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주거 건축의 고찰

2017. 10. 12. 10:20박물관후기

조선시대 주거 건축의 고찰

주택(가옥, 살림집) 이라는 것은 한 가족 단위의 구체적인 생활 공간이다. 모든 건축양식이 각 민족이나 시대, 지역 간의 문화사상적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특히 주택은 넓게는 민족성을 포괄하고 자연환경적 제반요소가 가미되어 시대상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조형물이다. 이러한 특수성의 반영과 함께 경제적 여건이나 신분상의 특성도 주택구조에 형향을 끼친다. 이러한 주택은 시대와 지역, 계층 그리고 용도에 따라 필요한 공간을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변화된다. 즉 남성과 여성의 공간, 주인과 하인의 공간, 산자와 죽은 자의 공간, 작업과 휴식의 공간, 그리고 의식을 행하기 위한 공간 등 각각의 기능을 지닌 공간들이 한 집안에 구성되어진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와 고유의 지형 등을 배경으로 독특한 건축 문화를 이룩해왔다. 지세를 존중하여 거스르지 않으며 자연에 순응하면서 조화시키는 슬기를 터득하고 불교와 유교사상, 풍수지리 등의 인문적 요인들은 건축의 입지에서부터 배치되어왔고, 형태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 특유의 조형성을 발전시킨 근간이 되어왔다.

우리의 건축은 나무와 돌, 그리고 흙 등을 주재료로 하여 이들을 적절히 가공하여 사용함으로써 목조 건축의 형태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전통적 목조 건축의 특성은 매우 다양하며 특히 공포, 구조와 기둥의 배흘림, 안쏠림, 솟음 등의 의장수법과 지붕의 처마곡선 등이 어우러져 우리의 독특한 전통적 조형언어를 창출해 내게 된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의 주택 건축에 있어서 계층에 따른 분류를 하고자 한다.

1. 조선시대의 주택 형성요인

조선시대의 주택건축은 고려시대에 형성되어온 주택구조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발달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개국과 더불어 조선시대만이 갖는 인문사회 환경의 영향으로 기본구조의 바탕 위에서 서서히 변화를 하게 된다. 조선시대 주택형성의 요인은 대체로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신분제도와 유가사상, 그리고 풍수지리가 그것이다.

첫째,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생활, 문화, 사상 등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고 주택에 있어서도 신분적 제약을 가져오게 하였다. 신분제도가 주택건축에 미친 영향으로는 첫째가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한양이 도읍을 옮기면서 이루어진 건축면적의 제한이다. 즉 한양의 땅이 한정되어 무제한으로 나누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양반에게 주는 땅을 제한하였다. 주택에 대한 두 번째 제약은 규모의 제한으로 세종때 대책을 연구하여 동왕13년(1430)에 구체적인 규정이 정립되고 경국대전에 입법화함으로써 조선시대의 건축법규로써 지켜져 왔다. 세 번째 제한은 주로 장식적인 것으로 세종때에 단청 금지의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고 있다. 장식적인 측면에서는 단청이외에 댓돌이나 계단석 등에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장식적 측면에 제한이 많았다. 그러나 문종때에 관청이나 사찰(절) 만은 예외를 두었으며 장식 제한은 잘 지켜지지 않아 사가에서도 단청을 한 예는 나타난다. 그러나 건축예술은 15C 전후 특히 임.란 이후 사회생활 전반에서 자본주의적 기운이 강화되면서 상공업의 발달과 지배체제의 붕괴로 인하여 부를 축적한 지방의 중인계층과 부농층이 호화주택을 지으면서 조선후기의 신분적 제약의 효력은 많이 약화된다.

둘째, 유교사상을 통치수단으로 내세운 봉건 통치자들이 민중들에게 유교적인 질서와 교리에 순종하도록 강요하면서 건설을 벌이고 건물을 세우는 경우에도 유교적인 질서와 규범을 반영한 도식적이고 사대주의적이며 복고주의적인 건축술만을 요구하였다.

조선시대의 건축유산은 왕의 거처와 관련한 건물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다 그전에 있었던 것을 개축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며, 새로 세워지는 건축물들도 소박한 유교 건물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건축물들에서도 유교적인 성격이 강화되어 전반적으로 저조한 상태에 있었다. 또한 유교의 기본 강령인 조상숭배와 남녀유별, 장유유서 등은 주택의 배치에 많은 영향을 미쳐서 가묘의 설치와 사랑채, 안채, 행랑채 등 한 집안에서도 성별과 신분에 따라 생활하는 공간을 구분하게 하였다.

셋째, 음양오행설에서 변화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토지는 만물의 생명력, 즉 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는 토지뿐만 아니라 만물 모두 가지고 있지만 분류가 땅 속에 흐르고 있어 그 흐름을 지맥이라하고, 그 기가 모이는 곳을 혈이라 하여 이 혈에 묘지나 택지를 정하면 그 생기를 받아들여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대개 뒤에 산이 있고 앞에 물이 흐르는 곳(배산임수)에 집을 짓게 되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곧 전통적인 주택위치의 기본적 바탕이 된다.

2. 조선시대 주택의 분류

․계층적 분류

이상에서 조선시대 주택건축에 영향을 준 요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는 조선시대의 주택을 계층에 따른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시대 주택은 사회신분제도에 의해서 다르게 분류될 수 있는데, 최상위 계층의 상류주택과 중인 계층의 중류주택,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서민주택, 마지막으로 양반집에서 거주하는 외거 노비의 집인 가람집 등으로 나눌 수 있다.

a. 상류층 주택

상류층 주택은 양반이나 이에 준하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주택으로 중인층과 양반층의 주택이다. 그러나 상류층 주택은 후대로 가면서 신분보다는 경제력만 좋으면 집을 크고 좋게 짓는 현상이 나타나고, 특히 1800년대 이후 시작된 세도정치에 의하여 소수의 문벌이 정권을 잡고 대다수 양반층은 권력에서 소외된다. 이에 따라 지방의 양반들은 토착지주화 되고 양반이라는 신분 유지는 경제력 확보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양반층의 토착화에 따라 상류층 주택에도 지역적 특성이 나타나게 되고 지역적으로 건축유형이 달라진다. 특히 안채의 경우 그 지역의 서민주택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아지며 토착지주화에 따라 농업경영이 가사생활에 중요한 부분으로 부각되어 마당과 채 구성에 있어 지역적 차이점이 나타난다. 이러한 상류층 주택은 일반 서민의 주택이 원시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과 비교하여 볼 때 상당히 발전한 주택양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극히 정체된 주생활 상태에 머물러 있고 그 대신 주생활의 본질이 아닌 다른 측면들로 취락의 중심적 기능이나 지방 토호로서의 필요한 기능들이 불균형하게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류층 주택은 평면의 형상에 따라 일(日)자형, 월(月)자형, 구(口)자형, 용(用)자형 등으로 나뉘는 길상문자형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지역과 환경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다. 그리고 상류층 주택은 비록 지방에 은거하기 위한 것이라도 한 취락의 토호적 교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주생활의 기능 이외에 다른 잡다한 생활이 가미되어 있다. 조선시대 상류층 주택에 대한 전체 건축면적과 상주면적과 상주면적 구성비를 보면 접객, 교화부분으로 쓰이는 대청마루와 접객의 사용빈도 수가 극히 적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안채와 대청마루, 주변에 부수하는 토호적 용도로서의 수장 부분과 노비 처소등이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류 살림집 형성에 끼친 요소와 특징을 보면

첫째, 양반 계급들의 궁중 생활의 경험이 개인의 주택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 주택의 대청마루는 기후를 감안하여 보면 그다지 큰 역할을 못하고 있다. 서민의 경우는 툇마루 형식 또는 다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한 칸 정도이던가 남쪽 지방으로 가면서 다소 넓어지는 것뿐인데 반해 상류층 주택에서는 상당히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는 궁궐의 침전 건축(교태전, 강녕전, 석어당, 자경전, 연경당)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유교정신에 입각한 생활 풍습의 영향이다. 유생들의 고고한 생활태도는 검소하게 생활하기도 하지만 권력과 지도층으로서의 위세를 체면이라 생각하여 호화스러운 주택을 영위하였다. 그리고 유교의 영향으로 가부장적인 가족제도가 모여 사는 공동체적인 부락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동일 주택에 있어서도 큰 사랑, 작은 사랑의 구별이 곧 장자의 지위를 보여주고 있으며, 부권 계승자로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남녀간에 있어서의 엄격한 구별은 주택에도 안채와 사랑채를 구별시켜 남녀를 격리시켰고 심지어 부부의 침실까지도 따로 만들었다. 한 주택 공간에 있어서도 여자가 사용하는 공간과 남자가 사용하는 공간이 구별된 것이다.

조상숭배의 유교사상이 주택건축에 나타난 것은 <사당>을 들 수 있는데 태종 때에는 정부에서 권장하고 위반하면 처벌까지 하였으며 양반 가문에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것은 후에 중인계층에게도 보급된다.

셋째, 지역사회에서 행한 중심적 역할이다. 당시 상류층 주택은 동족촌의 중심적인 상징 역할을 했으며, 그 지역 사회에서 경제적 지위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사랑채와 넓은 마루와 중정은 지역사회의 교화, 집회의 장소였으며 많은 광은 노비들의 거처인 행랑채와 더불어 경제생활의 지배적인 지위를 의미하였다. 또 별당 건축을 중심으로 한 일곽 역시 한 고을의 동헌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서 중정의 기능상의 역할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중정은 대부분 협소하여 정원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안동 의성김씨 종택, 안동 임청각, 월성향단 등이 이러한 면을 잘 나타낸다. 중정은 방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며 일상생활에서는 상하의 의견교환장소 또는 내객을 접대하는 공동생활의 중심장소로 쓰였으며 특별한 관혼상제 때에는 식장이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연회시 풍류를 위한 정자, 연못 등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별당 건축은 주택 내에서 사랑채의 연장으로 가장 다목적용으로 사용하였으며, 접객, 곡서, 한유, 관상들의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택지는 항상 알맞은 경승지를 택하고 인공 연당과 축산으로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별당 건물은 한국건축의 정취와 세부구법에 있어서 정교함이 잘 나타나있는 건물이다. 이렇게 볼 때 상류층 주택의 구성은 사랑채, 안채, 사당, 행랑채가 기본요소가 되고 정자나 서고, 별당 등이 필요에 따라 건축되었다. 그리고 이들 건물의 배치는 중국의 주택이 좌우대칭인데 반해, 비대칭을 이루고 있고 주택의 공간이 성(性)적 공간분화가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 상류층 주택은 몇 가지 관점에서 분류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안채의 원형을 기준으로 하는 방법과 사랑채와 다른 용도의 방들과의 관계로 분류하는 것을 언급하겠다. 안채의 원형을 기준으로 할 때, 민가형은 안동 양진당, 충효당, 예안이씨 종택, 강릉 선교장 경주최씨가옥, 구례운조루등이 있고 경기형으로는 안동 의성김씨 종택, 안동 임청각, 선교장, 월성 손동만씨가옥, 정읍 김동수씨 가옥, 관가정, 정재영씨 가옥등이 있다. 사랑채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할 때 분산형은 안동 의성김씨 종택, 선교장, 경주최씨가옥, 정읍 김동수씨 가옥, 의성 김동주씨가옥이 있고, 일체형에는 안동 양진당, 충효당, 예안이씨 종택, 임청각, 월성 손동만씨 가옥, 영천 정재영씨 가옥, 구례 운조루, 월성 향단 등이 있다.

b. 중류 주택

중류 주택은 중인 계급과 이들보다 한 계급 낮은 군교, 서리의 신분을 가진 자들의 주택을 말하는데 상류 주택보다는 격이 떨어지나 평면상의 구성이 이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기도 하는 반면 빈곤한 사람들의 주택은 서민 주택과 별 차이가 없다.

c. 서민 주택

서민 주택은 일반 평민들의 주택으로 농, 공, 상에 종사하고 조세와 군역의 의무를 지는 계층으로 서민들은 신분상으로나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자연히 주택의 모습도 중인이나 양반들의 주택보다 빈약하고 거의 변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 주택 중에서 가장 적고 초라하지만 우리 선조들의 땀과 애환이 깃든 곳이라 우리에게 가장 친밀감을 준다. 그리고 서민 주택의 주거형태는 지역적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며 그 지방의 자연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서민 주택의 원형은 어떤 지방의 민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형태이며, 이는 다시 소급하여 올라가면 1실 또는 2실의 원시 주택과 상동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민 주택은 지역적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북부(함경도)형, 서부(평안도)형, 중부형, 남부형, 제주형, 서울형 으로 나눌 수 있다.

또 형면 구성에 따라 분류하면 한 일자 홑집, 겹집, 양통집, 곱은자집으로 구분된다. 한국은 비교적 다양한 기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후와 기타 풍속적 요인으로 각기 다른 형면 구성을 하고 있다. 즉 각 지방마다 안방, 대청 부엌의 세 가지 특징있는 공간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가 그 지방의 평면을 결정하는 것이다. 지방별 평면 분류에 있어서 먼저 <북부형>은 부엌과 정주간, 그리고 네 개의 방들이 마치 전(田)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어 전자형이라고도 하며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이 형(形)의 특징은 부엌과 정주간 사이에 칸막이 벽이 없고 단지 부엌의 흙 바닥과 정주간의 온돌 바닥 차이로 구분되어 있다. 또한 정주간에 인접된 네 개의 온돌방들이 서로 그 벽을 공유하여 붙어 있는 겹집 구조를 이룸으로써 기후적으로 방한적 효과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전면은 남향이 되나 후면은 북향이 됨으로써 균등한 일조, 일사를 이루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 <서부형>은 평안도와 황해도 북부지방의 일부지방에 분포되어 있으며 부엌과 방, 방의 순서로 구성되어 일명 일자형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남부형과 동일한 형태지만 대청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이처럼 북부지방에 대청마루가 없어 대청의 발생요인과 사용요인을 생각할 때 기후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평면형은 원시시대 주거가 일실일주거에 의해 부엌과 방이 생기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이 평면이 가장 초기적 단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 중부형>은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일부의 중부지방에 분포된 것으로 평안도 지방형에 대청과 방이 衁자로 붙은 것이 다르다. 이것은 서울형처럼 衁자형이나 부엌과 안방이 남향하고 대청과 건너방이 꺾인 자리에 옴으로써 동서로 면하게 되어 일조, 일사에 유리하다.

< 서울형>은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 다수 분포되어 있는데, 서울이 조선시대 500년간 국도였던 만큼 중부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특색이 있는 평면이 형성되었으며 말기에 접어들면서는 전국 여러도시에 영향을 주어 하나의 도시형이라 해도 좋을 만큼 여러지역에 전파되었다. 이것은 衁자형으로 생겼으니 부엌이 꺾인 부분에 오고 대청과 건너방이 남향으로 앞쪽에 나오게 되며 부엌과 안방은 동서로 면하게 되어 중부형에서 남향에 면하던 바와는 다르다.

< 남부형>은 경상도, 전라도 일대에 분포된 것으로 부엌, 대청, 방이 일자로 구성되어 서부형과 일치하는 듯 하나 기후적 요인으로 대청이 첨가된 것이 특징이다.

< 제주형>은 제주도에만 나타나는 특색있는 평면형으로 중앙에 대청인 상방을 두고 좌우로 부모님의 방인 큰 구들과 자녀들의 방인 작은 구들을 두며 큰 구들 북쪽에 물품을 보관하는 고팡을 두고 이들이 겹집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엌인 정지는 일반적으로 작은 구들 앞쪽에 두는데 취사용 아궁이가 방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기후적 배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상방과 큰 구들 앞에는 낭간이라는 툇마루가 붙어 있다.

이와 같이 서민 주택의 경우는 기후조건에 따라 지역적 차이가 뚜렷하다는 것은 주택 평면 구성에서부터 외부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경제적 여건 때문에 최소한의 필요공간을 형성하되 가능한 그 기후에 맞도록 평면을 구성하고 배치함으로써 실내의 열 환경을 조절하려고 하였다. 겨울이 긴 함경도 지방에서의 전(田)자형의 평면을 취하여 방한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고 여름이 긴 남부지방은 일조, 일사, 통풍이 좋은 일자형의 평면을 사영하였으며 남부지방으로 올수록 마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온돌의 구조 및 형태도 북부지방으로 갈수록 열 효율이 높다.

평면 구성에 따른 분류를 하면 <홑집>은 맞걸이 구조인 도투마리집으로부터 전퇴 또는 전후퇴, 전후좌우 퇴집까지를 포괄하지만 간잡이 방식으로 볼 때 툇간을 제외한 간실이 한 일자 한 줄로 늘어선 집을 말한다. 분포지역은 함경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나타나며 주로 하층 농민의 집으로 이용된다.

< 겹집>은 구조적으로 전후퇴와 3평주방식이 결구되며 간잡이 방식도 복판에 대청을 두고 양쪽에 구들을 배치하되 간살이 홑으로 또는 겹으로 배열하는 집이다. 다시 말해서 기둥의 가로줄이 양통집이나 혹은 홑집과는 달리 한줄로 놓이지 않고 복판에 오거나 혹은 보기둥 자리에 놓이거나 함에 따라 간살이 홑으로 배치되다가 한쪽 끝에서 앞 되 2줄로 배치하는 방식인데 제주도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삼남지방에도 다수 분포한다.

< 양통집>은 구조상으로 두줄백이집이라고도 하며(중부지방) 기둥을 3열로 배열하고 간살을 2줄로 배치한 집을 말하며 간살이 3겹으로 간잡이 되는 사방집(세겹집)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이 겹집과 다른 것은 전후퇴를 제외하고 기둥을 정확히 세줄로 배치한다는 점이다. 분포지역은 함경도를 중심으로 태백산맥을 따라 남하하는 동해안 지대와 안동지역 및 옹진에서부터 서해안지대에도 나타나고 남해안에서도 드물게 나타난다. 이와같이 분포지역이 넓다는 것은 어느 한 지역의 특수한 간잡이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며, 분포지역은 서울에서 먼 변방지역으로서 해안지대나 산간지대등 오랫동안 사회 경제적 변화가 적었던 지역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곱은자집은 사회 경제적 발전이 현저했던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에서 차령산맥 이북까지의 중서부 지방 및 경북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이것의 간잡이 방식은 양통집이나 겹집과는 달리 홑집으로 구성되는 것이 특징인데 지역에 따라서는 그 지방의 겹집, 양통집의 간잡이 방식이 혼용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남지방 양반집의 대표적인 형태인 뜰집인데 이것은 이 지역의 특수한 간잡이인 양통형식과 서울의 간잡이 방식이 곱은자집이 혼용된 것으로 상류계층의 집을 모방하는 양반집의 일반적 특색인데, 특히 ꁁ 자형 뜰집은 주자학이 이기론에 따른 미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면서 이루어지는 공간개념이다. 이것은 불교의 선종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는 미학으로 14세기 이후 사찰에 일반화되며 민간에서는 15~16세기 이후에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한다.

다음으로 서민 주택의 방위와 배치 형식을 보면 내륙지방이나 도서지방에서는 좌향(묏자리나 집터 같은 것의 위치의 등진 방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방향)이 절대 방향의 개념에서 동일남일서향에 걸친, 즉 북향을 끼지 않는데 산간지방에서는 북향도 나타난다. 이것은 산간지방은 취락의 입지 조건상 많은 제약을 받음을 알 수 있다. 즉 전저후고의 지형을 찾아 등고선과 평행하는 자세에 일치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고, 또 배산임수의 원칙에 입각하여 생활하기에 편리한 좌향을 택한 인상을 주고 있다.

서민 주택의 각 동(棟)의 배치 방식을 보면 자연환경에 따른 대응, 생활내용, 사생활의 유지, 경제적 규모 및 필요한 건물의 동수의 영향을 받음을 볼 수 있다. 배치 방식은 주자학의 미학에 따라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를 앞뒤로 놓고 양쪽에 헛간 등의 곁채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치 형태는 蝡자, 튼衁자, 衁자, 二자, 튼ꁁ자, 튼鑁자 등 다양하지만 대부분 본채와 약간 떨어져 직각방향으로 별동배치된 튼衁자형 배치가 주종을 이룬다. 이는 소규모 민가에서 간단한 수장공간 및 가축사로 부속사가 사용되었으며 마당을 돌러싸는 공간과 접근과 관리가 용이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도서, 내륙, 산간등지에서 나타나는 배치상의 차이점은 산간과 도서지장은 본채와 부속채가 적고 대지면적도 좁음에 비하여 내륙지방은 본채와 부속채가 크고 중심으로 마당의 측면이나 맞은편에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으며 대부분 안채가 정면에서 그대로 보이지 않게 시각적 굴절효과를 노리고 있다.

또, 마을 안길에서 서로 마주치는 가옥의 대문은 서로 마주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데 이는 마을 안길의 한 지점에서 내부동선이 맞붙어 교차되는 혼란을 방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옥의 독립성과 기밀성의 유지에 적절히 대처하도록 고려되어 있다.

이보다 고식이라고 여겨지는 배치방법은 영동이나 안동 지역의 양통집에서 볼 수 있는데 앞마당은 외부에 개방된 채 바깥마당과 구분이 없고 다만 집 뒤의 뒤뜰 공간만 독립적으로 만들어진다. 이것은 대단히 오래된 방법으로 담장에 의해서만 구획하는 공간으로서는 가장 먼저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전에는 공간 중심에 집을 짓고 이것만으로 공간을 구성하였으나 나중에 담장으로 공간을 둘러 내부공간을 만드는 방식이 일반화되면서 가장 먼저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살림집은 기능에 따라 각기 따로 지어지는데 이것은 집의 중심체인 몸체를 중심으로 각자 빙 둘러쌌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런 방식은 청암리 사지의 절터 배치에 나타난다.) 뒤뜰만을 담장으로 둘러쳐서 설정하는 방식은 안동, 서해안의 양통집, 남해안의 겹집, 제주도의 주택에서 볼 수 있는데 양반집의 규모를 갖춘 집에서도 다른 공간과 구획되어 설정된다. 그러나 실제 조사에 의하면 20세기 이전의 가난한 민가에서는 뒤뜰조차 설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여유가 있는 민가에서나 이를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서민 주택의 재료는 한국의 전래적인 주택에서 대부분이 그렇듯 주택을 축조하는데 사용되는 재료는 그 지방 자연환경의 요건에 따라 구득이 용이한 재료가 이용되었다. 거의 대부분이 목조의 심벽구조인 서민 주택은 그 지방 산간에서 목재를 구했을 것이고 다만 중상류층 주택에 가까운 규모가 큰 주택을 경우에는 타지방에서 목재를 구했으며 목수까지 초청하여 건축하였다. 그러나 산간지방에서 목재가 많기 때문에 주택건축에 있어서 사용되는 재료가 더 크고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내륙지방이 우수한 것이 흥미롭다. 이것은 주변에서 생산된 얻기가 쉬운 재료를 사용한 것보다는 거주자들의 생활능력에 크게 좌우됨을 알 수 있다.

노비 주택

노비 계급의 주택으로 노비는 양반들이 주택 안에 거주시키는 솔거노비와 집 밖에 두는 외거노비가 있는데 외거노비의 집이 바로 가람집이다. 이 가람집은 서민 주택의 빈한한 주택과 같은 모습이다.

3. 결 론

조선시대 주택은 신분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고 또 지역에 따라서도 비교적 뚜렷한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상류주택은 인문 사회적 요건이 주택평면 및 배치결정상의 주요 요인이나 거기에 적절한 구조물을 설치하였고 서민 주택은 경제적 여건 때문에 평면구성 및 배치단계부터 자연조건을 고려하여 주택을 건축하였다. 위에서 조선시대 주거 건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구조적 분류

구조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도리의 수에 따라 3량, 5량가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도리의 형태와 장식에 따라 굴도리집, 민도리집, 납도리집, 소로수장 구조집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평면의 형태에 따라 홑집(외통집)과 겹집(양토집)으로 구분한다.

이외에도 지붕이나 벽의 형태나 재료에 따라 기와집, 너와집, 굴피집, 초가집, 띠집, 귀틀집, 까치구멍집, 토담집 등으로 구분한다.

굴도리집 : 서까래를 받는 도리의 단면이 원형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주로 상류주택에서 쓰인다.

납도리집 : 도리의 단면을 사각형으로 꾸민 집으로 중, 하류의 주택이나 묘사, 사찰 전각의 부속건물에 주로 쓰인다.

소로수장 구조집 : 도리나 장혀의 밑에 소로를 받쳐서 장식한 집으로 주로, 중 남부지방의 상류주택에 사용되었으나 조선 말기에는 서울과 중부지방의 중류주택의 장식용으로 유행하였다.

너와집 : 나무토막을 쪼개어 만든 널빤지로 지붕을 이은 집으로 너새집 또는 널기와집이라고도 한다.

굴피집 : 나무껍질로 지붕을 덮은 집을 말한다.

초가집 : 지붕을 볏짚 또는 억새 등으로 이은 집을 말한다.

띠 집 : 지붕을 띠(부들, 억새, 갈대 등) 로 이은 집으로 선사시대의 수혈주거나 고대 주거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귀틀집 : 통나무 또는 대나무를 가로 포개어 쌓아올려서 벽을 꾸민 집으로 모서리의 교차부는 서로 아개 위를 따서 맞물려 결구한다.

까치구멍집 : 토담집이나 귀틀집의 용마루 좌우 끝쪽 작은 합각머리에 구멍을 내어 환기용으로 사용한 집을 말한다.

토담집 : 벽을 흙벽돌로 쌓거나 거푸집속에 이긴 흙을 다져넣어 말리고 그 위에 지붕을 덮어 지은 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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