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7. 16:00ㆍ성리학(선비들)
황희
黃喜
세종의 신임을 철저히 받았던 명재상
출생 | 13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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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52년 |
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세종은 말년에 궁중에 부처를 모시는 내불당(內佛堂)을 조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계급들이 모두 유교를 숭상하는 자들이어서 세종의 내불당 조성은 큰 반대에 부딪쳤다. 집현전 학사들은 일제히 업무를 접고 귀가하는 일종의 데모를 벌였다. 마음이 상한 세종은 텅 빈 전내(殿內)를 휘둘러보며 비감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옆에 있던 황희(黃喜, 1363~1452)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모든 학사들이 나를 버리고 갔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신이 가서 달래 보겠습니다.”
황희는 집현전 학사들을 달래는 데 성공했고, 끝내 내불당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황희도 유교를 받드는 유생이었다. 그런데도 세종의 마음속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렸고, 늘 세종이 정책수립에 둘도 없는 협조자가 되었다. 세종은 자기를 알아 주는 신하는 황희와 박연(朴堧) 등 서넛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황희는 고려가 망할 징조가 뚜렷했던 혼란의 시기에 태어났고 세종의 탁월한 정책들이 이룩되어 조선왕조의 기틀이 다져진 뒤에 죽었다. 그의 아호는 방촌(厖村)이었다. 조상의 고향은 남원(또는 장수)이었으나, 그는 개경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균관 학관으로 있을 때 고려가 망했는데, 그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달랠 길 없어 개경 언저리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평생 벼슬을 돌보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유능한 그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그는 끝내 이성계의 끈질긴 간청을 물리치지 못해 뜻을 꺾고 벼슬자리에 올랐다.
황희는 조선왕실에 들어와서 세자를 가르치는 우정자(右正字)를 시작으로 태종 시기에 6조 판서를 두루 지냈다.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비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태종은 그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소. 만약 누설된다면 경 아니면 내가 한 것이오”라면서, 기밀에 관한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또한 하루 이틀이라도 만나지 못하면 꼭 불러다 만나서 둘이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좌참찬에 기용된 뒤 좌 ·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특히 그는 정승 자리에는 24년, 영의정 자리에18년 동안이나 재직한 뒤 물러나는 평탄한 생애를 보냈다. 황희는 관로에 들어선 뒤, 단 한 번의 유배와 두 번의 가벼운 파직밖에 겪지 않았다.
그가 유배당한 것은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세종)의 세자책봉을 크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양녕대군이 적자이므로, 적자를 제치고 다른 아들로 세자를 삼으면 후세에 큰 환란의 불씨가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는 또 양녕대군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고, 양녕의 두터운 친구이기도 했다. 이때 그는 파주 교하에 유배되었다. 가까운 곳에 두려는 태종의 배려였다. 하지만 벼슬아치들이 그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자, 그의 조상 고향인 남원으로 유배지를 바꾸었다. 태종은 그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유배생활을 하도록 특전을 베풀었다. 그는 남원 유배지에서 3년을 보내면서 문을 닫아걸고 친구들을 만나지도 않으며 글 읽기에만 열중했다.
또 그가 파직된 것은 좌의정으로 있을 때, 그의 지인 태석균(太石鈞)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투옥되었을 때였다. 그는 사헌부에 태석균의 감형을 부탁했다는 죄상을 받고 잠시 파직되었다. 그는 이 두 가지 경우 말고는 탄탄한 관로를 걸었다.
세종은 자신의 세자책봉을 크게 반대한 황희를 왕위에 오른 지 3년 뒤인 1422년 좌참찬으로 발탁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떠난 인사였다. 그 뒤 두 사람은 평생을 두고 공적으로는 군신의 관계였고, 사적으로는 둘도 없는 친구의 관계였다.
황희는 세종 밑에서 좋은 협조자 역할을 하여 세종의 빛나는 업적에 조력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즈음 식견이 좁은 선비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을 때에도, 내불당을 지으려 하여 집현전 학사들이 불같이 반대를 할 때에도, 또 천첩 소생들에게 비천한 일을 면제하는 조치를 내리려 하여 양반들이 반발할 때에도 세종을 돕고 세종을 이해하고 감쌌다. 특히 황희는 과학적인 농사 개량과 실질적인 예법 개정에 아주 큰 공헌을 했다.
작은 일에 너그럽고 큰 일에 엄격하다
그가 죽었을 때 사관은 이렇게 평가했다.
성품이 관후하고 신중하여 재상으로서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모습이 풍만해 특출하였고 뛰어나게 총명했다. 가정을 다스림에는 검소했고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일을 따질 때에는 공명정대하여 원칙을 살리기에 힘썼으며 마구 뜯어고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 《문종실록》 권12, 2년 2월조
인물평가에 짜기로 소문난 실록의 사관이 남다른 찬사를 보낸 것이다. 이처럼 황희는 공무에 있어서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늘 너그럽고도 인자했으며 죄인을 다스를 때에는 가벼운 처벌을 위주로 했다. 또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나라를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 선비요, 벼슬아치였다. 흔히 황희라면 순하고 사람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그는 뼈대없는 무골호인으로 보일 행동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계집종들이 싸움박질을 했다. 그중에 한 계집종이 황희 앞으로 달려와 고자질했다.
“저 아이가 제 험담을 하고 다닌답니다.”
“네 말이 옳다.”
다른 계집종이 억울하다는 듯이 달려와서 말했다.
“대감마님, 거짓말입니다.”
“네 말도 옳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희의 아들이 물었다.
“어찌 아버지께서는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고 하십니까?”
황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네 말도 옳다.”
이렇게 해서 황희는 무골호인으로 소문이 나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뼈대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서는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한 치의 빈틈도 보여 주지 않았다. 사실 앞의 두 계집종의 시비나 아들의 참견은 부질없이 따지는 인간사를 풍자한 이야기이다.
그는 청렴결백했다. 흔히 벼슬자리를 재산을 갈취하는 도구로 삼는 풍토에서 그는 녹봉만으로 가족과 종들의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다 보니 늘 쪼들리며 살았으며 그의 집은 지붕을 제대로 잇지 못해 늘 비가 샜다고 한다. 그는 비 오는 날이면 방 안에서 책을 읽을 때 우산을 받쳤다고 한다.
세종이 그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해 한 가지 작전을 짰다. 날짜를 정해 그날 사대문 안에 들어오는 계란을 몽땅 모아 그의 집으로 보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 홍수가 나서 계란장수들이 사대문 밖에서 며칠씩 묵은 뒤 계란을 들여온 탓으로 ‘정해진 날짜’에 들어온 계란은 모두 곯아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계란유골(鷄卵有骨)각주1) ’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이것을 청렴결백한 사람에게 내리는 하늘의 뜻이라 숙덕거렸다.
그는 공직자로서의 몸가짐을 철저히 실천했고, 친척이나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벼슬자리를 주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과거시험이나 능력에 따라 벼슬을 주도록 했다. 그런 탓으로 그는 자기 패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야생마 김종서를 길들인 명조련사
김종서의 사람됨을 잘 아는 황희는 그가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면박을 주기 일쑤여서, 김종서는 늘 황희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황희의 꾸지람만 들으면 땀을 흘렸다고 한다. 김종서는 정직하고 용기가 있었지만 근무시간을 잘 지키지 않고 낮술에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는데도 무슨 일이고 설치거나 소홀히 하는 흠이 있어 끊임없이 다듬었던 것이다. 황희는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그 후계자로 김종서를 추천했다.
허균은 황희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유자도 아니었고 뛰어난 신하도 아니었다. 특히 바른말을 잘하고 성격이 곧아서, 임금 앞에서 아첨하는 말을 하고 돌아서서는 배반하는, 즉 면종복배(面從腹背)하지 않았을 뿐이다. 세종 때에는 건국 초여서 해야 할 국사가 너무나 많았다. 황희 · 허조는 왕도에 힘쓰지 않았지만 그 명망으로 높임을 받았다. 한데도 오늘날 나라가 이만큼 안정된 것은 능히 이 두 신하가 보좌를 잘했기 때문이다.
허균은 황희가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세종 같은 성군을 만났기에 업적을 이룩했다는 것이요, 또 바른말로 세종을 보좌했기에 세종의 빛나는 치적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아주 적절한 인물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종이 없는 황희를 생각할 수 없다는 허균의 논지는 수긍이 간다. 황희가 만약 ‘연산군의 신하로 있었다’고 가정하면 쉽게 납득이 간다. 어쨌든 황희는 조선조 초기에 활동한 훌륭한 정치가로 첫손가락에 꼽힌다. 또 청빈과 근면을 생활지표로 삼은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90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가 죽자,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했고, “조정에서나 민간에서나 모두 놀라고 탄식하면서 조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여러 관청의 아전들과 종들도 모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 지냈으며 이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문종실록》 권12, 2년2월조)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칭송만이 넘친 것은 아니었다. 비난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사관은 또 기록하기를 “성질이 지나치게 너그럽고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 청렴한 지조가 부족하여 오랫동안 관리 임명을 맡아 보면서 뇌물을 받아먹었다는 비난이 적지 않게 있었다”고 했다. 왜 이처럼 상반된 평가가 있었을까?
그가 죽기 1년 전, 현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병을 치료할 때, 자신의 둘째 아들 보신(保身)이 벼슬에서 물러난 지 11년이 지나도록 다시 벼슬길이 열리지 않자 이를 변명하여 구제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자식을 변호하면서 “부정행위를 한 것은 나라 창고의 재물이 아니었고 그 실정이 애매했는데 매질에 못견뎌 인정하고 말았다”라고 했다. 문종은 노신(老臣)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또 다른 아들 치신(致身)이 잘못을 저질러 관아에 과전(科田, 하사 받은 토지)을 회수당했을 때에는 이를 임금에게 건의해 돌려받으려 했다고도 한다. 또한 그의 서자 중생(仲生)이 죽을 죄를 짓자,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을 조(趙)로 바꾸었다고 한다. 비록 그의 장남 수신(守身)이 영의정에 오른 명신이었으나 그의 자식들은 대부분 평탄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은 반대파의 모략으로 보인다. 언제나 어느 지도자라도 반대하거나 모략질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아무튼 후대 벼슬아치들의 청렴을 강조할 때마다 황희의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하며 모범의 인물로 제시된다. 조선시대 청렴한 벼슬아치를 뽑아서 청백리로 지정하고 기릴 때에도 언제나 그의 이름이 맨 앞줄에 올랐다. 그가 뇌물 받기를 즐겨 했다면 이런 조작이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그의 유적은 파주 일대에 보존되어 있다. 특히 임진강 언덕 위에 있는 반구정(伴鷗亭, 기러기와 벗하는 정자라는 뜻)은 그가 만년에 임진강 철새들을 바라보면서 유유자적한 곳이다. 이곳 언저리에는 황희의 묘소와 그를 기리는 서원도 자리 잡고 있어서 그의 체취를 풍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