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26. 10:23ㆍ사람과사람들
역사를 바꾼 31명의 별난 환자들
리차드 고든 저 김철중 역 에디터 2001.06.01
니콜로 파가니니 Nicolo Paganiniㆍ1782~1840
♣ 11세부터 평가받은 전설적 바이올린 명 연주가
천재 연주가의 시체는 가톨릭 정통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살아 있는 세월보다 더 오래 이곳저곳 떠돌다가 교회에 안장됐다. 파가니니는 죽은 후에 더욱 성가신 환자였다.
그는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토니오는 해운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는 꿈 속의 천사로부터 니콜로 파가니니가 사상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된다는 계시를 받았다. 니콜로는 단기간에 만돌린에 숙달하였다. 성 로렌쪼 대학원의 악장으로부터 바이올린을 지도받았는데, 11세 때부터 일요일마다 바이올린 독주를 하여 교회 청중을 들뜨게 하였다. 15세가 되자, 부친은 니콜로를 데리고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의 도시로 순회연주 여행을 떠났다. 토스커니 주에서 바이올린과 기타 음악을 작곡하면서 3년 간 조용히 공부하고, 1805년에는 토스커니 대공(大公) 부인이 된 나폴레옹의 여동생 루카 피옴비노 공작부인의 궁정에서 8년간 악장으로 일했다. 1815년에 베네치아인으로 댄서인 안토니아 비안키와 깊은 사이가 되었고, 1826년에 아들 아키리노가 태어났다. 1813년에 파가니니는 연주여행을 시작하여, 그 이래로 그의 한평생은 전 유럽에 걸쳐 개선 행진의 주인공이 되었다. 비엔나에서는 그의 초상화와 흉상이 길거리에서 팔리고, 그의 이름이 의류, 향수, 보석, 여자의 화장 도구나 케익까지 사업적으로 새기어져 듬뿍 돈을 벌었다. 런던의 킹 극장에서의 마법과 같은 연주로, 군중이 살아 있는 인간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려고 파가니니를 만져보려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영국에서 1년에 1만 7천 파운드를 벌었다. 그러나 항간에는 아주 수수께끼와도 같은 농담이 떠돌고 있었다.
아아 듣고 싶다, 파가니니. 저 녀석들 입장권을 샀구나, 5기니를 지불하고서. 누가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으려 하는가? 그들은 '팩오니(얼간이)'
무대 위의 파가니니는 키가 크고 바싹 야위었으며, 검정 머리카락은 길고, 눈은 움푹 들어간 이상한 모습이었다. 청취자는 살아있는 해골이라고 탄식했다. 그는 도박가였다. 그래서 노름빚 때문에 바이올린을 전당포에 잡히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프랑스인 상인이 현재 제노바시 공회당에 놓여져 있는 명기(名器) 구아르네리(1698~1744. 주세페 안토니오 구아르네리. 이름난 현악기가 만들어 지는 곳으로 유명한 크레모나의 바이올린 제작자. 같은 크레모나에서 명기를 만들어 활약한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에게 배웠다)를 그에게 증정했었다. 파리에 만들어진 그의 '카지노 파가니니'는 1838년에 파산되어 버렸다. 파가니니의 특별한 재능은 악마가 점지해준 신통력에 따른 것이며, 그가 살인범으로서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한 줄의 현밖에 없는 바이올린으로 연주 기술을 습득했다고 하는 전설이 떠돌기도 했다. 그런 소문에 대하여 그는 오히려 기쁜듯이 청중에게 인사를 했다. 파리에서 파가니니는 베를리오즈에게 스트라디바리우스 비올라를 써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작곡해 달라고 의뢰했고, 교향곡 '해롤드 인 이탈리아'을 증정 받았으나, 비올라 파트가 어딘가 부족하다고 말하며 받기를 거부하였다. 슈만,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의 피아노 음악 중에서 파가니니의 멜로디(리스트, 슈만은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기상곡"을 기초로 한 변주곡을 썼고, 그 밖에도 브람스, 라흐마니노프도 이 곡을 기초로 피아노 작품을 썼다)가 정중하게 사용되고 있다. 1820년에 그는, 바이올린을 구사하여 기술적으로 연주 가능(그의 체격, 용모와 거미와 같이 긴 손가락은 그가 거미 손가락증의 환자이며, 이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연주를 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하도록 고려한 24개의 기상곡(綺想曲) 작품 1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이외는 출연료의 가격이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비밀로 하고, 그의 악기와 마찬가지로 악보도 손 밑에 두고 공표하지 않았다. 6년 간의 순회 흥행 후, 그는 파르마에 틀어박혔다. 그는 병을 앓고 있었다. 고향 제노바에 대한 향수병에 사로잡혀서 배를 탔으나 니스에 도착하고, 꽃시장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프레펙처가에서 56세의 나이로 결핵 때문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기구한 순회는 다시 시작되었다. 로마 교황에 의해서 1827년에 금의 박차(拍車)훈위(Order of the Golden spur, 1559년에 로마 법왕 파울로 4세에 의해서 창립된 나이트작위)가 수여되기는 했으나, 파가니니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열렬한 신자가 아니었고 규율을 중시하지 않는 교도였었다. 가톨릭 교도에게 임종은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잊었는지 혹은 거절당했는지, 제대로 된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루지 못했다. 결국 이 사실은, 만약 그의 유해가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성지에 불법 체재한 것이 되고 만다. 그가 죽은 다음날, 관은 상점이 모여 있는 내륙 쪽으로 향하는 산-레파레이트 시가지의 교차점에 있는 양복점으로 옮겨지고, 친절하게도 근처 모자점의 지하실로 안치되었다. 다음에 관은 니스 병원의 개인용 병실로 옮겨졌다.
한편, 파가니니가 8만 파운드의 유산을 남긴 아들, 아키리노는 불친절한 사교(司敎)에 대한 교회법적 소송 절차를 밟았었다. 하지만 그는 패소했다. 그는 항소하였다. 이 항소는 로마 교황청 법정까지 가고 그때 다툼의 원인인 유해는 몬레카를로로 향하는 코오니쉬 도로에 있는 빌프랑쉐 격리 병원에 가로 누어 있었다. 사후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이상한 냄새에 시비를 걸었다. 유해는 전염병 환자나 격리 환자들의 집단 묘지로부터 떨어져서, 바닷물의 간만이 없는 지중해의 해변 모래밭으로 이장되었다. 어느날 밤, 죽은 천재의 혹독한 처치에 분개한 5인의 친구들은, 횃불에 의지하여 갑(곶)의 끝족까지 호스피스 만을 돌아 관을 걸머지고 갔다. 5인은 물가에 있는 낡고, 동그런 탑의 표지판 옆에 유해를 매장하고, 석재로 묘를 밀봉했던 것이다. 그 무렵 거장이 죽은 후로 이미 1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의에 찬 아들은 곧장 유해를 탄생지인 제노바로 옮길 것을 결정했다. 그는 보트를 전세로 빌리고, 관을 파내어 주의 깊게 보트의 갑판 위에 안치했다. 제노바의 검역관은 관과 살아 있는 시중꾼들을 상륙시키지 않도록 결정했다. 배가 마르세이유에서 왔는데 당시 마르세이유에는 콜레라 환자가 나왔다는 핑계 때문이다. 배는 재출범 해서 칸느에 도착했으나, 칸느도 마찬가지로 배를 환영하지 않았다. 크로니세테 갑(岬)에서 보이는 레린 제도가 겨우 유해를 받아들였다. 무인도이기 때문에 이의를 신청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4년 동안, 파가니니는 고독한 바위섬 세인테페롤의 돌 밑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후, 그는 재차 파르마로 돌아갔다
그의 아들은 유럽의 우상을 한 구석에 영구히 방치해 두는 것이 애가 탔다. 파가니니는 줄곧 마음이 내키지 않는 자신의 정원에 매장되었다. 8년 후, 그는 다시금 파헤쳐져서 재방부처리가 가해졌다.
그후 23년이 지나서, 로마 교황은 관대한 처치를 취하도록 결정하고, 파가니니는 다시 파헤쳐져서 파르마의 마돈나 델라 스타카타 교회에 매장되었다. 그 무렵은 그가 죽은 후 생존하고 있었던 기간보다 20년 짧은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영원한 휴식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1893년, 유체의 신원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어느 헝가리인 바이올린니스트가 모두에게 존경 받고 있는 파가니니의 유해가 가짜인 것이 확실하다고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67세의 아들은 아버지의 시들시들한 검은 코트, 또한 '여위고, 가냘픈 얼굴, 긴 볼수염과 목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그리고 어깨와 약간 들여다 보이는 늑골의 흰 뼈'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실로 거장의 고별 연주에 어울리는 피날레였다.
이 이야기는 런던 병원의 프레데릭 토리부스 준남작에 의해서 말해진 이야기이다. 프레데릭은 1902년에, 에드워드 7세의 급성 맹장염 수술 때문에 대관식을 연기시킨 의사이며 그의 사후 50년이 지나서, 프레데릭이 발견하고, 교정하고, 양육한 엘레펀트먼(중증의 신경선 유종 환자로 엘레펀트먼(Elephantman)이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것을 프레데릭이 구해냈다. 후일, 영화화되어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의 이야기는 런던의 웨스트엔드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크게 히트했다.
55세 때, 프레데릭은 사람의 생명을 구조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 후 15년간 니스 북방 알프스 마리타임의 비탈에 자라는 미모사(합수초, 아카시아 꽃) 속에서 브이야베스(몇 가지 종류의 어류, 조개류를 마늘, 사프란으로 풍미를 곁들여 푹 삶은 프랑스 남부, 특히 마르세이유의 명물 요리), 프로방스 와인과 코트 다주르의 도박장 등을 즐기며 유유자적 글을 쓰는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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