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호한민(胡漢民) (예서)

2012. 5. 12. 21:07서예일반

 

호한민

 

 

 

 

"만일 호한민 선생의 사람됨을 논한다면, 내가 가장 잘 안다. 그의 학문과 도덕은 모두 깊이가 있다. 광동에서만 보기 드문 인물이 아니라, 다른 성에서도 보기 힘든 인물이다....그의 평생의 큰 역량과 큰 재주를 생각하면 도독을 맡아서 할 정도일 뿐아니라, 총통의 직위를 맡아도 잘 해냈을 것이다."

 

이는 손중산이 호한민에 대하여 평가한 것이다.

 

호한민은 중국국민당 원로이며 초기 주요 지도자중 한 명이다. 그는 이론에 조예가 깊고, 문장이 뛰어났다. 일찌기 손중산이 가장 의지하던 오른팔이었다. 국민당내에서 그는 직위가 높았고, 경력도 오래되었으며, 명성도 뛰어났다. 후배인 장개석이 비길 바가 아니었다. 장개석도 호한민의 지원하에 비로소 당내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었던 것이다.

 

호한민은 1879년생이며, 광동 번우 사람이다. 21세에 거인이 되고, 1902년에 일본유학을 하며, 1905년 동맹회에 가입한다. 1907년에서 1910년까지 무장혁명에 여러번 참가하고, 황흥과 함께 광주신군의거와 황화강의거를 이끈다. 1911년, 신해혁명후에 광동도독, 남경임시정부 비서장이 되며, 나중에 교통부장, 총참의등으 직위를 맡는다.

 

1924년 1월 국민당의 제1차전국대표대회가 광주에서 개최된다. 호한민은 5명의 대회주석단의 1인이었다. 그리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고, 황포군관학교 정치교관을 겸임한다. 같은 해 9월, 손중산이 광주를 떠나 소관으로 가서 북벌대본영을 건설할 때 호한민은 대원수대행으로 광주에 남아서 지킨다.

 

손중산이 서거한 후, 국민당내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왕정위, 호한민과 요중개이다. 이들은 '삼거두'로 불리웠다. 1925년 8월,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인 요중개가 피살된다. 왕정위, 허숭지, 장개석의 3인이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국세를 장악하고 요중개사건을 처리한다. 요중개사건의 재판과정에서 국민당 우파의 지도자였던 호한민의 혐의가 가장 컸다. 그리하여 한때 구속까지 되었다가, 나중에 소련으로 시찰명목으로 보내진다.

 

1927년 영한분열(寧漢分裂, 남경정부와 무한정부의 분열)시, 호한민은 장개석을 지지하고, 남경의 업무를 주재하며, 반공청당에 참여한다. 나중에 입법원 원장등의 직위를 맡는다. 1931년, 장개석과 약법지쟁을 벌여 장개석으로부터 연금을 당한다. 나중에 광주로 가서 남방의 실력파지도자가 된다. 항일, 공산당소탕, 반장개석의 3대정치주장을 펼친다. 이리하여 장개석은 그를 '신군벌'이라 부른다. 1935년 6월, 호한민은 유럽으로 시찰을 떠나고, 장개석에 대한 공격을 멈춘다. 1935년 12월, 아직 프랑스에 머물던 호한민은 국민당 제5기 1중전회에서 중앙상무위원회 주석에 선임된다. 1936년 1월, 유럽에서 귀국하여 광주에 머문다. 1936년 5월 12일 호한민은 뇌일혈로 광주에서 사망한다.

 

호한민은 예서에 뛰어났다. 서예예술에서 상당히 높은 성취를 얻는다. 서법에도 연구가 깊어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남다른 품격이 있었다. 그의 예서는 단정하며 웅건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평한다: "호한민은 서예에 뛰어났다. 저수량, 미불을 하나로 합친 것같다. 만년에 조전비를 익혔는데 아주 닯았다. 남경 중산릉 대청의 정면 벽위에 음각된 <<총리유촉(總理遺囑)>>의 거대한 편액은 바로 호한민의 글이다.

 

출처/중국북경장안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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