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Ⅳ. 刻石 서예 및 印章, 磚瓦文

2012. 3. 15. 09:18서예일반

Ⅳ. 刻石 서예 및 印章, 磚瓦文

1. 刻石 서예

고대 사회에서 문자를 기록하는 재료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자연 상태의 나무나 돌등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돌은 비록 단단하지만 새기기가 크게 어렵지 않으며 오랜 기간 동안 보존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내용을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문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부호나 그림이 새겨진 刻石은 仰韶文化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문자가 새겨져 있는 刻石으로 시대가 가장 빠른 것은 1976년 殷墟에서 발견된 殷商시대의 武丁 후기(서기전 12세기)의 石牛와 石磬이다. 石牛에는 ‘后辛’ 두 자, 石磬에는 ‘妊冉入石’ 네 자가 새겨져 있으며 서체는 당시의 甲骨文과 비슷하다. 殷商시대의 刻石 가운데 글자가 가장 많은 것은 12자이며 보통 두 세자 정도이다.『雙劍誃古器物圖錄』에 殷商시대의 刻石 문자로 ‘永啓’, ‘永余’, ‘夭余’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여러 점 발견되고 있어서 돌이 甲骨과 함께 서사 재료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刻石 문자는 대부분이 돌로 만든 기물에 새겨져 있으며 내용도 기물이나 사람의 이름이다. 문자의 筆劃과 자형이 당시의 甲骨文이나 金文과 거의 같은 것으로 미루어 殷商시대에는 아직 여러 가지 서체가 탄생하지 않고 한가지 서체만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甲骨, 청동, 석재 등 서로 다른 서사 재료에 쓰고 새긴 서체의 서풍이 비슷한 것은 당시에 문자를 다루는 계층의 서사 수준이 매우 뛰어 났음을 알 수 있다.

殷商시대의 문자 자료는 甲骨文이 대부분이고 西周시대는 청동기 명문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殷商시대의 문자 자료는 대부분 甲骨文이라 할지라도 金文을 포함하여 옥과 도기 그리고 刻石 서예가 여러 점 전하고 있는데 비해 西周시대의 刻石 서예는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 西周시대의 문자 자료로 金文이 대부분이며 최근에 洛陽에서 출토된 玉簡 墨書 이외에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 특이한 현상이다. 春秋 戰國시대의 문자 자료도 여전히 金文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春秋 후기의 盟書와 戰國시대의 帛書, 竹簡書, 木牘 서예가 20세기에 들어와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장편의 문장이 기록된 春秋시대 이전의 刻石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대에 夏禹가 다스리던 시절의 刻石인『岣嶁碑』가 있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岣嶁碑』라고 전하고 있는 것은 戰國시대 초기의 僞作인 刻石을 후대에 摹刻한 것을 탁본한 것이다. 현존하는 완전한 형태의 刻石으로 시대가 가장 빠른 것은 春秋 戰國시대의『石鼓文』이다. 현존하는 유물을 근거로 할 때 석재에 문자를 새기는 행위가 성행한 시기는 戰國시대 후기부터이다. 先秦시대의 刻石으로는『石鼓文』 이외에 春秋시대의『秦景公大墓石磬文字』와 戰國시대의『曾侯乙墓石磬文字』,『守丘刻石』,『詛楚文』 등이 전하고 있다

1) 石鼓文

『石鼓』는 그 모양이 북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내용과 형식이 사냥에 관한 敍事詩이므로『獵碣』이라 부르기도 한다. 碣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형태가 둥글고 특별한 용도를 목적으로 만든 刻石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說文解字』에 “碣, 特立之石”(碣은 특별히 세운 돌이다.)이라 하였고『後漢書· 竇完傳』에서는 “方者謂之碑, 圓者謂之碣”(네모난 것을 碑라하고 둥근 것을 碣이라 한다.)이라 하여 碣이 둥근 모양이며 특수한 목적으로 세운 돌이라 하였다. 이밖에『獵碣』이 발견된 지명과 수량에 따라『陳倉十碣』,『雍邑刻石』으로 부르기도 한다.

『石鼓文』은 唐나라 貞觀 연간(627-649년 사이)에 岐州 雍城(지금의 陝西省 鳳翔縣)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唐나라 시대에 이미 蘇勖, 李賢, 李嗣眞, 杜甫, 張懷瓘 등 여러 사람들이『石鼓文』에 관한 문장을 남기고 있는 것과 같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 張懷瓘은『書斷』에서 “(籒文)‧‧‧‧‧其跡有[石鼓文』存焉. 蓋敍(周)宣王畋獵之作, 今在陳倉縣.”(籒文의 작품으로는『石鼓文』이 있다. 대개 周나라 宣王의 사냥에 관한 내용으로 지금 陳倉縣에 있다.)이라 하여『石鼓文』의 서체를 籒文으로 이해하였으며 陳倉縣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 竇蒙은『述書賦』에서 “岐州雍城南有周宣王獵碣十枚, 並作鼓形, 上有篆文, 今見打本.”(岐州의 雍城 남쪽에 周宣王의 獵碣 10枚가 있다. 북 모양에 篆書가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 탁본을 볼 수 있다.)이라 하였으며 韋應物은 그의 시에서 “今人濡紙脫其文, 旣擊旣掃黑白分.” (지금 사람은 젖은 종이를 붙여 때리고 쓸어서 그 문장을 흑백으로 분류해 낸다.)라 하여 『石鼓文』이 북 모양으로 생긴 열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에 이미 탁본이 전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石鼓文』의 拓本에 唐나라 시대에 이미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문헌의 내용만 전하고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하는 最古의 拓本은 北宋시대의 것으로『先鋒本』,『中權本』,『後勁本』 등 3점으로 모두 일본에 보관되어져 있다.

唐나라 시대에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또 탁본하여 소장하기도 하였으나 국가에서 보관하지 않은 까닭에 五代의 戰亂 과정에서 散失되었다. 北宋시대의 후기에 다시 발견되었을 때 이미 하나의『石鼓』는 절구통으로 변해 있었으며 그 후 宋 徽宗이 골동품과 서예를 좋아하여 많은 작품을 수집할 때 수도인 開封으로 옮겨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元나라 시대 이후부터는 樞密院의 후신인 國子學에 보관되어 왔으며 淸나라 乾隆25년(1760) 高宗은『石鼓文』이 세월의 흐름과 탁본 등으로 마모가 심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같은 모양의 石鼓를 만들고 摹刻하였다. 이것은『新石鼓』라 부르는데 현재 北京의 國子監에 보관되어 있다. 原石은 抗日 전쟁 때에 잠시 四川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北京故宮博物院에 보관되어 있다.

『石鼓文』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것이 만들어지고 새겨진 시대이다. 唐나라 시대에의 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周나라 시대의 것으로 이해하였다. 張懷瓘과 韓愈는 周나라 宣王시대의 것이라 하였고 韋應物은 文王시대의 것이라 하였으며 宋나라 시대의 鄭樵는 戰國시대 후기의 秦나라 작품이라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고고학과 문자학이 성행하여『石鼓文』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많아졌으며 제작 연대가 가장 관건이 되는 연구의 대상이었다.『石鼓文』의 제작 연대를 연구한 학자들은 빠르게는 春秋 초기이며 늦게는 戰國 후기라 하는 등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秦나라 작품이라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春秋시대의 작품으로 주장한 학자는 郭沫若, 震鈞, 羅振玉, 韓偉, 李仲操, 馬衡, 李學勤 등이며 裘錫圭, 陳昭容 등은 春秋와 戰國이 교차하는 시대의 것이라 하였고 戰國시대의 것이라 주장한 학자는 唐蘭, 羅君愓 등이다.

『石鼓文』의 연대를 연구한 학자들은『石鼓文』의 내용과 역사의 기록을 대조하거나 서체의 시대적 특징을 근거로 자신들의 학설을 펼치고 있다.『石鼓文』이 제작된 연대를 가장 빠르게 보는 학자는 郭沫若이었다. 그는『石鼓文硏究』에서 秦나라 襄公이 서기전 770년 周 平王의 東遷하는 행사에 참가한 후 돌아와 제작한 것이라 하였다. 中國社會科學院의 李學勤 교수는『東周與秦代問名』에서 春秋 중 후기의 것이라 하였으며 北京大學의 裘錫圭교수는『文字學槪要』에서 春秋 후기에서 戰國 초기의 것이라 하였고『關於石鼓文的時代問題』에서는 서기전 5세기를 전후한 秦나라 작품이라 하였다. 또한 唐蘭은『石鼓文代考』에서 戰國시대의 초기와 중기 사이의 秦나라 작품이라 하였다.『石鼓文』의 서체와 秦系 문자를 비교하여 연대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은『石鼓文』의 연대가 아무리 늦어도 戰國시대 중기를 넘어가지 않는다는 학설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었다. 1986년 陝西省 鳳翔縣에서 春秋시대 秦나라 景公시대(서기전 574)에 제작된『秦公大墓石磬文字』가 출토된 후 많은 학자들은 그 연대를 春秋 중 후기까지로 더욱 앞당겨 보고 있다. 徐暢은『石鼓文年代硏究綜述』에서『秦公大墓石磬文字』와『秦公簋』의 자형을 근거로『石鼓文』의 연대를『秦公簋』보다는 늦고『秦景公大墓石磬文字』보다는 빠른 春秋 중 후기의 秦나라 작품이라 하였다.

秦系 書體의 변천을 고찰해 볼 때『石鼓文』은 金文 서체에서 小篆으로 변천하는 과정에 있는 서체이다. 西周 宣王시대의『虢季子白盤』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小篆으로 변화하는 중심에 있는 서체는 먼저 筆劃이 균일한 굵기로 가지런해지고 직선화되며 장방형의 結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小篆으로 변천하는 과정의 중심에 있는 秦系 문자를 小篆화된 정도에 따라 순서를 매기면『虢季子白盤』-[秦公簋』-[石鼓文』-[秦公大墓石磬文字』로 나타난다. 따라서 서체의 발전을 근거로 하면 石鼓文은『秦公簋』와『秦景公大墓石磬文字』의 중간 시대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작품의 연대를 서체의 발전만을 근거로 하여 정하는 것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으며 더욱이 앞뒤 작품의 연대가 정확하지 않을 때에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秦景公大墓石磬文字』의 연대는 春秋시대 秦나라 景公4(서기전 574)년의 작품임이 밝혀지고 있으나『秦公簋』의 연대가 정확하게 고증되지 않아『石鼓文』의 정확한 제작 연대를 입증하기가 더욱 어렵다. 다만 많은 학자들이『秦公簋』의 연대를 春秋시대 秦나라 穆公(서기전 659)시대부터 桓公(서기전 577)시대 사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기 때문에『石鼓文』이 제작된 시대를 春秋시대 秦나라의 穆公시대부터 景公시대 사이의 작품으로 대강의 연대를 고증하게 된다.

『石鼓文』은 모두 10점으로 각 石鼓마다 매 구 4행, 전체 10首의 운문이 새겨 있다. 한 首의 시는 18구 혹은 19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화롭게 고기 잡고 사냥하며 지내는 것을 찬양하는 내용이다.『石鼓文』의 형식은 10首를 하나의 什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詩經』의『雅』와『頌』이 취하고 있는 章法과 같은 것이며 詩句도 많은 부분이『小雅』,『大雅』,『秦風』 등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에 시경이 매우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글자는 약 460자 정도이며 그 내용들 학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해석되고 있다. 각 편의 이름은 보통 남아 있는 글씨의 첫 구절에서 두 글자로 붙이고 있으나 그 순서는 각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郭沫若의 학설을 따르면 汧沔, 霝雨, 而師, 作原, 吾水, 車工, 田車, 鑾車, 馬遷, 人吾 등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에서 글자의 보존이 가장 좋은 것은 車工, 鑾車, 田車이다.

春秋 戰國시대의 秦나라 서체는 西周 문자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으며 秦始皇 이후에 통일되는 문자의 근본 형태가 되었을 뿐 아니라 漢나라 이후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石鼓文』은 大篆에서 小篆으로 변천하는 중심에 있는 서체이다.『石鼓文』의 예술성과 그 서예사적 가치는 春秋 戰國시대의 秦나라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을 뿐 아니라 先秦시대의 서체로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石鼓文』이 처음 발견된 唐나라 시대에 이미 杜甫, 韓愈, 韋應物 등 많은 시인 묵객들과 張懷瓘, 張彦遠, 竇蒙 등 서예 이론가들이 그 내용과 예술성을 노래하고 평가하였다. 碑學이 성행한 淸나라 시대 후기에는 더욱 많은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평가하였을 뿐 아니라 吳昌碩 등 전문적으로 臨書하고 창작하는 서예가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石鼓旣爲中國第一古物, 亦當爲書家第一法則也.”([石鼓文』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碑碣일 뿐 아니라 서예가에게 가장 중요한 법칙이 된다.)라 하여『石鼓文』의 역사적 가치와 서예사적 위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石鼓文』 서체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金文을 대표하는 大篆과 小篆의 중간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자형은 아직 大篆의 형태를 많이 간직하고 있으나 筆劃은 小篆의 특징인 圓筆의 中鋒 運筆로 균일한 굵기를 유지하고 있다. 起筆과 收筆은 逆入과 回鋒을 취하고 있으며 行筆에서는 藏鋒의 筆勢를 취하고 있다. 藏頭護尾와 藏鋒의 筆勢는 함축된 심미적 본질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감상자의 시선을 오래 붙잡아 두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石鼓文』의 筆劃이 비록 굵기의 변화가 없이 균일하나 많은 서예가들이 그 筆意를 찬양하며 감상하고 창작하는 까닭은 바로 筆勢의 함축된 심미적 특징 때문이다. 筆劃의 轉折 부분이 둥근 형태인 까닭에 한자의 기본적 結體인 사각형의 유지하고 있으나 둥글둥글한 느낌이 많으며 正方形과 長方形의 형세를 취하고 있다. 偏旁이 金文에서 글자에 따라 위치와 형태가 많은 변화가 있는 것과는 달리 거의 일정한 형태와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偏과 旁의 좌우 결구는 ‘如’, ‘猷’, ‘毆’ 등의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좌측이 낮고 우측이 높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車’, ‘樂’, ‘其’, ‘大’, ‘異’ 등 대칭을 이루는 글자는 엄격한 대칭의 결구를 이루고 있다. 중첩된 글자를 표시하는 ‘󰁍’이나 획수가 매우 간단한 글자가 연이어 나오는 ‘二日’ 등은 두 글자가 한 글자의 느낌이 나도록 처리하였다.

『石鼓文』의 章法은 행간과 자간을 정확하게 맞추었으며 筆劃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글자의 크기를 결정하되 空白의 안배를 철저하게 하였다. 따라서 비록 각 글자의 크기는 많은 차이가 나지만 자간과 행간 그리고 布置가 가지런하고 단정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깔끔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느낌을 갖도록 한다. 이와 같은 章法은 小篆의 布置와 章法을 형성하는 시금석이 되었으며 小篆 뿐만 아니라 漢隸, 魏楷, 唐楷 등 今體의 正體 章法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筆劃과 결구 그리고 章法에서 통일과 변화의 조화는 서예의 매우 중요한 창작 요건이다. 작품 전체에서 뿐 아니라 한 글자 한 획 안에서도 충분한 변화를 요구하며 그 변화 속에서도 서로 연관성이 있어야 하며 氣脈과 운율이 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창작론의 기본이다.『石鼓文』의 筆劃, 結體와 結構, 布置와 章法에는 변화와 통일이 매우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서예의 심미적 범주를 크게 陽剛과 陰柔의 두 가지 상대되는 개념으로 나누기도 한다. 北魏 시대의 造像記와 같은 方筆 서체는 陽剛의 심미적 법주에 있는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며 그 특징은 웅장하고 강건하며 호방한 筆劃에서 찾을 수 있다. 陰柔의 심미적 특징은 수려하고 단정하며 溫雅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圓筆의 서체에서 많이 표현되고 있다.『石鼓文』은 圓筆을 중심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轉折에서도 둥글게 運筆하여 유연하고 단아한 筆劃의 맛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中鋒 運筆로 강건함이 함축된 筆勢를 표현하고 있으며 사각형의 結體와 엄정한 章法으로 體勢가 장중하며 전체적으로는 기운이 왕성한 것이 특징이다. 직선과 곡선, 강건함과 온유함, 질박함과 화려함의 심미적 특징을 형태와 내면에 함축하고 있는『石鼓文』은 陽剛과 陰柔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2) 기타 刻石

『秦景公大墓石磬文字』는 1986년 陝西省 鳳翔縣의 春秋시대 秦나라 묘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 陝西省 考古硏究所에 소장되어 있다. 磬은 석재, 옥, 청동 등으로 만들어진 고대의 악기로서 모양은 곱자와 비슷하며 틀에 걸어 놓고 채로 때려서 울리게 하는 악기이다. 商나라 시대에 이미 單磬 혹은 三磬이 있었으며 周나라 시대에는 12개의 磬으로 한 조를 이루어 사용하였다. 秦景公大墓에서 출토된 石經은 20여 개의 온전한 것과 많은 殘片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曾侯乙墓에서 출토된 石經과 같이 32개의 경으로 한 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曾侯乙墓石磬文字』는 1978년 湖北省 隨縣의 戰國시대 曾나라 묘에서 출토되어 현재 湖北省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이 石經의 서체는 같은 묘에서 출토된『曾侯乙墓甬鐘』이 楚나라 金文 서체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과는 달리 꾸밈이 없는 草篆의 형태이다.

『秦景公大墓石磬』에는 190여자의 小篆에 가까운 서체가 새겨져 있으며 명문의 내용을 근거로 秦나라 景公 4년(서기전 574)에 제작된 것으로 고증되었다. 이 石經의 서체는 小篆으로 변천하는 秦系 문자의 중심에 있을 뿐 아니라 筆劃과 자형이 小篆과 매우 비슷하여 서체 변천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학설이 분분한『石鼓文』의 연대를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 내는데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서체의 筆劃이 가늘고 가지런하며 장방형으로 이루어진 結體는 小篆과 거의 비슷하다. 起筆과 收筆에서 方筆과 圓筆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으며 장방형의 結體와 대칭의 결구, 그리고 가지런한 布置와 章法은 小篆이라고 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岣嶁碑』는 戰國 초기에 湖南省 衡陽 衡山의 碧雲峯에 새겼다고 전하는 刻石이나 그 原石은 唐나라 이전에 이미 사라졌다고 한다. 衡山은 南嶽이라 불리며 主峰의 이름이 岣嶁峰이기 때문에 衡山에 있던 이 刻石을『岣嶁碑』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내용은 衡山에 제사 올리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굴곡이 심한 大篆의 서체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刻石은 夏禹가 治水한 시대의 것으로『神雨碑』 혹은『禹碑』로도 불렸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夏禹시대의 것은 물론 戰國시대의 刻石도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탁본과 摹刻本은 모두 宋나라 嘉定 5년(1212)에 長沙의 岳麓書院에 摹刻하여 세운 것을 근본으로 한다. 그 후 明나라와 淸나라 시대에는 摹刻本과 탁본이 늘어났으며 현재까지 明나라 시대의 탁본이 전하고 있다.

『守丘刻石』은 1975년 河北省 平山縣에 있던 戰國시대 中山國의 묘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 河北省 文物管理委員會에 소장되어 있다. 이 刻石은『河光刻石』 혹은『戰國中山刻石』으로도 불리며 높이 90㎝, 넓이 50㎝, 두께 40㎝의 바위에 大篆 19자가 새겨져 있다. 刻石을 세운 사람은 中山國 왕실의 묘를 관리하는 公乘得으로 왕릉의 수호와 관련된 목적으로 세운 까닭에『守丘刻石』 혹은『公乘得守丘刻石』으로 부른다. 단단한 석재에 새겨진 까닭에 筆劃이 가늘고 직선을 이루며 꾸밈이 적다. 자연석의 형세에 따라 結字하여 자형이 삐뚤삐뚤하고 章法이 자유스러워 질박하고 천진한 느낌이 많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詛楚文』은 戰國시대 秦나라 惠文王 13년(서기전 312)에 楚나라를 저주하기 위하여 짓고 새긴 문장으로『巫咸文』,『厥湫文』,『亞駝文』 등 세 편이 전한다. 세 편 모두 宋나라 시대에 발견되었으며『巫咸文』은 326자,『厥湫文』은 318자,『亞駝文』은 325자의 秦系 篆書이다. 그러나 원석은 이미 산실 되었으며 현재 전해지는 것은 후대의 翻刻本과 閣帖本이다. 세 점의[詛楚文』은 기도하는 신의 이름만 다를 뿐 문장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戰國시대 秦나라와 楚나라가 대립하고 전쟁할 때 秦나라가 楚나라의 패망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며 저주하는 내용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국가와 국가 사이는 물론 개인 사이에서도 저주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저주하는 내용의 문장을 기록하여 땅에 묻거나 태워서 상대방을 저주하였다.『周禮‧春官』에 周나라에는 ‘詛祝’의 관직을 두고 있었으며 국가간에 盟約이나 저주를 담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盟書로서 盟約하고 그 盟約이 깨지면 상대방을 저주하는 문장을 남겨 대대로 覺醒하게 하는데 이것이 詛呪文이다.

현재 전하여지는『詛楚文』은 摹刻의 翻刻本이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알기가 쉽지 않으나 筆劃과 결구, 자형과 章法이 小篆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秦系 서체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자형의 결구는 방정함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筆劃의 안배와 공백의 布置 등이『石鼓文』과 매우 비슷하다. 특히 ‘同’, ‘以’, ‘君’, ‘王’, ‘其’ 등의 글자는『石鼓文』의 문자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며 ‘不’. ‘多’, ‘用’, ‘宣’ 등의 글자는 小篆과 같은 자형으로 이루어져『詛楚文』이 小篆을 변천하는『石鼓文』의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詛楚文』을 근거로 秦系 문자가 大篆에서 小篆으로 변화하는 기본 규율을 좀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小篆이 결코 한 시대, 한 사람에 의해 창조된 서체가 아니라 秦系 篆書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서체임이 증명된다.

2. 印章 및 磚瓦

1) 印章과 封泥

先秦시대의 印章은 청동, 옥, 돌 등 딱딱한 재료에 문자를 거꾸로 새겨서 진흙, 簡牘, 비단, 종이 등에 찍어서 증표로 삼거나 비밀을 지키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簡牘이 주요한 서사 재료로 사용되던 先秦시대에는 문서의 비밀을 위하여 簡牘을 끈으로 묶고 진흙으로 밀봉하여 실마리에 圖章를 찍어 기밀을 유지하였다. 진흙이나 서사 재료에 찍기 위하여 새긴 것을 印章으로 부르고 문서를 밀봉하기 위하여 찍어서 굳어진 진흙을 封泥라 한다. 先秦시대의 印章은 古文印, 古朱文印, 古璽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근래는 좀 더 구체적으로 戰國璽, 六國璽, 秦印, 漢印 등 세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先秦시대에는 印章을 모두 璽라 불렀으나 秦始皇이 六國을 통일한 후에는 皇帝의 印章을 璽라 하였으며 관리들의 印章은 章 혹은 印이라 불렀다. 東漢의 應劭는『漢官儀』에서 “璽, 施也, 信也. 古者尊卑共用之.”(璽는 信標로 사용하는 것이다. 古代에는 누구나 모두 사용하였다.)라 하였으며 衛宏은『漢舊儀』에서 “秦以前民皆佩綬, 以金玉銀銅犀象爲方寸璽, 各服所好. 自秦以來, 天子獨稱璽, 又以玉, 君臣莫敢用也.”(先秦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금, 은, 옥, 동, 뿔, 상아 등으로 자유롭게 印章을 만들어 佩用하였다. 秦나라 이후에는 천자의 印章만을 옥으로 만들고 璽라 불렀으며 군신들은 감히 사용하지 못하였다.)라 하여 先秦시대의 印章은 璽로 불렸으며 信標로 사용하는 것이었음을 설명하였다. 현재까지 전하는 漢나라 시대 印章의 내용을 근거로 할 때 漢나라 이후에는 皇帝, 皇后, 諸侯, 등이 사용하는 印章은 璽라 불렀고 太守, 將軍, 公卿 등의 官印과 私印은 章이라 불렀으며 평민이 사용하는 것을 印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漢나라 시대의 緯書인『春秋合誠圖』와『春秋運斗樞』 그리고『後漢書‧郊祀志下』 등에는 五帝와 堯舜시대부터 이미 印章이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戰國策』,『淮南子·人間訓』 등에도 印章이 春秋 戰國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조금의 의문도 가지 않는 西周시대 이전의 璽印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다만 殷商시대의 璽印이라는 학설과 청동기 銘文의 模本 또는 후대의 위작이라는 등의 여러 학설이 있는 靑銅印 3顆가 殷墟에서 발견되어 관심을 받고 있다. 이 靑銅印의 인문은 아직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고 있으며 그 형태에 따라 편의상 亞字印, 目字印, 田字印으로 부르고 있다. 이 靑銅印에 관하여 于省吾, 黃浚, 李學勤, 馬國權 등의 학자들은 殷商시대의 璽印이거나 당시의 청동기 명문의 模本이라 하였으며 沙孟海, 高明 등은 殷商시대의 璽印 이라는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黃浚은 亞字印의 형태가 殷商시대의 청동기인『父丁簋』와『父乙尊』의 명문과 같은 것을 근거로 이 璽印을 商나라 시대의 작품으로 분류하여『尊古齋古璽集林』에 수록하였다. 그러나 高明은『中國古文字學通論』에서 沙孟海는『印學史』에서 이 璽印이 殷商시대의 작품이라는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 3方의 靑銅印은 현재 臺灣의 故宮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문헌의 기록과 지금까지 출토된 문물을 근거로 할 때 印章이 사용되기 시작한 가장 빠른 시대는 春秋시대로 확인된다.『左傳‧襄公二十九年』에 璽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國語‧魯語』에도 “襄公在楚, 季武子取卞, 使季治逆, 追而予之璽書."(襄公이 楚나라에 있을 때 季武子가 卞의 지역을 점령하자 季를 파견하여.........)라 하여 左傳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였고『周禮‧地官‧司市』에는 당시 세금을 부과할 때 璽節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春秋시대에 印章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84년 河南省 息縣에서 印面의 변이 1㎝, 높이가 3.7㎝인 春秋시대의 靑銅印이 출토되었다. 印文은 내용은 ‘郢稱’로 해석되고 있으며 春秋시대 후기의 楚나라 印章으로 고증되었다. 이밖에도 1944년에 山西省 風陵縣에서 출토된 물고기 문양이 새겨 있는 春秋시대의 靑銅印이과 曹나라의 靑銅印이 세 점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은 春秋시대의 印章이 비록 수량은 적으나 문헌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며 당시에 印章의 사용이 광범위하였음을 알기에는 충분하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先秦시대의 印章은 대부분 戰國시대의 것으로 印章의 형태와 서체가 뚜렷한 지역적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현상은 戰國시대의 서예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비슷한 것으로 楚, 齊, 燕, 三晋, 秦나라 등으로 나누어진다. 楚나라 印章은 형태와 크기가 매우 다양하며 대부분 官印으로 印章의 손잡이는 대부분 祭壇 형태인 壇鈕로 이루어져 있다. 印面에 十字 혹은 세로의 경계선이 있는 것이 많으며 거의 白文으로 서풍은 당시의 金文이나 簡帛 서체와 비슷하다. 齊나라 印章은 대부분이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印面의 한 변이 2.5㎝ 정도로 비교적 크다. 印鈕는 楚나라 印章과 같이 壇鈕이며 인문은 白文을 위주로 하고 있다. 十字나 세로의 경계선을 긋거나 아니면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하였으며 한 작품에 하나 정도의 덩어리 형태의 筆劃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다른 나라의 印章과 다른 특징이다. 燕나라 印章은 비교적 규칙적으로 같은 종류의 印章은 印面의 규격과 모양이 비슷하나 印鈕는 祭壇형, 기둥형, 언덕형 등 다양하다. 白文과 朱文이 모두 전하고 있으며 白文은 정방형이며 朱文은 정방형과 장방형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楚나라나 齊나라 印章과는 달리 白文에 글자와 글자 사이의 경계선은 없고 가장자리의 테두리선만 그어 놓았으며 정방형의 주문은 모두 테두리선이 있으나 장방형의 주문은 글자만이 있고 테두리선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三晋 즉 韓, 魏, 趙나라의 印章은 정치와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하여 印章의 형식과 서풍이 매우 비슷하다. 朱文이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筆劃이 가늘며 서체가 수려하다. 정방형의 형태가 많으며 테두리 印章의 크기는 비교적 작은 편으로 印面의 한 변은 1.5㎝ 정도이며 楚, 齊, 燕나라의 印章이 官印 위주인 것과는 달리 私印이 많다.

戰國시대 秦簡의 내용에 의하면 秦나라는 任官하는 官吏에게 증표로 印章을 下賜하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明나라 시대의 董說曾은『七國考‧秦器物』에서 “有司之賜印, 自秦孝公變法始耳.”(任官할 때 印章을 下賜하는 제도는 秦나라 孝公의 變法에서부터 시작하였다.)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秦나라에서는 印章이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 알 수 있다. 秦나라의 印章은 기본적으로 白文이며 거의 모두 가장자리의 테두리선이 있다. 정방형의 印章은 보통 네 글자로 田字형의 경계선이 있으며 장방형의 印章은 半通印이라 부르며 보통 두 글자로 日字형 경계선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방형의 印章은 印面의 변이 2.2㎝-2.4㎝ 정도이고 장방형은 가로 1.2㎝-1.3㎝, 세로 2.2㎝-2.4㎝ 정도이다. 印章 형태의 정방형과 장방형은 보통 관직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는데 정방형의 관직이 장방형보다 대체로 높게 나타난다. 印鈕는 두 가지 유형으로 壇鈕와 瓦鈕가 있으며 壇鈕가 일반적으로 시대가 빠르다. 瓦鈕는 戰國시대 다른 나라의 印章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형태로 西漢시대까지 나타난다.

先秦시대의 印章은 사용한 재료가 다양한 만큼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 가장 많은 印面의 모양은 정방형이며 그 다음이 장방형이고 원형, 둥근 자형, 삼각형, 마름모형 등이 있으며 간혹 凹凸의 모양도 나타난다. 새기는 방식은 양각의 朱文과 음각의 白文이며 白文은 十字형, 田字형, 日字형의 경계선을 넣고 있으며 주문은 테두리선을 넣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두 종류가 있다. 인문의 내용을 근거로 할 때 古璽는 크게 官璽, 私璽, 成語璽, 肖形璽, 族徽璽 등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대다수의 古璽는 대부분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도록 손잡이 부분에 구멍을 뚫어서 끈으로 연결하였는데 이 부분을 印鈕라 부른다. 印鈕의 모양은 여러 가지로 고리와 같은 鼻鈕, 기와를 엎어놓은 듯한 瓦鈕, 제단 모양의 壇鈕, 기둥 모양의 柱鈕 등과 각종 짐승의 모양을 새겨 놓은 것 등 매우 다양하다. 印鈕를 만드는 관습은 휴대하지 않는 帝王의 印章 등에도 용이나 봉황 등으로 화려하게 조각하여 권위를 나타내는 전통을 낳았으며 明淸시대 이후 印章이 篆刻 예술의 새로운 영역으로 다시 태어난 후에는 印鈕 예술이라는 또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잡았다.

통일된 秦나라 시대 이후에는 서체가 통일되는 것과 같이 印章의 형식과 내용 그리고 인문의 서체도 통일되어 지역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印章이 사용되는 범위가 皇帝印, 官印, 將軍印, 私印 등으로 확대되고 구체화됨에 따라 용도별로 크기와 모양이 다르게 나타난다. 印章에 사용하는 서체를 秦나라에서는 摹印이라 하였고 漢나라에서는 繆篆이라 하여 秦漢시대에는 印文 서체의 고유한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漢나라 시대는 戰國과 秦나라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印章이 가장 성행하였으며 높은 예술적 수준과 독특한 개성으로 이 때의 印章을 漢印이라 부른다. 漢印은 唐宋시대의 官印과 私印 뿐 아니라 明淸시대 이후 印章이 信標로서의 용도 이외에 창작하고 감상하는 순수한 예술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은 후의 전각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先秦시대 印章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信證이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인주를 사용하여 종이에 찍는 것이 아니라 印泥를 필요로 하는 위치에 붙이고 그곳에 印章을 직접 찍어서 信證으로 사용하였다. 印章을 점토에 찍어 굳어서 남겨진 형태를 封泥라 한다. 春秋 戰國시대에는 簡牘이 공문이나 개인 서신 등을 기록하는 서사 재료로 사용되었으며 일상의 기록 이외에 비밀을 필요로 하는 공문은 簡牘을 끈으로 묶고 印泥에 印章을 찍어 문서를 봉함 하였다. 封泥는 泥封이라고도 불리며 이름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後漢書‧百官志』로 漢나라 이전에 이미 封泥가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封泥를 하는 관습은 秦漢시대를 거쳐 魏晉시대에까지 널리 행하여 졌으나 南北朝시대 이후 비단과 종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封泥는 함께 사용된 竹簡書이나 木牘 그리고 이것을 묶은 끈이 땅속에서 쉽게 썩어 버리는 것과는 달리 물에 잠기거나 깨지지 않으면 매우 오래 보존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先秦시대의 封泥는 竹簡書이나 木牘보다 수량이 많고 출토된 범위도 광범위하다. 封泥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淸나라 후기로 甲骨文과 비슷하다. 1882년 四川省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이밖에도 陝西省, 河南省 등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수백 편이 출토되었고 1934년 山東省의 臨淄에서는 한곳에서 5백 편이 넘는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封泥가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잘 몰라 趙之謙과 같은 篆刻家도 靑銅의 印章을 만들기 위한 점토 주형이라 하는 등 학설이 분분하였다. 1972년 長沙의 馬王堆에서는 도기로 만든 항아리에 印章이 찍혀진 封泥가 여러 竹簡書과 함께 발견되었다. 竹簡書에는 항아리에 저장한 물건의 이름이 적혀 있고 封泥에는 ‘軑侯家丞’이라는 印章이 찍혀 있어서 封泥가 비밀을 필요로 하는 서신뿐 아니라 물건을 봉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封泥의 재료는 자연 상태의 점토를 정제하고 채색을 더하여 사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戰國시대 이전의 것은 두껍고 무거우나 秦漢을 거쳐 魏晉시대로 갈수록 얇고 가벼우며 입자가 곱고 매끄러운 것이 인공적인 제련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封泥에 찍혀진 인문의 내용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封泥의 점토와 색깔에 따라서도 신분의 높고 낮음이 나타난다. 帝王의 封泥는 매우 고운 입자의 진흙을 사용하였으며 紫色이나 藍色의 색채를 더하여 사용하였고 일반 관리는 회색이나 검은색을 사용하였다.

封泥는 印文이 찍혀져 남겨진 가장 오래된 자료로서 封泥의 筆劃, 結字, 布置와 章法의 연구는 고대 印章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또한 封泥의 인문은 諸侯나 관리들의 관직이거나 개인의 이름으로 고대의 관직과 행정 제도의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며 이미 잃어버린 지명의 고증에도 중요한 증거가 된다. 印章과 封泥는 인쇄술이 탄생될 수 있는 기본적 요소를 갖추고 唐나라 이후에 발명된 인쇄술의 선구가 되었다. 20세기에 다양한 기술의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수세기 동안 문자를 거꾸로 새겨 찍어내는 雕板 인쇄와 活字 인쇄가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이와 같은 인쇄 방법은 印章을 封泥에 찍어서 문자를 표현하는 방법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인쇄술의 근원이 印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 陶文 및 磚瓦文

넓은 의미에서의 陶文은 陶器, 벽돌, 기와 등에 쓰이거나 새겨 있으며 혹은 찍어서 이루어진 書體를 말한다. 도기, 벽돌, 기와 등은 모두 흙을 형틀이나 손으로 빚어서 모양을 만들고 또 흙이 굳기 전에 문자를 새기거나 찍은 후 구워서 완성하거나 완성된 이후에 글씨를 쓰거나 새겨서 필요한 용도에 사용하였다. 제작하는 과정과 재료가 같은 까닭으로 陶文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모양과 용도에 따라서 陶文, 磚文, 瓦當 등의 구체적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陶文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신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을 수 있다. 陝西省 西安의 半坡와 臨潼의 姜寨, 靈柩, 桓頭 그리고 浙江省의 良渚등에서 신석기 시대의 刻畵符號가 있는 陶片이 300여 개나 발견되었다. 이들 부호들을 문자로 보아야 할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서기전 4000년 이전에 이미 陶器가 사용되어졌으며 의식적으로 부호나 그림을 새겨 넣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60년 山東省의 莒縣에서 출토된 龍山文化의 土器에 刻文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것이 중국 최초의 書契라 한다. 아직 완전한 문자의 특징을 갖추지는 못하나 그 역사는 甲骨文이나 金文보다 훨씬 위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陶文 가운데 완전한 문자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商나라 시대이다. 江西省 吳城의 商나라 유적지에서 발견된 刻畵 陶文은 거의 완전한 문자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殷商시대 이전에도 이미 문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安陽에서 출토된 殷商시대의 陶器 중에는 붓으로 쓴 陶文도 함께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 陶文은 먹을 사용하여 ‘祀’자를 쓴 것으로 최초의 墨書로 인정된다.

殷商시대 이전의 陶文은 많이 발견되지는 않고 있으나 西周시대와 春秋 戰國시대의 陶文은 여러 지역에서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陝西省의 扶風, 起算, 鳳翔 등의 지역에서 西周와 春秋시대의 陶文이 조금씩 발견되었으며 戰國시대의 陶文은 山東省의 臨淄, 河北省의 咸陽 등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春秋와 戰國시대의 陶文은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劉鶚의『鐵雲藏陶』, 吳大澂의『古陶文字釋』 과『三代秦漢古陶文字考』, 周進의『季木藏陶』, 黃賓虹의『陶璽文字徵』 등 많은 저작이 나왔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春秋 戰國시대의 각 제후국에서는 도기의 제작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일상의 용구로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도기에 官名, 지명, 도공의 이름, 도기의 이름 등을 刻印하는 관습이 유행하였으며 사용한 서체는 당시의 金文과 마찬가지로 지역성이 분명하며 印章의 국가별 서체와 특징이 같다.

甲骨文, 金文, 簡帛 서체는 간략한 官名이나 사람의 이름부터 많은 글자의 문장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나 陶文은 보통 3-5자이며 많아야 10자를 넘지 않고 있다. 글씨를 쓰고 새긴 사람도 관료나 지식 계층은 물론이고 도기나 벽돌, 기와 등을 제작하는 계층에 의해도 쓰여지고 있다. 따라서 서체도 金文과 같이 엄격한 범칙이 있는 것도 존재하지만 구속되거나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형태의 筆劃과 자형이 많이 나타난다. 陶文의 다양한 형태 속에는 篆, 隸, 楷, 行, 草 등 모든 서체의 원류가 잉태되고 있어서 書體 변화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布置와 章法에 있어서도 규칙적인 것이 있는 반면에 書順이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 것 등 다양하게 있으며 어떤 것은 거꾸로 뒤집어 布置하거나 원형으로 돌려서 안배하는 변화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陶文 가운데 도기에 쓰인 서체 이외에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磚과 기와에 새겨지거나 刻印된 서체이다. 磚에 기록된 서체를 磚文이라 하고 기와에 기록된 서체를 瓦當이라 부른다. 磚은 담장이나 계단 등의 건축 공사에 사용되는 일종의 벽돌이나 현대의 벽돌과는 달리 기와를 만드는 것처럼 흙을 재료로 사용하여 구워서 만들어진다. 중국에서 磚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현존하는 것으로 최초의 것은 陝西省의 扶風에서 발견된 西周시대의 磚이다. 이 磚에는 그림이 刻印되어 있으며 글씨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 가장 오래된 磚文은 陝西省 咸陽에서 출토된 戰國시대 후기의 것이다. 先秦시대의 磚文은 대부분이 印章을 사용하여 눌러 찍은 서체이며 刻寫한 것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이와 같은 書體는 같은 시기의 陶文이나 瓦當 서체와 비슷하다. 글씨를 찍어 만들어 내는 방식은 西漢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왔으며 문장도 사람의 이름이나 한 두 자의 吉語가 대부분이었으나 漢나라 武帝이후 내용과 형식이 다양해진다. 瓦當은 기와의 수막새 앞면에 刻印한 그림이나 문자로 그 역사는 商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瓦當은 商나라 시대 초기의 것으로 河南省 鄭州의 商나라 궁전 자리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戰國시대 이전의 瓦當에는 모두 그림이나 도안이 刻印되어 있으며 문자가 있는 것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가 刻印된 瓦當은 秦나라의 것에도 약간의 흔적은 보이지만 漢나라 이후의 瓦當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출처 : 중국과 서예
글쓴이 : 금릉산방인 소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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