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12. 20:50ㆍ알아두면 조은글
그림 속 그 많은 인장은 누구의 것일까
어린 시절, 외갓집 장독대 옆에는 화초들이 무성했다. 여름 날, 비 그친 뒤 화단은 그렇게 싱그러울 수 없었다. 햇살이 비친 마당은 환했다. 아직 잎에 매달려 있는 물방울은 영롱했다. 물방울을 또르르 굴리며 심심함을 달래고 있노라면 어느 새 잠자리들이 날아왔다.
↑ 현재 심사정 <파초와 잠자리>, 종이에 수묵 담채, 32.7 x 42. 5 cm
조선 후기 화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파초와 잠자리>는 그런 어릴 적 비 갠 여름날의 오후를 떠올리게 한다. 물기를 머금은, 번잡하지 않은 붓질의 수묵은 어떤 서양화적인 재료보다 더 생생하게 물기 어린 여름 수목을 생생히 표현해내고 있다.
여기에 화면 오른쪽에 두 줄 휘갈긴 화제는 시적 운치를 더한다. 이 그림의 화룡점정은 ‘玄齋’라는 서명 뒤에 찍힌 붉은 인장이다. ‘墨禪(묵선)’이란 별호를 새겼다. 묵으로써 정진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작가 정신이 엿보이는 글귀가 멋스럽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붉은 색의 인장이 수묵의 세계에 불어넣은 생기다. 그것은 마치 빨간 맨드라미처럼 온통 초록의 화단에 아연 생기를 불어넣는다.
서양화와 동양 회화와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앞에서 얘기한 제발과 함께 이 인장이다. 서양화에서 작가가 이니셜 등을 붓으로 썼던 서명, 즉 사인(Signature)이 있다면, 동양의 그림에서는 그림을 그린 날짜와 이름 등을 쓴 관서와 함께 찍힌 인장이 있다. 동양 회화에서의 인장은 서양화의 사인처럼 작품이 진품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양의 회화에서는 서양화에는 전혀 없는 풍속이 있다. 바로 작가 뿐만 아니라 수장가나 감상가들도 그림에 인장을 찍었다는 것이다. 마치 수장가나 감상자들은 그림 위에 맘껏 제발을 썼던 것처럼 수장품을 자랑이라도 하듯, 붉은 도장을 찍었던 것이다.
서양화와의 또다른 차이…인장
돌이나 옥, 자기 등에 글씨를 새기는 전각은 조선시대, 예술로 대접을 받았다. 옛날 시서화에 두루 능한 이를 삼절(三絶)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인(印)을 넣어 ‘시서화인’을 사절(四絶)이라고 했던 것이다.
인장은 새기는 방식에 따라 ‘백문인(白文印, 글씨가 희게 나타나는 음각)’과 ‘주문인(朱文印 , 글씨가 붉게 보이는 양각)’으로 나뉜다. 이 둘을 합친 것은 주백상간인(朱白相間印 음각과 양각의 혼합)이라고 불렀다. 주로 성과 이름(성명인)을 글씨가 희게 보이는 백문으로, 아호(아호인) 등을 글씨가 붉게 나오는 주문으로 새겼다.
인장의 운치는 ‘유인(游印)’에 있다.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짧은 글귀나 그림에 어울리는 글귀 혹은 좌우명을 새긴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강가에서 조각배를 타고 여유를 즐기는 선비를 그린 <주상관매도>에 ‘심취호산수’(心醉好山水;좋은 산수에 마음이 취하네)라는 멋진 유인을 찍었다.
겸재 정선은 시인이었던 친구 이병연과의 아름다운 사귐을 형상화한 <시화상간도>에 ‘천금물전(千金勿傳)’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천금이나 되는 큰 돈을 준다해도 이 그림을 남의 손에 넘기지 말라는 뜻이니 친구를 향한 겸재의 우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또 파격적인 화풍으로 유명했던 중국 청나라 화가 팔대산인은 ‘가득신선(可得神仙; 신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뜻), 역시 청나라 화가 석도는 ‘치절(痴絶)’이라는 글귀를 새긴 도장으로 그림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동양의 화가들은 이렇듯 조그만 인장 하나에 멋과 여유, 혹은 생에 대한 의지를 담았던 것이다.
<작화추색도>의 수십개 도장은 누구의 것일까
↑ 조맹부의 <작화추색도> 부분. 그림 위에만 50여개의 인장이 찍혀 있다.
중국 원나라의 문인화가 조맹부(1254∼1322)가 그린 <작화추색도>를 본 일이 있는가. 관료를 지냈던 조맹부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인 1295년에 그린 그림이다. 외롭게 지내던 그는 오로지 주밀과 친하게 지냈다. 주밀(周蜜 ; 1232∼1298)을 위해 주씨 집안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산동 제남의 교외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는 화불주산(華不注山)과 작산(鵲山)을 각각 둘러본 뒤 이 두 산을 한 화면에 그렸다. 그림 지도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송설체로 제시를 써서 주밀에게 선물했다. 오른편의 삼각형처럼 생긴 산이 화산, 왼편의 호박처럼 생긴 산이 작산이다.
뒤의 집이 앞의 집보다 큰, 원근감을 무시한 풍경 자체도 특이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무수히 찍힌 붉은 인장들이다. 50개가 넘는다. 그 많은 인장은 누구의 것일까. 화가인 조맹부가 찍은 것일까. 정작 그 많은 인장 중에서 작가인 조맹부의 것은 딱 하나다. 호박 모양의 화산 오른 편, 제발 뒤에 찍힌 ‘조씨자앙(趙氏子昻)’이라는 네모난 붉은 인장(주문방인)이다. ‘자앙(子昻)’이라는 자를 새긴 것이다.
나머지는 다 수장가들의 것이다. 그들은 그림을 꺼내서 볼 때 마다 찍었다는 얘기다. 천하의 명품을 소장하고 이를 감상하는 뿌듯한 소회를 인장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그 많은 도장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가장 많은 것은 명나라의 개인 컬렉터 항원변(項元?) 1525∼1590)과 중국 황실 컬렉터의 대명사였던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1711∼1799)의 것이었다. 건륭제의 것이 11개 가량, 항원변(項元?) 1525∼1590)의 것이 12개 정도로 추정됐다.
이들 수장가들도 성명이나 호를 새긴 전각 뿐 아니라 혹은 멋들어진 뜻을 새긴 유인을 찍었다. 건륭황제의 것으로는 ‘건륭감상(乾隆鑑賞)’, ‘건륭어람지보(乾隆御覽之寶)’, ‘고희천자(古希天子)’, ‘삼희당정감새(三希堂精鑑璽)’, ‘의자손(宜子孫)자자손손 좋아라)’ 등 다양하다.
작화추색도에 찍힌 항원변의 수장인에는 ‘원변지인(元?之印)’, ‘자경(子項)’, ‘자경진비(子項珍秘)’ ‘항원변인(元?印)’, ‘항묵림감상(項墨林鑑賞)’ ‘묵림(墨林)’ 등이 눈에 띈다. 자신의 자 자경(子京)과 호 묵림산인(墨林山人) 등을 수장인으로 즐겨 쓴 것이다. 자신의 감식안에 대한 자긍심이 엿보이는 ‘신품(神品)’ 도 그가 즐겨 찍은 수장인이다.
명나라 초기 대규모 개인 수장 시대를 대표하는 항원변은 황제보다 많은 컬렉션을 자랑했는데, 몇 개 거느린 전당포가 자금줄이었다고 한다.
유명 수장가의 도장이 찍힌 서화는 그만큼 권위를 상징한다. 또 수장인을 눈여겨보면 컬렉션의 손바뀜 역사를 알 수 있다. 대체로 중국의 명품 고서화는 명말 항원변에서, 청초 양청표와 안기로, 그리고 건륭제로 이어졌다.
황제 수장가의 오만함…그림을 망치다
↑ 조맹부 <이양도> 조맹부의 다른 그림에도 이처럼 엄청난 인장이 찍혀 있다.
문제는 수장인의 남발이다. ‘시서화인’이라해서 사절로 꼽히는 도장은 그 자체로서도 예술이지만 인장이 어디에 찍히는 가에 따라 그림이 살아나거나 망치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찍힌 수장인들은 그런 것을 깡그리 무시됐다. 전선의 <부옥산거도>, 조맹부의 <인기도(人騎圖)>, 염입본의 <보련도>, 예찬의 <용슬재도>….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거의 이런 식으로 수장인의 홍수를 이룬다. 마치 얼굴이 핀 여드름처럼 보기 흉하다. 항원변의 인장도 숫자는 적지 않지만 대체로 그림의 가장 자리에 열을 지어 찍었다. 하지만 건륭황제의 수장인을 보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황제로서의 오만함이 엿보인다. 거칠 것 없는 그는 그림의 상단 중앙에, 그것도 대문짝만하게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듯 꽝꽝 인장을 눌렀던 것이다.
특히 건륭제는 작품의 미감을 고려하지 않는 난폭한 도장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예가 원대 방종의(方從義)의 고고정도(高高亭圖)에 찍힌 수장인이다. 예서와 초서로 번갈아 쓴 그림 속 제발은 얼마나 세련되고 운치가 있는가. 하지만 건륭황제가 소장하면서 화면 중앙 상단에 ‘건륭어람지보(乾隆御覽之寶)라는 붉은 도장을 찍는 바람에 그림의 아름다움이 반감되고 말았다. 그림을 죽이는 수장인이인 것이다.
이런 건륭황제를 두고 미국의 중국화 전문가 마이클 설리반은 이렇게 비꼬았다.
“지칠 줄 모르는 원기왕성한 사람이요, 탐욕스러운 미술품 수집가며 빈약하고 독단적인 감식가였으며, 자신의 제국의 역할의 한 기능으로서 중국의 미술 유산 위에다 자신의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남겨두도록 결정했던, 바로 그 지칠 줄 모르게 제기를 쓰고 낙관을 한 바라 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처음에는 서명도 보일 듯 말 듯
↑ 송 범관의 <계산행려도>에 쓰여진 범관의 관(款, 서명)
나무 잎 파리 속에 숨은 듯 쓰여 있다.
인장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서명조차 없었다. 중국 회화에서 서명이 등장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이지만 이 시기 그림에는 서명이 없는 것도 있고, 있더라도 바위틈이나 나무 숲 속에 숨겨져 있다. 그림을 버릴 까 우려해 화폭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기듯이 쓴 것이다. 북송 때의 화가인 범관 의<계산행려도>가 대표적인 예다.
얼마나 눈에 띄지 않게 썼는지 범관의 서명이 발견된 것은 현대에 와서였다. 1970년대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대만고궁박물관에서 소장 유물을 정리하던 중 연구원이 발견했다. 이로써 이 그림은 범관이 그린 진작임이 100% 증명됐다.
↑ 곽희 <조춘도>의 관.
‘조춘 임자계 곽희화’이라는 서명과 함께 ‘곽희필(郭熙筆)’이라고 새겨진 인장이 찍혀 있다
인장이 찍힌 최초의 그림은 역시 북송대 화가인 곽희의 <조춘도>다. 초봄의 물오른 나무 가지를 게발톱처럼 그리고, 붓터치를 습하게 하여 문드러지게 그린 암벽 표현이 특징이다. 이 그림의 왼쪽 빈 공간에 늘어진 나뭇가지 마냥 글씨가 쓰여 있다. ‘조춘 임자계 곽희 화(早春 壬子季 郭熙畵)’, 임자년 이른 봄에 곽희가 그리다는 뜻이다. 이 관지 위에 ‘곽희필’이라는 네모난 인장이 찍혀있다.
하지만 원나라 이후 문인화가 대세를 이루면서 제발과 함께 인장도 중시됐다. 또한 여기에 위에서 보인 예처럼 수장가 감정가 감상가들까지 자신의 인장을 마무 마구 찍으면서 그림 속 인장이 곰보 자국처럼 많아지게 된 것이다.
겸손하고 예를 갖춘 조선의 컬렉터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건륭제가 찍은 횡포와 같은 수장인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그림을 대할 때도 예를 갖췄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중인 수장가 석농 김광국소장품을 살펴보았다. 염입본의 <보련도>,
그러나 수장가로서의 자긍심과 서화에 대한 건륭제 못지 않았다. 그가 소장했던 신한평의 <미인도>에 찍힌 인장을 보라. ‘욕장만권이서 종신소영기중(欲藏萬券異書 終身嘯詠其中)’.
많은 책, 진귀한 글들을 수장하여 평생토록 그 가운데서 읊조리며 살리라는 뜻이다. 옛날 책은 서화와 함께 수장가들의 대표적인 컬렉션 목록이었으니, 이는 그림 속에서 살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조선의 컬렉터들은 수장인을 통해 자신의 권세를 세상에 알리려 했던 중국의 감상가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 피터 솅크 <술타니에 풍경>, 18세기 에칭, 21.0 x 25. 7 cm .
그가 소장했던 네덜란드 그림 <슐타니에 풍경>을 보면 그림 안에는 수장인이 없다. 그는 장황을 해서 별도의 종이에 제발과 함께 ‘김광국인’이라는 성명인과 ‘원빈씨’라는 아호인을 찍어 자신이 수장자임을 표시했다.
↑ 신한평의 <미인도>
신한평은 신윤복의 아버지다. 그가 김광국의 주문을 받아 그린 이 그림에도 별도의 종이로 장황을 한 뒤 제발과 함께 김광국의 수장인이 찍혀 있다. 특히 제발의 앞 부분에는 ‘욕장만권이서 종신소영기중’이라는 멋스러운 글귀의 도장(두인)이 찍혀 있다. 오른 쪽은 이 도장을 확대한 것.
↑ 능호관 이인상 <도봉계류도> , 종이에 수묵, 20. 5 x 47.6 cm. 그림 오른쪽 제발 밑에 ‘자자손손영보용’ 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능호관 이인상의 <도봉계류도> 부채그림에는 어느 수장가의 것으로 보이는 유인이 있다. ‘자자손손 영보용 (子子孫孫 永寶用)’ 자자손손 영원이 보배로 여겨 간직하라는 뜻이다. 부채 그림에는 붉은 수장인 하나뿐이다. 그래서 흑백 수묵의 산수에 한 떨기 꽃 같다. 그림을 살리는 수장인인 것이다. 조선의 컬렉터들은 이렇게 그림 앞에서 겸손했고 예의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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