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12. 21:07ㆍ서예일반
오치휘(吳稚暉)
오치휘는 일명 경항(敬恒)이라고도 한다. 청나라 광서 신묘과의 거인이다. 강유위, 양계초의 <<공거상서>>에도 참여한 바 있다. 유신을 주장하고, 신정을 주장했다. 일본으로 가서도 공부하고, 영국 프랑스에도 갔다. 나중에 손중산 선생을 따라, 동맹회에 가입하고 신해혁명에 투신한다. 그는 장개석의 내외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1865년에 태어나서 손중산보다 1살이 많고, 장개석보다 22살이 많았다. 그는 국민당집권시기에 최연장자였다.
민국괴인(民國怪人)으로 불리는 오치휘는 중앙연구원 원사였다. 그는 동서양의 학문에 정통했고, 교육을 중시하여 영향이 아주 컸다. 장몽린은 그를 중국학술계에 빛을 사방에 뿌린 혜성이라고 하였다; 호적은 그를 중국근 300년래의 4대반이학의 사상가중 한 명이라고 불렀다. 1962년 유네스코는 오치휘에게 '세계학술문화위인'의 칭호를 부여한다. 이리하여 그는 20세기에 이 영예를 차지한 첫번째 중국인이 된다.
오치휘는 1924년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된다. 1927년에는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주임, 중앙국방최고회의 상무위원, 국민당 중앙평의원, 총통부 자정이 된다. 사실, 이들 관직은 대부분 실권이 없는 허직이었다. 그는 일찌기 조카인 오여경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회를 열면, 나와 같은 이런 소위 '원로'들을 주석단에 부른다. 사진을 찍을 때도 나를 앞에 서게 한다. 무석의 혜산니인과 같이 그저 장 속에 놓아두는 것이다."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주임은 당연히 실권이 있는 직책이다. 그러나 오치휘는 실제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일생동안 중앙감찰위원의 급여만 받았고, 그것도 실제로 가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감찰원에 긴급공문이 있으면, 우우임이 비서장 적응을 그에게 보냈지만, 그는 뜯어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서명해서 보냈다.
1943년, 국민정부 주석인 임삼이 중경에서 병사한다. 장개석은 오치휘를 새로운 주석으로 추대했지만, 그는 사양한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오치휘가 사양한 이유는 3가지이다. 첫째, 나는 평소에 의복을 아무렇게나 간단히 입는다. 원수가 되려면 연미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면 편하지가 않다. 둘째, 나는 얼굴이 못생겼다. 큰 인물같지가 않다. 셋째, 나는 웃는 것을 좋아한다. 뭘 보면 그냥 웃음이 나온다. 외국사절이 국서를 보내는데 웃는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1946년, 국민정부는 훈정단계를 끝낸다고 선언하고, 남경에서 <<중화민국헌법>>을 선포한다. 오치휘는 제헌대표주석으로서 <<중화민국헌법>>을 장개석에게 넘긴다. 그리하여 '제헌대로(製憲大佬)"라는 말을 듣는다.
오치휘는 배분이 높은데, 자주 하고싶은대로 했다. 그는 일찌기 지팡이로 대립을 때리기도 했다. 쫓아가서 때리면서 욕을 해댔다. 나중에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쉽게도 이 개잡종을 따라잡지 못하겠다."
그는 아주 유머러스했다. 청나라과거에서 그는 거인이었는데, 나중에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거인은 내가 사기로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쓴 글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모조리 전서로 썼다. 그랬더니 과거시험관이 글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글자는 아주 잘 썼으니 합격을 시켜준 것이다. 한번은 한자 주음부호를 토론하는 회의상에서, 왕조(王照)라는 학자가 그와 얼굴을 붉히면서 논쟁을 벌였다. 왕조가 돌연 욕을 해댔다: "늙은 왕빠단, 그저 웃을 줄밖에 모른다."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대경실색했다. 분명히 한바탕 욕설전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오치휘는 웃으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아, 네가 잘못 안 것이다. 왕씨성은 내가 아니다. 나는 오씨이다."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었던 것은 오치휘가 항상 장개석을 위하여 앞장서서 깃발을 들고 응원을 했다는 점이다. 장개석이 나쁜 일을 벌이기 전날에 항상 오치휘가 나서서 여론을 형성한다. 이것때문에 민국18년 겨울, 풍옥상이 그에게 전보를 보낸 적이 있다: "창염노적(蒼髥老賊), 호수필부(皓首匹夫). 당과 국가의 원로로서 독불장군을 위하여 종노릇이나 하다니,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손중산 총리를 지하에서 만나볼 것인가라고 욕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선생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해명하실 것인가?"
오치휘의 전서는 아주 유명하다. 민국에서 무적의 전서 서예가이다. 중경에 있을 때, 장개석은 그에게 "장금자원묘지(蔣金紫園墓碑)"의 전문800자를 써달라고 한 적이 있다. 오치휘는 당시 77세임에도, 정신을 집중하여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성한다. 진포뢰가 이렇게 감탄했다: "원혼응중. 창경유력하면서도 힘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해서전화의 정품이다."
1953년 10월 30일 오치휘는 타이페이에서 병사하니, 향년 88세이다.
출처/중국북경장안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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