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서예이론] 중국의 서예 外

2017. 2. 23. 14:06서예일반



       작성일 : 13-08-20 11:32

중국의 서예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250  

        

중국의 서예 
 
 
   중국의 연원(淵源)은 문자의 발명과 동시에 있었을 것이나 원초(原初)의 것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다만 BC 14∼BC 12세기의 것인 은대(殷代)의 복문(卜文)을 새긴 갑골문(甲骨文)이 있고, 또 은(殷)시대의 금문(金文), 이른바 종정문(鐘鼎文) 즉 제기(祭器) ·무기(武器) ·악기(樂器) 기타에 새긴 명문(銘文)이 있어 알 수가 있다. 앞의 것은 귀갑(龜甲) ·수골(獸骨)에 칼로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직선(直線)과 절선(折線)이 많다. 뒤의 것은 틀[鑄型]에 글자를 써서 새기고 이 틀에 금속을 녹여 부어서 주조(鑄造)한 것이므로 필사체(筆寫體)이다.

   이것이 주(周)나라에 계승되었다. 주나라는 서주(西周:BC 1122∼BC 770)와 동주(東周:BC 770∼BC 222)로 구분하고, 동주는 또 춘추시대(BC 770∼BC 481)와 전국시대(BC 480∼BC 222)로 구분한다. 서주시대는 전대의 것을 지켜왔으나,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는 자체(字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지방적 특색을 갖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석문(石文)으로 석고문(石鼓文)이 있으며, 북처럼 만든 10개의 돌에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 글 자체를 주문(文)이라고 하며, 매우 정정(整正)하며 전아한 풍취가 있다. 진통일(秦統一) 이전 즉, 선진(先秦) 시대의 글자를 고문(古文) · 고주(古) ·대전(大篆) 등 여러 명칭으로 부르고 있으나 고전 ·대전으로 부르면 된다. 석고문의 제작시대에 관하여는 이설(異說)이 많아 단정하기 어려우나 출토(出土)된 지점으로 보아 진(秦)나라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BC 221)한 후 그 이전의 복잡한 문자를 통일 ·간이화(簡易化)하기 위하여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었으며, 진대에 이루어졌다고 하여 진전(秦篆)이라고 하며 그 이전의 복잡한 대전에 비하여 소전(小篆)이라고도 한다.

   전한시대에는 진(秦)나라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직선(直線) 위주의 예(隷)체가 이루어져 상용문자로서 사용되었고 점차 발전하여 말기에는 파책(波)이 생기고 후한에는 완성된 예서의 많은 비(碑)를 남겨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파세(波勢)가 없는 전한의 예를 고예(古隸)라 하고 파세가 있는 후한의 것을 팔분(八分)이라고도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천비(張遷碑) ·예기비(禮器碑) ·조전비(曹全碑) ·공우비(孔宇碑) 등이 있다. 이밖에 간쑤성[甘肅省] 등 서방지역에서 육필(肉筆)의 목간(木簡) ·죽간(竹簡) 등이 많이 출토되어 예(隸) · 장초(章草) 등이 상용(常用)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초서의 명가인 장지(張芝)는 정사(正史)에 이름을 남긴 최초의 인물이었다. 후한에 와서 채륜(蔡倫)에 의하여 종이가 발명되어(105) 문자의 표현이 자유롭게 된 것은 문화사상 큰 변혁이었고 서예 발달을 크게 촉진하였다.

   위 ·진시대는 전대를 계승한 예서해서에 볼 만한 것이 있으나 그 후의 해서로 옮아가는 과도기였다. 남북조시대에 진(晉)나라가 강남으로 천도(遷都)하여 동진(東晉)이 되고 강북은 혼란이 계속되다가 120년 뒤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었다. 남북조시대는 문화도 각각 특색 있는 것으로 형성되었으며 서예에 있어서도 북비남첩(北碑南帖)이라 하여 북의 소박하고 힘찬 해서와 남의 전아 우미한 해(楷) · 행(行) ·초서(草書)가 특색이 있다. 동진시대에는 고래로 유명한 서성(書聖)이라 칭송되는 왕희지가 나와 귀족적이고 향기 높은 해서 ·행서 ·초서 각체를 완성하여 예술로서 서예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이는 전대에서는 볼 수 없는 참신하고 완성된 서풍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법의 전형으로 거의 절대적인 것이 되어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악의론(樂毅論)》 《십칠첩(十七帖)》 《난정서(蘭亭序)》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등이 있다. 강남의 귀족적이고 전아한 서풍에 비하여 강북의 북위는 강건한 서풍이고 석문(石文)으로 많이 남아 있다.

   수시대는 남북의 서풍이 혼연(渾然) 융화되어 세련된 해서가 이루어져 당나라로 옮아가는 교량이 되었다. 당시대는 초당(初唐) 삼대가(三大家)인 구양 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저수량(遂良)이 나와 각각 특색 있는 해서를 대성하여 해서의 규범이 되고 있어 이 시대는 서예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구양 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화도사비(化度寺碑)》, 우세남의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저수량의 《맹법사비(孟法師碑)》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등이 있다. 그 후 손과정(孫過庭)이 나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초서의 규범으로 삼는 서보(書譜)의 작품을 남겼다.

   중당시대는 왕희지 이후의 제일인자로 치는 안진경(顔眞卿)이 나와 새로운 서풍을 개척하여 전의(篆意) 섞인 해서를 썼으며, 이를 노공체(魯公體)라 한다. 《근례비(勤禮碑)》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 《제질고(祭姪稿)》 《쟁좌위첩(爭坐位帖)》 《제백부고(祭伯父稿)》 등의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당말(唐末)에는 유공권(柳公權) ·배휴(裴休) 등이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송나라 초기 100년 동안에는 복고주의가 일어났으나 왕희지풍이 흠모되어 태종 순화(淳化) 3년에 칙명으로 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북송(北宋) 후기에는 채양(蔡襄)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미불(米) 등 4대가가 나와 종래의 무기력한 서풍에서 벗어나 주관주의 ·개성주의 강한 작품들이 나왔다.

원시대에는 조맹부(趙孟: 松雪)가 나와 복고주의를 표방하여 왕희지의 글씨를 조종(祖宗)으로 하는 전아 우미하면서 격조 높은 서풍이 풍미(風靡)하였으며 고려 말 이후 한국 서예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이 시대에는 명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축윤명(祝允明) ·문징명(文徵明) ·동기창(董其昌) 등이 대표 작가들이며 말기에는 자유분방하고 표현에 개성미가 강한 서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서위(徐渭) ·황도주(黃道周) ·예원로(倪元) ·장서도(張瑞圖) ·왕탁(王鐸) ·부산(傅山) 등이 있다. 이들은 대폭에 행 ·초서로서 리드미컬하고 정열이 약동하는 듯한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겨 후세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청조 강희제(康熙帝)가 동기창을 좋아하였으므로 그의 서풍이 널리 퍼졌다. 일면 개성이 강한 서가들인 정보(鄭) ·김농(金農) ·정섭(鄭燮) 등이 있지만 대체로 법첩을 주로 하는 첩학파(帖學派)가 많았다. 유용(劉鏞) ·양동서(梁同書) ·왕문치(王文治) ·성친왕(成親王) 등이 그러하며 금석학의 영향으로 전예(篆隸)가 유행하였던 시기이다. 특히 등석여(鄧石如)는 전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전무후무한 탁월한 서가였다. 후기에 들어 완원(阮元)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남첩북비론(南帖北碑論)을 제창하였다. 그 요지는 한 ·위(漢魏) 이래에 서예의 정통은 번각을 거듭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은 법첩으로 인하여 쇠잔하고 오히려 북위 이후의 비각(碑刻)에서 정통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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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20 11:32

서예의 의의
 글쓴이 : 학정서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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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藝의 意義 
 

   서예는 중국문화권 안에 있는 여러 나라에서 특유의 예술이었으며, 중국에서 서예는 독립된 훌륭한 예술일 뿐만 아니라 문학·회화와 더불어, 또는 그들 예술과 서로 융합하면서 중국문화사상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왔다. 이것은 한자가 서양의 알파벳과 달리 원래 그림문자에서 발달하였다는 한자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물론 한자는 그림문자 그것은 아니다. 또 한자 가운데는 표음(表音)의 성질을 가진 문자가 많다. 그러나 원래 한자는 그림문자를 대담하게 추상화하면서 그러한 추상화된 기본문자를 여섯 방법에 의하여 조립한 것이다.

중국 상고 때 한자 형성의 과정에서 고도의 미적 직관과 구성상의 고심(苦心)과 미적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시각예술로서 심미적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문자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일면 민족성이 반영되어 각각 특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 세종 때 한글이 제정된 이후 한글 서예가 발달하였으며, 조선 말엽에는 궁체(宮體)라는 서체가 이루어졌다. 궁체는 한자계가 아니므로 한자 필법이 원용(援用)되기는 하나 문자 구조상의 단순성으로 인하여 발달에 한계가 있다.

일본에서는 '가나'라 하여 한자에서 탈화(脫化)된 문자가 생겼고 또 '변체(變體)가나'라 하여 한자의 초서(草書)를 본떠 독특하게 발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는 전위서도(前衛書道) 또는 묵상(墨象)이라 하여 문자성이 없는 서예를 주장하는 일파가 일어났으나 문자성을 떠나서 서예가 성립한다는 것은 서예 본래의 성질(문자의 書寫)로 보아 긍정할 수 없다.






작성일 : 13-08-20 11:32

서예의 서체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163  

서예의 서체
 
 
 
   서예는 광의로는 세계 각국에서 쓰이는 글씨의 표현 형식을 말하나 보통 한자 및 한글의 전(篆) ·예(隷) ·해(楷) ·행(行) ·초(草) 등의 형태를 말한다. 글씨 비슷한 것이 나타난 것은 중국의 황하 문명기로 황제(黃帝) 시대의 사관(史官)이 새나 나뭇가지 등과 닮은 글자를 만든 것이 시초라고 하나 이것은 글자라기보다 부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후 은(殷)시대에 은문(殷文:갑골문이라고도 하며 거북의 등뼈나 짐승의 뼈에 예리한 기구로 새긴 글자)과 주(周)시대에 주문(周文)이 나타나 글자다운 체재(體裁)가 생겼다. 종정고문(鐘鼎古文)이라고도 부르며 종(鐘)이나 세발솥 등에 붓으로 써서 파낸 것이었다. 다시 동주대(東周代)에는 돌에 새겨진 석고문(石鼓文)이 나타나지만 선왕(宣王)시대에 사주(史)가 만든 대전(大篆)이란 자서(字書)에 이 글자의 형식이 사용되었으므로 대전 또는 주문(文)이라고 불린다.

이 대전을 필사(筆寫)하기 편리하게 점획(點劃)을 단정한 모양으로 한 것이 소전(小篆:篆書)으로 진(秦)나라의 이사가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이어서 이 시대에 진시황제에게 죄를 지은 정막(程邈)이 옥중에서 대전 ·소전을 다시 간략화한 글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예서(隷書:古隷)로 여기에서 서체는 일단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한의 초기에는 유덕승(劉德昇)에 의해 행서(行書)가 만들어졌고, 후한 말기에는 해서(楷書)도 생겼으며, 이 해서 ·행서 ·초서의 3체가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기본적인 서체가 되었다.





작성일 : 13-08-20 11:31

중국 문자는 어떻게?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184  

        


중국 문자는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중국 문자의 발생에 대하여 역사상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귀납적으로 말하면 기호나 도화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주역(周易)>계사에 보면 상고시대에는 줄을 묶어 다스렸다고 하였다. 따라서 결승이 최초의 간단한 기호로 큰 일은 줄의 매듭을 굵게 하고, 작은 일은 줄의 매듭을 가늘게 하였다. 도화는 그림을 그려 자연을 표현하였으니, 예를 들면 '虎'자는 호랑이의그림, '馬'자는 말의 그림을 그려 나타내는 방법이다. 이후 사회의 발전에 따라 이러한 것들 이 수요에 충족할 수 없게 되자 문자와 도화는 점점 분리되어 거리가 생겨 문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할 수 없게 되었다.

   문자란 번작하고 자세하게 그리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단지 특징만을 나타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인식시키면 그만이다. 물론 인류가 문자를 창조함에 반드시 민족언어와 서로 결합되어야만 비로소 영원히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노신은 일찍이< 학문학사강요(學文學史綱要)>에서 "말이란 풍파와 같다. 출렁거리던 파도소리가 오래 지나가면 그 자취도 아득해져 단지 귀와 입으로만 전해질 따름이다. 단지 부족한 것은 멀리 전달되고 후세에 이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 사물에 감동을 받아 이를 펴내면 노래가 된다. 노래는 감동을 주지만 그 일은 잊게 되는 것이다. 언행을 기록하는 것은 일들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다. 언어만 믿으면 일들이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줄을 묶어 다스렸고, 뒤에 가서는 성인이 주역의 서결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비록 문자가 많지 않더라도 설명은 반드시 문자에 의지하여야만 비로소 사람들의 사상이나 감정과 언행을 전달하여 사회의 수요에 적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문자는 성 음·형체·훈고의 세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성음과 형태 그리고 의의가 있어 문자의 발생과 법칙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자가 문자의 초보적인 역할을 하려면 먼저 형태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글자의 뜻을 해석하려면 먼저 문자의 구조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되기 때문이다. 문자의 형태는 체계가 있기 때문에 비교적 탐색이 용이하다. 만약 형태가 없다면 문자는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다.

   한나라 허신<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문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형태를 그린 것을 '文'이라 하고, 그후에 형태와 소리가 서로 도와주는 것을 '字'라 한다.

 '文'이라는 것은 만물의 근본이고, '字'라는 것은 말이 불어나 점점 많아지는 것을 뜻한다. "라고 하였다. 허신의 이러한 견해를 살펴보면 문자는 사물의 유형으로써 형상의 제작을 취 하는 것을 말한다. '文'의 본래 의미는 실이 섞여져서 나타는 무늬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에도 이러한 상형의 흔적이 남아 있다. '字'는 '文'에서부터 발전하여 한편으로는 그 형태를 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소리를 첨가하여 형태와 소리를 갖추어 사물의 발전에 따라 점점 그 수효가 증가하여 형성자가 더욱 많아졌다.

상형자를 보면 어떤 것은 자연계의 형상과 어떤 것은 기물의 형상을 취하였고, 어떤 것은 거북이의 무늬나 새의 발자국 등의 형상을 취하여 누구나 한 번 보면 금방 어떤 물체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형성자를 보면 대부분 한쪽의 형태로 의미를 나타내고, 한쪽은 소리로써 음을 나타낸다. 이외에 지사(指事), 회의(會意), 가차(假借), 전주(轉注) 등을 합하여 육서(六書)라고 한다.

그러면 문자의 시작은 언제쯤일까? 이것은 매우 단정하기가 어려운 문제다. 어떤 학자는 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甲骨)에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을 최초의 문자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을 부정하여 말하길 갑골문은 이미 성숙된 문자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반드시 문자의 발달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자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갑골문 이전부터 문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최근 중국 서안(西安) 반 파(半坡)에서 출토된 임동채도기(臨潼寨陶器) 위에 새겨진 문자와 청해락도현(靑海樂都縣) 유만(柳 ) 문자의 부호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정식으로 문자가 창제되기 이전에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으로는 실물(實物)·서결(書결)·도형(圖形)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실물은 가장 간단히 일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그중에서 가장 유행하였던 방법 이 앞에서 말한 결승(結繩)이다. 결승 이후에 부결(符결)의 방법이 생겨났으니, 목판이나 혹 은 목판 위의 한구석을 흠을 내거나 기타의 부호를 남겨 증거로 삼는 방법이다.

'결'은 즉 새긴다는 의미다. 따라서 서결(書결)이란 그림이나 문자를 새긴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당시의 문자가 대부분 기물 위에 그림을 새긴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종류의 방법은 단지 사람들이 도형을 통하여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어서 진정한 문자라고 볼 수는 없다. 진정한 문자는 도화성이 강한 부호로 언어를 제대로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도화는 실물과 비교할 때 매우 진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을 기록하는 도화는 한자의 전신이라 할 수 있으며, 많은 발전을 거쳐 번잡한 것을 간단히 하고 정리하여서 구체적인 언어 성분을 대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음과 형태를 첨가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문자는 탄생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 강조할 것은 문자의 창제에 관한 문제다. 옛사람들의 논문에서는 대부분 문자의 창제를 모인(某人)의 공로로 귀속하고 있는데 이는 매우 부당한 것이다. 노신(魯迅)은 <문외문답(門外問答)>에서 "당시 사회상으로 불 때 창힐 혼자서 문자를 만들 수는 없었다. 때로는 칼과 자루에 새겨진 한 점의 그림, 또는 문설주에 새겨진 그림 등이 마음과 입으로 서로 전해져 문자가 많아지자 사관(史官)이 이를 채집하여 일을 기록하였다. 중국 문자의 유래는 아마도 이러한 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자란 백성들 사이에서 싹이 터서 뒤에 어떤 특권자가 이를 모아서 정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국 고대의 유명한 사상가인 순자(筍子)도 <석폐(釋蔽)>에서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 지만 창힐만이 유독 전해지는 것은 그가 일찍 태어났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많지 만 후직(後稷)만이 유독 전해지는 것은 그가 뛰어났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문자가 결코 성인이나 천재에 의하여 창제되는 것이 아니라 고대 백성들의 실제생활 중에서 이루어진 지혜요, 결정체라는 것을 설명한 말이다. 문자란 무에서 유가 탄생되는 것이 아니다. 적은데서부터 출발하여 점점 많아지자 오랜 기간 동안의 선별을 거쳐 마침내 약속들을 정하고 풍속으로 이루어져서 문자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작성일 : 13-08-20 11:31

서법예술이란?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129  
서법예술이란 무엇인가?
 
 
 
   서법(書法)이란 탄력성이 풍부한 독특한 모필로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 한자(漢字)조형의 특질에 의하여 예술구상과 수법을 거쳐 만들어진 형태를 말한다. 형식상으로 본다면 서법은 정신과 풍채를 중요시하고 그 다음으로 형태와 바탕을 친다. 이것은 다시 말하여 지혜의 헤아림은 끝없이 넓고, 법이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풍채와 정신을 으뜸으로 보고, 곱고 아름다운 효용성을 그 다음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중의 오묘함에 대하여 옛사람은 "심오하고 현묘함은 사물의 곁에서 나오고 그윽하고 깊은 이치는 아득한 속에 숨겨져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서법예술이란 소리가 없는 소리요, 형태가 없는 형체인 것이다.

서법예술에는 자신의 규율이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붓 잡는 법, 팔을 운용하는 법, 붓 을 운용하는 법, 먹을 사용하는 법, 글자를 구성하고 배치하는법, 운치를 나타내는 법 등등 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예술형식은 왕왕 예술수법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 또는 이상을 표한한다. 따라서 이치는 숨겨져 있으나 의미는 심장한 것이다. 때로는 종횡무진한 뜻을 표현하기도 하며, 때로는 울적한 심정을 토로하곤 한다. 작품안에 운치와 풍채 그리고 기세를 표현하기 때문에 붓은 정이요, 먹은 흥취라고 한다. 서법이 비록 서사적인 면과 서정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지만, 한자라는 일정한 대상에 의존하여야만 한다. 만일 서법이 한자의 기본 구조와 점과 선의 본질을 벗어나 추상적인 표현으로 진행되어 진다면 이는 이미 서법이라 볼 수 없다. 서법의 표현수단은 회화나 조각과 같이 사물의 외형을 본뜨는 것이 아니요, 문학과 같이 고사(故事)를 서술하고 내심의 감정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음악에서의 악기와 비교적 서로 가까운 면이 있다. 악기는 선율과 화임 그리고 연주 등의 음향효과로 직접 미감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서법이나 악기는 모두 사상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뛰어나지만, 반대로 흉내내고 서사하는 데에는 뛰어나지 못하다. 이것은 서법의 각 체가 비록 다르다하나 조형상에 있어서는 이 공통점은 점과 선으로써 구성된 문자의 형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점과 선 혹은 구성의 단위는 문자를 이루는 형태의 전제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충분한 가변성과 표현력을 구비하고 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각 서체의 형태에는 허한 것과 실한 것, 펴있는 것과 오므라져 있는 것, 성긴 것과 빽빽한 것, 기울어져 있는 것과 바로 세워져 있는 것 등이 서로 대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동일미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서예에 구비되어 있는 예술적 미학요소이다. 이러한 데에다 부드럽고 탄력성이 풍부한 모필에 먹을 충분히 뭍혀 조형의 규율을 준수하면서 가변적 요소를 운용하면, 문자의 짜임새에 독특한 풍격의 형식미를 부여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형식미 안에 붓을 들거나 누르기도 하고, 무디게 하거나 꺾기도 하며, 천천히 쓸 때와 급하게 쓸 때의 조절을 잘하여 운율의 미를 창출한다. 또한 점과 선으로는 형태와 평면을 배치하고, 좌우로 기울어진 것과 바른 것을 균형있게 하며, 대소길이의 변화를 주며, 움직임과 고요함 그리고 거두어들임과 내쫓는 것을 알맞게 하여 정적인 맛과 동적인 맛을 자아내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제어하고, 호응하여 어우러져야 한 다. 이렇게 하여 눈에 보이는 형상은 지면상에 표현된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점과 선에서 나온 예술적 마력인 것이다. 서법의 경지는 고도의 법을 숙련시켜 법없는 가운데 법이 있어야만 지극한 법이 되며, 고 심은 극도로 하면서도 고심의 흔적이 없어야만 비로소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하겠다.



작성일 : 13-08-20 11:30
글씨를 배우려면?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081  

        

글씨를 배우려면 어떠한 단계를 거쳐야 하나? 
 

   글씨를 배우려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방법과 단계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전쟁을 함에 있어 만약 세부적인 계획이 없다면 승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문제는 초학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어떤 초학자들은 순서없이 글씨를 배우기도 하고, 혹은 되는 대로 배우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글씨에 직접적인 영향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글씨를 배울때는 어떻게 시작하여 어떤 경로를 거쳐야 하느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있어야만 된다. 만일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힘만 들고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 헛수고를 면할 수 없다. 글씨를 배울 때의 첫 단계는 붓을 움직이기 전에 준비작업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전쟁을 하기 전에 군사들을 충분히 훈련시키는 준비가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면 글씨를 쓰기 전에 어떠한 준비작업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먼저 글씨를 쓰는 목적을 분명히 한 다음 서예에 관한 기초적인 책들을 읽어야 한다. 그런 다음 어떤 비첩(碑帖)을 써야 하며, 어떤 글자들을 익혀야 하며, 어떤 붓을 써야 하며, 붓은 어떻게 잡아야 하며, 올바른 자세와 글씨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을 알아야 한다. 붓을 움직이기 전에 이러한 문제들을 먼저 알아야만 헛수고를 줄일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를 곧 붓을 움직이는 초급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글씨를 배울 때 먼저 글씨체를 받아서 쓰기 시작하는데 이것보다는 알맞는 비첩을 선책하여 임모(臨摹)를 하여야 만 직접적으로 초학자들의 모방실력을 배양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면 먼저 점·가로획·세로획·삐침·갈고리 등등의 획들을 익히고, 붓을 시작하고 끝내고 보내는 것 등을 알게 되면 훨씬 쉬워질 것이다. 글씨를 받아서 배우는 것부터 시작하면 판에 박은 듯한 글씨가 나와서 발전의 여지가 없게 된다. 따라서 초학자는 임모로부터 시작하여야만이 좋은 글씨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어떠한 서체(書體)에서부터 시작하여야만 옳은 길인가?

이 문제에 대한 서단의 의견은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예서(隸書)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고, 혹은 해서(楷書)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고, 혹은 초서(草書)나 행서(行書)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기도 하여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해서를 시작할 때에는 당해(唐諧)나 위비(魏碑)를 선택하는 것이 좋은데 이는 개인의 상황에 근거를 두어 결정하는 것이 좋다.

세 번째 단계는 해서의 기초가 비교적 착실하다고 느껴졌을 때 행서로 들어가는 과정을 말 한다. 행서는 일반적으로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敍)>, <성교서(聖敎序)>를 쓰거나 이북 해(李北海)의 <이사훈비(李思訓碑)>를 거쳐 안진경(顔眞卿) 혹은 미원장(米元章), 황정견(黃 庭堅)의 행서를 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처음 해서를 배운 사람의 것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안진경의 해서를 썼으면 행서도 그의 것을 쓰는 것이 좋다는말이다. 만일 글씨의 조화를 이루려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처음 배운 비첩과 같은 계열의 것을 쓰는 것이다. 현격하게 다른 것을 쓴다면 그만큼 글씨의 진보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행서가 이미 숙달된 상태에서 전서(篆書)나 예서(隸書)를 쓰는 과정이다. 옛사람이 말하길 "예서를 배우려먼 먼저 전서를 써야만 고풍(古風)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저서를 배우려면 먼저 소전(小篆)을 배운 뒤에 대전(大篆)을 배우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소전의 가로획이 가지런하고 세로획은 곧바르고, 둥근 획과 꺾어지는 획들 이 손에 어우러지고, 짜임새를 쉽게 익힐 수있고, 붓을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 다. 어떤 사람은 "만약 소전으로 기초를 삼고 갑골(甲骨)·종정(鐘鼎)·석고(石鼓)를 넘본다면 이루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처음 시작도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전은 이양빙(李陽氷), 등석여(鄧石如) 등의 전서를 쓰고 <석고문(石鼓文)>을 쓰는 것이 좋다. 예서는 한(漢)나라의 비(碑)를 쓰는 것이 좋은데, 예를 든다면 예기비(禮器碑), 사신비(史晨碑), 을영 비(乙瑛碑) 등이 그것이다.

다섯 번째의 단계는 이상의 여러 체를 골고루 습득한 후에 초서(草書)로 들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초서를 배우려면 먼저 장초(章草)를 써야 한다. 왜냐하면 장초는 한자씩 떨어져 있으면서도 초법(草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서 초서의 필법(筆法)과 짜임새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점을 무시하고 쓰기 때문에 초서를 마치 거미줄과 같이 이러 저리 엉기게 하여 힘도 없고 심지어는 무슨 글자인지도 모르게 쓰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올바른 초서라고 할 수 없다. 이상을 종합하여 말하면 글씨를 배우는 단계가 바로 초학자의 열쇠이며, 좋은 글씨를 쓰느냐 못쓰느냐의 관건인 것이니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무시한다면 성공의 길로 가기에는 무척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작성일 : 13-08-20 11:30

필위란 무었인가?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099  

        

필위(筆位)란 무엇인가? 
  

  붓을 잡는 위치의 높고 낮음을 필위(筆位)라고 한다. 보통 붓을 잡을 때 붓대의 중간 정도 로 잡는다. 이때 필두(筆頭)에서 중간부분까지를 다시 3등분하여 필두에서부터 1분,2분, 3분 등으로 나누어진다.

붓을 잡는 위치에 따라 글자의 출력감은 다르게 나타난다.

당나라 서예가인 노휴(盧携)는 <임지결(臨池訣)>에서 "붓을 잡는 위치가 종이에서 멀어지면 글자는 뜨고 허하게 되며, 가까우면 붓 끝에 체중을 싣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서체(書體)를 쓰든지 무조건 붓을 높게만 잡는데 이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붓을 너무 높게 잡으며 기맥은 골고루 될 수 있으나 힘을 붓 끝에 집중시킬 수 없어 행필(行筆)이 온전치 못하고 손바닥으로 붓의 중심을 잡기가 곤란하다. 반대로 붓을 너무 낮게 잡으면 영활한 움직임을 구사할 수 없어 세력을 확장시킬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붓을 잡아야 적당한 것인가?

일반적으로 초서는 3분, 행서는 2분, 해서는 1분으로 잡는 것이 적당하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자기가 짐작하여 확정하는 것이 가장 좋다. 붓대를 3등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붓털도 필두(筆頭)를 기준으로 하여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붓 끝을 1분필이라고 하며, 중간을 2분필이라고 하며, 윗부분을 3분필이라고 한다. 이것은 옛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결정한 것으로 그 목적은 글씨를 쓸 때 하나의 기준을 삼기 위해서다. 필두는 비록 부드러우나 탄력성이 풍부하여 누르면 일어나고, 움직이면 다시 수습할 수있다. 그러나 만약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좋은 글씨를 쓸 수가 없게 되므로 어떤 위치를 선택하여 쓰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다.

그러면 붓의 어떤 위치를 선택하여 쓰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가?

   일반적으로 말하길 글씨를 쓸 때 붓의 허리 부분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더욱이 초학자들은 해서 혹은 전서나 예서를 쓸 때에는 1분반 내지 2분필이 가장 적당하다. 이렇게 붓을 움직여서 누르고 꺾고 끌고 잡아 당기면, 힘을 적당하게 주면서 형세도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다. 글씨를 쓸 때 가장 주의할 것은 붓의 윗부분까지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점과 획이 정신과 모양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붓 끝으로 쓰게 되면 점과 획이 힘이 없게 되어 가볍고 경솔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붓털을 3분필로 나눔에 있어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다. 즉 붓털이 뾰족해지기 시작하는 허리부분에서 붓 끝까지를 3등분하여 붓 끝에서 가까운 쪽에서부터 1분필, 2분필, 3분필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붓 전체를 3등분하여 필봉에서 부터 1분필, 2분필, 3분필이라고도 한다.




작성일 : 13-08-20 11:30

낙 관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142  

        

낙관 [落款]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준말이다. 중국의 옛 동기(銅器) 등의 각명(刻銘) 중에서 음각자(陰刻字)를 ‘관(款)’, 양각자(陽刻字)를 ‘지(識)’라고 하는데, 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도 고대에는 낙관이 없었는데, 작가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과 독립에 수반하여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화론(畵論)이나 화사(畵史) 등의 저서가 많은 중국에서도 낙관에 대하여 논한 것은 극히 드물다. 당(唐)나라 말기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도 감식(鑑識) ·수장(收藏) ·감상(鑑賞) 등은 나와 있지만 낙관은 없고, 청(淸)나라 추일계(鄒一桂)의 《소산화보(小山畵譜)》에서 비로소 다루고 있는 정도이다. 《소산화보》에는 “화면에는 일정한 낙관의 공간이 있으나, 그 장소를 잘못 잡으면 화면의 균형이 손상된다. 서화에는 제목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다. 행이 긴 것도, 짧은 것도 있다. 두 행 되는 것과, 한 행만인 것이 있다. 가로로 쓴 것과, 세로로 쓴 것이 있는데, 세로로 내리쓴 것은 머리는 가지런히 글자를 맞추는 것이 좋으나 발은 맞출 필요가 없으며 들쭉날쭉해도 무방하다. (중략) 낙관은 행서(行書)나 해서(楷書)가 좋으며, 제구(題句)의 자는 약간 크게, 연월(年月) 등은 약간 작게 쓰는 것이 보통이다. 원(元)나라 화가들의 그림에서 수석(樹石) 위에 낙관이 있는 것은 화국(畵局)의 손상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화면에는 단관(單款:필자의 이름만 적은 낙관)이 좋다. 서화를 후세에 전하는 데에 있어, 단관은 그 진중함을 더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도둑맞을 것을 우려하여 기어이 쌍관(雙款)을 요구해오더라도, 자신의 불민(不敏)을 이유로 사양을 해도 무방하다”라고 씌어 있다. 필자의 개성을 중시함으로써 낙관이 의의를 가지지만, 그 형식은 그것이 화면에 종속되는 한 자유이며 일정한 법칙은 없다.

근대로 내려옴에 따라 오히려 낙관이 화면의 일부로서 구성되는 경향이 있다. 이 낙관은 도장이 함께 찍혀 있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낙관인장(落款印章) 또는 줄여서 관인(款印)과 낙관이 숙자(熟字:두 자 이상이 합하여 하나의 뜻을 나타내는 말. 즉 숙어)가 되는 것이 통례이다. 필자 아닌 사람이 나중에 화면에 기입한 낙관을 후낙관이라 한다. 서화 아닌 기물에 나타나 있는 서명도 낙관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명(銘)’이라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작성일 : 13-08-20 11:29

글씨를 배우는 흥취?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207  

        

글씨를 배우는 흥취는 어떻게 배양하여야 하나?
 
 
 
   서예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 전통예술이다. 서예는 독특한 풍격과 무궁한 매력을 지닌 동시에 생활환경을 미화시킬 수 있고, 심신을 길러 정서를 함양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서예가 형성된 이래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으며, 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다.

서예의 흥취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점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면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생리적으로 볼 때 어떤 종류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종류의 것을 좋아하면 반드시 무궁한 흥취를 자아내게 한다. 물론 좋아한다는 것은 완전히 생리적인 측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적인 작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정신적인 작용을 관념이라 한다. 흥취는 천성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연마와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 등등은 대개 사회환경의 영향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건반사로 말미암아 어떤 종류의 것을 좋아하게 된 이후에 피나는 수련과 단련을 쌓는데 이때 흥취도 저절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글씨를 배움에 있어서 어떻게 하여야만 심도있는 흥취를 배양할 수 있는 것인가?

첫째, 먼저 글씨를 배우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서예란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것만 추구해서는 안된다. 서예는 일종의 유익한 활동이며, 개인의 사상과 덕행에 대한 수양이며, 예술수양이며, 문화수양이다. 그러므로 서예를 통하여 침착함과 인내심을 길러 심 신의 건강과 우아한 흥취를 높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이 방면에 대한 상식을 넓혀야 한다. 예를 들면, 전시회를 통하여 많은 작품을 보아야 하며, 서예이론에 대한 많은 참고서와 지식을 쌓아야 하며, 명산대천과 각지에 흩어져 있 는 비석과 묵적(墨迹), 편액(篇額)들을 감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셋째, 항상 서예의 대가와 기초가 잘 닦여진 동호인과의 교류를 통하여 서예의 흥취를 높이고, 명작들을 감상하여 안목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몇 가지의 요소를 구비하면 흥취는 더욱 증가될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서예에 대한 흥취는 초보적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사회의 관심과 끊임없는 서예교류와 보급, 높은 문화수준과 생활의 향상 등으로 서예 인구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서예에 대한 흥취와 목적에 따라 성패와 영향이 달라진다. 뜻이 굳건한 사람은 흥취도 갈수록 농후해져 성공률이 높지만, 뜻이 굳건하지 못한 사람은 흥취도 점점 감소하여 중도에 포기하기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예와 그것에 대한 흥취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예를 배우려면 그것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있어야 하며, 항심을 가지고 나아가야만 비로소 그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작성일 : 13-08-20 11:28

탁본이란?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206  

        

탁본 [拓本]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에 전해졌고 금석학과 함께 성행한 동양의 독특한수법이다. 탁본과 같은 것에 어탁(魚拓)이 있다. 이것은 물고기에 먹을 직접 칠하여 거기에 종이를 대어 뜨기 때문에(이 방법을 어탁에서는 직접법이라 한다) 좌우 반대가 된다. 이 점은 판화·도장·인쇄 등도 마찬가지이지만, 이것들은 뜨거나 인쇄한 것이 정면으로 향하도록, 판(版)·인(印)·활자가 역(逆:左文字)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탁본은 본래 정면으로 향한 것을 그대로 같은 방향, 같은 크기로 떠내는 것이다. 범종이나 석비의 면을 먹으로 더럽히지 않고 직접 종이를 대어, 그 위에서 먹물로 가볍게 두들기듯이 하여 문자나 문양을 뜨기 때문에 새겨진 선 부분은 하얗고, 새긴 부분 이외의 도드라진 부분은 까맣게 떠지는 것이다.

   금속·돌·목재·도기·토기·기와 등, 요철 이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탁본할 수 있다. 석비의 문자나 공예품의 아름다운 조각·문양 등의 탁본은 그대로 흑백의 간소하고 고상한 예술품으로서 감상할 수 있다. 또, 옛날부터 중국의 명비(名碑)는 탁본을 떠서 첩(帖)으로 만들어졌으며, 법첩(法帖)이라 하여 서예의 명품 내지 교본으로서 존중되었다. 또한 고고학이나 미술사 연구를 하는 데 사진과 같이 복제방법으로서 중요하다. 사진은 연구 대상이 되는 큰 물체 전체를 찍을 수가 있지만, 반드시 실물대로 찍을 수는 없다. 그러나 탁본은 간단하게 언제나 그대로의 크기로 뜰 수 있어, 그 원시성에 오히려 가치가 있다. 문자의 점획이나 선 등의 미묘한 부분은 사진으로는 불가능한데, 특히 비문이나 종명 등의 문자·문장을 주로 연구하는 금석학에서, 탁본은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며 방법이다.




작성일 : 13-08-20 11:28

삼국시대의 서예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212  
삼국시대의 서예
 
 
 
   삼국시대의 서예를 살펴보면 먼저 고구려의 경우, 유물로는 전문(塼文) ·석각(石刻) ·묘지명(墓誌銘) 등이 있고 또 유명한 광개토경평왕호태왕비(廣開土境平王好太王碑)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부근, 즉 지린성[吉林省] 퉁거우[通溝]에 남아 있다. 이것은 높이 약 7m, 너비 약 2m나 되는 거대한 비석으로, 4면에 모두 문자가 새겨졌으며 고구려 영군(英君)의 훈적을 기록한 것으로 서체는 파세가 없는 고예(古隷)로서 특이하며 호탕 ·웅대하여 동양 서예사상 중요하다.

백제의 경우, 광복 후 부여에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가 발견되었고, 1972년에는 공주의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최고의 지석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불상명(佛像銘) 등 단편적인 것밖에 없었다.

신라의 경우, 통일 이전의 것으로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창녕비(昌寧碑) ·황초령비(黃草嶺碑) ·마운령비(磨雲嶺碑) ·북한산비(北漢山碑)와 1982년에 발견된 충원비(忠原碑)가 있다. 모두 북조풍의 해서로 고졸(古拙) 청경(淸勁)하여 신라적인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서체는 그 당시 중국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의 서풍 가운데 해서는 주로 구양순법이, 행서는 왕희지법이 신라 ·고려 두 나라의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따라서 통일 초기의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 ·김인문묘비(金仁問墓碑)와 화엄사석경(華嚴寺石經) ·사천왕사비 등이 모두 구법으로 앞의 두 비는 쓴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매우 뛰어난 글씨로 방정고아(方正高雅)하다. 그리고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흰 종이에 먹으로 쓴 사경(寫經)으로 한국 사경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김생(金生)은 각체를 모두 잘 썼다고 하며 고려 때 석단목(釋端目)이 집자(集字)한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가 있지만 진적(眞蹟)이 없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이 비만을 볼 때 왕희지의 아류(亞流)로서 과대평가되었다고 하겠다. 석영업(釋靈業)의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도 왕희지풍으로 주경(藏寺碑)가 있다.




작성일 : 13-08-20 11:28

글씨를 배우는 단계?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114  

        

글씨를 배우려면 어떠한 단계를 거쳐야 하나? 
 


   글씨를 배우려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방법과 단계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전쟁을 함에 있어 만약 세부적인 계획이 없다면 승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문제는 초학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어떤 초학자들은 순서없이 글씨를 배우기도 하고, 혹은 되는 대로 배우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글씨에 직접적인 영향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글씨를 배울때는 어떻게 시작하여 어떤 경로를 거쳐야 하느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있어야만 된다. 만일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힘만 들고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 헛수고를 면할 수 없다. 글씨를 배울 때의 첫 단계는 붓을 움직이기 전에 준비작업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전쟁을 하기 전에 군사들을 충분히 훈련시키는 준비가 있어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면 글씨를 쓰기 전에 어떠한 준비작업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먼저 글씨를 쓰는 목적을 분명히 한 다음 서예에 관한 기초적인 책들을 읽어야 한다. 그런 다음 어떤 비첩(碑帖)을 써야 하며, 어떤 글자들을 익혀야 하며, 어떤 붓을 써야 하며, 붓은 어떻게 잡아야 하며, 올바른 자세와 글씨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을 알아야 한다. 붓을 움직이기 전에 이러한 문제들을 먼저 알아야만 헛수고를 줄일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를 곧 붓을 움직이는 초급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글씨를 배울 때 먼저 글씨체를 받아서 쓰기 시작하는데 이것보다는 알맞는 비첩을 선책하여 임모(臨摹)를 하여야 만 직접적으로 초학자들의 모방실력을 배양할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면 먼저 점·가로획·세로획·삐침·갈고리 등등의 획들을 익히고, 붓을 시작하고 끝내고 보내는 것 등을 알게 되면 훨씬 쉬워질 것이다. 글씨를 받아서 배우는 것부터 시작하면 판에 박은 듯한 글씨가 나와서 발전의 여지가 없게 된다. 따라서 초학자는 임모로부터 시작하여야만이 좋은 글씨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어떠한 서체(書體)에서부터 시작하여야만 옳은 길인가?

이 문제에 대한 서단의 의견은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예서(隸書)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고, 혹은 해서(楷書)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고, 혹은 초서(草書)나 행서(行書)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기도 하여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해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해서를 시작할 때에는 당해(唐諧)나 위비(魏碑)를 선택하는 것이 좋은데 이는 개인의 상황에 근거를 두어 결정하는 것이 좋다.

세 번째 단계는 해서의 기초가 비교적 착실하다고 느껴졌을 때 행서로 들어가는 과정을 말 한다. 행서는 일반적으로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敍)>, <성교서(聖敎序)>를 쓰거나 이북 해(李北海)의 <이사훈비(李思訓碑)>를 거쳐 안진경(顔眞卿) 혹은 미원장(米元章), 황정견(黃 庭堅)의 행서를 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처음 해서를 배운 사람의 것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안진경의 해서를 썼으면 행서도 그의 것을 쓰는 것이 좋다는말이다. 만일 글씨의 조화를 이루려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처음 배운 비첩과 같은 계열의 것을 쓰는 것이다. 현격하게 다른 것을 쓴다면 그만큼 글씨의 진보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행서가 이미 숙달된 상태에서 전서(篆書)나 예서(隸書)를 쓰는 과정이다. 옛사람이 말하길 "예서를 배우려먼 먼저 전서를 써야만 고풍(古風)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저서를 배우려면 먼저 소전(小篆)을 배운 뒤에 대전(大篆)을 배우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소전의 가로획이 가지런하고 세로획은 곧바르고, 둥근 획과 꺾어지는 획들 이 손에 어우러지고, 짜임새를 쉽게 익힐 수있고, 붓을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 다. 어떤 사람은 "만약 소전으로 기초를 삼고 갑골(甲骨)·종정(鐘鼎)·석고(石鼓)를 넘본다면 이루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처음 시작도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전은 이양빙(李陽氷), 등석여(鄧石如) 등의 전서를 쓰고 <석고문(石鼓文)>을 쓰는 것이 좋다. 예서는 한(漢)나라의 비(碑)를 쓰는 것이 좋은데, 예를 든다면 예기비(禮器碑), 사신비(史晨碑), 을영 비(乙瑛碑) 등이 그것이다.

다섯 번째의 단계는 이상의 여러 체를 골고루 습득한 후에 초서(草書)로 들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초서를 배우려면 먼저 장초(章草)를 써야 한다. 왜냐하면 장초는 한자씩 떨어져 있으면서도 초법(草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서 초서의 필법(筆法)과 짜임새를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점을 무시하고 쓰기 때문에 초서를 마치 거미줄과 같이 이러 저리 엉기게 하여 힘도 없고 심지어는 무슨 글자인지도 모르게 쓰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올바른 초서라고 할 수 없다. 이상을 종합하여 말하면 글씨를 배우는 단계가 바로 초학자의 열쇠이며, 좋은 글씨를 쓰느냐 못쓰느냐의 관건인 것이니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무시한다면 성공의 길로 가기에는 무척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작성일 : 13-08-20 11:27

탁본 뜨는 방법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539  

        

탁본 뜨는 방법   
  

   건탁(乾拓)과 습탁(濕拓)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건탁은 동화(銅貨)나 은화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심으로 문질러 뜨는 아이들의 놀이와 마찬가지 방법이다. 종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꼭 눌러, 작은 고형(固形)의 탁본묵(石花墨이라고도 한다)으로 구석구석까지 문지르면 문자의 높은 곳은 까맣고, 낮은 곳은 하얗게 떠진다. 섬세한 문자나 문양이라면 손끝에 헝겊을 싸대어 여기에 탁본묵을 문질러, 대상물을 세심하게 뜬다.

습탁은 탁본하려는 대상물에 댄 종이 위에 물을 적셔 종이를 대상물에 붙이는 것이 특색이며, 수탁(水拓)이라고도 한다. 종이에 물을 칠하는 데는 붓을 쓰며, 큰 비(碑)나 종 등은 다 칠하기 전에 말라버리기 때문에, 타월에 물을 적셔 적당히 짜서, 이것을 말아 종이 위를 굴리면서 대상물에 종이를 밀착시킨다. 그리고 탈지면 등으로 종이를 가볍게 두드린다. 또는 별도의 종이 한 장을 대고 그 위에서 털브러시로 두들겨도 된다. 종이가 밀착되어 종이의 물기가 마르기 시작하면, 약간 물기가 남았을 때(이 물기의 정도를 체득하는 데 탁본기술의 묘미가 있다)를 짐작하여, 질 좋은 비단으로 솜을 싼 솜방망이에 먹을 묻히고, 준비한 또 하나의 솜방망이에도 먹의 침윤 정도를 잘 맞추어 그대로 재빠르게 지면 전체를 두드린다. 종이가 마른 후 떼어내어 미리 준비한 신문지 등의 위에 펴서 말린다.

탁본에 쓰는 종이는, 건탁은 명반을 먹인 얇은 미농지, 습탁에는 보통 화선지를 쓴다. 먹은 유묵(油墨)을 쓴다.



작성일 : 13-08-20 11:27

고려시대의 서예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244  

        

고려시대의 서예 
 

  고려시대에 남아있는 서예의 자료는 흔적비문 ·묘지명 ·사경 등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적다. 이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는 거의 비석이고 후기는 비 ·묘지명 ·진적과 사경 등이 많다. 전기는 전대를 이어 해서(楷書)는 구양 순의 서풍이고 행서(行書)는 왕희지풍의 일색이며, 후기에는 특히 제25대 충렬왕 이후 조맹부의 서체가 들어와 크게 유행하여 조선 전기까지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환추(李桓樞)의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와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碑塔:보물 361 )는 구법(歐法)인데, 근직(謹直)한 필력으로 주경하면서 금석기(金石氣)가 넘쳐 흐른다.

   장단열(張端說)의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眞靜大師圓悟塔碑;보물 172)는 한국 서예사상 드물게 우세남(虞世南)의 서풍으로서 수윤(秀潤) ·근정(謹整)한 명품이며, 고려 비 중에서는 최상급이다. 채충순(蔡忠順)의 현화사비(玄化寺碑)는 골기가 통달하고 정채(精采)가 비등하다고 하나 과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거웅(金巨雄)의 거돈사승묘선사비(居頓寺勝妙禪師碑)와 민상제(閔賞濟)의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는 모두 구체로서 당당한 것들이다.

   안민후(安民厚)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국보 59)는 구법이나 우(虞)에 가까운 것으로 근엄 ·정정하며 품격 높은 일품으로 일류에 속한다. 이원부(李元符)의 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는 《금석고(金石攷)》에 “신라 ·고려 양조에 있어서 금석의 서체는 대부분 구법으로 일관한 경향이 있는데, 홀로 원부의 우법(虞法)이 있음은 실로 새벽하늘의 샛별에 비할 수 있는 진귀하고 중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단열도 있었으며 또 완전한 우법도 아니며 송나라 휘종의 수금체(瘦金體)처럼 자획(字劃)을 가늘고 길게 뽑는 독특한 필법이다. 유려하고 운필이 자재(自在)하며 청경(淸勁)한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명(書名)이 매우 뛰어난 석탄연(釋坦然)은 처음으로 안법의 해서를 썼고 왕법(王法)의 행서를 겸했으며 문수원중수기 액제(額題)와 승가사중수비(僧伽寺重修碑)를 썼는데 명실이 상부하다. 오언후(吳彦侯)의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는 구법으로 근엄 ·주경하고 단아하여 당당한 명품이다.

   그 밖에 석영근(釋英僅)은 구법의 해서를 잘 썼고, 석혜소(釋慧素)도 안법을 섞은 듯한 해서를 잘 썼다. 김효인(金孝印) ·김순(金恂) 등은 구법이고, 전양고(錢良古)와 이군후(李君候)는 왕법의 행서를 잘 썼으며, 전원발(全元發)의 법주사혜정국사비(法住寺慧淨國師碑)는 전아한 해서이다. 제26대 충선왕(忠宣王)은 양위한 후 연경(燕京)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당시 원(元)의 명사(名士)들과 교류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와 친교가 두터워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문적과 서화를 많이 들여왔으므로 이에 따라 조맹부의 서체 즉, 송설체(松雪體)가 들어와 고려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의 서를 풍미하였으며, 이 시기는 송설체 일색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중에서 행촌(杏村) 이암(李慶壽) 형제는 원(元)나라 사람으로 원 말에 고려에 귀화한 사람으로서 송설체를 썼다. 권주(權鑄)의 신륵사대장각장경비(神勒寺大藏閣藏經碑)는 아윤 ·청아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명필로 이름 높은 김생(金生)의 글씨를 석단목(釋端目)이 집자(集字)하여 세운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낭공대사비)가 있으며 이는 왕희지체의 행서이지만 서명 높은 왕희지의 서에 비하면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인각사보각국사탑비(鱗角寺普覺國師塔碑)와 직지사대장각전비(直指寺大藏閣殿碑)가 있다.



작성일 : 13-08-20 11:27

글씨를 쓰는것과 서예와의 차이점?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238  

        

글씨를 쓰는 것과 서예와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사람들은 글씨를 쓰는 것이 곧 서예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완전히 같은 종류의 것은아 니다. 간단히 말하면 글씨를 쓰는 것은 실용에 목적이 있는 것이고, 서예는 사람들에게 예술 을 감상하게 하는 것이다. 서예는 실용가치 이외에 많은 예술형식이 있다. "일정한 대상에 기탁하여 아름답고, 단정하고, 웅건하고, 깨끗하며, 용이나 호랑이가 위엄을 가지고 날며 움직이는 듯한 형세를 가중시킨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꿋꿋한 기개로 근본을 삼고 변화로 쓰임을 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사당에 들어가 귀신을 보는 듯 하게 하며, 곳간을 살핌에 밑바닥이 보이지 않게 하는 듯하여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는 것이다.

  진(晉)나라 때 왕희지는 "글씨를 쓰려고 하는 자는 먼저 먹을 갈면서 정신을 집중시키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글씨의 자형을 미리 생각하여 크고 작은 획과 아래나 위로 향한 획과 평평하고 바른 획들을 움직여 맥이 서로 연결되게 구상한다. 이것은 뜻이 붓보다 먼저 있게 한 연후에 글씨를 쓰는 방법이다. 만약 평평하고 바른획이 마치 주판알 같이 위아래가 반듯하고 앞뒤가 고르면 글씨가 되지 않고, 단지 점과 선만 연결시켜 놓은 꼴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글자와 서예와의 관계를 천명한 말로서 글씨 쓰는 것과 서예는 반드시 일치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글씨 쓰는 것과 서예는 각각 실용성과 예술성의 특징을 공유하고 둘다 한자(漢字)를 빌려 글씨를 쓰나 특성과 창조성이 다르다. 글자와 서예는 모두 미의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나, 다른 점은 미의 관점이다. 하나는 실용미를 추구하여 발전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예술미를 추구하여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 예술미의 일면은 먼저 한자의 조형과 규율을 흐트리지 않고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감정의 동태와 사상의 조화를 이루어 법(法)을 타파하여 의(意)를 얻게 한다. 그리고 자기의 감정을 펴내어 글자의 기세와 풍모로 하여금 예술미와 매력을 표현하여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게 한다. 실용미의 일면도 비록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나 반드시 멋있고 힘있고 풍채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실용적인 면만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대중적이어야 하고 한자를 쓸 때 상하가 반듯하고 앞뒤가 고르면서 좌우가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도 범위를 넘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글씨와 서예의 다른 점이면서 동시에 구별되는 점이기도 한 것이다.



작성일 : 13-08-20 11:26

전각이란?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806  

전각 [篆刻]    
  
  
  
   서예나 그림을 그린 후에는 자기 이름이나 호(號)를 쓰고 도장을 찍는다. 이 도장은 문인묵객(文人墨客) 스스로가 새기는 것이 통례이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인장이 쓰였는데, 가장 발달하였던 시기는 한대(漢代)였다. 11세기 송대(宋代)에 이르자 새로운 금석학(金石學)의 발달로 한나라의 인장이 부활하게 되었고, 15세기 명대(明代)에 이르러 새기기 쉽고 아름다운 석재(石材)의 발견으로, 이전에 상아를 쓸 때와 같이 장인(匠人)들에게 인장을 의뢰하지 않아도 쉽게 새길 수 있게 되어 문인(文人)들은 장인예(匠人藝)로서는 이룰 수 없는 새로운 경지를 이루어놓았다. 수많은 문인들의 손을 거치는 동안, 전각은 시(詩)·서(書)·화(畵)와 병칭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초기의 창시자는 문팽(文彭)과 하진(何震)이며, 청대(淸代)에 이르면 정경(丁敬) 등의 한인(漢印) 연구로 더욱 새롭게 발전하였다. 그들은 출신지인 항저우[杭州]의 아명(雅名)을 따 '절파(浙派)'라는 세력을 이루기도 하였다. 청대는 전각의 흥륭기(興隆期)로, 등석여(鄧石如)·조지겸(趙之謙)과 같은 명인이 잇따라 나타났고, 청대 말에서 중화민국 초에 걸쳐 활약한 오창석(吳昌碩)은 구중국(舊中國) 전각의 마지막 대가였다.

   한국의 전각역사는 인장이 사용되기 시작한 고려 때부터이다. 당시는 대부분 동인(銅印)·석인이었고, 모양도 4각형, 6각형, 원형이었다. 자체(字體)는 대부분 구첩전(九疊篆)이며 배자(配字)는 방사선식으로 되어 있어 원주를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다. 이같은 고려 전각의 유풍은 조선으로 계승되어 상서원(尙瑞院)에서는 구첩전과 소전체(小篆體)로 동인 ·철인 등을 만들었다. 역대 임금의 많은 어보(御寶)가 만들어졌으며, 서예 ·회화의 발달과 함께 문인 스스로가 전각하는 사인(私印)이 유행하였다. 미수(眉戒) 허목(許穆)은 한국 전각의 제1인자이며, 전각을 남긴 많은 사람 중에서 자기 스스로가 전각하였다고 믿어지는 문인문객은 정학교(丁學敎)·정대유(丁大有)·윤두서(尹斗緖)·오경석(吳慶錫)·이상적(李尙迪)·김정희(金正喜)·김명희(金命喜)·김상용(金尙容)·오세창(吳世昌) 등 20여 명을 손꼽을 수 있다. 재료는 대개 부드러운 납석계(蠟石系)의 돌을 사용하고 도구는 철필(鐵筆)이라는 양날의 손칼을 사용한다.각법의 종류는 양각과 음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양각은 주문인(朱文印)이라 하며 바탕 부분을 새겨내는 것으로 찍었을 때 붉은색의 글씨가 된다. 음각은 백문인(白文印)이라 하며 글씨부분을 새겨내는 것으로 찍었을 때 흰색의 글씨가 된다.

   전각의 종류에는 성명을 새긴 성명인, 호를 새긴 아호인, 좋아하는 문구를 새긴 사구인(詞句印), 작품의 소장을 확인하기 위한 수장인(收藏印), 새·물고기 등 동물문양을 새긴 초형인(肖形印) 등이 있다. 성명인에는 백문인이, 아호인에는 주문인이 주로 쓰이며, 사구인에는 서화 폭의 우측 상단에 찍는 두인(頭印)과 중간에 찍는 유인(遊印)이 쓰인다.


작성일 : 13-08-20 11:26

조선시대의 서예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470  

조선시대의 서예
 
 
 
   조선시대 초엽의 서예는 고려 말의 경향이 그대로 계승되어 조맹부의 서체, 즉 송설체가 유행하였다. 송설체로 된 증도가(證道歌) ·천자문(千字文) ·적벽부(赤壁賦) 등이 왕부의 명령으로 간행되어 일반에게 전습(傳習)되었다. 1435년(세종 17)에는 승문원(承文院) ·사자관(寫字官)의 자법(字法)이 해정(楷整)하지 못하였다 하여 왕희지체로서 궤범(軌範)을 삼게 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양체가 안행(雁行)하였으나 주류는 역시 송설체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중망(衆望)을 한몸에 모은 예원(藝苑)의 중심 인물이었고, 당시의 최고 화가인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跋文)은 30세라는 약년(若年)의 서(書)이나 호매(豪邁) 늠늠하고 품위 또한 높다. 따라서 당시 천하제일이라 하였다.

   선조(宣祖) 이전에 서명(書名) 높은 사람으로는 강희안(姜希顔) ·김종직(金宗直) ·정난종(鄭蘭宗) ·소세양(蘇世讓) ·김구(金絿) ·성수침(成守琛) ·이황(李滉) ·양사언(楊士彦) ·성혼(成渾) 등이 있다. 대체로 조선 전기는 조맹부 ·왕희지 이외에도 명나라 문징명 ·축윤명의 서풍도 들어와 혼류(混流)되어 행하여졌다. 성종(成宗) 때의 권발(權撥)은 수윤(秀潤)한 행 ·초서의 대가로 초서는 조선시대를 통하여서도 가장 뛰어났다.

   선조(宣祖) 때에 한호(韓濩)가 나온 후로는 조선시대의 서풍이 크게 변모하였다. 즉 한호는 한국 서예사상 매우 이름 높은 사람으로 진체(晉體:왕희지풍의 체)를 연수한 듯하며 적공(積功)하여 해 ·행 ·초서에 능하였으나 누기(陋氣) ·속기(俗氣)가 많았다.

   그 후에는 삼대가(三大家)라 불리는 백하(白下) 윤순(尹淳) ·원교(圓喬) 이광사(李匡師)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있으며, 미불(米) ·백송(白松) 지창한(池昌翰) 등이 유명하며 이들의 필적은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작성일 : 13-08-20 11:25

서예의 바른 자세는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400  

        

서예의 바른 자세는 어떠한 것인가? 
 

   처음 글씨를 배우는 사람이 때때로 자세에 대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장차 글씨도 좋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심신의 건강에도 해가 된다. 그러므로 글씨를 쓸 때에는 앉은 자세나 선 자세가 항상 올바르게 유지되도록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러면 어떠한 자세가 올바른 자세인가? 먼저 마음을 평정시키고 기를 고르게 하고 정서를 안정시켜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영정치원(寧靜致遠)이라고 하는 것으로 심수쌍창(心手雙 暢)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다음은 아래와 위의 세 가지 자세와 몸과 기가 서로 결합하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아래의 세 가지란 두 발과 척추 끝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앉은 자세를 정확히 하려면 발을 안정시키고 몸을 올바르게 하여야 한다. 위의 세가지란 양손과 등뼈를 말하는 것으로 위 아래가 평형을 이루면서 기운을 집중시켜야 한다. 한 손은 자연스럽게 책상에 놓고 힘은 안배하여 붓 잡은 손이 합리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붓 잡은 손이 지탱할 수가 없어 오랫동안 글씨를 쓰지 못하게 된다. 등과 어깨는 기를 움직이는 길인 까닭에 붓을 종이에 대기 전에 먼저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쉬면서 의식적으로 기를 가라 앉혀야 한다. 그런 뒤에 천천히 기를 등으로부터 어깨를 통과하여 팔꿈치와 손에 이르도록 한 뒤에 서서히 붓을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열 손가락에 기를 통하게 한 다음 붓 끝에 모든 것을 집중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좀더 상세하게 말하면 글씨를 쓸 때 두 발바닥은 평행을 이루게 하면서 허벅다리는 약 한자 정도로 자연스럽게 벌리고 양 무릎도 허벅다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벌려야 한다 .엉덩이는 의자 위에 편안히 앉으면서 허리는 곧게 펴고, 가슴은 책상 위에 있는 법첩을 응시하고 있어야 한다. 이때 주의할 점은 몸이 기울어져서는 안되며, 등과 허리가 낙타처럼 굽어서도 안되며, 머리를 너무 숙여서도 안된다. 만일 이와 같은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면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신의 건강에도 좋지 못한 영향이 미치게 된다. 앉아서는 1촌(寸) 정도의 해서(楷書)를 쓰는 것이 좋으며 이 이상의 큰 글씨를 쓰려면 서서 쓰는 것이 좋다. 만약 앉아서 큰 글씨를 쓰게 되면 글자의 점과 획이 착각을 일으키게 할 뿐 아니라 글자의 형태도 이상하게 되기가 쉽다. 더욱이 중요한 작품을 할 때 앉아서 글씨를 쓰게 되면 전체의 균형이 혼연일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동감도 이루기가 어렵 다. 역대 서예가들이 큰 글씨를 쓸 때에는 서서 현완법(懸腕法)의 자세를 취하면서 작품을 하였다. 서서 글씨를 쓸 때에는 두 다리는 자연스럽게 땅에 디디고, 몸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기울 이고, 허리는 약간 굽히면서 머리는 숙이고, 눈은 종이를 바라보고, 왼손은 종이를 누르고, 오른손은 붓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 이때 주의할 점은 두 다리는 꼭 평행되게 할 필요가 없으며 앞뒤를 약간 어긋나게 하면서 편안하게 하되 손은 긁듯이 책상을 잡아서는 안된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여 말하면 앉은 자세나 선 자세를 막론하고 획일적이 되어서는 안되며, 심신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에선 든 것을 고려하여 몸과 마음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하여야 한다.



작성일 : 13-08-20 11:25

한글서예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368  

        

한글 서예 
 
   서예는 한자를 대상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한국에는 한글이라는 고유문자가 15세기에 만들어졌으며, 당시로는 그것이 심미(審美)의 대상으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서예라고 하면 먼저 한자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 오면서 한글 서예가 발달하고, 또 조선말엽에 궁체(宮體)라는 서체가 이루어지면서 한자와 함께 서예의 한 영역이 되었다. 궁체는 맑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다만 여러 체로 다양하게 발달하여 폭넓은 예술성을 지닌 한자와는 성격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한자 필법이 원용(援用)되기는 하나, 문자 구조상의 단순성으로 인해 발달에 한계가 있다. 최근 이러한 제약성을 탈피하기 위해 몇몇 서예가들이 한글 서예의 새로운 형태화를 시도하였다.



작성일 : 13-08-20 11:24

붓은 어떻게 잡아야 하나?
 글쓴이 : 학정서예원
조회 : 1,115  

        

붓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서예는 모필(毛筆)을 사용하는 특수한 예술이기 때문에 먼저 이것을 잡는 방법을 정확히 알아야 한는 것이 급선무다. 붓을 잡는 방법에 관하여 역대 서예가들이 많은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초학자들은 오직 붓 잡는 방법을 이해하고 오랜 숙련을 하여 자유자재로 붓을 운용할 수 있으면 글씨는 좋아 지게 된다. 붓을 잡는 방법에 대하여 옛날부터 많은 이론들이 전해져 내려왔다. 예를 들면 '오지집필 법'(五脂執筆法), '사지집필법'(四指執筆法), '삼지집필법'(三指執筆法), '악권집필법'(握拳執筆 法) 이외에 소동파(蘇東坡)의 집필무정법(執筆無定法)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오지집필법'(五脂執筆法)이 비교적 가장 유행하고 있는 집필법이다. 이 방법은 다섯 손가락을 합리적으로 배합하여 엽( ), 압(壓), 구(구), 게(揭), 저(抵), 도(導), 송(送) 등 으로 진행시키는 방법을 말한다. 이것이 이른바 '발등법(撥등法)'이라고 하는 집필법이다. 발 이라고 하는 것은붓대에 나타난 셋째와 넷째 손가락이 둥글고 활동적이어서 움직이기가 원 활한 것을 말한다. 등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탈 때 디디고 올라가는 등자를 말하는 것으로 호구(虎口)가 둥글고 텅빈 것이 마치 등자와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등자를 얕은 데 서 디디고 올라 가면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붓도 아래로 잡을수록 움직이기가 쉬워진다. 그 러면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엽( ) : 첫째 손가락의 끝마디로 붓대의 아랫부분을 잡고 힘써 곧게 한다.

  압(壓) : 둘째 손가락으로 첫째 손가락과 힘을 균등히한다.

  구(구) : 셋째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하여 붓대의 아랫쪽을 향하게 한다.

  게(揭) : 넷째 손가락으로는 붓을 올리는 듯하게 하여 셋째 손가락과 부닥뜨리게 한다.

  저(抵) : 셋째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한 것을 손가락으로 막는 역할을 한다.

  도(導) : 다섯째 손가락으로 넷째 손가락을 당겨 오른쪽으로 지나가게 한다.

  송(送) : 다섯째 손가락으로 넷째 손가락을 보내어 왼쪽으로 지나가게 한다.

이상 소개한 것은 붓을 잡는 방법의 요령을 설명한 것이다.

다섯 손가락들의 간격을 조밀하게 할면 손바닥은 비게 하면서 세워야 하고, 팔목은 평평 하게 하며, 붓대는 곧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의 사이를 자연스럽게 서로 의지하면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만약 둘째와 셋째 손가 락 사이가 떨어지게 되면 다섯 손가락의 힘은 균등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초학자들이 범하 기 쉬운 결점이니 특별히 유의하여야 한다.

붓을 잡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어 획일화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 을 막론하고 꼭 지켤야 할 것은 손가락 사이는 조밀하여야 하며, 손바닥은 비게 하여야 하 며, 팔목은 평평하게 하여야 한다. 붓 끝은 세우되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힘을 쓸 수 있 도록 하여야 한다. 긴장을 억지로 하면 안되며, 활발하게 하되 헝클어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붓을 잡을 때 꼭지켜야 하는 법칙이다. 그리고 붓을 잡는 위치는 글자의 크고 작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난다.




출처 : 그날에 솟아 오른 해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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