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재즈 드러머, 류복성

2014. 1. 7. 16:10사람과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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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아이돌판 진짜 음악 설 자리 없어”

재즈 드러머, 류복성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욕이 난무하는 인터뷰였다. 동행했던 사진기자가 인터뷰 장면을 동영상에 담다가 난색을 표할 지경이었다.

 

“기사에 내가 한 욕까지 다 써버려. 책상머리에 앉아서 어떻게 권력 좀 얻어볼까 하는 개○○들이 문제라고.”

 

재즈 드러머 류복성(70)씨가 기자에게 벌써 네 번째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반백 년 가까이 드럼을 치며 외길을 걸어온 한국 재즈 거장의 손은 그의 말투처럼 까칠했다. 평소 그는 무대 위와 사석에서 말이 거칠기로 유명했다.
   
초면인데도 무례한 질문이 쏟아졌다. 기자가 아니라, 류씨가 던지는 질문들이었다. 류씨는 재미동포 출신의 인턴 사진기자를 향해 “어디서 왔어? 한국인이야? 결혼은 했어? 애인은?”이라고 짓궂게 묻곤 아직 한국어가 서툰 사진기자가 당황하자 “이렇게 별걸 다 물어보는 게 한국인이야. 한국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집에 밥숟가락 몇 개인지까지 다 물어보잖아. 당황스럽게 해서 미안해요. Excuse me∼”라며 윙크를 찡긋 날렸다.

 

류복성. 20대의 기자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이었다.

40대 이상의 음악 애호가라면 익숙한 이름이다.

색소폰 연주자 정성조, 보컬 박성연, 피아니스트 신관웅 등과 함께 재즈 동토(凍土)였던 한국에 재즈 음악을 알린 1세대 연주가다.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 KT전화국 삼거리 인근의 ‘류복성 드럼 & 퍼커션 스쿨’을 찾은 건 10년 만에 재개되는 경북 울진 재즈페스티벌을 사흘 앞두고였다. 8월 6~7일 양일간 울진에선 재즈페스티벌이 열렸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3회에 걸쳐 열렸으나 주최 측의 사정으로 무기한 연기됐던 것이 10년 만에 새출발했다. 류복성 재즈밴드는 이 페스티벌에서 ‘재즈 메신저스 올 제너레이션’이란 이름으로 참가해 젊은 재즈 음악인들과 세대를 연결하는 앙상블을 선보였다.
   
10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울진 재즈페스티벌을 앞두고 류씨는 기대와 우려를 표했다.

 

“재즈음악인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다시 마련된 점은 다행이지만 여전히 재즈라는 음악 장르가 국내 음악산업의 변두리에 머물고 있는 부분은 극복해야 한다”는 게 류씨의 말이었다.

 

“우리말 가사로 된 좋은 재즈를 만들어내는 뮤지션 차원의 노력도 더 많이 필요하겠지.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는 상업적 이윤만 따져서 ‘돈 안되는’ 재즈 공연엔 후원을 안 해주는 행태가 더 문제야. 도둑놈들.”
   
   
“재즈 뮤지션들도 더 노력해야”
   
류씨가 드럼에 미친 지 올해로 53년, 그는 70세 백발 노인이 됐다. 하지만 인터뷰 전날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라이브 재즈클럽 ‘천년동안도’ 무대에서 봤던 류씨의 연주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봉고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흥에 겨워 연주하다가 탬버린으로 리듬을 맞추기도 하며 공연시간의 절반가량은 서서 연주하다시피했다.
   
1970년대 인기드라마 ‘수사반장’의 인트로 연주로도 유명한 류복성씨는 재즈를 선택함으로써 생활고를 겪는 등 어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류씨의 재즈 사랑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친 이 외래 음악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류씨는 “재즈 연주는 악보가 있지만 (악보에) 얽매이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즉흥적으로 작곡을 해야 한다”며 연방 “지구촌 최고의 음악”이라고 말했다.

 

“난 우리 국민의 50% 이상이 재즈음악을 듣는 재즈열풍이 올 것이라고 확신해. 그것도 곧.”

 

류복성 재즈밴드는 요즘도 서울 홍대, 청담동, 이태원 등지의 재즈클럽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 지난해엔 류씨를 포함한 한국 재즈 1세대의 이야기를 담은 ‘브라보! 재즈라이프’(감독 남무성)란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최근 2~3년 사이 TV 출연은 뜸했지만 아예 브라운관과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류씨는 그의 오랜 동료 김준(보컬)·신관웅(피아노)·이동기(클라리넷)·임헌수(드럼)·최선배(트럼펫) 등과 함께 지난 3월 12일 SBS 예능프로그램 ‘스타킹’에 출연한 바 있다.

류씨는 “지난번 SBS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한 건 우리 뮤지션들 차원에서 대중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한 것”이라며 “이런저런 이유들로 TV에서 재즈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아이돌판인 게 문제야. 모든 매스컴이 완전히 ‘아이돌판’이잖아. 아주 개○○ 같은 구조야.”

 

류씨가 한 시간 남짓의 인터뷰 동안 익숙해져 버린 욕설을 유독 거칠게 내뱉었다. 그는 우리 사회에 대한 쓴소리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주름진 얼굴과 작은 눈에서 ‘삐딱함’이 엿보였다. 류씨는 “우리 같은 뮤지션은 방송사와 출연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돈을 주고받는 관행에는 거리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재즈를 심다
   
류씨의 연습실에선 한국 재즈의 대가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곰팡이내가 났다. 연습실 벽면엔 류씨의 대형 얼굴 사진이 걸려 있었고 사각형의 공간엔 드럼, 앉아서 손으로 치는 작은 북 봉고, 선 채로 손으로 치는 북 콩가, 손으로 쥐고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아프리칸 셰이커 등의 타악기와 재즈 음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습실 한가운데 유리를 덮어 놓은 지름 약 50㎝짜리 드럼을 탁자로 삼아 자리잡았다.
   
“왜 재즈 드러머가 됐냐고? 그럼 김 기자는 왜 기자가 됐어?”

류복성씨는 “좋아서 (드럼을) 치는 거지 뚜렷한 이유 같은 게 있겠냐”며 오히려 기자에게 반문했다. 경기도 용인 읍내에서 4㎞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자란 류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라디오에서 재즈 음악을 들었다. 미국 재즈 연주가 마일스 데이비스의 ‘스트레이트, 노 체이서(Straight, No Chaser)’란 곡이었다.

류씨는 “그땐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이게 무슨 음악이지? 앞으로 할 음악은 바로 이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의 본격적인 재즈 인생은 가출과 함께 시작됐다. 중2 때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류씨는 부모의 반대를 피해 집을 나와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마침 축구 명문으로 알려진 서울시 강동구의 동북고등학교가 밴드 장학생을 모집하자 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재즈 음악을 배울 수 없었다.

“당시 유일하게 재즈를 연주하는 곳이 미8군 쇼 무대였던 거야. 그래서 낮엔 학교 가고 밤엔 미8군에 가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틈틈이 재즈를 배웠어.”

 

1958년, 17세의 그는 아직 정식 미8군 쇼단이 아니라 악기·조명 세팅 등을 거드는 ‘재즈보이’였다.
   
“내 얘기는 하루 종일 해도 모자라.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음악한 지 50년이 넘었잖아.”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한 재즈바에서 열린 '제4회 울진 재즈 페스티벌' 제작발표회에서 '재즈 메신저스 올 제너레이션'의 퍼커셔니스트 류복성이 연주하고 있다. '재즈 메신저스 올 제너레이션'은 류복성(퍼커션)과 정성조(색소폰)가 결성했던 전설적인 재즈 밴드 '재즈 메신저스'에서 비롯된 팀으로, 이들 두명에 후배들이 가세하며 40년 만에 부활했다. 2011.7.21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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