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

2016. 2. 4. 15:31나의 이야기

고전(古典)은 ‘신전(新典)’이다

橫看成嶺側成峰 옆으로 보면 잿마루요 비스듬히 보면 봉우리라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과 고저에 따라 모습이 각각 같지 않구나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으니
只緣身在此山中 이 몸이 이 산 안에 있기 때문이로세

송나라의 대시인 소동파(蘇東坡)는 절경으로 꼽히는 여산(廬山)을 찾았다가 들른 서림사에서 「제서림벽(題西林壁)」 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에서 깊은 철리(哲理)를 보여줬다. 시인은 여산의 봉우리들이 보는 위치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보여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면서 그건 ‘나 자신이 이 산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깨치듯 말한다. 산 안에 있어서 오히려 산을 제대로 볼 수 없으며, 그 전모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안,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를 들려주는 소동파의 시는 한국 사회가 특히 결여하고 있는 한 가지에 대해 새삼 생각게 한다. 한국 사회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대체로 총체적인 관점을 갖지 못하고 문제의 ‘안’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소동파의 말처럼 어떤 사안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그 문제 안으로 들어가서 철저히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대개는 그 안에 머무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 문제 ‘밖’으로 나와 멀리서 바라보고 위에서 내려다봐야 그 문제의 봉우리는 어떠며 골짜기는 어떤지, 그래서 진면목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략>

   어떤 사물이든, 어떤 현상이든, 어떤 사안이든 총체로서 바라볼 때 그 대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 사회엔 우리의 옛 선비들이 추구한 전인(全人)적 인간형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조선의 개국 공신이자 대학자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진유(眞儒)’, 즉 진짜 선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유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며, 윤리 도덕의 실천가여야 하며, 역사가여야 하며, 계몽적인 성리철학자여야 하며 교육자 또는 저술가가 돼야 한다.”(한영우, '정도전 평전')

말하자면 종횡적 지식과 품성과 덕성을 두루 갖춘 종합적 지성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大學)』에서 말한 격물(格物)에서부터 평천하(平天下)까지의 안목과 역량을 함께 갖춘(갖추려는) 군자상(君子像)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이런 지식인은 두 개의 ‘전’을 겸비한 이라 할 수 있다. 즉 전(全)과 전(專), ‘양 전’이다. 전체상을 내려다보는 조감적 시야와 함께 현미경적 세밀함까지 함께 아우르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에서 배우고 새겨야 할 중요한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논어(論語)』에서 말한 것처럼 ‘박학(博學)’과 ‘근사(近思)’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즉 넓은 안목을 가지면서 자기 주변의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주변의 문제를 절실하게 묻고 궁구하되 작은 것에 붙들리지 않고 전체적인 시야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고전을 읽는 독서법 자체에서도 매우 필요하다. 고전은 그걸 떠받들기 위해, 그 책 속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떠받들기 위해 읽는 것이어선 안 된다. 고전 ‘속’에 들어가면서도 고전 ‘밖’에서 그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전 속 선인들의 얘기에 질문을 던지면서, 지금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고전을 오히려 죽이는 것이 될 뿐이며, 고전을 과거의 유물로 만들게 될 뿐이다. 그건 고전을 고립시켜 ‘고(孤)전’으로 만드는 것이며, ‘고루(孤陋)한 고전’으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흔히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쌓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 말을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읽자면 옛것을 제대로 읽을 때 그 안에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옛것을 데울[溫故] 정도로 깊이 파고들어라. 그러나 또한 그 안에만 머무르지 말라. 그러면 거기에서 새로운 깨달음[知新]이 나온다.’

‘새로운 것’은 실은 대상의 새로움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이의 관점과 시야의 새로움이다. 시야와 안목의 넓이와 깊이의 문제다. 결국 낡고 진부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두 번 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래된 것을 넓게 보고 깊게 보는 것이며, 지금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 같은 온고지신으로 고전을 만날 때 고전은 옛 고전(古典)이 아닌 오늘의 ‘신전(新典)’이 된다. 고전이면서 신전이 된다. 그렇게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진짜 온고지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고(古)와 금(今)이 한데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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