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우임(于右任) (행서)

2012. 5. 12. 21:08서예일반

 우우임(于右任)

 

 

 

 

우우임은 1879년 섬서 삼원현에서 태어난다. 청나라 광서때의 거인이다. <<반곡반소루시초(半哭半笑樓詩草)>>를 발간하여 당시의 정치를 풍자하였다는 이유로 청나라조정에 의하여 지명수배를 받고, 상해로 망명하여, 진단공학에 들어간다. 진단학원을 졸업한 후, 광복회와 동맹회에 가입한다. 1907년부터 <<신주일보>> <<민립보>>를 창간하여 민주혁명을 적극적으로 선전한다. 남경임시정부 교통부차장, 국민연군주섬총사령관, 심계원장, 감찰원장을 지낸 국민당의 주요인물이다. 1912년후에 남경정부 교통부장, 국민정부 심계원장, 감찰원장을 지내는데, 감찰원장을 34년간 맡았다. 나중에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가서, 대만에서 15년을 지낸다.

 

만년에 대만의 우우임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끝까지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 1962년 1월 12일, 그는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내가 죽은 후, 옥산 혹은 아리산의 나무가 많은 높은 곳에 묻어달라. 산은 높아야 되고, 나무는 커야 된다.그래야 시시때때로 대륙을 볼 수 있다. 나의 고향은 중국대륙이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62년 1월 24일 우우임은 진지하고 침울한 감정의 시작 <<망대륙(望大陸)>>을 완성한다.

 

장아어고산지상혜(葬我於高山之上兮), 망아대륙(望我大陸);

대륙불가견혜(大陸不可見兮), 지유통곡(只有痛哭).

장아어고산지상혜(葬我於高山之上兮), 망아고향(望我故鄕);

고향불가견혜(故鄕不可見兮), 영불능망(永不能忘).

천창창(天蒼蒼), 야망망(野茫茫),

산지상(山之上), 국유상(國有殤)

 

1964년, 우우임은 타이페이에서 병사한다. 그의 묘는 타이페이시 양명산 위에 있다. 옥산의 주봉에는 그의 조각이 있다.

 

"삼간노옥일고괴(三間老屋一古槐)

낙락건곤대포의(落落乾坤大布衣)"

 

이는 사람들이 우우임에 대한 간결한 평가이다.

 

근대서법사상의 대가로서, 우우임은 위비(魏碑)와 행서, 장초를 결합한 행초서(行草書)에 능했다. '우우임표준초서'를 만들었고, '당대초성(當代草聖)', "근대서성(近代書聖)", "중국서법사상 3개의 이정표중 하나"(나머지 둘은 왕희지, 안진경)으로 칭송받았다.

 

우우임은 서예에 뛰어났고, 1920년대에 "북우남정(北于南鄭)"(남정은 만주국 총리를 지낸 鄭孝胥를 가리킨다)라는 말이 있었다. 우우임은 1932년 상해에 '표준초서사'를 만들어, 알아보기 쉽고, 쓰기 쉽고, 정확하고 아름답게라는 원칙하에 중국한자의 초서체를 연구, 정리, 보급한다. <<표준초서천자문>>을 만드니, 영향이 아주 컸다. 그의 저작에는 <<우임시존>> <<우임문존>> <<우임묵존>> <<포준초서>>등이 있다.


출처/중국북경장안가에서...

출처 : 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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