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상주와 춘추전국시대의 금문

2012. 3. 15. 09:18서예일반

. 商周와 春秋 戰國시대의 金文

1. 金文의 槪況

先秦시대의 서예 작품과 서체의 이름은 대체로 서사 재료의 종류에 따라 정하는 특성이 있다. 甲骨文, 金文, 竹簡書, 木牘, 帛書 등의 이름이 모두 서사 재료에 따라서 부쳐진 이름으로 秦나라 시대부터 생성되는 篆書, 隸書, 草書 등의 이름과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甲骨文과 金文이 큰 의미에서는 篆書에 속하며 또 小篆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大篆이라는 서체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구체적 개념으로 甲骨文과 金文을 서체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金文은 금속 재료에 주조하거나 혹은 새겨진 모든 문자를 말하지만 書藝學에서 사용하는 金文의 개념은 秦나라 시대 이전에 靑銅器에 鑄刻되어 있는 명문의 서체를 말한다. 포괄적인 서체 분류의 방법으로 金文을 大篆의 영역에 포함하며 높여 부르는 이름으로 吉金銘文을 사용하기도 한다. 吉金이라는 명사는『沇兒鍾』,『王孫鍾』 등의 명문에 자주 보이는 단어로 ‘吉’은 좋다, 아름답다 등의 뜻이 있어서 ‘吉金’은 청동기가 당시의 매우 귀중하며 중요한 용도로 사용되어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대의 사람들은 禮樂의 典禮에 사용하는 청동기를 대신하여 ‘吉金’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청동기의 명문을 吉金銘文이라는 雅號를 붙여 부르고 또 金文으로 간략하게 줄여 부르게 되었다.

金文의 기원은 甲骨文과 같은 시대인 殷商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아 볼 수 있으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한 시대는 西周와 春秋 戰國시대이다. 金文의 이름은 한자가 청동기라는 금속성 재료에 주조되어 있으므로 하여 붙여지게 되었다. 商周시대의 청동기 중에서 禮器에 많이 사용되어진 것이 鼎이고, 樂器에 가장 많이 쓰여진 것이 鍾이어서 金文이 鍾鼎文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지금까지 출토된 商周와 春秋 戰國시대의 것으로 한자가 주조되어 있는 청동기는 종류가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용도 또한 祭器, 禮器, 樂器이외에도 食器, 酒器, 洗器, 量器, 兵器, 車馬器 등이 있다. 청동기의 형태와 용도에 따라서 붙여진 이름으로는 鼎, 鍾, 鐘, 鬲, 敦, 豆, 缶, 簋, 卣, 盤, 盆, 盂, 角, 尊, 彝, 觥, 觚, 甁, 杯, 壺, 爵, 釜, 盨, 甑, 瓿, 簠, 罍, 斝, 甗, 匜, 戟 및 權量, 符節, 刀劍 등 50종류가 넘고 있어서 鍾鼎이라는 두 글자로 청동기에 주조된 서체의 이름을 대신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따라서 書藝學界에서는 金文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고 문자학계에서는 銅器 銘文의 이름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金文의 기원은 殷商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을 수 있으며 甲骨文과 함께 가장 오래된 한자 서체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殷商시대의 金文 작품은 몇 점되지 않으나 그것이 존재하는 그 자체에 매우 깊은 의미가 부여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작품을 근거로 할 때 殷商시대의 서사 재료는 甲骨과 청동기이며 편의상 서사 재료의 종류에 甲骨文과 金文이라는 서체의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의 甲骨文과 金文은 서로 다른 서체가 아니라 당시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던 하나의 서체이다. 다만 甲骨文은 새겨서 이루어 졌고 金文은 새긴 후 주조하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차이 때문에 자형과 미감이 다르게 표현된 것뿐이다. 甲骨文과 金文을 근거로 殷商시대에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서체를 분명하게 연구할 수 있고 또 비록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갑골과 청동기 이외에 옥, 돌, 도자기, 竹簡書과 木牘, 비단 등의 서사 재료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충분한 추측을 할 수 있게 한다.

殷商시대의 작품은 甲骨文이 金文보다 훨씬 많으나 西周시대 이후에는 金文이 작품의 수량도 많을 뿐 아니라 보존이 매우 완전하여 당시의 서예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秦始皇이 戰國을 통일한 후 秦나라 계통의 한자를 중심으로 문자를 통일할 때 金文 계열의 서체는 小篆으로 통일하였다. 小篆의 이름을 사용한 이후부터 先秦시대의 篆書체는 大篆으로 불리게 되었다. 金文속에는 小篆을 포함한 籒文, 鳥蟲篆, 九疊篆, 奇篆, 蝌蚪篆 등 大篆의 모든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隸書, 草書, 楷書 등 今體 서체가 탄생 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金文의 연구는 古體에서 今體로 변천하는 서체의 변천사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今體에 속하는 여러 서체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

甲骨文과 金文이 출현한 시기는 모두 殷商시대이나 先秦시대의 서적 중에서 甲骨文에 관하여 기록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우나 金文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墨子‧非命下』에 “書於竹帛, 鏤於金石, 琢於盤盂.”(대나무와 비단에 쓰고 청동기와 돌에 새기며 소반과 바리에 조각하다.)라 하였으며『禮記‧大學』에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商나라 湯王의 金文에서 말하길 ‘진실로 발전하려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여야 한다’.)이라 하여 商나라 시대에 이미 金文이 사용되었고 春秋시대에는 金文 뿐만 아니라 竹簡書과 帛書가 사용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金文에 관한 연구는 매우 일찍부터 이루어 졌으며 그 성과도 대단히 크다.『史記‧武帝紀』에 漢나라 武帝시대에 汾水에서 청동으로 만든 鼎을 얻었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으며『漢書‧郊祀志』에 宣帝시대에 殷商과 春秋 戰國시대의 청동기가 발견되었으며 張敞 등이 청동기와 金文에 대하여 의논을 제기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鄭衆, 鄭玄, 阮諶 등이 청동기에 대해 기술한 내용이 있고『梁書』,『南史』,『魏書』 등에 약간의 기록이 있으나 唐나라 시대 이전의 청동기와 金文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와 저작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청동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전문 서적을 편찬한 시대는 宋나라 시대이다. 趙明誠의『金石錄』에는 宋나라 眞宗시대의 咸平 3년(1000)에 句中正, 杜鎬驗 등의 학자가 당시에 발견된 청동기에 대해『說文解字』,『墨子』,『春秋傳』 등의 자료를 근거로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청동기에 새겨진 그림을 그대로 돌에 옮겨 새긴『皇祐三館古器圖』에 관해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의 청동기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게 한다. 宋나라 시대에 청동기와 金文을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歐陽修이다. 歐陽修는『集古錄跋尾』와『集古錄』을 저술하여 청동기 명문의 내용을 근거로『史記』와 여러 역사책의 연표를 수정하였으며 역대 청동기의 형식과 내용의 체계를 정리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후부터 사대부들은 청동기와 金文을 즐겨 소장하였으며 내용을 연구하는 학자도 많아져 金石學이 매우 발전하였다. 宋나라 시대 이후에 성행한 金石學의 특징은 청동기와 명문의 내용을 주로 연구하여 고대의 역사를 연구하거나 서적을 고증한 것이다. 金文의 자형과 심미적 특징을 연구하거나 金文 서체를 창작 활동에 응용하는 등 서예 작품으로서의 연구는 淸나라 시대의 碑學이 성행한 이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淸나라 시대 고증학, 금석학, 문자학 등의 博學이 성행하는 것과 함께 書藝學界에서도 碑學이 크게 성행하게 된다. 碑學을 이론으로 하는 비파의 서예가는 王羲之의 閣帖을 중심으로 臨書하고 창작하는 帖學의 전통에서 벗어나 唐나라 시대 이전의 금석 서예와 서풍을 중심으로 臨書하고 창작하였다. 비파의 서예가는 秦漢과 南北朝시대의 刻石 서예 뿐 아니라 先秦시대의 金文에서도 새로운 심미적 요소를 찾아내 작품의 창작에 응용하였다. 淸나라 중, 후기에 비로소 金文이 금석학, 문자학, 書藝學 등 모든 영역에서 연구되어지고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아 金文學의 새로운 학술 영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甲骨文이 발견되기 이전인 18, 9세기의 淸나라 시대의 서예가들은 金文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유일한 한자로 인정하고 연구하고 창작하였다.

金文은 청동기에 鑄刻되거나 새겨진 銘文이기 때문에 金文의 역사는 청동기와 운명을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에서 청동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商나라 시대이며 가장 보편적으로 쓰여진 것은 西周시대 이후이다. 서기전 6, 7세기에 철기가 발명되어 무기나 생활 도구로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거나 禮樂의 전례에는 청동기를 꾸준히 사용하였다. 秦漢시대에 竹帛이 대량 사용되고 石碑를 새기는 전통이 탄생할 때까지 金文은 가장 중요한 서사 재료 가운데 하나였다. 청동기에 鑄刻되어진 金文의 형식은 양각과 음각으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 음각을 款이라 부르고 양각을 識(지)라 부르고 있으며 통합하여 款識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金文은 음각으로 鑄造되어 있으며 양각으로 주조된 것은 극히 드물고 칼로 새겨진 것은 春秋 戰國시대 이후에 보이기 시작한다.

金文의 筆劃과 자형은 글씨를 쓰고 새기는 사람의 뜻 이외에도 명문의 주조 과정에서 우연과 필연의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형성된다. 金文의 문장과 글씨는 청동기를 제작하는 주인에 의해 제공되어 전문 匠人에 의해 새겨지고 주조되어 이루어 졌다. 이러한 명문은 書-刻-鑄造-淸砂의 4가지 공정을 거쳐서 완전한 金文으로 탄생하기 때문에 같은 시대의 같은 서체라 할지라도 새겨서 이루어진 甲骨文과는 서체와 서풍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 金文을 주조할 때 쇳물의 흐름으로 생겨나는 우연한 효과는 金文의 筆劃과 자형이 다른 서체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으로 화선지에 먹물이 번져서 생기는 효과와 같이 매우 자연스럽고 오묘한 심미적 영역을 형성한다. 殷商시대의 甲骨文에 이미 당시에 붓이 사용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어 붓은 당시에 이미 중요한 서사 도구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대부분의 甲骨文이 새겨서 이루어진 까닭에 筆劃이 딱딱하고 각이 많아 붓으로 쓴 글씨의 심미적 특징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金文은 비록 새기고 주조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筆劃은 풍부한 심미적 요소를 갖추게 되어 붓으로 쓴 효과뿐만 아니라 칼과 붓의 조화와 주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金文의 문자 형태와 서사 방법을 살펴보면 당시의 사람들은 筆劃과 결구, 章法 등 서예의 예술적 구성 요소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金文은 先秦시대 서예의 중요한 영역으로 순수한 예술로서도 매우 높은 가치가 인정될 뿐 아니라 古文字의 학습이나 大篆 계통의 작품 창작에 매우 중요하고 유익한 자료가 된다.

2. 金文의 내용 및 형식

書, 刻, 鑄. 淸砂의 네 단계의 공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金文의 내용과 형식은 매우 다양하다. 殷商시대의 金文은 象形性과 종교성이 짙은 문양과 문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문양과 문자는 부족의 徽章이나 자신들의 행복을 기원한 상징 부호가 많으며 문장을 이루고 있는 문자도 부족의 이름이나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여 휘장이나 상징 부호의 보조 역할을 한다.

1938년 河南省 安陽의 殷墟에서 殷商시대의 청동기가 한 점 발견되었는데 무게가 875㎏이나 나가는 거대한 鼎이다. 鼎의 내부에 司母戊이라는 글자가 주조되어 있어『司母戊鼎』이라 불리며 명문은『母戊方鼎器銘』이라 불린다. 이 鼎은 殷王인 文武丁(文丁)이 어머니 ‘戊’의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祭器이다. ‘司’자는 ‘祠’자로 제사의 뜻이고 ‘母戊’는 文王의 어머니 이름이 ‘戊’라는 뜻이다. 司母戊鼎은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 가운데 金文이 주조되어 있는 것으로 최초의 작품이다. 그 내용이 매우 간단하여 殷왕이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상징성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殷商의 金文 가운데에는 사람, 들짐승, 새, 고기 등과 같은 그림과 한자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 많이 있다. 이러한 것은 사냥이나 수렵 등과 같은 사회 생활의 현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만물을 숭배하고 또 그것을 기초로 문자를 만들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청동기가 禮樂의 도구로 주로 사용되던 春秋 戰國시대 이전은 중국 역사상 전쟁이 가장 많았고 권력 다툼이 치열하였을 뿐 아니라 사상과 철학이 매우 다양한 시대이다. 夏, 商, 周와 戰國시대는 1800여 년의 기나긴 분열과 전쟁 속에서 권력 의식이 싹트고 정치적 역량이 사회와 문화 의식의 핵심인 우주 의식과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어 형상의 표준 양식을 중시하게 되었다. 周나라 시대 이전에는 하늘과 자연을 숭배하고 태양신과 조상신을 받들어 모시는 것으로 그들의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尊神’ 사상의 우주관은 周나라 시대로 넘어오면서 점차 인간을 존중하는 ‘重人’의 자아 의식이 싹트게 된다. 周나라 시대에는 禮器나 樂器, 祭器 이외에 생활 용구로서도 청동기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를 단순히 청동기를 제작하는 기술의 발전만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상과 사회제도를 함께 연관시켜 이해하면 金文의 내용과 형식을 연구하는데 지름길이 될 것이다.

西周시대의 金文은 그 내용과 형식에서도 하늘과 조상신에 대한 점이나 제사와 같은 것은 점차 줄어들고 전쟁과 盟約, 임금과 신하의 관계 등 사회의 현실을 담고 있는 記事文이 중심을 이루어 나타나게 된다. 西周시대는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수렵 생활에서 농경 생활의 사회로 바뀐 天子가 중심이 되는 봉건제의 농경 사회이다. 봉건제의 기초 위에서 위정자가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禮와 義로서 그 중심은 천자가 되며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여 지키는 무형의 규칙으로 자리잡게 된다. 새로운 경제 제도와 宗法 제도는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위정자와 그 조상을 숭배하며 그들의 德治를 찬양하게 하였다. 따라서 청동기의 형식은 禮器와 樂器가 다량으로 출현하게 되었으며 金文도 천자를 찬양하고 조상을 송덕하는 내용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 제도와 도덕의 요구가 청동기의 형식과 金文 서예의 심미적 특징을 결정하게 되어 규범적이면서도 웅장함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先秦시대의 청동기 가운데 명문이 있는 것만 하여도 8000점을 넘고 있으며 글자가 적은 것은 한 두 글자에서 많은 것은 500자에 이르는 것도 있다. 그 중에서 5000점 이상이 西周시대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10자 이상의 명문이 있는 청동기만 하여도 700점에 이르고 있다. 容庚이 편찬한『金文編』에 의하면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 명문의 한자는 4천자를 넘으며 그 가운데 읽어서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2400여자이다. 이와 같이 西周시대에는 金文의 황금기로 서예사에서 殷나라 시대의 甲骨文과 나란히 ‘殷商甲骨文, 西周金文’으로 불리고 있다.

西周시대에는 사회의 상황이 점점 복잡해져 문자의 쓰임이 많아지고 된다. 따라서 새로운 한자가 자꾸 생겨나게 되었으며 한자의 수가 증가하는 것과 동시에 문장을 쓰는 수준도 높아지게 되었다. 문자 문화의 성숙은 청동기에 鑄刻하는 金文의 내용과 형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며 禮義 문화의 요구와 함께 시대가 요구하는 일정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鬲과 같은 항아리 주둥이나 목에 鑄刻된 金文은 오른 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을 향하여 한 줄로 쓰여 있으나 비교적 넓은 면적에 鑄刻된 金文은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왼쪽으로 줄을 바꾸어 읽을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방법과 순서로 쓰는 전통은 甲骨文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甲骨文은 서사 재료의 성격과 용도의 특수성 때문에 격식이 완전하게 고정되지 못하였다. 金文에서의 완성된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의 書順은 한자의 書順을 완전한 法式으로 자리잡게 하였으며 서예의 심미적 범주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利簋』는 周나라 초기의 청동기로 1976년 陝西省 臨潼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의 내부에 4행, 32자의 명문이 鑄刻되어 있으며 周나라 武王이 殷나라를 정복하고 7일째 되는 날에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周나라의 武王이 殷나라를 정벌한 유일한 기록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와 같이 周나라 시대 金文의 내용은 국가의 중대한 사건과 그 결과에 따른 상벌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상을 받은 신하가 국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가문의 영광을 대대로 남기기 위하여 청동기로 禮器나 祭器를 제작하여 명문을 새겨 넣었다. 청동기 명문의 내용은 ① 제사, 禮儀 등 禮樂 ② 왕과 조상의 頌德 ③ 策命 및 상벌 ④ 전쟁 ⑤ 토지, 관직 등 사회 제도 ⑥ 교육 ⑦ 干支 등을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또한 명문은 記事文의 위주로 하고 있으며 대체로 ① 시간 ② 장소 ③ 受命者 ④ 冊命辭 ⑤ 頌德辭 ⑥ 作器 ⑦ 祝願辭 등의 순서와 형식을 따르고 있다. 아래에서 비록 짧은 문장이나 보편적 金文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있는 康鼎을 예로 들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 釋文(康鼎)

惟三月初吉甲戌, (시간)

王在康宮, (장소)

榮伯入右康. (儐相 및 受命者)

王命死司王家, 命汝幽黃‧鎥革. (冊命辭)

康拜稽首, 敢對揚天子丕顯休. (頌德辭)

用作朕文考寶尊鼎, (作器)

子子孫孫其萬年永寶用. (祝願辭)

* 번역

3월 初吉(매월 1일부터 7, 8일)의 甲戌, 周나라 왕이 康宮에 자리하고 榮伯이 들어와 康의 오른쪽에 자리하였다. 왕이 명하여 康에게 王家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상으로 검은 색의 佩玉 띠와 쇠로 만든 말 재갈을 하사하였다. 康은 예를 표하고 천자의 덕을 칭송하였다. 이에 나는 文德이 뛰어난 선친을 尊崇하며 보배로운 鼎을 만드니 子子孫孫 수 만년 영원히 보존하고 사용하길 기원한다.

康鼎에서와 같이 시간과 지점은 사건이 완료된 후 국왕이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상을 내리는 때와 장소이다. 儐相은 국왕을 동반하여 접대하는 사람이며 受命者는 명령을 받는 사람이고 冊命辭는 王命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頌德辭는 명령과 상을 받은 사람이 국왕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作器와 祝願辭는 자손들이 선대의 업적을 숭상하여 청동기를 만들고 영원히 기념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康鼎은 冊命의 내용을 기록한 청동기지만 다른 내용의 청동기에서도 그 형식은 大同小異하다고 말할 수 있다. 좀더 복잡한 내용의 청동기는 등장 인물이 많고 사건의 내용이 복잡할 뿐 기본적 형식은 비슷하다.

서기전 770년 周나라 平王이 洛陽으로 東遷한 이후의 周나라를 東周시대라 한다. 東周시대는 역사상으로 春秋와 戰國의 두 시대로 나누어 설명한다. 春秋는 당시 魯나라 隱公 원년(서기전 722)부터 哀公 14년(서기전 481)까지의 魯나라 역사책인『春秋』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戰國시대는『史記』의 六國年表가 시작하는 周나라 元王 원년(서기전 475)부터 秦나라가 六國을 통일한 秦始皇 26년(서기전 221)까지를 일컫는다. 洛陽으로 東遷한 이후의 周나라는 정치와 경제, 군사적 역량은 급격히 하락하여 天子는 이름만 존재하게 되고 대신 諸侯들의 실권이 증가하게 된다. 군사와 경제적으로 비교적 강대한 諸侯國들은 周나라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다투어 정벌하여 齊, 魯, 晋, 宋, 鄭, 秦, 楚, 吳, 越 등의 諸侯國이 서로 覇王으로 군림하며 春秋의 세력으로 정립되었다. 春秋시대의 분열과 전쟁은 戰國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많아지고 극렬하여 하루도 전쟁이 끊일 날이 없을 정도였으며 결국 秦, 楚, 燕, 齊, 韓, 魏, 趙의 戰國七雄이 각 나라별로 견제하며 대립하게 되었다. 春秋 戰國시대에는 각 諸侯國들이 독립적인 정치제도를 채택함에 따라 독자적 문화가 싹트게 된다. 따라서 金文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서체와 서풍이 西周시대의 통일된 것과는 달리 諸侯國마다 독특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春秋 戰國시대에는 청동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여 祭器와 樂器뿐만 아니라 생활 용기도 청동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銅鏡, 貨幣, 刀劍, 印章 등과 각종 농기구에도 청동을 사용하여 명문의 내용도 청동기의 형태와 특성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청동기 주인의 이름이나 관직 또는 휘장, 좋아하는 글귀, 匠人의 이름 등 각양 각색이다. 청동기를 주조하는 기술의 발전으로 청동기의 장식과 金文은 매우 섬세해지며 많은 장식을 하기에 이른다. 戰國시대의 중기까지만 하여도 祭器나 樂器 등 典禮에 사용하는 청동기 명문의 내용과 형식은 西周시대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나 서체와 서풍은 모든 청동기에서 春秋시대의 초기에 이미 각 제후국마다 서로 다르게 변천하였다. 戰國시대의 중 후기에는 각 지역마다 金文의 형태가 서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차이가 심하게 변하였으며 명문의 내용도 대부분 청동기 주인과 匠人에 관한 기록이며 글자 수도 현저하게 감소되는 것이 특징이다.

3. 金文 서체의 변천

1) 殷商과 西周시대의 金文

청동기 시대는 인류가 원시 시대의 긴 잠에서 깨어나 최초로 문자를 사용하며 역사의 한 장에 정식으로 등장한 시대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고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거치며 꾸준하게 진화하고 발전하였으나 그 속도는 매우 느려 100만년 이상의 긴 세월을 보내고서 문명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문자를 발명한 이후의 인류 문명은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발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국은 夏, 商, 周의 三代에 청동기와 한자를 발명하여 진정한 문명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청동기와 한자를 예술 영역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하였다.

청동기를 주조하고 한자를 鑄刻하는 과정에서 청동기와 한자 서체의 아름다움과 그들의 조화를 추구하는 심미적 요구로 인하여 金文 서체의 독특한 미적 영역이 형성될 수 있었다. 金文은 先秦시대에 존재하는 문자의 기록 방법인 刻寫와 書寫의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다시 鑄造하는 과정과 다듬는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서체의 형태와 심미적 범주가 刻寫 서체와 書寫 서체와는 매우 다르다. 새겨서 이루어진 甲骨文과 刻石 서예 작품은 비록 그 재료는 다르지만 한 번 혹은 몇 번을 새기고 쪼아 붓으로 쓴 느낌보다는 칼로 새긴 느낌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金文은 쓰고 새기는 과정을 거쳤으나 주조하는 공정을 한 번 더 거쳤기 때문에 쇳물이 흘러 들어가는 과정과 굳을 때 생기는 특수한 효과로 생기는 鎔鑄感이 가장 큰 심미적 특징이다.

殷商시대의 金文은 甲骨文과 함께 당시에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서체로 매우 발전되고 성숙한 문자이다. 東漢시대의 許愼이 小篆의 자형을 기초로 분석한『說文解字』의 六書 造字法에 의해 대조하여도 많은 글자에서 造字 원리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金文에서는 象形字나 指事字와 같은 獨體字 이외에도 會意字, 形聲字와 같은 合體字도 이미 다량으로 나타나고 있다. 合體字가 많다는 것은 한자의 造字와 사용 방법이 매우 발전해 있었다는 증거이다. 殷商시대 이전의 문자 자료는 거의 부호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교 할 때 甲骨文과 金文이 사용된 殷商시대는 한자가 완전한 문자의 기능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先秦시대의 청동기는 일 만점을 넘고 있다. 그 가운데 殷商시대 이전의 청동기도 적지 않으나 명문이 鑄刻 되어 있는 것은 매우 적을 뿐 아니라 문자를 기록한 것보다는 부호에 가까운 작품이 많다. 殷商시대 이후에 명문이 鑄刻되어 있는 청동기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청동기에 명문을 鑄刻하는 전통이 생겨나게 된 것은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 제도가 갖추어 지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한자의 발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殷商시대의 명문이 있는 청동기는 비록 甲骨文보다 적으나 문자 사용의 수준과 당시의 서체를 연구하는데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殷商시대의 金文은 鑄刻한 특수성으로 인하여 筆劃의 형태와 심미적 특징이 甲骨文과 달라 두 서체가 서로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자형과 결구는 서로 비슷하여 金文과 甲骨文이 당시에 공통적으로 사용한 서체이며 표현 형식만 다를 뿐 서로 교류하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76년 殷墟의 같은 장소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갑골에 ‘婦好’라는 글자가 동시에 적혀 있으며 서체가 서로 일치하는 것이 몇 점 발견되었다. 또한『作冊般甗』,『戍嗣子鼎』 등의 金文은 筆劃 뿐만 아니라 結字와 章法까지도 甲骨文과 매우 흡사하여 당시에 甲骨文과 金文이 동일한 서체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殷商시대 金文은 글자 수가 적어 적게는 두 세자부터 많아도 50자를 넘지 않는다. 명문은 대체로 씨족의 상징인 族徽, 청동기 주인의 이름, 청동기의 제작자 등 매우 간단한 것들이 대부분이며 글자 수가 많은 것은 전쟁, 제사, 토지, 盟約 등에 관한 내용들이다. 이 때의 金文 서체는 象形性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글자가 크고 筆劃이 굵은 작품은 波磔과 撇捺이 많으며 筆劃이 가는 서체는 甲骨文과 비슷한 자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45년 이전 安陽의 殷墟에서 발견된『二祀邲其卣』,『四祀邲其卣』,『六祀邲其卣』 등의 작품은 殷商 후기의 金文으로 象形性의 結字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筆劃이 굵으나 시작과 끝 부분이 가늘고 波磔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殷商시대 金文의 전형적인 특징이며 그림에서의『四祀邲其卣』와 같이 서체가 웅장하고 강건하며 古拙한 미감을 표현하고 있다.『戍嗣子鼎』,『作冊般甗』,『小臣邑斝』 등의 金文은 筆劃이 가늘면서 주조가 매끄럽게 이루어진 서체로 새긴 느낌이 많다. 이와 같은 종류의 金文 서체는 結字와 결구 그리고 布置와 章法은 다른 金文과 비슷하나 筆劃이 가늘고 새긴 느낌으로 인하여 甲骨文과 비슷한 미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殷商의 후기 金文에는『宰甫卣』,『乃孫作祖己鼎』과 같이 굵은 筆劃과 가는 筆劃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주조된 느낌과 새긴 고루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殷商시대의 명문에는『六祀邲其卣』,『戍嗣子鼎』과 같이 명문의 마지막 부분에 동물이나 부호로 이루어진 族徽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西周시대의 청동기와 그 명문은 고대 봉건 사회의 귀족 통치 권력의 권위와 그들의 사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귀족 중심의 계급 사회와 禮樂제도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西周시대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계급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정 수준과 형식의 禮樂 제도를 중시하였다. 또한 그 권위의 표현으로 당시의 가장 귀중한 재료인 청동을 사용하여 祭器와 禮器 등을 제작하였으며 명문에 조상의 업적과 그들의 사상을 기록해 자손 만대에 보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전통과 나란히 銅器을 제련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한자의 숫자가 증가되었다. 따라서 청동기의 鑄造 수준과 문장의 구사 능력이 향상되어 筆劃과 結體가 단정해지고 布置와 章法도 점차 규격화되었으며 몇 백자에 이르는 긴 명문도 나타나게 되었다.

殷商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周나라는 문자와 청동기 문화를 그대로 받아 들였으며 청동기 기술자들도 자연스럽게 周나라에 귀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西周시대 초기의 金文 서체는 殷商 후기의 書體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20세기 중기에 北京의 順義縣에서 출토된 西周시대 초기의 청동기에서 殷商시대의 것과 비슷한 族徽가 鑄刻되어진 명문이 상당수 발견되어 西周시대 초기에는 殷商의 문화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金文 서체도 筆劃이 대체로 굵고 波磔의 느낌이 있는 筆劃이 아직 그대로 존재하며 질박한 심미적 특징을 표현한 것이 殷商시대의 金文과 비슷하다. 다만 殷商시대의 金文에서 종종 나타나던 것처럼 筆劃은 가늘며 甲骨文과 비슷한 형태의 서체는 거의 사라져 버렸으며『叔德簋』와『禽簋』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西周 중기부터는 청동기에 鑄刻하는 명문의 숫자는 급속히 증가해 간다. 명문의 기록을 위하여 청동기의 많은 면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명문의 중요성과 아울러 鑄刻하는 위치도 잘 보이는 곳인 청동기의 내부 바닥을 선택하는 것이 많아졌다. 이 때부터 명문을 기록하는 것이 청동기를 만드는 목적 가운데의 하나가 되었으며 명문의 기록을 위하여 청동기를 만들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명문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청동기를 살펴 볼 때 수 십자 이상의 명문이 있는 청동기가 700점이 넘고 있으며 300자 이상의 긴 명문이 있는 청동기도『散氏盤』,『曶鼎』,『毛公鼎』 등 많이 있다.

孔子는『論語』에서 “郁郁乎文哉, 吾從周” (문예와 예의가 화려하고 아름답구나! 나는 周나라의 관습을 따르리라.)라 표현한 것과 같이 周나라 시대에는 문화와 예의 제도가 가장 번성하였다. 西周 중기는 청동기 문화와 예의 문화뿐만 아니라 金文 書體의 성숙기라 할 수 있다. 康王시대를 지나면서 筆劃의 起筆과 收筆에서 逆入과 回鋒의 느낌이 많이 나타나며 굴곡과 鋒芒은 점점 줄어들어 간다. 획의 굵기도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하며 갑자기 굵거나 가는 筆劃도 감소하고 結字와 결구도 가지런하여 정제된 느낌을 주는 작품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몇 몇의 작품에서 殷商시대와 周나라 초기에 나타나고 있던 筆劃의 특징인 波磔과 撇捺 그리고 덩어리 형태의 筆劃이 사용되고 있으나 ‘王’, ‘丁’, ‘子’, ‘旦’, ‘天’ 등 특정한 몇 글자에 한하며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西周시대 중기 이후의 金文 서체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초기의 筆劃과 자형 그리고 章法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으면서 동시에 행간과 자간을 맞추어 기록하는 布置와 章法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殷商과 西周 초기에 명문의 마지막에 동물이나 부호 등으로 기록하던 族徽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西周시대 초기의 작품인『庚贏卣』,『大盂鼎』과 같은 작품에서도 가로와 세로를 맞추어 布置 하였으나 波磔과 덩어리 형태의 筆劃이 많으며 한 행의 글씨가 다른 행까지 침범한 것이 있어서 시각적으로 자간과 행간의 느낌이 크게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周나라 穆王시대 이후의『遹簋』,『靜簋』,『乖伯簋』,『牆盤』,『卯簋』,『免盤』 등 많은 金文에서 취한 章法은 가로와 세로가 분명할 뿐 아니라 자간을 행간보다 넓게 布置 하였다. 또한『大克鼎』과 같은 金文은 가로와 세로의 경계선을 그어 자간과 행간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기도 하였다.

西周 후기의 金文은 중기의 서풍을 계승하였으나 筆劃은 더욱 다듬어 지고 結字와 章法이 규범화되어 통일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기까지 한 작품에 몇 자씩 나타나던 덩어리 형태의 筆劃도『多友鼎』,『史頌簋』,『頌鼎』,『虢季子白盤』 등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한 작품에 한 두 글자에 그치며 그 글자도 ‘旦’, ‘丁’, ‘子’ 등의 글자에 국한된다.『毛公鼎』에서는 ‘天’자 ‘正’자에 모두 덩어리 형태의 筆劃을 사용하였으나 덩어리의 크기가 작으며 주위의 글씨와 잘 어우러지는 까닭에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筆劃의 굵기 변화가 적어지고 結字와 결구가 규칙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한 작품 안에서 글자의 크기가 비슷하게 된다. 布置와 章法도 자간과 행간의 질서가 더욱 분명해지며『頌壺』와 같은 작품은 가로와 세로의 경계선을 두 줄로 그어 자간과 행간을 더욱 분명하게 처리하기도 하였다.

西周시대 후기의 金文 서체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虢季子白盤』과 같이 小篆의 느낌이 나는 筆劃과 결구의 작품이 출현하는 것과『散氏盤』과 같이 규칙과 자유스러움이 조화를 이룬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당시에 이미 문자에 대한 심미 의식이 매우 높았으며 청동기의 주조 기술이 매우 숙련되었다는 증거이다. 西周시대의 후기에는 金文을 鑄刻하는 사람이 표현하고자 하는 金文의 심미적 범주를 아무런 기술적 제약 없이 표현해 내는 정도에까지 이른 것이다.

2) 春秋 戰國시대의 金文

西周시대의 金文은 그 변천의 특징으로 서체의 구분을 초기와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초기의 金文은 筆劃이 굵거나 아니면 가늘며 波磔과 덩어리 형태가 많으며 질박하고 웅장한 미감이 있다. 중기를 거쳐 후기로 가면서 점차 筆劃이 다듬어지고 결구와 章法이 규칙적으로 변해 자간과 행간이 분명하여 강건하면서도 단아한 심미적 특징이 있다. 그러나 春秋 戰國시대는 여러 나라가 각 지역별로 나뉘어 세력을 형성하고 발전하여 金文 서체도 각 나라별로 서로 다르게 나타나며 변천하게 된다.

周나라가 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후 제후국들이 하나 둘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됨에 따라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크게 위축된다. 수많은 세력 다툼을 거친 후 春秋시대에는 齊, 魯, 晋, 宋, 鄭, 秦, 楚, 吳, 越나라 등이 견제와 대립하며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諸侯國들은 자기 나라의 권위와 정통성을 표현하는 수단과 방법으로 西周시대의 전통인 청동기를 앞다투어 제작하게 되었다. 春秋시대의 초기에는 모든 나라에서 西周시대 金文의 서풍을 계승하여 西周 후기의 金文과 매우 비슷한 자형과 서풍을 표현하였다. 西周시대의 金文 서체는 비록 초기와 후기에 따라서 조금씩 변천하고 있으나 동서남북의 지역에 따른 변화는 분명하지 않으며 대체로 통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후국들이 점차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이후의 春秋와 戰國시대의 金文 書體는 각 지역별로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형태와 서풍을 나타내게 되었다.

春秋 戰國시대 金文 서체의 가장 큰 특징은 筆劃과 자형의 다양화라 말할 수 있다. 筆劃이 가는 것, 굵은 것, 끝이 뾰족한 것, 뭉텅한 것; 자형이 긴 것, 넓은 것 등 표현해 낼 수 있는 모든 筆劃과 字形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商周시대 이전에 흔히 나타나는 波磔이 있는 筆劃과 자형을 모방하여 金文을 제작한 것도 여러 점 나타난다. 주조 기술의 발달과 미적 의식의 발전으로 金文의 字形에 장식성을 더하여 새로운 金文 서체인 鳥蟲書, 蝌蚪書, 鳳龍書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鳥蟲書類의 서체는 春秋시대의 창이나 칼등의 무기에 주로 사용된 서체이다. 역사상으로 매우 유명한 越王 句踐의 劍은 鳥蟲書의 대표작으로 劍에 鳥篆으로 “越王鳩淺(句踐), 自作用劍”이라 鑄刻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王子午鼎, 楚王酓璋戈, 王子于戈, 越王大子矛 등이 있다. 春秋 戰國시대의 다양한 金文 서체 속에는 小篆과 비슷한 筆劃과 자형이 이미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隸書, 草書, 楷書 行書의 모태가 되는 筆劃이 잉태되어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春秋 戰國시대의 金文 서체가 西周시대의 金文 서체에 비해 훨씬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나라별로 독자적인 정치 형태를 갖추고 서로의 독특한 문화로 발전해 가기 때문이었다. 빈번한 전쟁으로 제후국별로 연합하거나 대립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문화를 흡수하거나 배척하는 상황은 金文 서체의 자형에 많은 영향을 미쳐 같은 뜻의 글자가 지역별로 다른 형태로 쓰이는 異體字가 많아졌다. 또한 春秋 戰國시대는 儒, 法, 道, 墨家 등 수 많은 사상의 유파가 서로의 학술과 사상을 전개하는 百家爭鳴의 시대이다. 사상과 철학의 다양화는 사회와 정치적 독립성과 함께 春秋 戰國시대의 서체가 지역별로 혹은 국가별로 독창성을 갖추게 하는 근본적 요소가 되었다.

春秋시대 金文 서체의 형태와 심미적 특징을 지역별로 크게 東土系, 西土系, 南土系, 北土系, 中土系로 구분하고 戰國시대의 金文은 국가별로 秦系 金文과 楚, 燕, 齊, 韓, 魏, 趙의 六國 金文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 방법은 당시의 세력이 강대한 春秋시대의 五覇國과 戰國시대의 七雄國을 중심으로 정치와 사회, 경제와 문화를 설명하는 전통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戰國시대의 후기에 秦나라가 六國을 통일하고 秦나라 문자를 중심으로 문자를 통일함에 따라 秦系 문자의 전통성이 부각되어 현대의 학자들은 秦系 문자를 六國 문자와 비교하는 방법이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방법은 문자학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金文 서체의 형태에 따른 구분법으로 書藝學界에서도 많은 부분을 채용하고 있다.

서기전 770년 周나라 平王이 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후 秦 襄公을 諸侯로 冊封하고 西周의 옛 땅인 岐山의 서쪽 지방을 다스리게 하면서부터 秦나라는 春秋시대의 제후국 가운데 강력한 국가의 하나로 성장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 할 수 있었다. 秦나라는 周나라의 옛 땅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周나라의 정치와 文化를 직접적으로 계승하여 매우 빠르게 그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戰國시대에는 다른 제후국들을 차례로 공격하여 서기전 221년 마침내 六國을 통일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六國을 통일한 秦나라는 자신들이 사용하던 서체를 중심으로 大篆, 小篆, 刻符 등 篆書류의 여러 서체와 隸書를 통일하여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秦나라는 西周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계승하였으며 그 서체를 중심으로 한자를 통일하였기 때문에 한자 서체의 변천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되며 秦나라에서 사용되던 문자계통을 秦系 문자라 부른다.

秦系 문자의 변천과 발전적 특징은『史籒篇』에 기초한 西周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것과 실용성을 목적으로 점차 筆劃의 간략화를 추구하여 戰國시대의 중기에 隸變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史籒篇』은 周나라 宣王시대에 太史인 籒가 학생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大篆의 15편 책이다. 秦나라는 周나라 이후의 전통적 문자 교육서인『史籒篇』를 기본 교재로 하여 학생들에게 읽고 쓰는 공부를 시켰다고 전한다. 따라서 春秋 戰國시대의 秦나라는 자연스럽게 西周에서 사용하던 서체를 이어 받을 수 있었다.

西周의 전통을 계승한 秦나라 金文 서체의 기본 특징은 규범화되고 실용화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秦나라의 서체가 다른 六國 서체의 급격한 변화에 비해 안정되긴 하였으나 秦始皇이 六國을 통일하기까지 550년의 긴 세월 동안 조금씩 변하게 된다. 秦나라의 문자 사용은『史籒篇』에 기초하여 문자를 학습하고 문장을 기록하는 순수한 실용성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실용성의 추구로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서체의 변화는 문자의 簡化 현상이다. 이러한 문자의 簡化는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상의 서사 과정에서 筆劃과 자형을 조금씩 변하게 하였다. 筆劃과 자형의 簡化는 象形性의 자형을 점차 부호화 하였을 뿐 아니라 筆法과 結字 등의 서사 행위에 영향을 미쳐 筆順과 書順을 결정하게 되었다. 또한 서체와 서사 행위의 簡化는 小篆을 탄생시켰으며 동시에 隸變의 발생과 隸書가 출현하는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秦系 문자 자료로는 兵器, 權量, 組版, 虎符, 貨幣 등의 청동기 명문과 刻石, 印章과 封泥, 陶文, 簡帛 등의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春秋시대의 秦나라 金文으로는 武公시대의『秦公鐘』,『秦公鎛』과 景公시대의『秦公簋』 등이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春秋시대의 秦나라 金文 서체는 西周시대의『虢季子白盤』과 같이 筆劃과 결구가 매우 정밀하며 엄격한 규칙을 갖추고 있다. 비록 초기의 金文은 筆劃이 가늘고 유연하며 후기의 작품은 筆劃이 굵고 강건한 심미적 특징을 갖추고 있으나 규칙적인 筆劃과 결구는 小篆의 자형을 향하여 변해 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春秋시대의 후기부터 戰國시대의 중기 孝公 때까지는 秦나라 金文의 공백기라 할만큼 아직까지 발견된 작품이 없다. 그러나 春秋시대의 秦나라 작품으로 알려진『石鼓文』과 孝公시대의『商鞅錞』,『商鞅戟』,『商鞅方升』 그리고 嬴政시대의『新郪虎符』 등의 작품으로 미루어 秦나라 金文 서체의 변천과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春秋 戰國시대의 秦나라 金文 서체의 筆劃과 자형 그리고 서풍의 가장 큰 특징은 秦始皇 이후의 통일된 篆書 서체인 小篆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秦公簋』,『商鞅方升』,『石鼓文』,『秦公大墓石磬文字』,『詛楚文』은 西周시대의『虢季子白盤』에서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는 小篆으로 변화하는 중심에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특히 戰國시대 獻公과 孝公이 적극적인 東進 정책을 펼친 후부터는 小篆으로의 변천 속도가 매우 빨리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孝公시대 이후의 金文인『商鞅方升』과『詛楚文』 등은 기존의 金文에서 나타나고 있는 筆劃의 鎔鑄感과 웅장한 느낌은 거의 보이지 않고 통일 秦나라 시대의 金文이나 刻石 篆書와 같이 轉折 부분을 제외하고는 직선의 가는 筆劃을 사용하였으며 장방형의 결구를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金文 서체를 근거로 하면 秦나라 金文의 특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大篆에서 小篆으로 서체가 변천한 역사를 알 수 있다. 예전의 학자들은 小篆이 통일 秦나라 시대에 李斯, 趙高, 胡毋敬 등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었으나 秦系 문자의 끊임없는 발전으로 小篆이 실용의 서사 행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李斯 등은 다만 小篆을 정리하고 규범화하였으며 통일된 서체로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史記‧楚世家』에 의하면 楚나라는 祝融氏가 세운 나라로 周나라 武王이 殷商을 정벌할 때 세운 공로로 分封을 받아 丹陽(지금의 湖北省 秭歸)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기의 楚나라는 국력이 미약하였으나 西周시대의 후기부터 春秋시대를 거치는 동안 남방의 수 십 나라를 정복하여 齊나라와 晋나라에 대항하는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楚나라는 가장 남쪽에 자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다른 제후국들과 문화적 교류가 비교적 적을 뿐 아니라 周나라 문화의 영향을 적게 받아 그들의 문화는 지역성이 매우 뚜렷하다. 또한 楚나라 문화는 원시 종교의 색채가 농후한 巫俗 문화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청동기 명문의 서체도 신비감과 낭만성이 매우 짙은 예술 형식을 갖추고 있다.

西周시대 후기부터 春秋시대 초기까지의 楚나라 金文은 殷商과 西周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서체와 楚나라만의 독특한 서체가 함께 존재한다. 西周시대 후기의 楚나라 金文인『楚公逆鎛』은 殷商과 西周의 金文에서 나타나고 있는 서체의 형태를 취하긴 하였으나 起筆과 收筆이 뾰족하고 자형이 길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작품은 楚나라 金文 서체는 西周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서체로 발전해 나가는 조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春秋 戰國시대의 楚나라 金文 서체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春秋시대의 楚나라 金文은 비교적 적게 발견되고 있으나 몇 몇 작품과 西周와 戰國시대의 金文 서체를 연계하면 서체 변화의 큰 흐름을 알 수 있다. 共王 시기의『王子嬰次鑪』, 昭王 시기의『王子申盞盂』,『王孫遺者鐘』 등의 金文에서는 이미 西周 金文의 서풍은 남아 있지 않고 자형이 길며 筆劃이 산뜻하고 부드러운 楚나라 특유의 새로운 서풍을 형성하기 시작하고 있다. 특히『王子午鼎』과 같은 金文은 戰國시대에 유행하는 鳥蟲書로 鑄刻 되어 있어서 鳥蟲書가 楚나라에서 생겨났을 뿐 아니라 楚나라의 서풍이 각 제후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西周시대 후기와 春秋시대 전기의 楚나라는 경제와 군사력이 미약한 작은 나라였으나 서체의 개성은 가장 뚜렷하였다. 春秋 중기부터 국력을 적극 배양하여 春秋五覇와 戰國七雄 가운데의 하나가 된 楚나라의 경제와 군사력은 남방의 여러 나라 중에서 최고에 달한다. 楚나라가 패왕의 이름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감과 동시에 그들의 문화는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나간다. 당시 楚나라 주위의 작은 나라로는 曾國, 唐國, 蔡國, 申國, 呂國, 許國, 應國, 厲國, 陳國, 黃國, 胡國 등이 있었으며 후에 거의 모두 楚나라에 귀속된다. 이들 작은 나라들은 지리적 여건 등으로 종주국인 周나라보다는 楚나라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楚나라를 중심으로 한 남방의 여러 나라들의 문화를 楚系文化라 부르기도 한다. 楚系文化의 범주에 있는 나라들은 청동기의 형태 뿐 아니라 청동기 명문도 楚나라 서체의 형태와 서풍을 이어 받았다. 徐國의『沇兒鐘』, 蔡國의『蔡侯盤』, 許國의『子璋鐘』, 黃國의『黃韋兪父盤』, 曾國의『曾侯乙編鐘』과『曾侯乙墓甬鐘』 등의 金文은 楚나라 金文의 외형과 서풍을 그대로 이어 받은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春秋 戰國시대 楚나라 金文 서체는 전 후기 변화가 매우 많을 뿐 아니라 지역성이 가장 뚜렷하고 예술성이 뛰어나다. 春秋시대의 초기에는 西周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과 예술성을 발휘하여 戰國시대 이후에는 筆劃이 유연하고 結體가 수려한 형태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새로운 筆劃과 結字의 심미적 요구는 鳥蟲書와 같은 꾸밈이 많은 서체를 탄생하게 하였고 異體字를 출현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문자의 쓰임을 더욱 확대하였다. 楚나라의 金文에서도 서체의 예술적 효과 뿐 아니라 서사 행위의 간편화를 추구한 흔적을 발견 할 수 있다. 戰國시대 초기의 작품인『鄂君啓銅節』,『楚王酓㿻鼎』 등의 金文 서체는 春秋시대 후기의 秦나라 작품인『侯馬盟書』에서 나타나는 隸書의 筆劃과 자형 그리고 결구를 많이 사용하여 春秋시대에 이미 隸書가 탄생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春秋 戰國시대 중국의 동쪽에서는 齊나라와 魯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와 문화의 큰 흐름으로 金文의 새로운 서풍이 싹트고 발전하게 된다. 齊나라는 周나라 초기에 呂尙이 封邑을 받아 營丘와 臨淄(지금의 山東省)에 도읍을 정하고 周나라 문화와 東夷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齊나라 金文 서체의 서풍은 종주국인 周나라의 영향권 속에서도 비교적 빨리 동방의 고유한 체계를 형성 할 수 있었다. 春秋시대 초기의『齊縈姬盤』과 같은 金文에서는 西周의 金文 서체를 기초로 하고 있으나 질박하고 중후한 미감을 버리고 筆劃이 가늘고 날카로운 심미적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심미적 특징의 배경에는 齊나라의 정치과 경제 그리고 문화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齊나라는 바다를 가까이 하고 있는 까닭에 상업이 발달하였고 또 사상과 성격이 활발하였다. 농업이 중요한 경제 수단인 周나라 金文의 질박함을 이어 받았으나 수산업과 상업이 발달한 齊나라는 자연스럽게 빠른 運筆의 筆劃과 날카로운 미감의 서체로 바꾸어 사용하게 된다.

春秋시대 후기의『洹子孟姜壺』,『陳喜壺』와 戰國시대 초기의『陳逆簋』 등에서는 西周 金文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간략하고 빠른 筆劃을 주로 사용하여 齊나라의 金文 서체에 대한 서사와 심미적 요구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戰國시대 이후에는『禾簋』,『陳純釜』,『陳曼簋』와 같이 전통 金文의 자형을 기본 결구로 하면서도 齊나라 특유의 運筆法으로 筆劃의 끝을 뾰족하게 收筆하여 날카로운 느낌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齊나라 金文 서체는 비록 지역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楚나라 계통의 문자와는 달리 급격한 변화나 꾸밈을 하지 않고 전통과 개성을 조화시키며 발전한 것이 특징이다.

魯나라는 종주국인 周나라 武王시대에 현재의 山東省 曲阜에 封邑을 받아 禮樂을 숭상하는 국가로 성장한다. 周나라 平王이 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후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魯나라는 周나라 전통의 禮樂을 폐지하지 않고 더욱 발전시킨 국가이다. 西周의 禮樂을 숭상한 까닭으로 春秋 중기까지의 魯나라의 金文 서체는『魯伯愈鬲』,『魯大司徒匜』와 같이 西周시대의 金文과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고 후기에는 齊나라의 영향으로 結體가 약간 길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견된 戰國시대의 金文이 없기 때문에 그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春秋 戰國시대의 中原과 북방 지역의 정치와 사회 현상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였다. 분열과 연합, 전쟁과 和平을 거듭하는 동안에 문화적 교류가 많아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金文 서체도 서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春秋시대 중원의 제후국으로 宋, 鄭, 衛나라와 鄶, 戴, 蘇, 虢 등의 많은 작은 나라들이 있었다. 戰國시대에는 宋나라가 동쪽으로 도읍을 옮겨가고 衛나라의 힘이 약해짐과 동시에 韓, 魏, 趙의 세 나라가 晋나라를 땅을 차지하고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중원과 북방 지역은 楚나라를 중심으로 한 남방과 齊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쪽과 달리 강력한 하나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은 까닭에 연합하고 분열하거나 망하고 생겨나는 혼란의 과정이 되풀이된다. 따라서 사상과 문화가 서로 영향을 끼치게 되고 金文의 서풍도 한 강대국을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별로 서로 다른 서체의 특성을 갖추게 된다.

鄭나라는 商나라의 옛 땅에 위치하여 金文 서체도 商나라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春秋시대의『鄭雍原父鼎』,『鄭義伯匜』,『鄭大內史叔上匜』 등의 金文 서체는 殷商의 전통을 많이 이어 받았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戰國시대의 초기부터는『哀成叔鼎』과 같이 結體가 길어지며 筆劃의 起筆과 收筆을 뾰족하게 처리하여 급격한 서체의 변화 현상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서체는 晋나라 金文의 서체와 비슷한 것으로 당시의 문화와 金文 서체가 많이 교류하고 있었음을 상징한다. 宋나라는 殷商의 후예이나 春秋시대의 金文에는 殷商의 서풍이나 심미적 특징이 나타나지 않고 筆劃이 우아하고 結體가 단정하여 곱고 수려한 심미적 특징을 나타낸다.『商丘叔簋』,『樂子敬簋』와 같은 金文은 西周의 전통적 결구를 취하고 있으나 웅장하고 건강한 筆劃은 사라지고 연약하고 단조로운 筆劃으로 예술성이 많이 떨어진다. 衛나라는 春秋시대부터 秦나라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오랜 기간 존재하며 주위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며 성장하였다. 문화와 예술도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여『詩經』속에 여러 편의 아름다운 시가 기록되어 전하고 있으며 근래에 많은 유물들도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衛나라의 청동기는『衛夫人文君叔姜鬲』을 제외하고는 거의 발견되지 않아 金文 서체의 변화를 알기가 어렵다. 다만『衛夫人文君叔姜鬲』을 근거로 衛나라의 金文 서체가 전통에 기초한 비교적 보수적인 자형으로 이루어진 것을 살펴 볼 수 있을 뿐이다.

晋나라는 春秋시대 때에는 周나라의 제후국이었으나 戰國시대의 초기에 韓, 魏, 趙의 세 나라로 분리되어 각 각 독립된 나라로 성장하였다. 韓, 魏, 趙의 세 나라가 晋나라의 옛 땅에서 세력을 형성한 까닭에 ‘三晋’이라 부른다. 春秋시대의 晋나라는 비록 강대국이었으나 현재까지 발견되는 金文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春秋시대 초기의『晋姜鼎』을 北宋시대에 모작한 金文과『晋侯家父壺』,『晋文公鐘』 그리고 春秋 후기의『郘鐘』,『郘大叔斧』 등의 金文을 근거로 하면 晋나라 金文 서체는 종주국인 西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강건한 심미적 특징은 많이 사라졌으나 筆劃이 둥글둥글하고 굵기 변화가 많으며 자형은 정방형을 취하여 西周의 金文과 비슷한 질박한 미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春秋 중기의『欒書缶』,『趙孟介壺』와 같은 金文 서체는 자형이 길고 유연한 굴곡의 筆劃이 매우 유창하다. 이와 같은 것은 晋나라의 金文도 다른 제후국들과 마찬가지로 西周의 전통적 형태에만 얽매이지 않고 자신들의 심미적 요구와 표준에 맞는 서체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戰國시대 이후에는 晋나라가 韓, 魏, 趙의 세 나라로 분열되었다. 따라서 戰國시대 이후 三晋의 金文 서체도 새로운 형태로 변천하게 된다.

戰國시대 韓, 魏, 趙나라는 비록 晋나라의 옛 땅에 자리를 잡고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으나 그들의 金文 서체는 晋나라의 전통을 이어 받지 않고 삼국이 서로 영향을 끼치며 그들 나름대로의 개성 있는 서체로 발전시켜 나간다. 魏나라의『魏紀年邦司寇矛』와 趙나라의『三年□令戈』 그리고 韓나라의『王三年鄭令戈』,『七年侖氏戈』,『六年格氏令戈』 등의 작품을 근거로 하면 三晋의 金文 서체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 쓴 글씨처럼 筆劃이나 結字에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전통적인 秦系 문자는 물론이고 楚系 문자나 동방의 문자 계통에서도 비록 西周의 전통에서는 멀어져 있다 하여도 나름대로의 규칙을 만들어 서체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三晋의 金文 서체는 筆劃이 거칠고 結字와 間架 결구를 대충대충 끝마친 것이 마치 漢나라 시대의 刑徒 磚文과 비슷하다.

春秋 戰國시대에는 수많은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여 金文 서체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다. 春秋시대에는 대체로 西周의 전통적 金文 서체를 기초로 하여 조금씩 변천하여 각 지역별로 특성을 살리며 발전하였다. 周나라가 종주국으로서의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는 戰國시대에는 秦나라와 그 외의 여섯 나라가 각각 자신들만의 독특한 자형을 갖추고 서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春秋 戰國시대 金文 서체는 지역과 국가별로 서로 다른 자형으로 변천하여 지역성이 매우 뚜렷하다. 점과 획의 위치를 바꾸거나 혹은 생략하여 사용하는 등의 행위로 인하여 異體字와 簡體字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문자의 사용이 민간으로까지 광범위하게 확장되어 草書와 隸書 등 새로운 서체가 탄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4. 金文의 심미적 특징

金文은 청동의 재료를 사용하여 대부분이 書-刻-鑄造-淸砂의 공정을 거쳐서 탄생한 서체이다. 간혹 청동기에 직접 刻寫한 문자도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런 것은 매우 적다. 따라서 金文의 미감은 墨跡이나 刻石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는 鎔鑄感이 가장 큰 특징이다. 서예 작품의 심미적 특징은 서체에 따라서도 각각 다르게 나타나지만 서사 재료와 용구 그리고 書寫 방법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나타난다. 甲骨文은 龜甲과 獸骨 등의 딱딱하면서도 질긴 재료에 예리한 칼로서 새겨서 이루어진 까닭에 筆劃에 칼 맛을 많이 나타내며 轉折부분이 각이 많고 뾰족하여 비록 筆劃이 가늘지만 건강하고 예리한 미감이 있다. 刻石 작품은 딱딱하지만 잘 떨어지는 돌을 쪼아서 새긴 까닭에 筆劃의 轉折부분을 자유롭게 각지게 하거나 둥글게 할 수 있으며 筆劃의 굵기도 다양하게 표현 할 수 있다. 그러나 甲骨文이나 刻石 서예는 쓰고 새기는 과정만으로 이루어진 서체이므로 강인하고 남성적인 陽剛의 심미적 특징은 잘 표현하고 있으나 부드럽고 온화한 陰柔의 미감은 잘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金文은 甲骨文이나 刻石 작품의 제작 과정에는 없는 鑄造와 淸砂의 과정이 추가되어 자연스러운 鎔鑄感뿐만 아니라 강건하고 부드러운 陽剛과 陰柔의 미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畵宣紙에 書寫하는 현대의 書藝 창작과 매우 잘 어울리기 때문에 甲骨文이나 刻石 작품을 기초로 한 창작보다는 원래의 맛을 훨씬 잘 표현 할 수 는 장점이 있다.

金文의 筆劃은 변화가 많으며 結字와 결구가 매우 다양하다. 청동기의 주조 과정에서 쇳물의 흐름과 응고의 특성으로 생겨난 자연스러운 鎔鑄感은 마치 화선지에 창작 할 때 行筆에서 긋고, 멈추고, 들고, 누르는 등의 다양한 運筆의 변화를 추구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轉折에서도 둥근 것과 각진 것, 가는 획과 굵은 획 등 풍부한 변화가 있으며 자형의 크기와 間架 결구가 매우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규칙적으로 정돈되고 다듬어진 통일성과 법칙성은 刻石 작품인 秦篆이나 漢隸보다는 떨어지지만 金文도 완전히 주조 과정에서 생겨난 우연성만으로 이루어진 서체가 아니라 숙련된 표현 능력이 있음을 실물에서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수많은 金文의 鑄刻을 통하여 작가의 의식은 미리 우연성의 결과를 예측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심미적 표준도 자연스럽게 형성 될 수 있었다. 작가의 의식과 쇳물의 흐름이 융화하여 강건하고 웅장한 형태에 자연스러운 맛과 천진하고 질박한 미감이 金文 서체의 가장 뚜렷한 심미적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金文은 禮儀 문화의 핵심인 조상에 대한 제사와 왕권의 절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하였다. 甲骨文이 귀신의 숭배를 기초로 한 문자이며 金文은 이보다 더욱 성숙하고 발전한 귀신 숭배, 조상 숭배, 왕권의 절대화, 국가간의 전쟁 등 인간 위주의 사상을 기초로 한 문자이다. 따라서 예의 제도의 효용성과 절대자의 권위를 추구하게 되어 書體가 장엄하고 강건하며 전아한 서풍을 형성하게 되었다. 金文 서체의 형태와 심미적 특징의 변천 과정은 활발하고 자유로운 변화에서 규칙적이고 안정된 자형과 결구로, 자연스럽고 질박함에서 단아하고 수려한 아름다움으로, 담백함에서 화려한 꾸밈을 추구하며 변화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 기본 양상이다. 西周시대 초기의 金文 서체는 殷商시대의 甲骨文의 맛을 간직하고 있으며 行間과 자간이 비교적 자유로우며 筆勢가 질박하면서도 엄숙하고 강건하다. 西周시대의 중기와 후기의 金文은 筆劃이 부드러워지고 간결하며 結體가 단정하고 규칙성을 갖출 뿐 아니라 間架 결구가 매우 분명한 형태를 취하여 강건한 미감을 기본으로 하지만 단아하고 수려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春秋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종주국인 周나라의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金文 서체도 각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와 미감을 갖추게 된다. 秦系 金文은 周나라의 전통을 비교적 많이 계승하여 실용성과 규칙성을 추구하며 小篆의 형태로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남쪽 지방의 楚系 金文은 가장 뚜렷한 지역성을 띄면서 예술성과 장식성을 추구하였으며 鳥蟲書와 같은 새로운 서체의 탄생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중원 지역과 齊나라와 魯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쪽 지역의 金文 서체는 周나라의 영향과 주변 국가의 영향을 고루 받았기 때문에 秦系 金文이나 楚系 金文보다는 지역적 특성이 적다. 그러나 戰國시대에는 각 나라별로 세력 다툼이 더욱 치열하였으며 작은 나라들이 戰國 七雄의 국가를 중심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각 제후국별로 각양각색의 독특한 형태와 심미적 특징을 갖춘 金文이 고루 출현하게 된다. 戰國시대 후기에 秦나라가 六國을 통일하고 문자를 통일하였기 때문에 이 때의 金文 서체의 심미적 특징을 분석하고 설명 할 때에는 秦系 金文과 그 외의 六國 金文을 나누어 비교 설명하는 방법을 많이 취하고 있다. 秦系 金文의 가장 큰 특징은 春秋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전통을 계승하여 실용성과 규칙성을 추구하여 小篆으로 서체를 통일한 것이다. 六國 金文의 가장 큰 특징은 많은 異體字의 출현과 鳥蟲書, 蝌蚪書 등 꾸밈이 많은 장식성의 서체가 다양하게 사용된 것이다.

金文이 가장 발전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은 대부분 西周시대의 金文이다. 따라서 포괄적인 의미에서 金文 서체의 심미적 특징을 이야기 할 때는 주로 西周시대의 金文을 중심으로 한다. 필자도 전통적 방법에 따라 西周시대의 金文을 중심으로 하여 金文의 심미적 특징을 筆劃, 結字와 결구, 그리고 布置와 章法 등 구체적 방면 나누어 살펴본다.

隸變이 있기 이전의 서체인 古體字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본적 특징은 波磔, 撇捺, 趯 등의 筆劃이 없고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문자학계에서는 古體字는 筆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線이라 부르고 있다. 비록 筆劃의 명칭이 隸變이 있은 후 隸書나 草書 등의 서체가 탄생한 뒤부터 사용되었으나 書藝學界에서는 古體字에서도 筆劃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金文도 다른 古體字의 서체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몇 글자에서 波磔과 덩어리형 筆劃을 취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金文의 筆劃은 굵기와 길이의 변화가 다양하고 한 획 안에서도 굴곡과 기복이 심한 것이 많으며 꾸밈을 강조한 것이 많기 때문에 심미적 범주가 매우 광범위하다.

殷商시대 金文 서체의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 筆劃은 웅장하고 강건하며 중후한 형태와 질박하고 자연스러운 심미적 특징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노예 제도 사회의 강렬한 생존 욕구와 귀신과 자연을 숭배하는 신앙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연을 숭배하는 신앙 사상은 西周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상의 공덕을 노래하거나 제사 지내고 왕권의 권위를 중시하는 인간 위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봉건제도의 채택으로 상대적으로 안정된 신분의 조건 아래에서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영향으로 金文 서체의 筆劃은 강건하면서도 단아한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利簋』,『天亡簋』,『禽簋』,『何尊』,『大保簋』,『康贏卣』,『大盂鼎』 등 西周시대 초기의 金文은 殷商의 金文과 비교 할 때 그림 형태의 문자가 많이 사라지고 있으며 象形性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殷商의 전통인 波磔과 덩어리형 筆劃이 남아 있고 甲骨文에서 나타나는 각이 지거나 뾰족한 筆劃이 있으나 점차 둥글고 원만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의 筆勢는 기운이 넘치고 筆意가 쾌활한 것이 특징이다.

『作冊令方彝』,『令鼎』,『靜簋』,『師酉簋』,『九年衛鼎』,『乖伯簋』,『休盤』,『牆盤』 등 西周 중기의 昭王시대부터 恭王시대까지의 金文 서체는 筆劃이 단정해져 굵기의 변화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길이도 규칙적으로 변하여 상하와 좌우에 대칭이 분명해지고 있다. 筆劃과 筆劃사이의 공간과 間架와 결구에 일정한 규칙이 생겨나며 자체의 크기가 점점 고르게 변하고 있어서 단아한 미감을 느낄 수 있다.『曶鼎』,『卯簋』,『免盤』,『大克鼎』,『小克鼎』,『番生簋』,『大鼎』 등 西周 중기의 懿王시대부터 夷王시대까지의 金文 서체는 筆劃이 가지런해지는 것과 동시에 세로로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실용성의 추구로 筆劃과 結字가 간결해지는 것과 동시에 圓筆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유창하고 우아한 심미적 특징이 있다.

『多友鼎』,『散氏盤』,『史頌簋』,『頌鼎』,『頌壺』,『兮甲盤』,『虢季子白盤』,『毛公鼎』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西周 후기 厲王시대부터 東周시대 이전까지의 金文 서체의 筆劃의 형태와 심미적 범주는 더욱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은『虢季子白盤』과 같이 小篆으로 완성되어 가는 筆劃의 규범화이며 또 하나는『散氏盤』과 같이 예술성이 뛰어난 筆劃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金文 서체의 結字와 結構는 筆劃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자형이 커지고 작아지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럽고 질박한 미감이 많이 나타난다. 비록 한 작품 속에서 획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긴 筆劃과 짧은 筆劃에 함께 있고 자형도 크기를 달리하지만 공간의 안배는 규칙과 통일성이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筆劃의 길이가 서로 다르고 자형의 크기가 달라도 筆劃의 질감이 같고 空白이 일정한 규칙을 갖추고 있는 작품은 심미적 범주가 마치 혈연 관계가 있는 가족처럼 서로 잘 어울리게 된다. 이와 같은 결구의 법칙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서체가 바로 西周시대의 金文 서체이며 훗날 篆刻의 結字와 결구에 많은 영향을 끼쳐 ‘計白當黑’의 이론을 탄생시키게 된다. 計白當黑의 結構법은 疎密의 분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규칙과 자연스러움을 쉽게 조화시킬 수 있다.

金文 서체의 布置와 章法은 행간의 세로줄을 비교적 강조했으며 字間의 가로줄은 일정한 기준이 없는 ‘竪有列橫無列’의 방법을 많이 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章法은 甲骨文의 특징과 비슷한 것으로 筆劃의 길이가 다르고 획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자형을 안배한 結字와 결구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西周 후기와 春秋 戰國시대의 金文 서체가 자형의 크기가 통일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자간과 행간이 뚜렷해지는 것을 볼 때 자형의 크기 변화가 布置와 章法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金文이 鑄刻되어 있는 청동기가 대부분 평평한 면적이 아니라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행과 열이 수직과 수평의 직선이 아니라 非直似直의 章法으로 이루어져 있다.

西周시대의 후기 金文 서체에서 많이 나타나는 章法은 가로와 세로의 자간과 행간을 분명하게 하여 규칙과 통일성을 강조하게 된다.『頌簋』,『頌壺』,『墻盤』,『虢季子白盤』 등의 金文은 자간과 행간이 규칙적인 것은 물론이고 筆劃의 굵기와 길이 뿐 아니라 자형의 크기도 일정하다. 이와 같은 작품은 비록 筆劃은 단아하지만 엄격한 結字와 결구 그리고 章法으로 말미암아 장엄하고 엄숙한 미감이 특징이다. 春秋 戰國시대의 金文과 진한의 刻石 서예가 주로 선택한 章法이 이와 같은 金文 서체의 규칙이며 엄숙하고 장엄한 미감이다.

서예 작품은 金文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새겨진 것과 쓰여진 것의 두 가지 형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서예의 심미적 범주를 크게 金石氣와 書卷氣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金石氣는 쇠나 돌등의 재료에 새겨져 있는 작품에서 나타나는 심미적 특징이고 書卷氣는 簡帛이나 종이에 쓰여져 있는 작품에서 나타나는 심미적 특징을 설명 할 때 사용한다. 서체나 서풍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보편적인 金石氣의 심미적 범주는 강건하고 씩씩한 陽剛의 미이고 書卷氣의 심미적 범주는 부드럽고 유연한 陰柔의 미라 할 수 있다. 金文은 새긴 후에 다시 주조하는 과정을 거쳐서 탄생한 서체이기 때문에 독특한 심미적 범주를 형성하게 된다. 청동기의 주조 과정에서 쇳물의 유동으로 생기는 자연스러운 熔鑄感은 金石氣와 書卷氣의 심미적 범주를 겸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鎔鑄感은 비록 딱딱한 청동기를 서사 재료로 하고 있으나 서예 미학에서 중요한 심미적 범주로 이해하고 있는 錐劃沙, 印印泥, 屋漏痕 등과 쉽게 접근되는 미감으로 설명 할 수 있다.

『天亡簋』는 周나라 武王시대(서기전 11세기)의 작품으로『大豐簋』 혹은『朕簋』라 불리며 淸나라 道光연간인 1844년에 陝西省 岐縣에서 출토되어 현재 中國歷史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명문은 8행으로 모두 76자이며 武王이 周나라를 세우고 예를 갖추어 天室에서 先考인 文王과 上帝에게 제사를 올리며 殷商이 멸망하여 상제와 여러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周나라가 대신함을 보고하는 내용이다.『天亡簋』는 天亡이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 찬조한 공로로 武王으로부터 상을 받아 祭器를 만들고 명문을 새겨 자손 대대로 사용하게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殷나라의 멸망과 周나라의 건국에 관한 역사가 새겨져 있는『天亡簋』의 명문은 역사적 사료로서도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周나라 초기의 金文 서풍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天亡簋』의 명문은 殷나라 후기의 金文에서 나타나는 波磔과 덩어리형 筆劃을 많이 버리고 있으며 둥근 자형과 곡선의 筆劃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글자의 筆劃과 자형이 비래하고 오른쪽 밑으로 기운 듯 한 結體와 공간의 배치가 성숙하지 못한 布置와 章法, 그리고 筆勢가 조금 약하여 예술적 성숙도는 후대의 金文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殷나라 시대 金文의 형태와 심미적 특징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周나라 시대의 독특한 金文 예술의 영역을 개척한 작품으로 꼽힌다.

『大盂鼎』은 西周 康王시대(서기전 11세기-서기전 10세기)의 작품으로『盂鼎』 혹은『全盂鼎』으로도 불리며 淸나라 道光시대에 陝西省 郿縣(일설에는 岐縣)에서 출토되어 中國歷史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이 청동기는 규모가 매우 큰 작품으로 높이가 1m에 달하며 주둥이의 넓이는 80㎝에 가깝고 명문도 19행에 291자이다.『盂鼎』은 周나라 南公의 자손인 盂가 周왕실에서 내린 작위와 상을 받고 이 제기를 만들어 조상의 廟堂에 모시고 대대로 물려 쓴 청동기이다. 명문은 康王 23년에 왕이 南公을 임명하고 아울러 周나라에 공이 많은 南公의 후계자인 盂에게 상을 내려 더욱 충성하도록 한 내용이다.

『大盂鼎』은 글자가 비교적 크며 서체가 장중하고 엄숙하며 품위가 있는 西周 초기의 대표적 金文 서체로 꼽히고 있다. 새겨서 鑄造되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金文이지만 筆劃의 起筆과 收筆이 혹은 가늘고 혹은 굵게 표현하는 등 변화가 풍부하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맞추어 布置 하면서도 글자의 筆劃에 따라 자연스럽게 結字하였으며 획수가 적은 글자는 과감한 筆劃을 사용하여 결구와 章法이 매우 돋보인다. 또한 ‘有’자와 ‘又’자 등에서 사용한 波磔은 훗날 탄생하는 隸書 波磔의 근원이 되었다.

『散氏盤』은『失人盤』이라 불리기도 하는 西周 厲王시대(서기전 9세기)의 작품으로 357자의 명문이 주조되어 있다. 이 청동기는 淸나라 康熙 연간에 세상에 알려 졌으나 언제 어디서 출토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嘉慶 14년(1809)에 兩江 總督 阿毓寶가 仁宗의 50세 생일에 진상하여 궁중에 보관되었으며 국민당 정부가 臺灣으로 옮겨가 현재는 대만의 故宮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명문은 사돈 관계에 있는 失씨와 散씨 두 가문이 토지를 분배하여 경계를 정하고 증인을 세워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盟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散氏盤』은 西周의 토지제도와 계약 제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散氏盤』은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후 지금까지 서예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金文으로 수많은 평론과 창작의 대상이 되었다. 先秦시대의 서예 작품 가운데『散氏盤』만큼 후세 서예가의 사랑을 받은 작품은『石鼓文』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西周 金文 서예의 筆劃은 크게 올챙이형, 쥐꼬리형, 덩어리형, 小篆형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散氏盤』은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한다고 꼬집어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西周 金文 筆劃의 심미적 특징을 종합적으로 표현하였다. 자연스럽게 써 내려간 筆劃은 천진난만하여 규칙이 없는 듯 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규칙과 미감을 표현하였다.『散氏盤』 서예의 가장 큰 특징은 세로로는 줄을 맞추었으나 기계적이지 않고 가로로는 줄을 맞추지 않았으나 산만하지 않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布置와 章法이다. 結字와 결구도 布置와 마찬가지로 글자 본래의 크기와 형세에 따라 크기와 방향이 정하여져 변화가 풍부하고 자유스럽다.『散氏盤』 전체적으로 질박하고 천진하면서도 西周 金文의 고유한 미감인 장엄하고 전아한 심미적 특징을 잘 표현하였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그 자유스러운 運筆과 章法으로 ‘草篆’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毛公鼎』은 西周 宣王시대(서기전 9세기-서기전 8세기)의 작품으로 淸나라 道光 연간인 1850년 陝西省 岐縣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는 대만에 보관되어 있다. 명문은 商周시대 청동기 金文 가운데 가장 긴 32행에 497자이며 毛公??음이 周宣王에게 정치에 더욱 힘써 국가의 태평 성세를 도모할 것을 권하고 후한 상을 받은 사실과 文王과 무왕 등 선대의 업적, 그리고 毛公가문을 찬양한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毛公鼎』은 글자 수가 많고 청동기의 바닥에 주조한 까닭으로 그림과 같이 둥근 바닥의 모양에 따라 곡선의 세로 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자형도 전체의 모양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조금씩 기울어져 있으나 결코 균형을 잃지는 않았다. 각각의 서체는『大盂鼎』과 같이 웅장하고 묵직하지는 않고『散氏盤』과 같이 자유스럽고 천진하지는 않지만『毛公鼎』만의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미감을 갖추고 있다. 筆勢가 유창하고 결구의 조화가 뛰어나며 가로줄을 맞추지 않고 획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布置하여 단아한 가운데서도 자연스러운 맛을 표현하였다.

『虢季子白盤』은 西周 宣王시대의 작품으로 淸나라 道光 연간에 陝西省 寶鷄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北京의 中國歷史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季盤』 또는『虢季子盤』으로 불리기도 하며 8행에 111자의 명문이 鑄刻되어 있다. 명문은 虢季子白이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周王의 상을 받고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虢季子白盤』의 서체는 筆劃이 가지런하고 규칙적이며 圓筆을 위주로 대칭의 結字와 결구를 취하였다. 자간과 행간이 뚜렷하며 空白의 안배가 매우 철저하여 우아하고 단아하며 함축된 심미적 특징이 표현되고 있다. 특히 筆劃의 굵기가 균일하고 結字가 장방형을 취하고 있는 것이 秦나라가 통일한 이후에 사용한 小篆과 매우 닮아 있어서 小篆이 한 사람에 의해 창작된 서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虢季子白盤』과 같은 종류의 서체에서 출발하여『秦公簋』,『商鞅方升』,『石鼓文』,『秦公大墓石磬文字』,『詛楚文』 등의 서체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小篆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형성 될 수 있었다. 秦나라가 六國을 통일하고 문자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李斯 등이 秦나라에서 사용하던 서체와 다른 종류의 서체를 정리하여 완전한 小篆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5. 金文의 서예사적 위치 및 가치

청동기 명문의 내용은 고대의 역사를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진실성이 가장 높은 역사 자료이다. 당시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이며 이를 통하여 기록되지 않은 역사나 잊혀진 역사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당시의 사람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하여 기록하였으며 몇 천년을 변하지 않고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金文의 내용을 근거로 후대에 기록된 역사와 서로 비교하고 연구하면 역사와 문헌의 진위를 고증 할 수 있다. 또한 고고학과 문자학의 연구에도 많은 자료를 제공 할 뿐 아니라 한자의 탄생과 서체 변천의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서체의 변천사와 서예사에서 金文이 차지하는 위치와 가치는 매우 높고 중요하다. 金文이 최초의 성숙된 문자인 甲骨文과 함께 殷商시대에서부터 사용되어 온 까닭에 한자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유추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小篆은 물론이고 隸書, 草書, 楷書, 行書 등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모든 書體가 탄생할 수 있는 모태가 되었다. 따라서 金文 서체는 筆劃과 자형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結字와 결구로 이루어져 풍부한 심미적 범주를 형성하고 있다. 春秋시대의 많은 金文 서체에는 이미 小篆과 같이 굵기의 변화가 없고 매끈한 筆劃과 장방형의 結字와 대칭의 결구가 존재하며 가로와 세로를 정확하게 구분한 布置와 章法이 있다. 殷商과 西周시대 초기의 筆劃에 撇捺과 波磔이 있는 金文은 은 거론하지 않더라도 戰國시대의 많은 金文 서체에서는 草書나 隸書의 筆劃과 결구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銅鏡이나 무기 같은 청동기의 명문에서는 行書와 草書의 筆劃과 같은 비교적 자유스럽고 유동적인 맛이 많은 筆劃이 있으며 이와 서체는 획과 획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서로 연결된 듯하여 行草의 느낌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것을 살펴 볼 때 비록 金文이 비록 모든 今體字 書體의 탄생에 직접적 관계가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小篆과 隸書의 모태가 된 것에는 틀림이 없으며 草書, 楷書, 行書 근본이 金文속에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西周시대 이전의 金文 서체는 象形性이 많은 것에서 점차 象形性을 버리는 형태로 변천하였으며 春秋시대 이후에는 筆劃이 직선으로 변화하고 자형이 장방형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筆劃과 자형이 계통에 의한 변천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새로운 형태와 미감을 갖춘 작품이 나타나게 된다. 象形性의 감소와 筆劃의 직선화는 선에 대한 새로운 미적 의식을 싹트게 하였고 古體字의 마지막 서체인 小篆을 탄생하게 하였다. 종주국의 문화적 영향을 적게 받는 지방의 제후국에서 사용한 金文 서체나 민간에서 사용하는 실용성의 서체에는 완전한 부호로서만 이루이진 형태로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隸書와 草書 등 今體字의 서체를 탄생하게 하였다.

중국 서예사에서 작품을 창작하고 감상하기 위한 목적의 예술 행위로 서예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한 시대는 漢나라 후기와 魏晉시대부터이다. 漢나라 시대까지의 서사 활동은 문장을 남기기 위한 실용성이 목적이었다고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甲骨文과 金文 그리고 秦漢시대의 刻石 서체와 簡帛 서체가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였다고 하여 심미적 추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金文을 포함한 漢나라 이전 시대의 서사 행위의 가장 큰 목적이 문장을 기록하는 것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筆劃의 변화와 자형의 응용 등 예술 행위에서 요구하는 형식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金文은 다른 서체와 달리 문자를 쓰고 새기는 과정 이외에 주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매우 높은 수준의 기술과 예술적 감각이 요구되었다. 문자를 쓰고 새기는 과정에서 주조한 이후에 나타날 서체의 筆劃과 자형을 미리 예상 할 수 있는 기술적 경험과 감각은 서예의 심미적 표준과 수준을 높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書-刻-鑄造-淸砂의 공정을 거쳐 탄생한 金文 서체는 문인과 匠人의 결합 작품으로 秦漢시대 이후에 성행하는 刻石 서예 작품의 형태와 심미적 범주를 형성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대부분의 金文은 청동기를 제작하는 주인이나 그 주위의 문인에 의해 문장이 지어지고 쓰여져 서체의 기본 형태가 결정되고 청동기를 제작하는 장인에 의해 새겨지고 주조되며 마지막에 문인과 장인의 심미적 표준의 종합으로 다듬어져 완성된다. 秦始皇이 六國을 통일한 이후 강력한 중앙 정부의 힘이 탄생하게 됨에 따라 예의 제도도 春秋 戰國시대의 제후를 중심으로 한 것과는 황제를 중심으로 하게 된다. 또한 문자와 도량형 그리고 무기와 차바퀴 등 많은 영역에서 통일된 규범을 실시하자 제후들이나 지방 관리들이 자유로운 형태와 크기로 제작하던 청동기도 점차 사라지게 된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황제의 고유한 권리로 자리잡게 되며 그 기록을 남기는 행위도 청동기를 제작하여 명문을 기록하던 것과는 달리 당시의 개념으로 하늘과 가까운 산봉우리의 바위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청동기를 이용하지 않았을 뿐 황제나 그 주위의 문장가와 서예가가 글을 짓고 썼으며 匠人의 새김으로 완성되는 것은 金文의 형식을 이어받았다. 金文이나 진한의 刻石 서예 작품은 다같이 예의 문화와 제도의 요구로 탄생하였기 때문에 비록 서체는 다르지만 엄숙하고 장중하며 典雅한 심미적 범주를 형성하고 있다.

金文 서체의 독특하고 다양한 자형과 筆劃 그리고 심미적 범주는 수 천년의 서예사에서 가장 뚜렷하고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다양한 筆劃과 자형은 今體에 속하는 모든 서체를 탄생하게 하였으며 광범위한 심미적 범주는 고대뿐만 아니라 현대의 작가에게 창작 영역의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金文 서체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서예의 모든 심미적 특징을 종합하고 있으며 結字와 결구 그리고 布置와 章法 등 서예 창작의 법칙이 모두 金文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중국과 서예
글쓴이 : 금릉산방인 소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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