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9. 20:57ㆍ간찰용어
조선 시대 군무(軍務)와 정사(政事)를 논의하던 비변사(備邊司)를 달리 이르는 말. [유사어]변사(邊司). 비국(備局). 비변사(備邊司).
비변사[備邊司]
비변사는 조선후기 국방과 군사에 관한 기밀뿐 아니라 국정 전반을 총괄한 최고의 기구이다. 중종 대에 남북 변방에서 발생하는 국방관계의 긴급한 사안을 대처하기 위한 임시기구인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을 고쳐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이후 명종 대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정식기관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기능이 강화되어 조선후기 국정을 처리하는 최고관부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비변사는 1865년(고종 2) 3월 의정부와 통합되어 폐지되었다. 이칭으로 비국(備局), 주사(籌司), 주당(籌堂), 묘당(廟堂)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전기 비변사]
임시 군사 대책기관
조선 초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국가는 이때마다 의정부, 병조,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과 함께 군사 및 국방 전략을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지변사재상은 변방 지역의 관찰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으로 구성되어 국방상 긴급 사안을 처리하는 임시 회의기구였다. 이후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三浦倭亂)이 발생하자, 이의 진압을 위해 비변사를 설치하고, 고위 문관으로 비변사종사관을 맡게 하였다. 이때 설치된 비변사는 임시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곧 폐지되었다.
1517년(중종 12)에는 북방의 경비를 위해 평안도와 함경도에 체찰사와 순찰사를 차출해 군무를 분담한 축성사(築城司)를 비변사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비변사가 정식 관료기구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은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발생한 1555년(명종 10)에 이르러서였다. 왜변으로 인한 제주의 방비와 호인(胡人)의 정세 등을 병조와 함께 의논하면서 권한이 커져 비변사는 정1품아문의 정식관청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의 비변사 ]
최고의 정책 결정기관이 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변방의 긴급사안을 처리했던 비변사는 기능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을 맞이하였다. 전쟁을 극복하기 위해 군사업무와 함께 모든 국가의 일을 비변사에서 의논하며 결정하였기 때문에 의정부의 권한은 점차 축소되었다. 임진왜란 시 비변사는 군령, 인사, 군사훈련, 외교 등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둔전(屯田), 납속사목(納粟事目), 공물 진상, 의병 격려, 군량 운반, 수령 임명, 시체 매장, 산천 제사 등 재정, 민정에 관한 사무도 통할하여 처리하였다. 왕세자의 분조(分朝)에 별도의 분비변사(分備邊司)가 설치될 정도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비변사는 최고기구로서의 역할은 지속되었다.
[비변사의 운영과 조직]
비변사는 도제조, 제조, 부제조, 낭청 등으로 조직되었다. 도제조는 현임 의정인 시임대신과 의정을 역임한 원임대신이 모두 겸임하였다. 시임대신은 비변사를 주관해서 운영하여 비변사 공사(公事)의 결정과 계사(啓辭)의 마감을 하였으며, 원임대신은 왕의 지시나 비변사가 요구하는 특별사안에 대한 자문을 맡았다.
[비변사의 폐지]
조선 후기 비변사의 역할 강화는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을 약화시킨 것으로, 비변사의 폐지를 주장하는 논의가 여러 차례 대신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미 설치된 기관의 폐지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65년(고종 2) 3월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의정부의 실권을 회복하고 행정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국정 의결권을 의정부로 이관하였다. 그 과정에서 비변사는 종부시(宗簿寺)와 종친부(宗親府)를 합친 전례에 따라 의정부와 통합되어 폐지되었다.
승정원의 기능과 역할
승정원(承政院) 【임금의 명령을 받아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일을 담당한다. 당하관에는 언제나 문관을 쓴다.】
『경국대전』권1, 「이전」, 경관직 정삼품아문
승정원(承政院)은 임금의 대변인이 되는 곳으로서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하고 임금과 가깝기 때문에, 나라에서 이를 중시하여 당상관은 이조(吏曹)나 대사간을 거쳐야 겨우 맡을 수 있었다. …(중략)…
승정원은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므로 그 책임이 가장 막중하여, 승지에 임명되는 자는 인망(人望)이 마치 신선(神仙)과 같으므로 세속 사람들이 ‘은대(銀臺) 학사’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궁문(宮門)은 파루(罷漏)가 되면 열고 인정(人定)이 되면 닫곤 하였는데, 승지 등이 4경(更)에 대궐에 나아가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가므로 예종(睿宗, 1450~1469, 재위 1468~1469)이 명하여 궁문을 날이 밝으면 열고 어둑해지면 닫도록 하자 사람들이 모두 이를 편안하게 여기었다. 이에 앞서, 승지는 단지 한 사람만 입직(入直)을 하였다. 세조(世祖) 때 이교연(李皎然, 1413~1475)이 입직하는 중에 술이 취해 누워 있었는데, 세조가 하문(下問)을 하였으나 이교연이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두 사람이 입직을 하도록 하였다.
李裕元, 『林下筆記』卷22 文獻指掌編 喉院之緊
첫 번째 사료는 『경국대전』에 수록된 승정원의 역할을 규정한 것이다. 두 번째 사료는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수록된 승정원의 중요성에 대한 부분이다.
승정원은 조선 건국 직후인 1400년(정종 2) 4월 중추부(中樞府) 승지(承旨)가 승정원(承政院) 승지로 개칭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 승정원은 이후 1401년(태종 1) 7월 중추원에 해당되는 승추부(承樞府)가 설치되면서 한 때 혁파되었으나 1405년 승추부가 해체되면서 다시 설치되어 독립된 관서로 존재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때 6대언체제(六代言體制)가 완성을 보게 되는데, 이전까지 도승지(都承旨)의 전신인 지신사(知申事)를 비롯해 4대언(代言)이 이(吏)⋅호(戶)⋅예(禮)⋅병(兵)⋅공조(工曹)를 관장하던 것에서 새롭게 동부대언(同副代言)을 신설, 형조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1433년(세종 15)에 지신사(知申事)가 도승지로, 대언이 승지로 그 명칭이 개편되면서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승정원은 주 임무는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또한 각 관청에서 올라오는 보고와 이에 대한 왕의 결재 사항을 각 관청에 하달하는 업무도 맡았다. 이러한 보고 체계가 조선 초기부터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 보고 경로는 다원화되어 있었고 세종대에서야 이를 승정원으로 일원화했다. 보고 주체도 승정원의 업무 처리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은대조례』에서 “인종대 모든 공사(公事)는 합문(閤門, 편전의 앞문) 밖에서 모든 관원이 친히 아뢰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승정원 관원이 배석한 자리에서 6조가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형태였음이 짐작된다. 그 후 6조가 직접 보고하는 제도는 폐지되고 승지에게 말을 전하면 주서는 그것을 문자로 바꾸어서 문서로 보고하는 체제로 변화하였다. 문서에서 보고 내용은 통상 “모승지(某承旨), 이모사언계왈(以某司言啓曰), 운운(云云)”의 형태로 시작하였는데, 이는 “아무개 승지가 ○○관청의 말로 아뢰기를 ‘~이라’ 했다. ”라는 의미이다.
승정원을 통해 모든 관서의 보고가 왕에게 올라가고 왕명이 승정원을 통해 관서에 내려짐으로써 승정원의 체제도 조선 시대 6조의 체제에 맞게 6승지로 운영됐다.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형조를 담당하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만약 승지가 해당 관청의 관원과 상피(相避)의 관계에 있게 되면 왕에게 보고하여 담당 부서를 바꾸기도 했고, 특정의 승지를 상례에는 벗어나지만 왕명으로 다른 부서를 관장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피란 친인척 관계에 있거나, 업무상 서로 혐의가 있는 관계의 사람들이 같은 관서에 재직하는 일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상피를 하는 이유는 일의 과정에 사적인 감정을 배제시킴으로써 일이 공적으로 처리되게 하려는 까닭이었다.
승정원은 이밖에도 오늘날 관보와 유사한 조보(朝報)의 발행을 주관하였으며, 궁궐문의 열쇠 관리를 최종적으로 관장하였다. 조선의 아침은 대궐문이 열리면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만큼 대궐문이라는 것은 단순히 출입문 의미 이상을 갖는데, 그 최종 책임이 승정원에 있었다. 승정원의 업무는 국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항상 국왕의 지근거리에 청사가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 근정전의 서남쪽 월화문 밖에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정궁으로 창덕궁이 활용되면서 승정원은 인정전 동쪽에 위치하였다.
승정원의 관청 일기인 『승정원일기』가 현전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왕명을 출납하던 국왕 비서실의 일기이다. 왕명 출납은 물론이요, 국왕에게 보고되고 처리된 모든 일들과 의례적 사항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었으며, 국정 논의 현장에 대한 기록 또한 수록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현존하는 기록물의 총 기간을 보면 전자가 절반에 불과하지만, 양으로 따지면 약 5배 정도가 된다. 또한 실록이 시정기(時政記)나 사초(史草) 등을 토대로 편집자들이 취사선택하여 가공한 2차 자료라면, 『승정원일기』는 당시의 상황을 현장에서 바로 기록한 1차 사료다.
소격서[昭格署]
조선 시대에 도교(道敎)의 신선과 별자리에 제사 지내는 의식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
소격서는 고려 시대에 소격전(昭格殿)이라고 불렀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고려에서 설치했던 수많은 도교 관련 시설들이 폐지되었다. 하지만 소격전과 삼청전(大淸殿)만은 유지되었다. 소격전의 설치 목적은 도교의 3청성신(三淸星辰)에 대한 초제(醮祭)를 집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3청은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으로 도교의 신선들이 살고 있는 별자리를 의미한다.
조선은 1396년(태조 5) 한양에 소격전과 삼청전을 새로 설치하고 초제를 거행했다. 이후 1466년(세조 12) 소격전의 명칭을 소격서로 바꾸면서 정식 관서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소격서와 관련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소격서의 임무는 3청성신에 대한 초제를 담당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아울러 담당 관원으로 제조(提調) 1인, 별제(別提) 2인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소격서는 도교의 상징적 공간이었기 때문에 유신(儒臣)들은 이를 폐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과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대에는 소격서 철폐 문제를 둘러싸고 상당한 대립 양상이 나타났다. 소격서 철폐 문제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다가 결국 1518년(중종 13)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의 강력한 건의를 통해 혁파되었다. 하지만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가 제거되면서 이듬해 다시 설치되었다. 소격서는 결국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폐지되었다.
사림파의 소격서 혁파 상소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趙光祖) 등이 상소하였다. ……(중략)…… 이제 소격서(昭格署)를 설치한 것은 도교(道敎)를 펴서 백성에게 사도(邪道)를 가르치는 것인데, 기꺼이 따라 받들고 속임수에 휘말려서 밝고 밝은 의리에는 아득하고 탄망(誕妄)한 형상에는 밝습니다. 이는 실로 임금 마음의 사(邪)와 정(正)의 갈림길이요, 정치 교화의 순수하고 잡스러움의 원인이요, 상제(上帝)의 기뻐하고 성냄의 기미이니, 왕정(王政)으로서는 끊고 막아야 할 것입니다.
도교를 신봉하는 것이 민간에서 성행한다 하더라도 임금 된 이로서는 진실로 예를 밝히고 의리를 보여 대도(大道)를 천명하여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 끝까지 정도를 보전해야 하는데, 도리어 사도를 존숭하여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관원을 두어 받들고 초제(醮祭)를 거행하여 섬기며, 마치 당연히 제향(祭享)해야 할 신처럼 공경하고, 축수(祝壽)와 기도가 더욱 빈번하여 음귀(陰鬼)가 간악을 빚어냅니다. 이는 곧 임금의 계책에 법이 없어서이니 하민(下民)들이 어디에서 본받겠습니까? 비록 상전(常典)과 같이 봉행하여 나라에 모범을 보이더라도, 어리석어서 사리를 알지 못하고 기호(嗜好)가 서로 다른 것이 백성들의 상정(常情)이라 감화시키기 어려운데, 하물며 허망한 종교로 인도하여 온 세상을 이상한 지경으로 몰고 가는 것이겠습니까?
....(중략).....
제왕(帝王)이 교화를 독실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여 민중을 거느리고 선을 행하는 것은 공론을 따르고 하정(下情)을 빼앗지 않는 데에 불과합니다. 더욱 공경하게 마음을 가지고 백성을 대수롭게 여기지 말아야 하며 민첩하고 용맹하고 과단해서 물정(物情 )을 힘써 따르소서. ……(하략)……
『중종실록』권34, 13년 8월 1일(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