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20. 08:59ㆍ알아두면 조은글
영험한 샘물로 어머니 눈병 치료차 올라… 목욕하면 병이 낫는 초정도 있어
인왕산仁王山(338.2m)은 한양 도성 안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그 기이한 산세로 인해 왕들에 얽힌 숱한 사연,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선비들과 시인묵객들이 음풍농월한 기록, 그리고 지금까지 전하는 청계천·옥류동·청풍계 등의 명칭을 낳고 스토리를 간직한 한마디로 족보 있는 산이다. 그 산을 영화 ‘남한산성’의 주요 배경이자 주인공이었던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영수 청음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신비한 샘터를 찾아 올랐다가 기록을 남긴 것이 <유서산기遊西山記>이다. 그의 후손들이 줄줄이 영의정과 좌의정에 오르는 등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서 더 유명한 김상헌이 어머니의 눈병 치료를 위한 심성이 눈길을 끈다. 그 기록이 유산록 첫 부분에 나온다.
‘한양의 산이 복정覆鼎에서부터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왕도의 진산이 된 것을 공극供極이라고 일컫는다. 이 공극에서 갈려 나와 산등성이가 불쑥 솟아나 꾸불꾸불 뻗어 내려오다가 서쪽을 끼고 돌면서 남쪽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을 필운弼雲이라 한다. 내 집은 이 두 산의 아래에 있어 아침저녁으로 들락날락하면서 일찍이 산을 가까이에서 접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산 역시 다투어 내 집의 창과 실태를 들어오려 하여 친근함을 더하려는 것 같았다. (중략) 갑인년(1614, 광해군 6) 가을에 어머님께서 눈병이 났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서산에 신통한 샘이 솟아나는데 병든 사람이 머리를 감으면 이따금 효험을 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이에 마침내 날을 잡아 산에 올랐는데, 큰형님과 나와 광찬과 광소가 함께 따라갔다. (후략)’_<국역유산기> (국립수목원 편저) 인용
김상헌은 인왕산 바로 아래 살면서 한 번도 산에 올라가보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다.
하지만 항상 산을 접하고 있어 산과는 매우 친근하다고 묘사한다. 처음으로 인왕산에 오르는 이유를 ‘이 산에 신통한 샘이 있어, 이 샘물로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유산록에 밝히고 있다. 산이 높지 않으니 당연히 하루 만에 끝냈다. 그것도 정상에는 오르지 않은 듯하다.
그의 유산록 첫 문장에 나오는 ‘복정’은 솥을 뒤엎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북한산의 옛이름이다. 아마 인수봉을 보고 명명한 듯하다. 북한산은 이외에도 부아악, 북악, 삼각산 등으로 불렸다. ‘공극’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을 가리킨다. 조선 중종 때 중국 사신 공용경이 백악을 공극산, 인왕산을 필운산이라고 고쳐 부른 데서 유래했다. 공용경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백악을 ‘한양 도성의 북쪽 끝을 끼고 있다’는 뜻으로 공극이라 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밝히고 있다. 필운산은 백사 이항복이 어렸을 때 권율의 집에 ‘처가살이贅居’했다고 해서 필운이라 불렀다는 유래도 있다. 그래서 석벽에 ‘필운대’라고 새긴 글자는 이백사의 글씨라고 전한다.
청계천삼청동 등 인왕산서 지명 유래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기록에 따르면 ‘삼각산의 내맥이 보현봉이 되고, 보현봉이 우람하게 높고 낮은 언덕땅으로 퍼져 거기서 양편으로 갈라져, 왼편 가닥은 울툭불툭 길게 내려간다. 이것도 좁은 목을 이루어 안암 땅에 이르고, 오른편 가닥은 반 마장쯤 내려오다가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백악이다. 백악에서 반 마장쯤 내려와서 한 산줄기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인왕산이다. (중략)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두 물이 껴있는 곳이 곧 명당이라고 했는데, 가지와 잎새가 중앙을 둘러 회돌아 있는 것이 그것이다’고 한양과 특히 경복궁은 명당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인왕산은 조선 초기부터 명산으로 꼽혔던 듯하다. 그에 관한 기록은 많이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2권 경도편에 ‘도읍을 정할 때 무학대사가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청룡과 우백호를 삼으려고 했는데, 정도전이 어렵게 여기며 아뢰기를 “예부터 제왕은 모두 남쪽을 향하여 다스렸으니 동향으로 도읍을 창설할 수 없다”고 하며 마침내 무학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왕산이 경복궁의 주산이 될 뻔했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인왕산이 서산이 되지 않았을 터이다. 김상헌이 인왕산을 ‘서산’이라고 칭한 것도 북악이 주산이 되면서 북악의 서쪽에 있는 인왕산이 우백호의 산이 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왕산은 서산, 필운산 등 몇 가지 지명으로 불렸다.
<고려사>에는 인왕산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인왕사에 대한 언급은 자주 등장한다. 당시 수도였던 개경(지금 개성)에 흥복사와 인왕사가 가장 유명한 절이었다.
그 흥복사가 나중 원각사로, 인왕사는 그 명칭 그대로 여기저기 전한다. 기록에는 인왕산 지명도 인왕사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인왕사는 어디서 유래했을까? 확인해 주는 문헌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몇 가지 근거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는 국교인 불교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안정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왕사도 그 일환으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왕은 원래 불탑 혹은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을 나타낸다. 흔히 금강역사나 인왕역사 등의 이름으로 절에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석굴암 입구에 있는 인왕상이다. 따라서 인왕산이 인왕사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는 인왕산이란 지명이 생기기 전 인왕사가 자리를 잡고 앉아 그 위력으로 경복궁을 지키고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 인왕산을 무학대사는 당연히 조선의 주산으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무학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인왕산은 조선 초기부터 그만큼 주목받는 산이었다. 당연히 숱한 사대부들이나 시인묵객들이 드나들며 음풍농월을 읊으며 많은 기록을 남겼다. 수성동은 안평대군과 그를 따르는 문인들의 놀이터였고, 청풍계와 옥류동은 김상헌을 비롯한 서인-노론계의 중심지였다. 여기에 신비하고 영험하다는 샘물까지 있었으니, 인왕산은 단연 주목받는 산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3권 한성부 산천편에 김상헌이 찾은 영험한 샘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영천靈泉이 산허리 바위 아래에서 나는데 돌짬에서 솟아나며 맛이 달고 맵지 않고 또 매우 차지도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상헌은 그 영천을 받아 어머니 눈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유산에 나선 것이다.
그는 그의 형과 같이 나섰다. 지금 그의 집으로 추정하는 곳은 청와대 옆 무궁화동산이다. 그곳에 김상헌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라는 시비도 함께 있다. 지조를 굽히지 않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그가 한양을 떠나면서 남긴 시다. 그의 형 김상용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간다. 그의 형 집은 그가 남긴 시에 단서가 있다. ‘청풍계 위의 태고정은 우리 형님이 사시던 곳’이라고 했다. 청풍계는 지금 청운초등학교 뒤쪽 인왕산 계곡을 말한다. 그쪽으로 향한다.
청운초등학교 바로 앞에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 선생이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그 옆이 세종대왕이 탄생하신 곳이라고 한다. 길을 안내한 종로구청 숲해설사 장석렬씨는 “인왕이란 지명도 세종이 태어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인자한 왕이 되라는 의미로 인왕산으로 명명됐다는 유래도 있다. 또 지금 청운초교 뒤쪽에 그의 형의 집이 있었을 듯하다고 추정한다”고 말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흔적을 둘러보고는 청풍계로 방향을 잡았다.
대궐 같은 집들이 앞을 가로막고 그 사이로 방향을 찾는다. 집 안에 ‘百世淸風백세청풍’과 ‘淸雲山莊청운산장’ 석각이 보인다. 아마 이런 석각들 부근에 김상헌의 형 집이 있었지 않았나 추정한다.
‘인왕동에 들어가서 고故 양곡 소이상이 살던 옛집을 지났는데, 이른바 청심당, 풍천각, 수운헌으로 불리던 것들이 지도리는 썩고 주춧돌은 무너져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중략) 이곳을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니 절벽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고 푸른 잔디로 덮인 언덕이 있어 곳곳이 다 볼 만하였다. 다시 여기를 지나서 더 위로 올라가자 돌길이 아주 험해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아마 청풍계로 들어선 듯하다. 청풍계는 지금 정주영씨 집이 있는 바로 위 계곡을 가리킨다. 인왕산 구름다리가 있는 계곡이다. 김상헌은 한 번 더 쉬고 마침내 영천을 찾아 물을 받는다.
‘샘이 있는 곳에 이르니, 지세가 공극산의 절반쯤에 해당한다. 높이 솟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새가 날개를 편 듯이 지붕을 얹어 놓은 것 같다. 바위 가장자리가 파여 있는 것이 처마와 같아 비나 눈이 올 때, 예닐곱 명 정도는 들어가 피할 만했다. 샘은 바위 밑 조그만 틈새 가운데로부터 솟아 나왔는데 샘 줄기는 아주 가늘었다. 한식경쯤 앉아서 기다리자 그제야 겨우 샘 구덩이에 3분의 1쯤 채워졌다. 샘물의 맛은 달착지근했으나 톡 쏘지는 않았고 차갑지도 않았다. 샘 근처의 나무에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지전紙錢을 붙여 놓은 것으로 보아 많은 노파가 와서 영험을 빌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묘사로 볼 때 샘물을 받은 곳은 현재 석굴암 터로 추정된다. 열 명 가까운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동굴 크기나, 샘물이 나오는 위치상 가장 유사한 장소로 보인다. 그리고 산의 기도터는 전부 샘터가 있다. 그만큼 물과 기도는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물이 있다고 기도처가 있는 건 아니지만 기도처가 있으면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또 지전, 즉 종이돈도 당시 기도할 때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석굴암에는 현재도 기도객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인왕산의 물은 과거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청계천의 발원지도 인왕산이다. 주변 북악산이나 안산, 낙타산, 남산 등지에서도 지류가 많았을 터인데 유독 인왕산에서 흘러간 물에서 그 유래를 딴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청계천은 원래 이름은 그냥 개천開川이었다. 조선 초기 지도에도 개천으로 표시돼 있다. 그 개천이 산의 청풍계에서 부는 바람風이 빠지고 청계천이 됐다. 이는 인왕산의 물 자체의 신령하고 영험함에 근거를 두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왕산의 신령스런 물에 대해서 보충해서 설명한다. ‘초정椒井은 인왕산 아래에 있으며, 목욕하면 병이 나았다. 효종조와 현종조에 모두 여기에 행차했다.’
‘석굴의 앞에는 평평한 흙 언덕이 있었는데 동서의 너비가 겨우 수십 보쯤 된다. 비로 인해 파인 곳에 오래 묵은 기와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인왕사의 옛 절터인 듯하다. 어떤 이가 북쪽의 맞은편 골짜기에도 무너진 터가 있다고 한다. 일찍이 듣기로는 국초에 도읍을 정할 때 서산의 석벽에서 단서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이어 김상헌은 인왕산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그 설명이 지금의 인왕산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산 전체가 바위 하나로 몸체가 되어 산마루부터 중턱에 이르기까지 우뚝 선 뼈대처럼 가파른 바위로 되어 있다.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와 겹쳐진 절벽이 똑바로 서고 옆으로 늘어서 있어 우러러보매 마치 병기를 모아 놓고 갑옷을 쌓아놓은 것과 같아 그 기묘한 장관을 이루 형용하기 어려웠다.’
인왕산은 화강암 통바위로 이루어졌다. 인수봉을 조금 넓혀서 갖다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강암은 세월이 흐르면 마사토로 변한다. 우리가 북한산이나 인왕산 등 화강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사토는 화강암의 부식에 따른 영향이다.
석굴암에서 정상까지는 가파르고 험하다. 김상헌은 위험해서 가지 않고, 젊은 아들 둘이 날렵하게 갔다 온다. 그리고 김상헌은 남쪽 봉우리로 바로 직행한다. 거기서 한양 도성과 무악재 등을 바라본다.
‘큰형님과 더불어 남쪽 봉우리에 오르니, 산봉우리 아래에 술 곳간이 있었다. 두 채를 서로 마주 보게 지어 놓았다. 10칸 정도가 서로 이어져 있다. 술 냄새가 퍼져 나가 새들조차 모여들지 않으니, 모르겠다만 얼마나 많은 광약狂藥(술의 별칭)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온통 취하게 하였던가. 앞쪽으로는 목멱산(지금의 남산)이 보이는데, 마치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는 듯하다. 남쪽으로는 성이 산허리를 감고 구불구불 이어진 것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아래에 어찌 용같이 훌륭한 인물이 누워 있겠는가. 지금 반드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래로 수많은 여염집의 기와지붕이 땅에 깔려 있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마치 물고기의 비늘과 같다.’
그가 오른 남쪽 봉우리는 지금의 범바위인듯 하다. 범바위, 즉 호랑이바위 정상에 올라서면 서대문 무악재를 포함해서 한양 도성과 동대문까지 훤히 보인다. 오히려 인왕산 정상보다 조망은 더 확 트였다. 또한 산성을 용이 누워 있는 모습에 비유한 장면은 지금도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단지 김상헌은 당시 집 모양을 물고기의 비늘과 같다고 했던 반면, 지금은 빌딩과 아파트로 둘러싸인 서울은 영락없는 성냥갑 같다.
범바위에서 얼마 내려가지 않으면 선바위가 나온다. ‘선암’이라는 명칭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선암禪巖은 세상에 전하기를, 한양 도성을 쌓을 때 바위가 중이 장삼 입은 모양같이 인왕산 모퉁이에 서 있어 선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무학은 성 안으로 선암을 들여보내려 하고 정도전은 성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태조가 그 이유를 물었다. 도전이 아뢰기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면 불교가 성하고 성 밖으로 내보내면 유교가 흥합니다” 하니, 명하여 도전의 말을 좇게 했다. 무학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후로는 중들이 선비의 책보를 지고 따르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도성의 안팎 사람들이 치성 드리러 찾은 가장 영험스런 곳이 서성의 서대문밖, 홍제동 고개를 넘어가기 전 인왕산 중턱에 우뚝 솟은 선바위이다’고 전한다. 서울시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돼 있다.
김상헌은 더 이상의 행로에 밝히지 않고 여러 소회에 대해서 감상담같이 늘어놓으며 끝을 맺고 있다.
‘조석으로 생활하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접하던 산을 태어난 지 45년이나 지난 오늘날에서야 비로소 한 번 올랐다. 천지는 잠시 머물러 가는 주막인 거려?廬이고, 희서羲舒는 비탈길에 굴러가는 구슬과 같은바, 부생浮生의 백 년 세월은 이 우주에 잠시 몸을 의탁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이 마치 바람 속의 물거품과 같아 멀리 떠가거나 가까이 있거나 흩어지거나 모이거나 하는 것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지금부터 여생이 몇 년이나 더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어머니와 형을 모시고 아들과 조카를 따르게 하여 다시 이 산에 놀러와 여기에 머물러 먼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루 종일 즐기는 것을 어찌 또 다시 기약할 수 있겠는가. 인하여 느낀 바가 있어 그것을 쓰고 때를 기록해 두고자 한다. 현웅의 집은 남쪽 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금릉으로 쫓겨났고, 백사 역시 불암산 아래 은둔해 있다.’
김장생과 더불어 우암 송시열의 스승으로서 우국충정에 대한 뭔가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낸 듯하다.
끝으로 인왕산에서 유래해 현재까지 전하는 지명을 살펴보자.
삼청동은 원래 도교의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을 모시는 삼청전이 있었던 곳이라 명명됐으나, 이와는 달리 산 맑은 산청山淸, 물 맑은 수청水淸, 사람 맑은 인청人淸으로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팔판동은 옛날 8판서가 살았다고 해서 유래했다. 옥류동은 수석과 같이 좋은 경치가 있다고 해서 명명됐으며, 김상헌의 후손 김창협이 지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당 부분 그 자취가 사라지고 없다. 그나마 옥인동 아파트를 헐고 수성동계곡을 살려낸 건 볼 만하다.
<청음집>권38 기에서 발췌
漢陽之山。自覆鼎而來。爲 王都之鎭者曰拱極。自拱極分峙。穹嶐磅礡。西擁而南抱者曰弼雲。余廬于兩山之下。朝夕出入起居。未嘗不與山接。而山亦爭入於吾之軒窓几案。若有所加親焉。故常送目臥遊。不曾往來岩壑之間。歲甲寅秋。慈闈目疾。聞有靈泉出於西山。病沐者往往輒效。遂卜日以往。伯氏及余燦,熽俱從。入仁王洞。過故陽谷蘇。貳相舊宅。所謂淸心堂,風泉閣,水雲軒者。退戺殘礎。殆不可分。陽谷用文章顯世。旣貴而富。又稱有心匠。結構極其工麗。交遊之士。皆一時詞翰聞人。其所賦詠。必多可記而傳。至今未百年。已無一二存焉。士之所恃以施於後者。不在斯也。由此而上。絶壁飛泉。靑莎翠阜。處處可悅。又由此而上。石路峻仄。去馬而步。再憩迺至泉所。地勢直拱極之半。一穹石。翼然如架屋。石際槌鑿狀屋簷。雨雪可庇六七人。泉從石底小縫中出。泉脈甚微。坐一餉。始滿坎三分之一。而坎周僅比一碾。深亦不及膝尺剩。泉味甜而不椒。亦不甚冷冽。泉之旁叢林。紛然亂着紙錢。多婆乞靈處也。石窟之前。土岸平衍。東西纔數十步。雨破出古瓦。認是仁王寺遺址。或言迤北對谷。亦有廢基。古跡陻沒。莫能辨也。嘗聞國初定都時。得丹書于西山石壁云。而亦不知處也。山以全石爲身。從頂至腹。屹骨巉巖。危峯疊壁。直豎橫布。仰視如攅兵積甲。奇壯難狀。支脈絡而爲岡。群岡分而爲谷。谷中皆有泉。淸流觸石。萬玉琤琮。水石實都中第一區也。所恨令縱禁弛。徧山無尋丈之木。若得松栝蔭日。楓枏夾岸。颼颼乎瑟瑟乎。婆娑掩映於風月之夕。則蓬壺,崑閬。亦奚足健羨也。背見曲城甚邇。遣僕輩探路。路險不可攀云。燦熽捷步往還。能道所見。沙峴行人。小如蟻子。三江風帆。歷歷可枚數矣。竊自歎吾年未及而衰劣已甚。跬步地尙不堪騁脚。見險而止。況能就列陳力。展吾少學。行道以及人哉。與伯氏上南峯。峯之下有酒庫。二廊對構。連亘十餘間。酒氣所干。飛鳥不集。不知許多狂藥。使擧世皆醉也。前瞰木覓。若撫卑幼。南城轉山腰。屈曲蜿蜒如臥龍。其下寧有人龍臥乎。今未必在也。閭閻萬瓦撲地。織織如魚鱗。亂後二十三年。生齒日增。室屋之多如此其盛。中間男子計不下數十萬。而未有一人佐堯舜致唐虞。徒俾國勢益弱。民生益悴。邊鄙益聳。陵夷至於今日。豈蒼蒼者降材靳歟。抑降之而不知不庸耶。何莫非時也命也運也。景福空苑。城摧木缺。龍樓鳳閣。鞠爲茂草。但見慶會池荷葉飜風。明滅於夕陽中。前之妨賢誤國。致戎馬生荊棘。後之嗾疏求媚。行邪說廢法宮。奸臣之罪。可勝誅哉。東闕雙聳。赤白中天。禁林松柏。鬱鬱蒼蒼。虎賁龍驤。淸宮望幸。王者之居。廢興固有數。而臨御亦有時也歟。興仁傑構。東眺屹然。鍾街大道。通豁一條。左右列肆。若衆星分躔。井井有次。其間若車若馬。馳者驟者。遑遑焉汲汲焉。皆有所利圖者。唐人詩所謂相逢不知老。眞妙讚也。佛巖翠色。望之可挹。石峯秀拔。非尋常面目。若近輔京室。作爲東鎭。與西南北三岳共峙。則岩岩之䠨。實壯國勢。迺遠在郊外數十里。若遯于荒野者然。天公造物之意良可惜也。噫。以朝夕起居之所常接者。生四十五歲。始得一登。穹壤蘧廬。羲舒坂丸。浮生百年。寄形宇宙。泛泛若風中之漚。或遠或近。或散或聚。皆不能自由。自今餘生。未知幾歲。而陪母兄從子姪。更遊於茲山。以寓遐矚。而永一日之娛者。又安可期也。因感而書之。以記歲時。玄翁宅在南城。令斥逐金陵。白沙亦遯于佛巖山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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