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西漢과 新莽시대의 서예

2012. 3. 15. 09:17서예일반

2. 西漢과 新莽시대의 서예

1) 刻石

漢나라 시대 초기의 朝廷에서는 秦나라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국을 통일한 후 15년을 견디지 못하고 빨리 멸망한 원인에 대해 연구하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국가를 영원히 보전할 계책을 도모한다. 건국 초기에는 秦나라의 제도를 많이 계승하였으나 점차 漢나라의 실정에 맞는 제도로 바꾸어 갔다. 武帝시대부터는 유학을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고 도덕과 仁義를 숭상하였다. 또 과학과 기술을 육성하여 제지술, 천문학, 수학, 의학 등이 급속한 성장을 하며 국력은 나날이 강대해져 갔다. 이와 함께 문학과 예술도 급속하게 발전하였으며 문예에 대한 심미 의식이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李澤厚는『中國美學史』에서 漢나라 시대의 사람들을 “人民在實踐中有力地確證了自己是能够征服自然, 奪取佔有和創造無盡藏的物質財富的强大主體.”(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자신이 충분히 자연을 정복하고 무진장의 물질적 재력을 쟁취하고 점유할 뿐 아니라 창조할 수 있는 주체라고 확신하였다.)라 평가하였으며 이와 같은 사상적 배경이 심미적 의식이 발전한 이유라고 설명하였다. 漢나라 시대 문예의 부흥은 司馬遷의『史記』를 낳게 하였고 漢賦를 탄생시켰으며 음악과 회화 등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이상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 새로운 서체가 탄생하여 여러 가지 서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刻石, 簡牘, 印章, 瓦當, 銅鏡 등 많은 종류의 서예 자료가 등장하였으며 예술적 수준도 매우 높아졌다.

西漢이 2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왕조를 유지해 왔으며 또 서예 활동이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진행되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刻石은 얼마 되지 않는다. 宋나라 시대의 尤袤는『硯北雜記』에서 “西漢石刻文, 自昔好古之士, 固嘗博彩, 竟不之見, 聞自新莽惡稱漢德, 凡有石刻, 皆今僕而磨之, 仍嚴其禁.”(西漢시대에는 예로부터 옛 전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본래 刻石 문자가 무척 많았다. 그러나 지금 그것들을 볼 수 없는 것은 新莽시대의 통치자는 漢나라 풍습을 싫어하여 대부분의 刻石을 땅에 묻거나 갈아 없애 버리고 비를 세우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라고 들었다.)이라 하여 西漢시대의 刻石으로 전하는 것이 적은 까닭은 新莽시대에 西漢의 刻石을 모두 훼손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확실한지 역사적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으나 西漢의 刻石이 東漢에 비해 매우 적고 新莽이 건국한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때 尤袤의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西漢과 新莽시대의 刻石 서예로 현재까지 전하여지고 있는 것은 약 16점으로 매우 적은 수량이다. 그리고 隸書 서체의 변천이라는 각도에서 바라볼 때 簡帛 서예에 비해 그 진행 정도가 매우 늦은 편이다. 西漢 중기의 簡帛 隸書는 이미 波磔이 매우 발달하여 성숙한 漢隸의 수준에 이르고 있으나 西漢 후기까지의 刻石 서체는 篆書에서 隸書로의 변천 과정에 있는 자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筆勢는 여전히 篆勢로 쓰여지고 있다. 西漢시대의 刻石 가운데 篆書 작품은『群臣上??刻石』,『北階石題字』,『霍去病墓石題字』,『鬱平大尹馮君孺久墓題記』,『東安漢里刻石』 등이 있으며 隸書와 篆書의 筆劃과 결구가 혼용되어 있는 것으로는『霍去病墓石題字』,『王陵塞石刻字』,『廣陵王中殿石題字』,『𧟄盜刻石』,『連雲港界域刻石』,『麃孝禹刻石』 등이 있다. 簡帛 隸書와 비슷한 작품으로는『魯孝王刻石』이라 불리기도 하는『五鳳二年刻石』이 있으며 최초로 波磔을 사용한 刻石으로『楊曈買山刻石』이 있다. 비록 波磔은 발달되지 않았으나 篆書의 筆勢와 字勢가 거의 표현되지 않은 刻石으로 新莽시대의『萊子侯刻石』이 있다.

西漢의 刻石 서예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때 그 심미적 특징은 한마디로 질박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같은 시대의 簡帛 서예는 筆勢의 움직임과 體勢의 다양한 변화로 기운이 생동하며 건강하고 풍부한 자형의 미를 표현하였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簡帛 隸書와 東漢의 刻石 隸書에 비해 西漢의 刻石 서예는 우직하고 강건한 筆劃과 무겁게 움직이는 운동력으로 순박하고 고아한 意趣를 표현하였다고 평가된다. 西漢의 刻石 서예는 당시의 시대정신과 심미적 취향을 대표하는 예술 영역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西漢의 刻石으로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으나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으며 예술성이 뛰어나고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큰 까닭으로 깊은 연구와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

『群臣上??수刻石』은『婁山刻石』이라고도 불리며 西漢 文帝시대의 後元 6년(서기전158년)에 새겨진 刻石으로 현존하는 西漢의 篆書 刻石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서예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으로 인정된다. 이 刻石은 淸나라 道光연간에 河北省 永平에서 발견되었다. 높이가 145cm이고 넓이가 28cm의 비교적 큰 덩어리의 돌에 한 줄로 내려쓴 15자의 篆書가 새겨져 있다. 刻石의 내용은 “趙世二年八月丙寅群臣上??수此石北”이며 서체는 篆書의 筆劃과 자형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나 隸書의 맛이 첨가되어 있다. 淸나라 시대의 陸增祥은『八瓊室金石補正』에서 “以筆勢審之, 似與秦篆差異, ‘丙寅’二字, 轉筆方折, 全是隸意.”(이 刻石의 筆勢를 살펴보면 秦篆과 차이를 보인다. ‘丙寅’ 두 글자의 轉折부분은 方筆과 折筆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隸書의 筆意로 이루어져 있다.)라 하여 비록 篆書로 쓰여 있으나 진전과는 서로 다른 方筆이 많으며 隸書의 筆意가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碑體皆方扁, 筆益茂密,······樸茂雄渾, 得秦相筆意.”(字體가 모두 偏方形의 결구이며 筆劃이 튼튼하다.······웅장하고 질박한 미감은 秦나라 시대 李斯의 筆意로 이루어져 있다.)라 하여 偏方形의 결구로 이루어져 있으나 질박하고 건강한 심미적 특징은 진전의 筆意를 배우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霍去病墓石題字』는 西漢 武帝의 元狩 6년(서기전 117년)에 새겨진 刻石으로 1957년 陝西省 興平縣에 있는 霍去病의 墓에서 출토되었다. 측면에 “左司空”이라는 篆書가 새겨진 刻石과 정면에 “平原樂陵宿伯牙霍巨孟”이라는 隸書가 새겨져 있는 刻石 두 점으로 西漢의 篆書와 隸書를 연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재료이다. 篆書로 새겨진 ‘左司空’은 漢나라 시대의 관직 이름으로 건축을 담당한 직책이고 ‘平原樂陵’은『漢書·地理志』의 기록에 ‘平原郡’과 ‘樂陵縣’의 지명이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하여 지명이며 ‘宿伯牙’와 ‘霍巨孟’은 그 당시의 사람 이름으로 고증되고 있다. 이들 刻石이 霍去病의 墓誌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霍去病墓石題字』라고 이름하였다. 霍去病은 漢나라 시대의 장군으로 漢 武帝때 匈奴를 정벌하는 등의 공을 세웠으며 驃騎장군의 칭호를 얻어 이름을 떨쳤으나 24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漢 武帝는 그를 위하여 장중한 장례를 치러 주고 墓誌에 石人과 石獸 등을 많이 세웠다고 하는데『霍去病墓石題字』도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篆書로 새겨진 ‘左司空’은 비록 세 글자밖에 안되지만 무거운 筆力을 느낄 수 있으며 공백의 안배가 매우 뛰어나다. 隸書로 쓰여진 刻石은 古隸와 今隸의 중간 형태이나 楷書의 筆勢와 體勢를 많이 나타내고 있다. 結體와 章法이 천진스럽고 질박한 심미적 특징 가운데 충만한 활력과 기운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魯孝王刻石』는 西漢 宣帝시대 五鳳 2년(서기전 56년)에 새긴 刻石으로『五鳳二年刻石』이라 불리기도 한다. 金나라 시대의 明昌 二年(1191)에 山東省의 曲阜에 있는 孔廟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까지 曲阜의 孔廟에 보존되어져 있다. 내용은 “五鳳二年魯卅四年六月四日成”이며 서체는 波磔이 없는 古隸이고 모두 3행으로 첫 번째 행과 두 번째 행은 4글자, 세 번째 행은 5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魯孝王刻石』의 전체적 이미지는 당시의 簡帛 隸書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西漢의 刻石 가운데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篆書의 筆勢와 隸書의 體勢를 겸비하고 있으며 簡帛 隸書의 결구와 筆意을 융합하여 고졸하고 웅장한 심미적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章法에 있어서도 3행의 13자 글씨를 자형의 크고 작음과 筆劃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적절히 布置하여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또한 첫째 행과 둘째 행의 마지막에 ‘年’자가 겹치는 것을 簡帛 隸書에서 자주 등장하는 結體로 파격을 가하여 적은 글자 수가 적고 같은 서체일 때 나타날 수 있는 단조로움을 잘 극복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淸나라 시대의 方朔은『枕經堂金石書畵題跋』에서 “字凡十三, 無一字不渾成高古, 以視東漢諸碑刻, 有如登泰岱而觀徂崍諸峯, 直足俯視睥睨也.”(글자는 모두 13자로 한 자도 고상하고 고아하지 않은 것이 없다. 『魯孝王刻石』을 기초로 東漢의 여러 碑刻을 감상하는 것은 마치 泰山에 올라 徂徠山의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똑 바로 걸으면서 곁눈질로 내려다보는 것과 같다.)라 하여『五鳳二年刻石』이 작품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東漢 隸書 刻石을 연구하는 지름길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楊曈買山刻石』은『漢巴州民楊曈買山地刻石』이라고도 불리는 西漢 宣帝시대의 地節 2년(서기전 68)의 작품이다. 淸나라 道光年間에 四川省 巴縣에서 발견되었으나 咸豊 10년(1860)에 불에 타서 없어졌다. 이 刻石은 모두 5행, 27자이며 波磔을 사용한 최초의 刻石 隸書로 알려져 있다. 淸나라 시대의 方朔은『枕經堂金石書畵題跋』에서 “結構渾樸, 波磔勁拔, 意在篆隸之間, 與[五鳳二年刻石』不相上下.”(결구가 질박하고 波磔이 굳세고 빼어나다. 筆意는 篆書와 隸書의 중간이나『五鳳二年刻石』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시대가 빠른지 구별이 어렵다.)라 하여 篆書와 隸書의 중간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나 시대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趙之謙, 葉昌熾, 羅振玉 등의 학자는 이 刻石을 翻刻本이라 하였다.

『萊子侯刻石』은 新莽시대의 天鳳 3년(서기 16)에 새겨진 刻石으로『天鳳刻石』이라고도 불린다. 淸나라 嘉慶 22년(1817)에 山東省의 鄒縣에서 발견되어 현재 鄒縣의 孟廟에 보관되어 있다. 刻石의 높이는 44cm이고 넓이는 63cm이며 모두 7행으로 각 행마다 다섯 글자의 隸書가 새겨져 있다. 刻石의 오른쪽 부분에는 이 刻石을 발견한 顔逢甲 등이 발견할 당시의 상황과 느낌을 기록한 3행의 題記가 行書로 새겨져 있다.

『萊子侯刻石』은 가장자리와 행간에 경계선을 새기고 가장자리의 경계선 밖으로 빗살무늬로 장식을 더하여 시선이 글씨에 집중되게 하였다. 비록 波磔이 성숙하지는 아니하였으나 西漢시대의 다른 刻石 서체와 달리 古隸의 느낌이 많지 않으며 筆勢와 字勢에서 성숙한 隸書의 심미적 범주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淸나라 시대의 楊守敬은『平碑記』에서 “是刻蒼勁簡質. 漢隸之存者爲最古, 亦爲最高.”(이 刻石은 고아하고 힘이 있으며 간결하고 질박하다. 남겨진 漢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또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라 하여 이 刻石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方朔은『枕經堂金石書畵題跋』에서 “以篆爲隸, 結構簡勁, 意味古雅, 足與孔廟之[五鳳二年刻石』繼美”(篆書의 筆法으로 隸書를 썼다. 결구가 간결하고도 힘이 넘치며 古雅한 느낌은 孔廟에 있는『五鳳二年刻石』의 심미적 특징을 계승하였다고 할 만하다.)라 하여『萊子侯刻石』이『五鳳二年刻石』과 더불어 西漢의 刻石으로서 매우 수준이 높은 작품이라 평가하였다.

2) 簡帛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고학이 발전하는 것과 발맞추어 수많은 簡帛이 끊임없이 발견되었다. 戰國시대와 秦나라 시대의 簡帛 뿐 아니라 漢나라와 魏晉南北朝시대의 簡帛까지 매우 많이 발견되었다. 先秦시대의 簡帛 서체는 篆書와 隸書의 筆劃과 결구를 함께 표현하였으며 隸書로 변천하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西漢시대의 簡帛 隸書는 당시의 刻石 서체와 비교할 때 隸書로의 변천이 거의 완성된 단계에 다다랐으며 수량도 훨씬 많을 뿐 아니라 내용의 중요성으로 簡帛의 연구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西漢의 刻石은 그 수량도 적을 뿐 아니라 刻石에 새겨 있는 문자가 매우 적고 내용도 사람의 이름과 지명 그리고 刻石을 새긴 연대가 전부인 까닭에 당시의 서체 변천이나 사회를 연구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따라서 西漢시대의 서체와 서예를 연구하는 자료로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은 20세기 이후에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簡帛 隸書이다.

『馬王堆帛書』,『銀雀山漢簡』,『張家山漢簡』,『阜陽漢簡』 등 西漢 초기의 漢簡은 篆書의 筆勢와 體勢를 조금 포함하고 있으나 波磔이 성숙되고 筆劃의 결구가 刻石 隸書가 완성된 東漢 후기의 隸書와 차이를 보이지 않는 등 隸書로의 변화를 마무리 지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敦煌에서 발견된 武帝시대의『天漢三年簡』,『太始三年簡』과 居延에서 발견된 武帝와 昭帝시대의 여러 簡牘 그리고 宣帝시대의『五鳳元年簡』 등 西漢 중기의 漢簡에서는 초기의 漢簡보다 더욱 발전된 筆法으로 표준 漢隸에 근접하고 있는 筆劃과 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西漢 후기의『武威儀禮簡』에서는 筆劃과 결구는 물론이고 布置와 章法도 완전한 형태의 표준 隸書로 발전되어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따라서 西漢시대의 簡帛 隸書를 고찰하면 隸書로 변화하는 서체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으며 또 隸書가 東漢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 아니라 西漢시대에 이미 완성되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말하면 簡帛 隸書의 완성은 西漢 후기이며 刻石 隸書의 완성은 東漢의 桓帝와 靈帝시대라 할 수 있다. 다만 簡牘이라는 서사 재료의 특성으로 완전한 형태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이 적고 서사 활동의 대부분이 일상생활의 개인적 서신이나 저술 혹은 고전을 베끼는 등 실용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에서는 東漢의 隸書에 뒤지고 있다.

『馬王堆帛書』는 西漢 초기의 帛書로 1973년 湖南省 長沙의 漢墓인 馬王堆에서 출토되었다. 한 폭의 넓이가 50㎝ 정도의 비단에 먹을 사용하여 서사하였으며 간혹 朱砂로 쓴 것도 있으며 행간과 가장자리에 경계선을 그은 것도 있다. 이 帛書의 글자는 현재 湖南省 博物館에 보관되어 있으며 모두 12만 자가 넘는 매우 많은 양으로 그 내용도 다양하다.『馬王堆帛書』을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六藝類, 諸子類, 刑法類, 天文類, 地理類, 醫藥類, 軍事類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철학과 역사에 관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내용을 서적에 따라 구체적으로는 분류하면『周易』,『表服圖』,『春秋事語』,『老子』,『戰國策』,『皇帝書』,『五星占』,『天文雲氣占』,『地形圖』,『駐軍圖』,『經脈』,『五十二病方』,『相馬經』,『刑德』 등으로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체는 篆書에서 隸書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나 이미 隸書로의 진행이 많이 이루어져 있으며 波磔이 발달되어 있고 結字와 章法도 隸書의 기본을 갖추고 있다.『馬王堆帛書』는 잃어버린 옛 책의 고증과 당시의 사회제도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서예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특히『老子』 甲本과 乙本은 그 예술성에서도 탁월한 작품으로 꼽히며 西漢의 서예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老子』 甲本은 字形이 비교적 길어 篆書의 느낌이 있는 隸書로 글자의 크기가 다양하고 글자의 생김새에 따라 세로와 가로로 자유롭게 뻗어 나가는 結字로 이루어져 있다. 세로의 행간을 만들었으나 구속된 느낌이 없이 매우 활동적이고 자간을 일정하게 갖추지 않았으나 규칙과 조화가 내재되어 조금도 산만하지 않은 章法이 돋보인다. 乙本은 字形이 매우 방정하고 규범적이며 가로획은 수평을 기준으로 삼았고 세로획은 수직을 기준으로 삼아 매우 안정된 느낌이다. 글자의 크기가 가지런하고 筆劃이 규칙적이며 波磔의 적절한 사용으로 전체적으로 생동감 있는 筆劃의 결구로 이루어져 있다. 結體는 표준 漢隸에서 많이 채택한 偏方形을 취하고 있으며 글자와 글자 사이를 많이 띄워서 가지런한 규율에서 올 수 있는 답답함을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乙本과 같은 章法은 刻石 隸書가 완성되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예술성의 극치로 평가되는 桓帝와 靈帝시대의 표준 隸書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이는 것으로 평가된다.

『鳳凰山木牘』은 漢 文帝시대의 前元 13년(서기전 167)의 木牘으로 1973년과 1975년에 湖北省 江陵에서 출토되어 현재 湖北省 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鳳凰山竹牘』은 모두 100여 점으로 내용은 장례의 물품, 帳簿, 계약 등에 관한 것으로 당시의 사회 상황을 연구 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木牘의 보존이 좋아서 西漢의 서체를 연구하기에 훌륭한 작품으로 結體가 비교적 길게 되어 있으며 圓筆을 많이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 많다. 간혹 篆書의 자형이 있으나 筆劃은 이미 완전한 隸書를 사용하였으며 波磔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간혹 草書의 筆勢와 體勢가 나타나기도 하지만『馬王堆帛書』와 비슷한 자형과 심미적 특징으로 西漢시대 簡牘 隸書의 전형적 작품이라 평가되고 있다.

西漢시대의 簡帛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敦煌에서 발견된『流沙墜簡』, 內蒙古의『居延漢簡』, 甘肅의『武威漢簡』이다. 이들 세 곳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簡牘은 수량도 수 만점에 달할 뿐 아니라 보존 상태도 매우 완전하다. 또한 木簡, 竹簡, 竹牘, 木牘 등 모든 형태의 簡牘들이 모두 발견되었으며 竹簡으로 책을 만들 때 각 竹簡을 엮은 형식이 매우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초기 형태의 簡牘 隸書부터 완전하게 성숙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隸書가 나타나고 있으며 章草와 今草로 쓴 簡牘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楷書와 行書 등 모든 형태의 서체가 나타나기 때문에 西漢시대의 서체 연구에 가장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流沙墜簡』 西漢의 武帝시대인 元鼎 6년(서기전 111)부터 東漢의 桓帝시대인 元嘉 3년(서기 153)까지의 簡牘으로 1901년부터 1916년 사이에 인도의 考古 조사단에 의해 敦煌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이 漢簡은 주로 木簡과 木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학, 수학, 占卜, 천문과 지리에 관한 내용이 많다. 또한『急就章』의 殘片이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의 서체 연구는 물론『急就章』 기원을 고찰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流沙墜簡』은 西漢과 東漢에 걸친 260여 년 동안의 簡牘 隸書가 변천한 과정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으므로 筆法과 結體 그리고 章法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예를 들어『天漢三年簡』(서기전 98)의 書體는 篆書, 隸書, 草書의 書風을 고루 갖춘 복합체의 성격인데 비해 100년이 지난『天鳳元年簡』(서기 14)의 서체는 漢隸의 전형적 형태로 東漢시대의 가장 성숙한 隸書의 하나인『禮器碑』와도 書風이 비슷하다.

『居延漢簡』은 西漢 武帝시대의 天漢 2년(서기전 99년)에서 東漢 安帝시대의 永初 5년(서기 111)까지의 簡牘으로 현재 甘肅省 文物考古硏究所에 소장되어 있다. 1972년에서 1976년 사이에 甘肅省 居延에서 발견되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簡牘 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으로 2만 점을 넘고 있다. 그 가운데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것도 천 점이 넘고 있어서 당시의 사회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된다. 이 漢簡도『流沙墜簡』과 같이 木簡과 木牘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형식과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居延漢簡』의 형식으로는 簡, 牘, 封檢, 函檢, 符, 冊 등이 있으며 문장의 형식을 살펴볼 때 詔書, 爰書, 檄, 記, 簿籍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기술, 법률, 철학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簡牘은 대부분 竹簡書과 木牘이 대부분이었으나『居延漢簡』에는 완전한 형태의 冊이 한 점 포함되어 있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이 冊모은 두 77편의 木簡을 삼으로 꼰 실을 사용하여 두 줄로 묶었는데 길이가 23cm정도로 전체의 폭은 약 120cm정도이다. 이 책은 병참기지의 기물을 기록한 것으로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居延漢簡』의 書體는 隸書가 가장 많으며 章草와 今草도 다량 포함되어 있다. 또 성숙한 형태는 아니지만 楷書와 行書의 筆劃과 結體로 이루어진 글자도 나타나고 있다.『流沙墜簡』에서도 隸書와 草書가 모두 나타나고 있으나 두 서체가 혼용되어 있는 형태가 많은 반면『居延漢簡』에서는 隸書와 草書의 구별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隸書는 波磔이 완전히 성숙되어 있으며 특별한 몇 글자를 제외하고는 완전한 偏方形의 結體로 이루어져 있다. 章草에서도 간혹 波磔이 보이기는 하지만 筆勢가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유연한 흐름을 느낄 수 있으며 今草는 아직 완전히 성숙되지는 않고 章草와 혼용되어 있으나 筆劃과 글자의 연결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武威漢簡』은 西漢 후기부터 東漢까지 오랜 기간에 걸친 簡牘으로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에 의해 출토되었다. 西漢시대의 것으로 1959년 출토된『武威儀禮簡』과『王杖詔令』, 1981년 출토된『武威王杖詔令冊』 등이 있으며 東漢시대의 것으로 1972년 발견된『武威醫藥木簡』 등이 있다.『武威儀禮簡』은 西漢 후기의 목간으로 모두 469점이며 목간의 길이가 약 55㎝, 폭이 0.75㎝ 정도로 漢나라 시대의 簡牘 가운데 비교적 길다.『武威儀禮簡』의『儀禮』는 甲, 乙, 丙本 세 종류의 판본이 전하고 있으며 甲本의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 이『儀禮』는 현존하는 經書 중에서 가장 빠른 판본으로 알려져 있다.

『武威王杖詔令冊』은 西漢 후기의 詔書로서 26점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1959년에 발견된『王杖詔令』과 비교하여 당시에 사용된 詔書의 격식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武威醫藥木簡』은 약 90점이 발견되었는데 100여종의 약물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 東漢시대의 중요한 의학서이다.『武威漢簡』은 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글씨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각각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서 쓴 것이다. 經書, 詔書, 醫藥書 등 각 영역별로 서사하는 방법이 일정한 규칙으로 통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두 성숙한 漢隸의 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武威漢簡』는 漢나라 시대의 사회제도와 經學, 醫學 등은 물론 簡冊제도와 서예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된다.

3) 金文

西漢과 新莽시대의 서예 작품을 크게 刻石 서예와 簡帛 서예의 두 영역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시대의 서예 자료로 金文, 陶文, 磚文, 印章 등도 많이 전하고 있으나 서예사에서 크게 중요시하지 않는 것은 이것들에 사용된 서체가 漢나라 시대에 성숙되고 완성된 서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金文, 陶文, 磚文, 印章 등의 서체도 漢나라 시대의 서예로 분명한 영역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그 흐름은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陶文, 磚文, 瓦當, 印章 등에 관한 내용은 先秦과 東漢시대의 篇目에서 따로 개설하였으므로 이 篇目에서는 金文에 관한 내용만 간단히 이해하기로 한다. 西漢과 新莽시대의 金文에 사용된 서체는 小篆으로 비록 실용의 용도로서는 그 사용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으나 국가의 중요한 목적으로 여전히 많이 사용되었다.

漢나라가 건국한 초기에는 秦나라에서 사용하던 서체를 그대로 계승하여 사용하였다. 秦나라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의 기록에는 小篆을 사용하였으며 일반적 문서나 개인의 기록에는 隸書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청동기로 만든 여러 가지 물건에는 先秦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대부분 篆書로서 기록하였다. 그러나 漢나라 시대의 金文은 先秦시대의 金文과 같이 서체 변천의 각도에서 바라보거나 이해할 수 없으며 다만 전통의 계승과 서풍의 변화 그리고 서법 예술의 각도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西漢의 金文은 秦나라 시대의 刻石이나 虎符 등의 서체뿐만 아니라 詔版에서의 筆劃과 결구 그리고 布置와 章法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隸書의 영향으로 筆劃의 轉折부분에 각이 진 형태가 많이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先秦시대의 金文이 주조하여 이루어진 서체인 반면 秦나라 시대 이후의 金文은 주로 새겨서 이루어진 것과도 많은 관련이 있다. 靑銅器에 새겨진 이러한 篆書는 先秦시대의 篆書에 비해 쉽게 쓰고 쉽게 새길 수 있는 기록의 간편함은 물론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書體에 익숙해지도록 하였으며 새로운 隸書가 완성될 수 있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西漢과 新莽시대의 金文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秦나라 시대의 官方에서 사용한 공식 서체인 小篆의 서풍을 계승한 형태로 비록 結體가 사각형의 구도이나 圓筆의 筆劃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행간이 가지런하다. 宣帝시대 神爵 4년(서기전 58년)의『成山宮渠斜』, 元帝시대 初元 원년(서기전 48년)의『上林豫章觀銅鑒』, 陝西省의 三橋에서 출토된 成帝시대 鴻嘉 3년(서기전 18년)의『周博造上林銅鑒』등이 대표적 金文으로 꼽힌다. 둘째는 篆書와 隸書의 筆劃이 혼용되어 있는 서체로 篆書에서 隸書로 변천하는 과정에 있는 서체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陽泉使者舍熏鑢銘』과 같이 銘文가운데 어떤 문자는 완전한 古隸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波磔이 비교적 발달되어 있기도 한다. 셋째는 隸書의 자형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草書의 筆勢를 많이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武帝시대 太初 4년(서기전 100년)의『谷九鼎』이 대표적이다.『谷九鼎』은 結字가 질박하고 運筆이 天眞하여 감상자로 하여금 순박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新莽시대의 金文은 貨幣와 量器 銘文의 서체가 대표적이며 복고 정치의 영향으로 고전적 형태이다. 王莽이 西漢의 정권을 빼앗아 新나라를 세우고 선택한 정책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復古정책이다. 문자와 서체의 사용에서도 西漢의 제도를 버리고 秦나라 시대에 사용하던 小篆으로의 復古를 단행하였다. 西漢의 중기에 이미 성숙한 隸書보다는 秦나라 시대의 官方에서 사용한 공식 서체인 小篆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新莽에서 小篆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秦篆과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심미적 요구에 알맞은 자형으로 바뀌어 사용하였다. 方筆의 筆劃과 轉折부분을 각지게 표현하였으며 筆劃을 위로 모아 結體하여 위는 빽빽하고 아래는 헐렁하게 결구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특징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으로는『新嘉量』이 있다.

『新嘉量』은『新莽銅嘉量銘』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모두 두 점이다. 한 점은 淸나라 궁중에 소장되어 있다가 현재 대만에 소장되어 있으며 또 한 점은 淸나라 후기에 河南省 孟津에서 출토된 殘片으로 현재 中國 歷史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新嘉量』의 형식은『漢書․律歷志』에 斛, 斗, 升, 籥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新嘉量』은 新莽시대의 도량 제도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서예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높게 평가된다.

『新嘉量』은 新莽시대의 복고 서풍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筆劃은 수평과 수직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세로의 筆勢가 매우 돋보인다. 結體는 세로의 形勢로서 장방형을 취하였고 특히 글자의 위는 빽빽하고 아래는 성글게 결구하여 더욱 긴 느낌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결구는 東漢의『袁敝碑』와『袁安碑』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明淸시대 이후의 篆書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출처 : 중국과 서예
글쓴이 : 금릉산방인 소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