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임 / 유금강산기(1595)

2017. 6. 6. 13:44옛산행기

노경임 / 유금강산기(1595)

금강산(金剛山)이 세상에 유명해진 지 오래되었다. 그 이름은 여섯 가지가 있으니 금강산(金剛山), 풍악산(楓嶽山), 개골산(皆骨山), 열반산(涅槃山), 기달산(怾怛山), 중향산(衆香山)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금강산의 기이하고 빼어남을 매우 좋아하여 한 번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을미년(1595년) 여름 시강원(侍講院)의 사서(司書)로서 강원도순문어사(江原道巡撫御史)로 나갔으나 원습(原隰ㆍ높고 마른 땅과 낮고 젖은 땅을 함께 이르는 말)을 내달리느라 가서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9월 16일에서야 금성현(金城縣)에서 출발하였다. 여기에서 산 아래까지는 이틀 길이라는 말을 듣고서 창도역(昌道驛)에 가서 가벼운 행장을 꾸려 통구현(通口縣)으로 향하였다. 땅거미가 지자 농가에 투숙하였다. 길가에서, 초록빛 계곡물 푸른 산이 구비 돌며 무성한 것과, 기이한 꽃 특이한 나무들이 들쭉날쭉하며 은은하게 보이는 것을 많이 보았다. 보기만 하면 마음이 쏠려서 문득 즐거웠다. 이 때 찬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반은 떨어졌다.

다음날 새벽 서둘러 밥을 먹고 서리를 맞으며 채찍을 잡고서 양 골짜기를 따라갔다. 이때 허물어진 가게 옆 물속에 바위가 의연한 것을 보았는데 진세(塵世)의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봉우리 험준한 곳은 소나무들이 빼어나고 울창하여 하늘의 해를 볼 수 없기도 했다. 말을 버리고 미투리를 신고서 천천히 걸어갔다. 하인들로 하여금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받들게 하면서 고생스럽게 그 꼭대기에 도달하니 형세가 자못 시원스러웠다. 뒤따르던 가게 노인에게 물어보니 이곳이 단발령(斷髮嶺)이라고 하였다. 옛날 어떤 사람이 이곳에 도착하여 금강산을 바라보고서 머리를 자르고 세속의 인연을 끊었던 까닭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라 한다. 숲 속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니 봉우리들이 춤추며 뛰는 듯하고 옥과 눈처럼 영롱하다. 이것이 바로 금강산이다.


나무 아래에 쉬면서 정신과 기운이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또 일어나 걸어갔다. 종일토록 산수 사이에서 오르고 또는 내려갔다가 어떤 시냇가에 도착했다. 관인(官人) 두어 명이 꿩과 물고기, 술, 밥을 장만하여 올리는데, 회양부(淮陽府)에서 보낸 것이었다. 내가 어제 오후 행장을 꾸릴 때 가볍게 했었다. (내가) 외지인이라 오늘의 유람을 알지 못하여 몇 날 밤을 지내지는 않을 것이라 여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몰랐으나) 회양부사는 이미 이 사실을 알았으니, 심하구나! 세속의 줄을 벗어나기 어려움이여. 우스울 뿐이다. 녹음 속에 앉아 한참을 머문 후 다시 출발하여 해질 무렵에 비로소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렀다. 장안사는 산 아래에 있는데 난리를 만나기 전 화재로 다 타버려서 동쪽 회랑 몇 간만 남아 있다. 승려들이 굶주림과 병으로 고생하다가 거의 모두 죽었고 남아 있는 서너 승려들도 모두 초췌하여 귀신의 형상이었다. 매우 불쌍했다. 계곡물이 절 북쪽으로부터 세차게 흘러 절 앞에서 돌아 내려가는데, 맑고 깨끗하며 검푸르고 차갑다. 시끄럽게 부딪치며 흘러 사람의 귀를 시끄럽고 요란하게 하였다. 봉우리는 절 왼쪽에서 반석(盤石)을 이루고 뜰에 임하여 우뚝 솟아 있다. 소나무와 삼나무 암석으로 이루어진 골짜기에 붉고 푸른빛이 가려질 듯 비치어 사람의 눈에 빛나니 옛날에 이른바 선산(仙山)이 사람의 이목을 현란하게 한다는 것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늙은 승려를 불러 물어보니 가장 아래에 솟아 있는 것은 장경봉(長鏡峯)이라고 하였다. 바위 모서리는 반쯤 가려진 채 초목이 울창하였다.


장경봉 위에서 조금 내려온 곳은 관음봉(觀音峯)이다. 관음봉 위에 또 하나의 단아하고 묵직하며 기이하고 우뚝한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단정한 사람이 손을 맞잡고 서 있는 것처럼 의젓하다. 지장봉(地藏峯)이다. 관음봉과 지장봉 사이는 깊고 기이하며 비밀스러운 골짜기가 있다. 맑은 계곡물이 성난 듯이 내려가고 암석은 어지럽게 쌓여 있다. 혹은 멈추어 못이 되었고 더러는 흩어져 떨어지는 폭포가 되었으니, 곧 백천동(百川洞)이다. 백천동 위에 가장 높게 우뚝 크게 서 있는 봉우리는 미타봉(彌陀峯)이다. 이 때 서산의 해는 이미 지고 동쪽에서 달이 막 떴다. 밤이슬이 서늘하고 서리꽃이 하늘에 가득하였으며, 기이한 짐승들이 때때로 서로 부르는 것 같았다. 홀로 선방(禪房)에 누우니 정신이 서늘하여 표연(飄然)히 속세를 버리고 벗어나려는 생각이 났다. 옛 사람이 이른바 세상 얽매임 털어 버리고, 벼슬을 내 놓고 깊은 산에 들어가서, 사슴을 벗 삼고 구름과 안개를 짝 삼아 종신토록 돌아가기를 잊는다는 것이 대저 어찌 그저 한 말이겠는가? 다음날 일찍 밥을 먹고 장차 골짜기로 들어가려는데 승려 몇 명이 작은 가마를 가져왔다. 그 모양새가 간략하고 공을 덜 들여 만든 것이었다. 마침내 가마에 올라 승려들에게 길을 물으면서, 기이하고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문득 쉬었다. 수십 걸음을 걸어가다 맑고 깊은 시내를 만났다. 그 위에는 넓은 바위가 있었다. 땅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산기슭으로 향하였다. 봉우리가 높이 솟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것이 있었으니 삼일암봉(三日庵峯)이다. 그 아래에 삼일암(三日庵)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봉우리 옆에는 안양암(安養庵)도 있다. 암자 북쪽 밖에 큰 성이 있고 안에는 작은 성이 있는데, 깎아지른 언덕과 절벽에 의지하여 매우 험준하였다. 아마 고려 말에 전란을 피하던 곳인 듯하다. 두어 걸음쯤에 못이 있었는데 각이 졌으면서도 길다. 깊이는 수십 척이다. 명연(鳴淵)이다. 또 두어 걸음쯤에는 맑은 물결이 흩어지는데 위에는 반석이 있어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다. 길 왼쪽에는 작은 암자가 있다. 청연암(靑蓮庵)이다. 길 오른쪽에의 작은 암자는 신림암(神林庵)이다.


수십 걸음을 더 가서 표훈사(表訓寺)에 들어갔다. 문 안에는 비석이 있는데 원나라 시절에 세운 것으로 글자의 획이 어제처럼 뚜렷하며 매우 정밀하게 만들었다. 당시 부처에게 아첨한 것이 심했음을 알 만하다. 청연과 신림, 표훈이라는 이름은 모두 절을 창건한 승려의 이름으로, 그 자취를 기억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절 북쪽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나는 금광봉(金光峯)이며 그 위에 금광대(金光臺)가 있다. 다른 하나는 오인봉(五人峯)으로, 옛날 다섯 명의 신선들이 소요하면서 유람하였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봉우리 아래에는 요학대(邀鶴臺)가 있다. 봄 여름 즈음에 청학이 항상 그 옆에서 춤을 추거나 혹은 울면서 서로 화답하는데, 그 소리가 몇 리가 되는 곳까지 들리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두 봉우리 사이로 나와 동북쪽으로 대여섯 걸음 가면 골짜기가 있는데 그윽하고도 크다. 이름하여 만폭동(萬瀑洞)이다. 만 줄기는 원통암(圓通庵)에서 나오고 다른 한 줄기는 원적동(圓寂洞)에서 나와서 합해져 이 골짜기가 되었다. 동구(洞口)에는 반석이 있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회양태수(淮陽太守)가 되었을 때 취해서 ‘동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새기게 하였는데 마치 용사(龍蛇)가 꿈틀대는 듯한 형상이었다. 또한 하나의 훌륭한 자취이다. 반석 위 벼랑이 잘린 곳에는 선인들이 써 놓은 이름들이 많다. 나 역시 따르는 사람에게 명하여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으니 남겨 두어 나중에 보려 한 것이다. 골짜기 왼쪽에 높은 봉우리 셋이 있는데, 삼향로봉(三香爐峯)이다. 봉우리 오른쪽에는 보덕굴(普德窟)이 있는데 구름에 반쯤 걸려 있는 형상이라 바라보면 선궁(仙宮)처럼 아득하여 올라갈 수 없었다. 두어 걸음 되는 거리에도 반석이 있는데 길이는 수십 길이 될 만하며 넓이는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정도이다. 계곡물이 그 옆을 감싸듯 흘러 가고 동쪽 옆에 조그마한 웅덩이가 있다. 승려에게 물어보니, 옛날 관음보살이 머리카락을 씻던 곳이라 하여 명건암(名巾巖)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 말이 요망한 것이 가소로웠다. 그 아래에도 못이 있는데 관음담(觀音潭)이다.


또 수십 걸음 가니 반석이 더욱 기이하고 깨끗하였으며 색깔이 옥처럼 하얗다. 아래에는 흑룡담(黑龍潭)이 있고 위에는 10여 척 되는 폭포가 있었다. 그 청절(淸節)하고 신교(新巧)한 것은 여러 골짜기 중 으뜸이었다. 좌우에 깎아지른 절벽이 곧게 솟았는데 높이가 몇 천 척인지 알 수 없었으며, 정상에 이르러서는 나뉘어 봉우리가 되었다. 위로 하늘의 해를 보니 우물 안에 앉은 것 같았다. 폭포 서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높고 깊어 형용할 수 없었다. 이 골짜기의 동쪽은 바로 유점(楡店)이라고 한다. 그 위에는 마하연암(摩訶衍庵) 등의 암자가 있었다. 폭포 아래에 이르러 바야흐로 절벽을 따라 보덕굴(普德窟)에 올라가려고 승려들로 하여금 잡고 당기게 하여 이르러 보니 승사(僧舍)는 겨우 너댓 칸이었다. 한 면은 바위에 걸어놓아 중간을 쇠사슬로 묶어서 견고하게 하였으며, 한 면은 구리기둥으로 빈 곳을 매꾸어 땅으로 삼았으니 그 노고를 알 수 있었다. 벽 사이에는 유람온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적혀 있었다. 굴의 이름을 보덕(普德)이라고 한 것은 또한 청연, 표훈의 경우와 같다. 여기에서 올라가니 온 산의 경치를 다할 수 있었는데, 난리가 일어난 후로는 오는 사람이 끊겨서 초목이 어지럽게 자라 길을 덮었다고 한다. 안타깝다. 잠시 쉬었는데 승려들이, “이미 온 산의 골짜기와 운하(雲霞)를 보셨고 날도 늦었으니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하기에 마침내 가마를 타고 표훈사로 향하였다. 점심을 먹고 잠시 졸고나서 정신과 기운을 차린 후 덩쿨을 잡고 장차 정양사(正陽寺)로 향하려 하였다. 산허리에 세 개의 암자가 있는데, 수선암(修善庵)과 기기암(奇奇庵)과 삼장암(三藏庵)이다. 정양사에 오르고 나니 절이 토산 마루에 자리잡아 온 산의 진면목을 정면으로 대하고 있었다. 절에 이르기 전에 진헐대(眞歇臺)가 있고 진헐대 위에는 집 두어 칸이 있었다. 노승이 나와서 말하기를, “동남쪽 산기슭 높은 봉우리 위에 대(臺)가 있는데, 천일대(天逸臺)라고 합니다. 양영공(楊令公)이 쌓은 것인데 형세가 아득하니 먼 곳까지 볼 수 있으니 가서 구경하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말에 응하여 천일대에 이르러 보니 과연 상쾌하고 고매(高邁)하며 높이 솟아 우뚝하였다. 시험삼아 온 산을 바라보니, 석양이 반쯤 비추자 연하(煙霞)가 잠깐 사이에 걷혀서, 봉우리들은 드러났다. 능각(稜角)은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운데 원숭이는 어지럽고 울고 단풍나무는 섞여 있었다. 그늘은 은근히 비추어 으스름하고 방불(髣髴)하여 의연(依然)히 한 폭의 그림 병풍이었다. 하물며 골짜기는 그윽하고 깊으며 계곡물은 분방(奔放)하여, 우레처럼 우짖고 금슬(琴瑟)처럼 울렸다. 천태만상이 모두 눈 아래로 들어오니 참으로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노승을 시켜 봉우리들을 일일이 지적하게 하니, 큰 성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은 바로 망고봉(望高峯)이었다.


옛날 산마루를 유람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 봉우리부터 올라갔다. 망고봉 위의 새 형상 같은 것은 석응봉(石鷹峯)이다. 석응봉 위에 우뚝 솟은 큰 봉우리는 바로 철망봉(鐵網峯)이다. 그 아래 봉우리는 승상봉(僧牀峯)이다. 옛날 승상암(僧牀庵)이 그 옆에 있었으므로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또한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그 이름이 국망봉(國望峯)이다. 국망봉 동쪽에 그것보다 험하고 가파르며 높고 큰 것이 있는데 그 이름이 비로봉(毘盧峯)이니 바로 금강산의 제일봉(第一峯)이다. 이 봉우리에 오르면 동해의 넓고 넓음과 섬들의 아스라함이 바라다 보인다. 북쪽으로는 함경도 고을들과 야인(野人)들의 소혈(巢穴)로 통하며, 남쪽으로는 영남의 산천과 양호(兩湖ㆍ호남과 호서 지방)의 성곽이 바라다 보인다. 서쪽으로는 경도(京都)의 장엄하고 수려함과 평안도·황해도의 구역까지 다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나머지 천만 봉우리들은 매우 기괴하고 망망(茫茫)하여 큰 것과 작은 것, 우러러보는 것과 굽어보는 것, 달리는 것과 쫓는 것, 읍하는 것과 절하는 것, 펴진 것과 굽은 것, 오는 것과 가는 것, 맞이하는 것과 보내는 것, 춤추는 것과 뛰는 것, 놀라것 같고 성낸 것 같은 것, 기쁜 것 같고 슬픈 것 같은 것, 일어난 것 같고 앉은 것 같은 것, 추격하는 것 같고 도망하는 것 같은 것, 떨어진 것 같고 붙은 듯한 것 같은 것, 선 것 같고 누은 것 같은 것, 혹은 말을 타고 가는 것 같고 혹은 걸어가는 것 같은 것, 혹은 옷을 걸치는 것 같고 혹은 관을 쓰는 것 같은 것, 혹은 달려 내려가는 것 같고 혹은 달려 올라가는 것 같은 것, 혹은 산승(山僧) 같고 혹은 늙은 신선 같은 것, 혹은 무리지은 양과 같고 혹은 성난 소와 같은 것, 혹은 달리는 개 같고 혹은 싸우는 날다람쥐 같은 것, 혹은 준마 같고 혹은 사나운 이리 같은 것, 혹은 서려있는 용 같고 혹은 웅크린 범 같은 것, 혹은 나르는 봉황 같고 혹은 멈춘 난새 같은 것 등 그 모습이 매우 여럿이라 이루다 기록할 수 없다. 내가 비록 제일봉(第一峯)에 가지는 못하였지만 이 대(臺)에 앉으니 이미 산의 진면목을 다 볼 수 있었다. 비록 절세의 화공이 취한 듯한 신필(神筆)로 선산(仙山)의 기이한 경계를 환상적으로 그려내어 그 아름다움과 교묘함을 다한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으랴. 이 산의 명성이 천하에 퍼진 것은 마땅하구나. 중국 사람의 글에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보고 싶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구절이 있으며, 임진년 난리 때에 왜인(倭人)이 승려를 만나 ‘금강산’이라는 세 글자를 써 준 일로 이 산의 이름이 중원과 오랑캐에게 알려졌으니 또한 분명하지 않은가? 아! 천하에 유명한 것 중에 그 실상에 부합하는 것이 드물거늘 오직 이 산만이 실상이 그 명성에 웃돈다. 세상에 도(道)를 지닌 사람 역시 실상이 그 명성을 웃돌기를 이 산과 같이 한다면 그 명성은 커지기를 구하지 않아도 커지고 더 널리 이름나기를 구하지 않아도 더욱 멀리 될 것이다. 그리하여 멀리는 이 넓은 세상과 오랑캐 밖에까지, 크게는 만세토록 또는 천지가 다 하도록까지 무궁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을 보는 자 어찌 한갓 바라보고 유람하는 데에만 그치랴. 반드시 마음 속에서 감발(感發)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출처 : 敬菴集)


◆노경임(盧景任ㆍ1569~1620)은 자는 홍중(弘仲), 호는 경암(敬菴), 본관은 안강(安康)으로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선조 24년(159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해 교리(校理)ㆍ지평(持平)을 지냈으며, 순안어사(巡按御史)로 강원도에 내려가 삼척부사 홍인걸(洪仁傑)의 비행을 적발ㆍ처결하였다. 그 후 다시 지평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고, 체찰사 이원익(李元翼) 밑에서 신임을 얻었다. 이에 앞서 정인홍(鄭仁弘)의 인품에 관하여 간사한 인물이라고 장현광에게 보고한 사실이 뒤에 알려져,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무고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뒤로는 낙동강변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