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량黃俊良

2018. 5. 21. 17:49성리학(선비들)

황준량

동의어 중거(仲擧), 금계(錦溪) 다른 표기 언어 黃俊良



시대 조선
출생1517년(중종 12)
사망1563년(명종 18)
경력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
유형 인물
직업 문신
대표작 금계집
성별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본관 평해(平海)

요약 1517(중종 12)∼1563(명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목차        

  1. 개설
    1. 생애 및 활동사항

      개설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사온서주부 황영손(黃永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효동(黃孝童)이고, 아버지는 황치(黃觶)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고, 문명(文名)이 자자하였다. 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훈도로 차출되었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으며, 양현고봉사를 겸하였다. 1544년 학정, 1547년(명종 2) 박사에 이어 전적에 올랐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중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었다.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했으며,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1551년 경상도 감찰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앞서 청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의 모함이 있자, 외직을 자청해 신녕현감으로 부임했다가 1556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단양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였다. 그러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졸하였다.

      신녕현감으로 있을 때 기민을 잘 진휼(賑恤)해 소생하게 하였다. 또한 전임관(前任官)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학교와 교육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해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는 특은(特恩)을 받기도 하였다. 벽지에 있던 향교를 군내에 옮겨 세우고, 이 지방의 출신으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문묘 서편에 따로 사우(祠宇)를 마련해 제사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주목사로 나아가서도 영봉서원(迎鳳書院)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孔谷書堂)·녹봉정사(鹿峰精舍) 등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의 학자 오건(吳健)을 교관(敎官)으로 삼는 등 교육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우애가 돈독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자식이 없어 아우 수량(遂良)의 아들로 양자를 삼았다. 풍기의 욱양서원(郁陽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