晩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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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대진(戴進, 1388-1462)
봄놀이 후 늦은 귀가(春遊晩歸)
족자(軸), 비단에 수묵담채, 167.9 x 83.1 cm
 
대진은 자는 문진(文進)이며 호는 정암(靜庵) 또는 옥천산인(玉泉山人)이라고 하는데 절강(浙江) 전당(錢塘, 오늘날 항주(杭州))사람이다. 일설에 의하면 대진은 항주의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산수와 인물화에 능하여 유명해졌다. 선덕(宣德) 연간 추천에 의해 궁에 들어가 봉직하였는데 탁월한 솜씨로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훗날 동료의 시기로 배척을 당해 남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항주에서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데 그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았고 당시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절파(浙派)의 시조가 되었다.

왼쪽 아래의 전경(前景)은 정원을 그리고 있는데 담장 밖으로 뻗어나온 나뭇가지와 길가의 붉은 색 복숭아꽃은 모두 “봄날”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선비 한 사람이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정원에 하인 하나가 등불을 들고 문을 향해 나오고 있는 모습은 봄놀이를 다녀온 주인이 ‘저녁 늦게 돌아오는’ 시적인 정취를 드러내고 있다. 중경(中景)의 밭 사이의 작은 길 위에는 두 사람의 농부가 쟁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고 먼 곳의 농가의 빈 터에는 아낙네가 가금(家禽)에게 모이를 주고 있는데 인물들이 비록 작지만 화가가 미세한 부분에도 매우 신경을 써서 묘사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의 화법은 남송의 마원(馬遠)과 하규(夏圭) 일파의 영향을 받았다. 빈 공간을 대부분 남겨두고 있는 구도 역시 남송 원체화의 양식을 이어 받고 있지만 화면이 비교적 평평한데 근경과 원경이 거의 동일한 평면 위에 있어 공간의 깊이감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비록 작가의 낙관이나 인장이 없지만 화풍으로 볼 때나 또 다른 작품과 비교를 통해 대진이 북경에 있던 시기의 작품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회화 기법상의 공력의 깊이나 필묵이 원활하고 변화가 다양한 것으로 보아 대진의 화풍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작품의 하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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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와 산새(梅花山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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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진홍수(陳洪綬, 1599-1652)
매화와 산새(梅花山鳥)
족자(軸), 비단에 수묵담채, 124.3 x 49.6 cm
 
진홍수는 절강(浙江) 제기(諸暨) 사람이다. 자는 장후(章侯) 자호(自號)는 노련(老蓮)이라 하였다. 명이 망한 후에 호를 회지(悔遲), 물지(勿遲), 운문승(雲門僧)이라고 하였다. 서화에 능하였는데 회화에서는 인물화를 주로 잘 그렸고, 화조와 초충, 산수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가 그린 인물은 신체 묘사가 육중하고 장대하며, 옷주름 표현은 가늘지만 힘이 있어 이공린(李公麟, 1049-1106)와 조맹부(趙孟頫, 1254-1322)인물화의 예술 극치를 겸하였지만 있지만 그는 과장된 수법을 사용하여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 명 말기 변형주의(變形主義) 화풍의 대가이다. 이밖에도 그는 판화의 제작에 참여하여 명말기 판화 예술에 공헌이 지대하다.

커다란 태호석(太湖石) 뒤에 각이 진 줄기의 늙은 매화 나무가 있는데 나뭇가지에는 활짝 핀 매화꽃이 만발해있다. 산새 한 마리가 가지 위에 서 있는데 그 표정이 매우 분위기가 있다. 진홍수는 고대 대전체와 같은 서예적인 필법으로 매화 나무 줄기를 그렸다. 꽃은 구륵전채(鉤勒塡彩)기법으로 그리고 윤곽선은 실처럼 가는 선으로 그려졌다. 꽃잎과 꽃술은 모두 하얀 가루로 칠해져 있는데 풍성하고 두터운 느낌을 준다. 바위의 주름은 기운찬데 필묵이 둥글고 습윤하며 함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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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고도(玩古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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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1368-1644)    두근(杜堇, 1465-1505활동)
완고도(玩古圖)
족자(軸), 비단에 수묵채색, 126.1 x 187 cm
 
두근은 본래 성이 육(陸)씨로 훗날 성을 두(杜)로 고쳤다. 단도(丹徒, 오늘날 강소 진강(鎭江))사람으로 남경(南京)에서 살았다. 자는 구남(懼南)이고 호는 정거(檉居), 고광(古狂)이라 하였고 스스로 청하정장(靑霞亭長)이라고도 서명하기도 하였다. 성화(成化) 초, 진사시에 낙방한 후 시와 서화 창작에 전념하였다.

「완고도(玩古圖)」는 두 폭을 하나로 이어 붙인 것으로 원래 그림이 병풍으로 표구되었던 것 같다. 주제는 골동품을 감상하는 것 외에 또한 거문고(琴), 바둑(棋), 서화(書畫)의 소재로 문인의 예술활동을 묘사하고 있다. 화풍은 우아하고 질박한데 남송 원체화의 여운이 감돈다. 두근의 이러한 유형의 공필 인물화는 당인(唐寅)의 중기 양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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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王維)의 “강과 산에 내린 눈” 그림을 본떠 그리다. (仿王維江山雪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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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清. 1644-1911)    왕시민(王時敏, 1592-1680)
왕위(王維)의 “강과 산에 내린 눈” 그림을 본떠 그리다. (仿王維江山雪霽)
족자(軸), 종이에 수묵담채, 133.7 x 60 cm
 
왕시민은 강소성(江蘇省) 태창(太倉)사람이다. 자는 손지(遜之), 호는 연객(煙客), 서려노인(西廬老人)이며 만년에는 서전주인(西田主人), 귀촌노농(歸村老農)이라 하였다. 조부 왕석작(王錫爵)은 만력 연간에 관직이 상국(相國)에까지 이르렀으며 부친 왕형(王衡)은 한림편수(翰林編修)를 지냈다. 왕석작은 당대 명사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겨하여 동기창(董其昌, 1555-1636)과 진계유(陳繼儒, 1558-1639)를 지형산(支硎山)으로 초청하였는데 왕형(王衡)은 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왕시민 역시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서화를 배워 탄탄한 기초를 닦았다. 만력(萬曆) 42년(1614) 왕시민은 수도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데 상보승(尙寶丞) 벼슬을 시작으로 관직이 태상사소경(太常寺少卿)에 이르러, 옛 사람들이 그를 “왕봉상(王奉常)”이라고 불렀다. 49세 때 민남(閩南, 지금의 복건성)지역으로 파견되어 일하다 심한 과로로, 남경(南京)에 돌아온 후 학질에 걸리는데 그후 관직을 그만두고 태창 교외의 서전(西田, 명대 황실에서 왕시민의 조부 왕석작에서 하사한 땅)에서 은거 생활을 하며 예술 창작에 전념하여 많은 사(詞)와 서화 작품을 남겼다.

왕시민의 집안은 역대의 명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고서화를 감상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천계(天啓) 4년(1624) 상보경(尙寶卿)으로 승진하여 수도에 장기간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웃인 정계백(程季白)이 소장한 왕유(王維)의 “강산설제도(江山雪霽圖)”를 빌려 보게 된다. 또, 숭정(崇禎) 5년(1632)경에는 일찌기 동기창이 소장했었던 왕유의 작품 ”설계도(雪溪圖) ” 역시 그의 소유가 된다. “사왕(四王)”은 그림을 그릴 때마다 어떤 명가의 필법을 방하여 그린다고 제목을 붙이고는 했는데 대략 그 생각과 정신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이 그림은 왕시민 자신이 본 것과 자신의 집에 소장한 명화에 의거하여 다시 송과 원대의 각 화가들의 구도와 필묵, 채색 방법을 자유롭게 운용하여 당대 왕유 화풍의 옛스럽고 고상한 맑은 기운을 표현해냈다.

이 작품은 무신(戊申)년 (1668)에 그려진 것으로 이 때 화가의 나이는 77세였다. 그림 위의 산과 암석은 마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며 웅대한 산의 형상을 구성하는데 화면에 동감이 충만하다. 전체 그림은 준법보다는 우아한 선과 채색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나무는 가는 붓으로 윤곽을 그리고 채색은 녹색과 홍갈색, 백분을 위주로 되어있는데 바로 고법에서의 설경을 표현하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필묵의 처리가 깔끔하고 습윤하며 채색이나 붓질이 우아하여 당나라시대 청록몰골(靑綠沒骨) 산수화를 추구한 서정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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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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