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3. 22:35ㆍ간찰용어
卓文君(탁문군)이 과부가 되었을 때, 司馬相如(사마상여)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반해서 야반도주(夜半逃走)한 후 아내가 된 일. [가도사벽(家徒四壁) ]
탁문군卓文君의 본명은 문후文后인데 사천 지방의 거상이었던 탁왕손卓王孫의 딸이었다. 그녀의 용모는 매우 수려하여서 중국 고대의 십대 미인 중에 탁문군이 꼭 포함될 정도였다.
탁문군은 중국 미인의 별칭이 되었고 중국 미인의 조건인 원산미遠山眉(먼 산처럼 보이는 희미한 눈썹), 연화협蓮花頰(연꽃처럼 발그스레한 뺨), 부용부芙蓉膚(부용꽃처럼 뽀얀 피부)도 그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한다. 또한 그녀는 문장에 능하고 북도 잘 치며 거문고를 잘 타는 등 재능이 많았다고 한다.
현대중국의 문호 임어당林語堂이 현대 여성의 이상적인 모델로 탁문군을 꼽은 것은 탁문군의 글재주가 뛰어났기도 했지만 격식이나 제도에 구애됨이 없는 자유분방한 성격과 자립정신을 높게 샀기 때문이었다.
부친이 탁문군이 16세일 때 동업자의 아들에게 탁문군을 출가시켰지만 몇 개월도 되지 않아 남편이 죽고 그녀는 청상과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당시 사마상여司馬相如(기원전179~기원전117)라고 하는 문인이 있었는데 성도成都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무에 뛰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장경이었으나 공부를 마치자 문경지교의 주인공인 제나라의 인상여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을 상여라고 고쳤다.
상여는 당시의 관례대로 돈을 주고 관직을 사서 경제의 무기상시에 임명되어 황제의 옆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는 상여의 특기인 사부辭賦를 싫어했으므로 사마상여는 말직에 있었고 그래서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때 경제의 아우인 제후국 양나라의 효왕孝王이 장안을 방문했다.
효왕은 제의 추양이나 회음의 매승, 오의 장기부자 등 재주가 뛰어난 선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상여는 그들에게 완전히 빠졌다. 그래서 병을 구실삼아 무기상시를 그만두고 효왕을 찾아서 양나라로 갔다. 효왕의 배려로 상여는 다른 선비들과 같은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수년 동안 그들과 같이 열심히 공부한 끝에 유명한 글 《자허부子虛賦》를 지었다. 칠국의 왕이 경제에게 모반한 「오초칠국의 난」에 효왕이 가담하였다가 실패하여 죽자 사마상여는 사방을 전전하다 고향인 성도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집도 재산도 이렇다 할 직업도 없었다. 임공臨邛(사천성 공협)의 현령이었던 왕길王吉은 사마상여와 친한 친구 사이어서 그를 임공에 불러 관사에 묵게 해주었다.
여기서 현령과 상여는 한가지 계획을 세웠다. 현령은 마치 귀중한 손님이 자기를 찾아온 것처럼 일부러 공손한 태도를 보였고 매일같이 상여를 방문해서 인사를 드렸다. 상여는 처음에는 현령을 잘 만나주었으나 나중에는 일부러 시종을 보내 몸이 아파 만날 수 없노라고 현령의 방문을 거절했다.
현령도 상여에 대해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척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이러한 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임공의 거리에는 부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탁왕손은 노예 800명을 거느렸고 정정은 수백 명의 노예를 거느린 큰 부자였다. 이 두 사람이 만나 연회를 베풀어 현령과 그 ‘대단한 손님’을 초대하자고 의논했다.
그들에게 초청을 받아 현령이 탁왕손의 집에 이르자 이미 백 명 이상의 손님들이 모여 있었다. 상여는 한낮이 다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보냈더니 몸이 불편해서 참석할 수 없다는 전갈이 왔다.
현령이 손수 상여를 맞이하러 가자 그제서야 상여가 연회석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눈이 모두 이 ‘대단한 손님’ 상여에게 향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기를 기다렸다가 현령은 상여 앞에 나아가 칠현금을 내놓으며 “상여공께서 취미로 칠현금을 타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한 곡 연주해주십시오.”하고 공손히 청하였다.
상여는 처음에 일부러 거절하다가 현령께서 청하셨기 때문이라며 마지못한 척 〈봉구황〉이란 곡을 뜯었다.
***
봉구황鳳求凰 (원문생략)
봉아, 봉아, 고향에 돌아왔구나!
너를 찾아 사해를 떠돌아 헤맸지만
이제까지 그 원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오늘 밤에야 이 마루에 올라 만나게 되었구나
아름다운 낭자가 규방에 있으나
방은 가까워도 사람은 멀어 비통하게 하는가
그녀와 함께 한 쌍의 원앙이 될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을텐데
봉아, 봉아, 나를 따라 머물러 주렴 !
부지런히 여신님을 위해 뒤를 밀어 주렴
정이 흐르고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나니
깊은 밤 서로 의지하길 알아주는 이 누구이던가
두 날개 활짝 펴고 하늘 위로 날아오르니
나는 더 이상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오.
***
문군 또한 어릴 때부터 음률을 알기에 사마상여의 <봉구황>을 듣고 바로 그 뜻을 이해했다. 현령과 상여가 지금까지 연극을 꾸미어 상여를 귀한 손님으로 만들어 탁왕손의 집에 초대하게 한 것도 사실은 문군을 상여의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지금 칠현금을 뜯어 그 가락으로 문군의 마음을 끌려는 것이었다. 문군은 남몰래 문틈으로 상여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상여에게 완전히 마음이 사로잡혀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연회가 끝난 후에 상여는 사람을 시키어 문군의 하인에게 선물을 주고 곧 문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날 밤, 문군은 몰래 집을 빠져나와 상여에게 달려왔다. 상여는 그녀를 마차에 태워 성도로 달아나 버렸다. 탁문군이 사마상여를 만났을 때, 17세였고 사마상여는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초중반쯤 되었을 때였다.
이 사건은 당시 성도를 뒤흔든 유명한 사건이었다. 연인들의 사랑의 도피를 중국에서는 ‘사분私奔’이라 하는데 이후, 이 두 사람의 애정 도피행각을 주제로 한 소설과 경극이 많이 등장하였다.
탁왕손은 이 사실을 알고는 크게 화가 나서 자기 딸에게 돈 한 푼도 주지 않을 것이며 평생 동안 만나지 않기로 맹세한다. 성도에서의 그 둘의 생활은 매우 곤궁하였다. 그들은 다시 임공으로 돌아와 옷도 팔고 하다가 결국엔 임공에서 조그만 주막을 하나 차리게 된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탁문군은 손수 손님을 접대하며 술을 팔았고 사마상여는 짧은 바지를 입고 주막 내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사를 했다. 사방으로 벽만 둘러져 있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뜻하는 「가도벽립家徒壁立」이란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한서》〈사마상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