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3. 14:07ㆍ성리학(선비들)
이현보
동의어 비중(菲仲), 농암(聾巖), 설빈옹(雪鬢翁), 효절(孝節) 다른 표기 언어 李賢輔
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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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67년(세조 13) |
사망 | 1555년(명종 10) |
경력 | 형조참판, 호조참판 |
유형 | 인물 |
관련 사건 | 중종반정 |
직업 | 문신, 문인 |
대표작 | 농암집 |
성별 | 남 |
분야 | 문학/고전시가 |
본관 | 영천(永川) |
요약 1467(세조 13)∼1555(명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전 옥준상인, 〈이현보초상〉, 1536년, 비단에 채색, 126×105㎝, 보물 제872호, 개인소장.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현보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머리에 평량자를 쓰고 있는 점, 책상을 앞에 두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 한 손으로는 불자를 들고 한 손으로는 허리띠를 잡고 있는 자세 등에서 특이하다. 1536년 옥준상인이 그렸다고 전해진다.
개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菲仲),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鬢翁). 예안 출신. 아버지는 참찬이흠(李欽)이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
생애 및 활동사항
1498년(연산군 4)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둔다.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교유했으며 고향에 돌아와서는 시를 지으며 한가롭게 보냈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效嚬歌)」·「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문학사에서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612년(광해군 4)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됐다가 1700년(숙종 26)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됐다. 시호는 효절(孝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