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5. 18:22ㆍ즐거운 사자성어
귤중지락(橘中之樂)과 신선놀음[난가(爛柯)]
- 바둑의 아칭(雅稱)
바둑을 일컫는 여러 별칭(別稱) 중에, 귤중지락(橘中之樂)과 난가(爛柯)라는 아칭(雅稱)이 있다. 이솝우화 같은, 어쩌면 신화 같은 전설에서 유래된 말이다.
“신화(MYTH)는 경이로운 자연현상에 대한 인간의 설명적 시도에서 나왔다.”
“신화는 인간의 상징적 표현기술의 산물이다.” 등 신화 발생의 여러 입장에서 볼 때,< 신화와 종교(차충호 지음) P5~P7 >
신화는 다양하고 풍부한 자유로운 상상력의 보고(寶庫)이다. 그리고 신화는 일련의 정리된 사건들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A Message), 즉 교훈(Instructions)이 담겨져 있다고 보는<앞 책 p.3> 해석학적 관점에서, 귤중지락과 난가의 전설을 재조명(再照明)해 보고자 한다.
귤중지락과 상산사호(商山四皓)
중국 내륙 쪽 깊숙이 들어앉은 파촉(巴蜀)지방의 어느 농가 울타리에 수 백 년 묵은 커다란 감귤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해 유난히 큰 귤 한 개가 매달려 있어 그 집주인이 한여름 동안 조심스럽게 잘 가꾸었더니 세말 들이 단지만큼이나 크게 자랐다.
대대로 착하게 살아왔던 이 집 식구들은 필시 무슨 길조일 것으로 짐작 하고 다 익었을 때 조심스럽게 큰 귤을 반으로 쪼개니 이게 웬일인가. 귤 속에는 좌우 두 쌍의 노인 네 사람이 두 틀의 바둑판을 놓고 오로(烏鷺)삼 매경에 흠뻑 빠져 있다, 오히려 큰 귤을 갈라놓아 신선놀음의 무르익은 경 지를 깨뜨려 버린 것을 심히 질책하면서 땅으로 껑충 뛰어내리더니 별안 간 분출하는 샘물의 안개 속에 하안 용(龍)으로 돌변하여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일은 과연 이들 네 노인들이 누구였 느냐는 의문이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유명한 상산사호(商山四皓)라고 주석을 붙였다는 것이다.
상산(商山)은 중국 섬서성 상현(陝西省商縣) 동쪽에 위치한 명산의 이름 이다. 어지러운 난세를 피하여 숨어살기에 알맞은 험준한 산으로 진(秦) 나라 말기 정치가 혼란하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에 상산 깊숙이 은 둔하여 바둑 두는 일로 낙을 삼던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 (夏黃公), 록리선생(록里先生) 네 사람이 모두 머리카락, 수염, 눈썹이 하얗 게 신 백발노인이었으므로 이들을 가리켜 '상산사호'라 불렀는데,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고조(漢高祖)가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게 되어 이들 원로를 중용하려고 했으나 끝내 고사한 채 여전히 깊은 산 중에서 바둑으로 소일 하며 난세를 피하여 숨어살았다.
간혹 나무꾼이 나무하러 입산했다가 풍신 좋은 백발노인 네 사람이 나 무 그늘 아래 넓은 바위에 둘러앉아 바둑 두는 광경을 보고 돌아와서 그 들의 고상한 이야기를 전했을 뿐이었다.
- 이승우 바둑이야기(전원문화사) P28~P29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설따라 삼천리'류의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또는 귤처럼 작은 공간에서도 서로 마주 앉아 바둑만 둘 수 있다면 모든 세상사를 잊고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귤 속인가? 왜 귤 속에서 만의 즐거움인가? 어쩌면, 제비가 물어다 준 흥부의 박 이야기와 혹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왜 두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도 아닌 네 사람의 백발노인인가? 왜 한 틀도 아닌 두 틀의 바둑판인가?
爛柯의 傳說
중국의 《술이기(述異記)》에 따르면, 중국 진(晋)나라(265∼420) 때 석 강(淅江) 상류인 구주의 석실산(石室山) 아랫마을에 왕질(王質)이라는 나무 꾼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평소에 가보지 못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두 동자(童子)가 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왕질이 재미가 나서 옆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구경을 하고 있으려니, 한 동자가 주머니에서 귤 비슷한 것을 꺼내주면서 먹으라 고 하였다. 왕질은 그것을 받아먹고 나니 배고픈 줄 모르고 바둑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맛있는 열매였다. 바둑이 한판 끝나 자 한 동자가 도끼자루를 가리키며 자루가 썩었다고 하였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왕질은 그제서야 자루 없는 도끼를 들고 황급 히 마을로 내려와 보니 전에 살던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사람 들이 그의 집을 들락거리고 있었으며 집 안에서는 제사를 준비하느라 분 주하였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어보았더니 이 집 주인의 증조부인 왕질이 라는 사람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이 날을 제삿날로 삼았 다고 하였다.
두 동자는 신선이어서 바둑 한판 두는 데 수 백 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 이다. 이렇듯 왕질의 전설에서 유래한 난가는 그 후 바둑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흔히 어떤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 는 것을 일컬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고 한다. 이때 신 선놀음이란 바둑을 뜻한다.
그 신선들이 바둑을 둔 산을 난가산(爛柯山)이라 하였고, 왕질이 본 신 선들이 둔 바둑을 기록한 《난가도(爛柯圖)》가 송(宋)나라 기사인 이일민 (李逸民)이 지은 《망우청락당집(忘憂淸樂堂集)》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 NAVER 백과사전 난가[爛柯]
이 이야기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유래된 설화로, 많은 사람들이 속담처럼 바둑은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모르고 구경할 만큼 재미있다는 점을 과장한 이야기 정도로 알고 있다.
정말 단순히 재미만을 강조하기 위한 전설일까? 그렇다면, 평범한 나무꾼이 바둑 한 판 두는 데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신선들의 바둑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를 만큼 재미를 느낄 정도로, 그 바둑 수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신선들의 바둑 한 판은 왜 수 백 년의 시간이 걸리는 걸까? 혹 파라다이스를 상징하는 무릉도원(武陵挑園)의 이야기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바둑은 우주의 보편적 운행 법칙을 밝히는 놀이 도구다.>라는 가설에서 위의 두 전설을 재조명해 보자.
먼저 귤중지락을 살펴보자. 왜 귤인가. 바둑판이 바로 귤 모양이다. 귤 속은 수많은 알갱이를 감싼 조각 덩어리가 8개에서 10개로 평균 9개가 있는데 간혹 7개와 11개짜리도 보이지만 평균 9개엔 변함이 없다. 또한 9개가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다. 이것은 바로 바둑판의 9궁을 나타낸다. 따라서 바둑판은 귤 속 같은 무한한 우주 공간을 나타낸다.
태양계와 그 밖에 무수한 은하계가 있는 우주 공간을, 그 무엇이 귤 속만큼 흡사하게 비유할 수 있겠는가. 두 틀의 바둑판은 귤을 반으로 자르면 두 틀의 바둑판이 되는 이치이다, 또한 네 명의 노인은 당연히 두 틀의 바둑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귤 하나가 이미 우주 공간을 나타내는 하나의 바둑판일 수도 있다. 그러나 天元과 변 그리고 귀의 특수성이 있는 바둑판의 특성상 귤을 반으로 자른 두 틀의 바둑판이 이치에 맞는 것 같다. 원을 방으로 나타낸 이치이다. 이야기 전개 상, 바둑판 한 틀이나 두 틀이나 아무 상관이 없는데 왜 굳이 두 틀 이겠는가. 또한 두 틀의 바둑판을 강조하기위해 4명의 노인을 등장시켜야만 했을 것이다. 구경하는 사람이 없으니 조금은 어색하지 않는가.
'상산사호'이야기는 후에 네 명의 노인 어쩌면 신선을 상산사호로 각색 한 듯하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구한 동양 철학의 핵심인 '물아일여(物我一如)'사상, 더 나아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천부경>의 중심사상 -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 이 바로 그 것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람 중에 천지가 하나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바둑은 '물아일여'을 이루기 위한 정신 수양 도구임을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귤 속의 즐거움, 바둑 삼매경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좀 억지스럽긴 해도, '흥부와 놀부' 작가가 여기서 모티브를 받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흥부처럼 착하게 살며 정신 수양을 쌓으면, 이미 박 속(자신의 마음 속)에 금은보화가 가득 쌓이는 복을 받는 게 아닐까.
다음은 난가의 전설을 살펴보자. 귤중지락이 우주의 공간적 개념을 설명했다면, 난가는 우주의 시간적 개념을 강조한 전설이다. 지구의 하루와 태양계의 하루 그리고 은하계의 하루는 각각 다르다. 각각의 바둑 한 판은 담는 시간이 다르다.
어느 바둑 한 판은 무한한 우주를 담은 한 판이고, 어느 한 판은 하루살이의 한 판을 담은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 사람의 수양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울러 평범한 나무꾼과 동자가 등장하는 것은 바둑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그 수양 정도에 따라 수백 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이 요즘은 속세를 잊을 만큼 경치 좋은 곳으로 많이 퇴색되었다. 무릉도원은 이 쪽 바깥세상과 다른 시간을 사는 곳이라는 개념이 강하다. 그리고 유토피아 같은 이상향을 뜻하는 말이다.
난가의 전설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 바둑의 수양 정도에 따라 시간을 초월한 <물아일여>의 인간 이상향을 도연명이 무릉도원으로 각색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의 두 전설을 '바둑은 천부경 풀이를 돕기 위한 놀이 도구다'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렇게 황당한 이야기만은 아니며 보다 실질적인 가르침이 있는 이야기다. '우주'라는 말에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 듯, 불가에서 가르치는 "가장 큰 것은 가장 작은 것과 같고, 영원은 찰나와 같다'는 시공관이 바둑 한 판에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전설이다.
[출처] 귤중지락(橘中之樂)과 신선놀음[난가(爛柯)] - 바둑의 아칭(雅稱)|작성자 무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