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5. 16:49ㆍ서예가
학계에서 공인된 민국 4대 서예가는 각각 담연개(譚延闓)(해서), 호한민(胡漢民)(예서), 오치휘(吳稚暉)(전서), 우우임(于右任)(행서)이다. 이 4명은 모두 민국시대에 아주 대단했던 사람들이다. 민국시대 정계에서 호풍환우하던 인물이다. 사업과 학문에서 모두 남다른 성취를 거두었다.
담연개(譚延闓)(해서),
담연개는 호남 다릉(茶陵)사람이고, 절강성 항주에서 태어났다. 부친 담종린은 진사로 섬서순무와 섬감, 민절, 양광총독의 직위를 지냈다. 학문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담연개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어려서는 광서제의 스승인 옹동화(翁同龢)로부터 '기재'라는 말을 들었다.
1904년, 담연개는 청나라말기의 마지막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중시에서 1등으로 공사(貢士)가 된다. 즉 회원(會元)을 한 것이다. 4월에 전시에 참가하여 2등35명으로 진사출신이 된다. 이때부터 정계에서 활약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호남에서 청나라 00여년간 회원을 배출하지 못했던 공백을 메워주었고, 그는 진삼립(陳三立), 담사동(譚嗣同)과 함께 "호상삼공자(湖湘三公子)"로 칭해진다. 그는 한림편수의 직위를 받았다.
담연개는 근대 군주입헌파의 대표자이다. 1907년 '호남헌정공회'를 조직하여 입헌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1909년에는 호남자의국 의장이 되어, 호남입헌파의 수뇌인물이 된다. 신해혁명때는 혁명에 가담한다. 장사를 광복시킨 후, 호남군정장 및 참의원 의장에 추대된다. 나중에 호남도독을 세 번이나 맡는다. 1912년 국민당에 가입하여, 호남지부장이 된다. 나중에 호남성장 겸 독군, 국민당중앙정치위원회 주석, 국민정부 주석, 행정원장등의 직위를 맡는다.
담연개는 변신에 능했고, 정치풍향을 잘 파악했다. 3번이나 호남총독을 역임하고 국민정부 주석까지 맡았으며, 나중에 초대 행정원 원장까지 맡아서, 전체 민국시대에 혁혁한 명성을 떨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여러 인물들이 명멸하는 민국시대에 보기 드문 '정치오똑이'였다. 그는 평상동안 미색에 흥취가 없었고, 오로지 미식은 중시했다. 더욱 보기 드문 일은 그가 문인이면서도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며, 마상기술도 아주 뛰어나서, 무인의 풍모가 있ㅇㅆ다.
담연개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것은 그의 서예가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는 것이다. 청나라때 전풍지(錢灃之)의 뒤를 잇는 안진경체의 대가이며, 민국4대서예가의 으뜸으로 꼽혔다. 그의 글씨는 그 사람됨과 같이 대권을 장악한 기상이 있었다. 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안진경체에서는 담연개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담연개는 시와 서에 모두 뛰어나서, 시련(詩聯)을 잘 지었다. 서예작품은 예술과 문화재의 이중가치가 있고, 현재 남경 중산릉 반산요정의 안에 쓰여 있는 석비 "중국국민당장총리손선생어차(中國國民黨葬孫先生於此)"라는 두 줄의 거대한 황금글씨는 바로 담연개가 쓴 것이다.
담연개는 1880년에 태어나서 1930년에 죽었다. 담연개의 딸 담상(譚祥)은 송미령이 미국유학때 동창생이며, 나중에 장개석의 최측근심복이며, '부총통'에까지 오르는 진성(陳誠)에게 시집을 간다.
출처/중국북경장안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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