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스크랩) 위창(葦滄) 오세창 글씨

2018. 6. 25. 18:01서예가

 

 

                           위창(葦滄) 오세창 글씨

 

 

 

 

 

葦 滄 年 譜

 

1864 (1): 서울 이동에서 출생

1865 (2): 부친 吳慶錫 義州監稅官에 부임

1865 (3): 부친 賚咨官으로 北京. 귀국후 병인양요 기록.

1868 (5): 부친 뢰자관으로 북경행

1869 (6): 부친 譯官으로 북경행. 3品 通政大夫에 오름.

1871 (8): 부친 家塾을 설치하여 大致 劉鴻基를 위창의 스승으로 모심

1872 (9): 부친 朴珪壽와 함께 북경행.

1873 (10): 부친 종2嘉善大夫에 오름. 북경행.

1874 (11): 부친 역관으로 북경행.

1875 (12): 부친 정2資憲大夫에 오름. 위창 金載信의 따님과 결혼.

1876 (13): 부친 강화도 병자수호조약 체결. 과로로 인한 중풍으로 반신불구.

1877 (14): 부친 종1崇政大夫에 오름.

1879 (16): 위창 譯科에 합격. 가숙 철거. 부모 양친 콜레라로 사망.

1880 (17): 司譯院等第.

1882 (19): 後苑駐衛淸營差備官에 임명됨.

1884 (21): 甲申政變에 연루되어 劉大致廣州로 도피하여 구속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 유대치 행방불명. 이때 부친이 수집한 진귀한 서양물품 다량 분실.

1885 (22): 司譯院 直長에 임명.

1886 (23): 博文局 主事에 임명. <漢城週報> 기자.

1888 (25): 6품에 오름. 박문국 폐지됨.

1890 (27): 淸使引禮差備官에 임명.

1894 (31): 김홍집 내각 甲午更張 실시. 내무부 주사로서 군국기무처 郞廳(비서실)에 임명됨. 의정부 주사를 겸하며 내각 비서관으로 정식 발령됨.

1895 (32): 3품에 올라 工務衛門參議에 임명. 농상고부 참서관. 郵政局 通信局長 겸임.

1896 (33): 斷髮. 참서관 사임. 통신국장 사임.

1897 (34): 일본 문부성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과 교사로 부임.

1898 (35): 일본에서 귀국.

1902 (39):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으로 망명. 손병희 만나 천도교 입교. 천도교의 敎旗와 훈련원의 현판(鳳凰閣) 휘호.

1906 (43):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귀국. <萬世譜> 창간. 사장에 취임.

1907 (44): <만세보>가 국채보상운동 주도. <만세보>폐간됨.

1908 (45): 大韓協會 조직하여 抗日運動.

1909 (46): <大韓民報> 창간 사장 취임. <槿域書畵徵>출판계획 수립.

1910 (47): 한일합방. <대한민보> 폐간됨. 언론생활 마감. 書畵界와 구체적 관련 맺기 시작하여 金嘉鎭, 安中植, 李道榮 등과 書畵鋪(화랑) 개설 협의. <槿域書彙> 발문 씀.

1911 (48): 천도교 道師가 됨. 書畵美術會 개설 회원으로 참여. 금석문으로 서예에 전념.

1913 (50): 書畵大展覽會에 수장품 다수 특별출품 및 본인작품 출품.

1918 (55): 書畵協會 13인과 함께 발기. 서화계의 대표적 인사로 부각.

1919 (56): 3.1 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獨立宣言書에 서명. 구속.

1920 (57): 공소공판에서 3년 언도.

1921 (58): 가출옥(28개월 복역)

1922 (59): <書畵協會報> 창간. <書家列傳>,<畵家列傳>연재. 2회에 그침.

1925 (62): 5회 협전에 <徐市起禮日出><篆書> 출품

1927 (64): 7회 협전에 출품.

1928 (65): <槿域書畵徵> 啓明俱樂部에서 출간.

1929 (66): 9회 협전에 <魚車舟> 출품. 서화협회 임시총회에서 간사로 선출됨.

1932 (69): 11회 협전에 <小扇短札> 출품.

1934 (71): 13회 협전에 <象形古文> 출품.

1935 (72): 14회 협전에 출품

1936 (73): 15회 협전에 춤품

1937 (74): <槿域印藪> 題字

1943 (80): <槿墨> 題字

1945 (82): <매일신보><서울신문> 초대사장에 취임. 건국준비위원회 고문.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대한국민당 고문. 무수한 국민대회, 시민대회, 환영회에 민족인사로 참석. 조선서화동연회 고문으로 추대.

1946 (83): 8.15해방 1주년 기념일에 대한제국 황제 玉璽를 민족대표로서 인수. 해방전람회에 출품.

1947 (84): 2회 해방전람회에 출품.

1950 (87): 6.25사변으로 대구로 피난.

1953 (90): 4.13 대구 대봉동 遇居에서 사망. 사회장으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

 

年譜에서 보는 바와 같이 葦滄8대에 걸친 譯官 집안으로 중국으로 부터 신사상과 신문물을 접하여 일찍이 신문화에 접할 수 있었으며 부친의 친구이며 漢醫로서 개화당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스승 劉大致와 그의 제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유길준 등과 함께 개화파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또한 역관들은 중국을 왕래하며 무역으로 막대한 재력을 갖고 있었기에 위창의 부친 亦梅 吳慶錫은 국내외의 희귀한 書畵를 방대하게 수집할 수 있었다. 亦梅 또한 金石學書畵에 조예가 깊어 중국에 많은 금석학자와 서화가를 사귀어 그의 수집에 도움을 많이 주기도 하였다.

위창의 서예와 전각, 그리고 <槿域書畵徵>,<槿域書彙>,<槿域畵彙>,<槿墨>,<槿域印藪> 등의 편저들은 亦梅의 수집이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창의 書藝篆刻的 雅趣의 발로로서 그의 전서와 전각의 位相韓國篆刻始初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출처 : 청 산 별 곡
글쓴이 : 竹史 김병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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