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經

2023. 2. 21. 05:31한문기초書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경전과 도학자들의 저술에서 심성 수양에 관한 격언을 모아 편집한 책.
내용
수록된 내용은 먼저 경전에서 뽑은 것으로 ≪서경≫(1장)·≪시경≫(2장)·≪역경≫(5장)·≪논어≫(2장)·≪중용≫(2장)·≪대학≫(2장)·≪예기≫ 악기(樂記)편(3장)·≪맹자≫(12장)의 29장이 실려 있고, 다음에 송나라 도학자들의 글로는 주돈이(周敦頤)의 <양심설 養心說>과 ≪통서 通書≫·<성가학장 聖可學章>, 정이(程頤)의 <사잠 四箴>, 범준(范浚)의 <심잠 心箴>, 주희(朱熹)의 <경재잠 敬齋箴>·<구방심재잠 求放心齋箴>·<존덕성재잠 尊德性齋箴>으로 7편이 실려 있다.
진덕수는 이 명문들에 송나라 유학자들의 논의들을 붙여서 주석으로 삼았으며, 자신의 <심경찬 心經贊> 1편을 덧붙였다.
1234년 안약우(顔若愚)가 천주부학(泉州府學)에서 간행하면서 발문을 실었다. 이 발문에서 진덕수가 만년에 다시 천주의 수령이 되었을 때 이 책을 편집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1242년 조시체(趙時棣)가 진덕수의 ≪심경≫과 ≪정경 政經≫을 합쳐서 간행하였으며, 이 합간본에는 진덕수의 문인 왕매(王邁)의 서문이 실려 있다.
≪문헌비고 文獻備考≫에 수록된 ≪심경법어 心經法語≫는 ≪심경≫과 동일한 책의 다른 명칭이다. 첫 머리에 ≪서경≫ 대우모(大禹謨) 편의 인심도심장(人心道心章)이 실려 있는데, 진덕수는 <심경찬>에서 인심도심장의 글, 곧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해준 16자의 말씀(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따르는 마음은 지극히 희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용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은 만세토록 전해오는 심학(心學 : 도학의 심성 수양 공부를 의미하며 양명학을 가리키는 ‘심학’과는 구별하여야 함.)의 근원임을 강조하였다.
명나라의 정민정(程敏政)은 ≪심경≫에 붙인 주석서인 ≪심경부주 心經附註≫ 서문에서 ≪심경≫에 실린 주석 가운데 진덕수의 ≪독서기≫를 인용한 점을 유의하여 주석이 진덕수의 편집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뒷 사람들이 첨가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정민정은 또한 이 서문에서 사람이 사람된 것은 본심(本心)을 잃지 않는 것일 뿐이며, 성학(聖學)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요령은 경(敬)에 있다 하여 ‘심(心)’과 ‘경(敬)’을 ≪심경≫의 핵심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심경부주≫에는 한 편의 발문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 정민정은 ≪심경≫과 ≪정경≫의 합간본이 통용되면서 마음(≪심경≫)을 본체로 삼고 정치(≪정경≫)를 응용으로 삼았다 하여, 체용론으로 보려는 입장을 비판한다.
곧, 마음은 그 자체에서 본체와 응용이 갖추어져 있는 만큼 ≪정경≫과는 관계없이 ≪심경≫이 독립적으로 성립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책 끝에 정민정의 문인 왕조(王祚)의 발문이 있어서 ≪심경부주≫의 저작 경위와 효용을 기록하고 있다.
≪심경≫은 우리 나라에 16세기 중엽인 중종 말, 명종 초에 김안국(金安國)이 이를 존숭하여 그의 문인 허충길(許忠吉)에게 전수한 데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심경≫을 가장 중요시한 학자는 이황(李滉)이다. 이황은 젊어서 이 책을 서울에서 구해보고 깊이 연구한 뒤에, “나는 ≪심경≫을 얻은 뒤로 비로소 심학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믿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알았고, 이 책을 공경하기를 엄한 아버지같이 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의 기록에 따르면, 1561년(명종 16) 겨울 스승 이황을 모시고 있을 때 이황은 새벽마다 ≪심경부주≫를 한 차례 독송하였다 한다.
이황은 1566년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지어서 ≪심경≫의 비중을 사서와 ≪근사록≫에 못지 않게 존숭함을 밝히고, 정민정의 ≪심경부주≫와 관련, 작자인 정민정의 인물됨에 관한 논난을 변론하고 ≪심경부주≫의 내용에 육구연(陸九淵)의 학풍이 섞여 있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변론하였다.
여기에서 이황은 명나라의 진건(陳建)이 정민정의 학풍에 주희와 육구연의 입장을 뒤섞으려는 태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적어도 ≪심경부주≫는 도학의 정통성에서 문제가 없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황의 제자 황준량(黃俊良)은 “진덕수는 실상이 없고, 범준은 절실하지 못하며, 황간(黃幹 : 주자의 제자)의 소견은 두 사람보다 더욱 떨어지고, 정민정은 식견이 밝지 못하고 채택이 정밀하지 못하다”라 하여 ≪심경≫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이황은 적극적으로 변론하였다.
이황은 ≪소학≫·≪근사록≫·≪심경≫ 가운데 초학자가 처음 공부하는 자리에서는 ≪심경≫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심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또한 제자들에게 만년까지 ≪심경≫을 강의하여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까지도 계속하였다.
1794년(정조 18) 왕은 권벌(權橃)의 ≪근사록≫ 수진본(袖珍本)이 전해진 것을 보고 채제공(蔡濟恭)으로 하여금 어제(御製) 서문을 짓게 하면서, 전날 즉위하기 전에 보았던 이황이 직접 교정한 ≪심경≫ 수진본을 들어 말하였다. 여기에서 정조는 이 두 수진본의 사실이 유사할 뿐 아니라 이 두 책은 겉과 속의 관계나 수레의 두 바퀴 또는 새의 두 날개처럼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삼계서원(三溪書院)에서 모각(模刻)한 ≪심경≫은 ≪심경부주≫로서 <어제근사록서 御製近思錄序>와 정조의 연설(筵說)을 첫 머리에 싣고 있으며, 본문 바로 앞에 원나라 정복심(程復心)의 <심학도 心學圖>와 <심학도설 心學圖說>을 싣고 있다.
정복심은 이 <심학도>에서 심(心)을 한 몸의 주재라 하고, 경(敬)을 한 마음의 주재라 하여, 두 개의 중심 개념으로 제시하며, ≪심경≫의 전체 정신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지은 ≪심경≫에 관한 저술은 9종이나 된다. 곧, 이덕홍(李德弘)의 ≪심경질의 心經質疑≫(1권), 조호익(曺好益)의 ≪심경질의≫(1권), 이함형(李咸亨)의 ≪심경표제 心經標題≫(2권)·≪심경질의부주 心經質疑附註≫(1권), 이황의 ≪심경석의 心經釋義≫(1권)·≪심경질의고오 心經質疑考誤≫(2권), 정구(鄭逑)의 ≪심경발휘 心經發揮≫(2권), 박세채(朴世采)의 ≪심경요해 心經要解≫(2권), 주세붕(周世鵬)의 ≪심경심학도 心經心學圖≫(1권)이다.
여기에서 이덕홍·조호익·이함형·정구는 이황의 제자다. 따라서 9종 중에서 7종이 이황과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황의 ≪심경≫에 대한 존숭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심경≫에 관한 조선 후기 도학자들의 관심은 매우 높아서 많은 저술이 남아 있다. 조목(趙穆)의 <심경품질 心經稟質>, 이만부(李萬敷)의 <심경속설 心經續說>, 이원조(李源祚)의 <심경강의 心經講義>, 김병종(金秉宗)의 ≪성학속도≫·<제9심경찬도 第九心經贊圖> 등 영남학파의 저술뿐만 아니라, 한원진(韓元震)의 <심경부주차의 心經附註箚義>, 정호(鄭澔)의 <심경편말오씨설후변 心經篇末吳氏說後辨>, 이항로(李恒老)의 <심경부주기의 心經附註記疑> 등 기호학파의 저술도 상당수 있다.
또한,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은 ≪심경밀험 心經密驗≫(1권)을 저술하여 ≪소학≫이 밖을 다스리는 데 비하여 ≪심경≫은 속을 다스리는 것으로 대응시키며 자신이 경전을 연구한 것을 ≪심경≫으로 귀결시키겠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저술에서 자신의 심성론적 견해에 따라 주자학의 심성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분석을 제시하였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양명학자인 정제두(鄭齊斗)가 ≪심경집의 心經集義≫(2권)를 저술하여 주자학과 육왕학(陸王學)을 통합하는 체계를 시도하였다. 그는 정민정의 ≪심경부주≫를 모방하면서 그의 체계가 주자학에 기울어져, 지루하고 번잡함을 극복하려 한다는 양명학적 입장의 ≪심경≫을 제시한 것이다. 최근에는 ≪심경≫과 ≪근사록≫을 합쳐서 영인한 판이 두 종류나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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