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기차와 비둘기를 사랑한 드보르자크(Dvorak) [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

2014. 1. 7. 16:26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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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24)

기차와 비둘기를 사랑한 드보르자크

 

 

 

첼리스트 고티에 카푸숑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하고 있다

 

 

체코 작곡가 드보르자크(1841~1904)는 기차와 비둘기를 사랑했다. 답답할 때는 프라하 중앙역으로 갔다. 어디론가 막 떠나려는 기차의 모습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비둘기를 보면 가슴이 설레였다. 운행 시간표까지 다 외울 정도로 자주 기차역을 찾았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운 후 집으로 돌아올 때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작곡가로 돈을 많이 번 후에는 아예 비둘기를 키웠다. 1884년 시골에 별장을 짓고 비둘기 사육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소박한 전원생활을 즐겼다. 비둘기와 기차를 동경한 그는 푸줏간 주인이 될 뻔 했던 운명에서 벗어났다. 체코의 작은 마을인 넬라호제베스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장남인 드보르자크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은 음악에 더 몰입했다. 독일어를 배우라고 덕망 높은 안토닌 리먼 선생에게 보냈는데 엉뚱하게 바이올린과 비올라, 건반악기 연주법과 화성학을 익혀 왔다. 물론 아버지도 치터(현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였다. 하지만 아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원했다. 반대가 심했지만 드보르자크의 열정과 더딘 신체발육 때문에 포기했다. 리먼 선생의 설득까지 더해져 드보르자크는 16세에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한다.

 

공부는 즐거웠지만 가난에 시달렸다. 생계유지를 위해 프라하 일류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연주하는 카렌 콤자크 악단의 비올라 주자가 됐다. 이후 오페라 극장에서 연주하게 됐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연주하는 고된 삶이 계속됐다.

 

첫사랑도 빗겨갔다. 1865년 24세에 피아노를 가르쳤던 배우 지망생 요제파를 흠모했다. 그러나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그 사이 그녀는 부유한 백작에게 시집가 버렸다. 실연의 상처에 괴로웠으나 훗날 그녀의 동생과 사랑에 빠진다. 1873년 드보르자크의 찬가 ‘자유와 후계자들’ 초연에 참가한 알토 가수 안나 체르마코바와 결혼식을 올린다.

 

묘한 인연이었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안정된 삶은 그의 창작 열기를 지핀다. 유서 깊은 성 보이체프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어 현악 4중주 3곡과 교향곡 4번, 오페라 ‘왕과 숯장이’ ‘고집쟁이들’ 등 좋은 작품을 쏟아냈다.

 

가세도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국비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다. 교향곡 3~4번과 실내악곡을 심사위원회에 제출한 결과 연간 400글루덴을 5년 동안 수령했다. 당시 교회 봉급과 개인 레슨비를 합쳐도 월 186글루덴을 벌었으니 상당히 큰돈이다. 이 풍요로운 시기 덕분에 아무 걱정 없이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그의 대표작 ‘현을 위한 세레나데 E장조 Op.22’도 이때 나왔다. 아주 애틋하고 서정적인 작품이다. 깊은 밤 연인에게 닿고자 하는 사랑의 감정을 읊었다. 가녀린 여인 같은 바이올린과 비올라, 듬직한 남성을 연상시키는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서로의 안타까운 마음을 섞으며 감미로운 울림을 빚어낸다. 그 선율이 너무 부드럽고 풍부하게 넘쳐흘러 세상의 소음과는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다. 

 

Dvorak Serenade for String Orchestra E Major Op.22

 

"Russian Camerata" Chamber Orchestra Yuri Medianik - conductor

 

Antonín Dvořák - Serenade for Strings in E major, Op. 22, B. 52

1. Moderato

2. Tempo di valse

3. Scherzo

4. Larghetto 

 

 

브람스의 후원 덕분에 유럽 음악스타로 떠올라

 

장학금을 받은 후 행운도 겹쳤다. 장학금 심사위원인 독일 작곡가 브람스(1833~1897)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보르자크의 음악성을 높게 평가한 브람스는 악보를 출판사 베를린 짐로크사에 소개했다. 그때 출간한 드보르자크의 <모라비아의 이중창>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두 번째 작품인 <슬라브 무곡집>도 성공해 엄청난 돈을 벌었다. 영국 런던에서 교향곡 7번을 초연했을 때는 ‘보헤미아의 브람스’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유럽 음악계 찬사를 받은 후 몸값도 크게 올랐다. 1886년 짐로크사는 ‘슬라브 춤곡 제2집’ 작곡료를 10배 더 올려줘야 했다. 브람스는 물심양면으로 그를 밀어줬다. 지휘자나 연주자들에게 그의 작품을 초연하도록 권했다. 심지어 드보르자크가 미국에 있을 때도 출판할 악보의 마지막 교정까지 봐줄 정도였다. 작품의 방향이나 악기 사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브람스 덕분에 유럽 음악의 중심으로 떠오른 드보르자크는 ‘현악 4중주 D단조’를 작곡해 헌정했다.

또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집>을 관현악으로 편곡해 존경을 표시했다. 브람스의 은혜를 잊지 않은 드보르자크는 자주 빈으로 찾아가 감사 인사를 했다. 브람스도 드보르자크를 만나러 프라하를 방문하며 우정을 키워나갔다. 브람스는 아량이 넓은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의 강력한 라이벌인 바그너(1813~1883)의 영향을 받고 있는 드보르자크를 이해하고 모른 척해줬다. 드보르자크의 독일어 오페라 ‘알프레드’와 현악 4중주 2~4번에는 바그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Dvorak Quartet op 34 in d minor I: Allegro. Stamic Quartet live

 

The Stamic Quartet gives a definitively lyrical interpretation of the first of Dvrka's mature quartets at the 2010 'Indian Summer in Levoca' Festival.

 

 

Dvorak Quartet op 34 in d minor II: Alla polka, allegretto scherzando

 

 

 

Dvorak Quartet op 34 in d minor III: Adagio. Stamic Quartet live

 

 

 

Dvorak Quartet op 34 in d minor IV: Finale. Stamic Quartet live

 

 

 

물론 불멸의 작곡가 베토벤(1770~1827)과 슈베르트(1797~1828)의 영향도 받았다.

 

어쨌든 끊임없이 창작의 동기를 불어넣어주는 브람스라는 든든한 후견인이 없었더라면 드보르자크의 명곡이 쉽게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브람스에게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외모도 비슷해졌다. 길고 덥수룩한 턱수염이 무척 닮았다. 하지만 그의 행운을 시기하듯 1875~1877년 아들과 두 딸을 잃었다. 피아노 3중주곡 g단조와 ‘스타바트 마테르’에 그 슬픔이 담겨 있다.

 

 

광활한 대륙 미국서 교향곡 9번 ‘신세계’ 탄생

 

40~50대 전성기를 누린 드보르자크는 브람스뿐 아니라 세계적인 작곡가들과 교유했다. 1888년 프라하를 방문한 차이콥스키와 절친한 사이가 됐다. 2년 후에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차이콥스키와 친분을 유지했다. 사회적 명예도 높아져 갔다. 프라하 음악원 작곡과 교수가 되어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제자 수크는 그의 딸과 결혼했다. 이때 그의 인기작인 피아노 3중주 ‘둠키’를 작곡했다. 슬라브의 정서를 담은 일종의 명상곡이다.

 

우크라이나 지방 민속 음악에서 유래됐으며 민족의 애환과 향수가 서려 있다.

 

하지만 드보르자크는 암울하고 몽상적인 선율 중간에 생동감 넘치는 춤곡을 넣어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창작열에 물이 올랐던 1892년 가을, 드보르자크는 특별한 제안을 받게 된다. 뉴욕 국립음악원 창립자인 자넷 서버 여사가 연봉 1만5000달러에 음악원장직을 부탁했다. 그가 체코에서 벌어들이는 연간 수입의 3배에 달했다. 생계 걱정은 없었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서는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액수였다. 게다가 대우도 좋았다. 하루에 3시간만 가르치면 되고 1년에 4개월의 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 처음에 망설이던 그는 아끼던 제자가 동행하기로 하자 제안을 승낙했다.

 

18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선 순간 그는 광활한 땅에 놀랐다. 그리고 흑인과 인디언에 대한 무자비한 인종차별에 경악했다. 게르만족에게 오랜 세월 탄압을 당한 체코인으로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낯선 땅에 염증을 느낄 무렵, 체코계 이민자들의 마을에서 위안을 얻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 9번 ‘신세계’에 그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대륙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을 담은 작품이지만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있다. 흑인 영가와 아메리칸 인디언 민요가 간간이 녹아있지만 전반적으로 보헤미안 정취가 가득하다. 이 곡에선 제2악장이 가장 유명하다. 바다 건너 고국 땅을 추억하는 잉글리시 호른 선율을 듣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흐를 것 같다. 지독한 향수병에 걸린 작곡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하다.

 

Dvorak - Symphony No. 9 "From the New World" - II (part 1)

 

New World Symphony by Antonin Dvorak. Wiener Philharmoniker.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제 2악장 Largo

 

 

 

 

깊고 뜨겁게 체코 민족을 사랑한 작곡가

 

결국 미국에서 3년밖에 못 버티고 1895년 프라하로 돌아왔다. 이때 작곡한 현악 4중주 13번과 14번은 고향의 품에 안긴 기쁨을 노래했다. 귀향한 후 일도 잘 풀렸다. 1901년 프라하 음악원장이 되고, 오스트리아 상원의원에 임명되며 음악가로서 최고 영예를 누렸다. 푸줏간 집 아들로서는 엄청난 출세를 한 셈이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가는 아니었다. 강경론자는 아니지만 체코 국민에 대한 애정은 깊었다. 출판사가 자신의 이름을 안톤 드보라크라는 독일어 풍으로 표기하면 거세게 항의했다. 체코는 오랫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식민지였다. 국토를 점령당하고 종교(카톨릭)와 언어를 탄압 당했다. 그러나 체코인의 수준 높은 문화 덕분에 민족 멸망의 위기를 넘겼다. 1860년대에는 민족 자결투쟁이 일어났다.

 

드보르자크도 민속시 소재 교향시 ‘정오의 마녀’와 ‘산비둘기’를 발표했다. 체코어로 오페라 ‘루살카’도 작곡했다. 루살카는 슬라브 신화 속 물의 요정으로 호수나 강에 산다. 이색적인 선율미와 치밀한 구성이 더해져 체코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호평을 받았다.

 

특히 아리아 ‘달에게 부치는 노래’가 유명하다. 팝페라 가수 사라 브라이트만이 2000년 이탈리어로 번안해 불러 화제가 됐을 정도로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체코 민족의 음악성을 세계에 알린 드보르자크는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 1901년 9월 그의 60세 탄생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프라하와 고향 넬라호제베스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오페라 시리즈 마지막 날에는 프라하 국민극장에 횃불 행렬이 이어졌다.

 

Sarah Brightman La Luna (Live @ Otobutai)

 

Otobutai concert Dvorak

La Luna (Song to the moon) by Sarah Brightman

 

 

하지만 그의 음악적 영감은 늙어가고 있었다. 바그너를 모방한 듯한 마지막 작품인 오페라 ‘아르미다’ 초연이 끝나기도 전에 병마에 시달렸다.1903년 5월 1일 급사해 4일 후에 국장(國葬)이 치러졌다. 죽기 직전에 12번째 오페라를 구상 중이었다고 한다. 좋은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한 남자의 일생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사진제공 서울시립교향악단]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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