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7. 17:07ㆍ성리학(선비들)
하연
동의어 연량(淵亮), 경재(敬齋), 신희(新稀), 문효(文孝) 다른 표기 언어 河演
시대 | 조선 |
---|---|
출생 | 1376년(우왕 2) |
사망 | 1453년(단종 1) |
경력 | 영의정 |
유형 | 인물 |
직업 | 문신 |
대표작 | 경상도지리지, 진양연고 |
성별 | 남 |
분야 | 역사/조선시대사 |
본관 | 진주(晉州) |
요약 1376(우왕 2)∼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하즙(河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하윤원(河允源)이고, 아버지는 부윤 하자종(河自宗)이며, 어머니는 정우(鄭寓)의 딸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녹사를 거쳐, 직예문춘추관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동부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태종은 그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하했다 한다.
세종이 즉위하자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조심스럽게 처사하여 신임을 받아 예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曹溪宗) 등 불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받았다.
1425년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 뒤 대사헌·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1437년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판이조사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공세법(貢稅法: 연분9등, 전분6등)을 마련했으며, 1442년에는 각품의 행수법(行守法)을 제정하였다. 1445년에 좌찬성이 되어 70세로서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4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으로 있던 1451년(문종 1)에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 간 문안에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진양연고(晉陽聯藁)』가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