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18. 10:00ㆍ나의 이야기
신고산타령은 함경선 철도 김낙기 정읍농악 멜러디
백제가요 정읍사 연주 소리에 신고산 타령과 유사한 부분이 함경선 공사감독 김낙기 고향 재인 유천석 전광문의 소리채보
함경도는 농악이 없다 정읍농악 '삭대엽 정읍'멜러디 삼채장단 그대로 묘사한 곡인데 첫부분은 저음을 고음으로 변주한다
백제시대 노래로서 그 음악소리가 조선시대 아악으로 편곡 궁중음악에 정읍(수재천)으로 남았고 민간 전통계승음악으로는 정읍농악의 태평소 멜러디로 아리랑, 고향의봄 등 한국민요와 가요의 원류 소리기본으로 남아 고증되고 있다
후백제 애국가이며 고려 무신정권부터 조선시대 군악으로 사용했고 최근에도 1894년 전봉준 동학군이 정읍에서 군악으로 사용하엿고 1906년에 대원군의 협조로 최익현이 이어서 정읍 태인지역 호족 도강김씨 김직술 김기술,임병찬 권영모등이 항일의병 행진에 사용하였다
그후 전봉준 친족 전해산 의병이 최후로 죽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했다
조선정부의 최후항일의병을 두번이나 실패한 원인이 국제정세 병법과 글을 모르는 무학력 머슴급 농군으로 실패만 되풀이하여 먼저 "배워야 이긴다" 라는 담양 일신학원 선교사등 선각자 들이 나서서 미국형자유 사립대학 와세다 대학에 이광수 최남선 신익희 장덕수 백관수 김성수 등이 유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미국 월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담화로 동경유학생에서 부터 조직하여 3.1만세운동이 일어나 1920년 한국독립운동이 함경도 만주 러시아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진다
결국 이런 일로 미국의 도움으로 연결 임시정부와 미국 승전으로 해방된다
1918년에 이웃마을 가인 김병로, 김상태, 유학규등이 권유하여 정읍호족 의병장 김직술 김기술 친족 김낙기를 동경 유학을 보낸다
토목과 전공으로 미국인 교류를 위해 영어를 잘 알고 일본 철도공사 감독에 알바로 일해 고학햇다
1923년 동경관동대지진사건에서 한국인 학살에 동경대학생으로 항거하다가 학살된 동포 유골을 포켓에 지니고 한국에 귀국 고향에서 농악대를 인솔 협율사 공연으로 민족문화를 계몽하며 걸궁으로 모은 자금을 은밀히 독립자금으로 만주 지청천 장군과 홍범도 장군지역으로 보낸다
일본 경찰의 비리를 보면 학살된 동경동포 유골을 포켓에서 내보이고 주먹으로 구타했다
조선총독부에 최남선 등 와세다 대학 정계 선배들이 은밀히 도움으로 발각되지 않앗 고 김병로 고향 선배의 변호로 무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독립정신 고취 계몽을 위하여 서울의 최고 연극영화 감독 안종화를 두만강변 회령에 초치 독립운동 연극을 하면서 만주 독립군 나운규와 윤봉춘이 참여한다
여기서 함경도와 전라도 정읍 동학군 김개남 친족 의병파 동경유학생 김낙기와 양도 독립군 후손이 만나게 된다
1977년 김낙기고향 정읍 칠보중학교에서 KBSTV 기록영화 녹화 (권오성PD와 백호빈감독)
김낙기는 고향에서 농악연주가 가능한 권순국이 구성한 유동근 서넙죽 김낙선 신동구등 인부를 많이 데려와서 작업하고는 정읍농악을 공연햇다
유동근 전광문 재인광대로서 대대로 전통이은 혈족이였다
북한지역은 탈춤 타령박자의 놀이로서 전라도 농악의 소리는 없다
신고산타령은 정읍농악 삼채장단 리듬소리 허허굿 장단 그대로 이며 한국민요에서 백제가요요 가장 유사한 토탬소리이다
아래에 호남유일 고유 허허굿 장단과 함경도 신고산 타령 소리를 비교한다
신고산이 우르르르 기차나가는소리에
갱게게갱 게게게갱 갱게게갱 게게게갱 (정읍 칠보지역 허허굿 농악장단)
신고산 큰애기들 밤보 짐만 싸누 나
갱게게갱 게게게갱 갱게게갱 게게게갱 (정읍 칠보지역 허허굿 농악장단)
이 장단은 전주신흥고등학교와 만주 지청천 독립군학교 교가 북한 소년행진곡으로 그장단은 정읍농악 '삭대엽 정읍' 전광문 태평소곡을 모방한 가장씩씩한 곡이였다
이런 감명깊은 농악을 제지하는 일본 순경을 감히 구타하는 김낙기 행위를 모델로 아리랑 주인공 미치광이 김영진이 일본순경을 때리고 체포되는 아리랑영화 내용으로 제작한다
이상준 홍난파 제자 이정숙이 아리랑을 부르자 단성사 극장은 울음바다 일경이 호각불고 즉시 상영금지 햇다 이정숙의 오빠 이구영감독과 안종화 감독의 나에게 증언이다
와세다대학 호남학생단장 별명이 호랑이 얼굴에 카이젤수염으로 동경 큰주먹 깡패로 그 당시 불렷다고 고향마을 친구 손영종 전 칠보초등교장이 전하기도 했다
김성수 김병로 신익희는 동경유학생 후배를 동학군 친족 천하장사 김환채 아들 큰주먹 김낙기를 스카웃하여 동경의 거리에서 유명하여 왜소한 왜인학생을 제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낙기가 원산에 거주하면서 1926 신고산 철도를 일하는 시기에 무명의 소규모 '신고산타령' 민요가 이상준의 악보집에
기록되어 남아잇다
이곡 신고산 타령은 가사리듬이 정읍농악 멜로디로서 정읍사 그 소리를 정읍재인 농악수 전광문이 태평소로 분소리이다
정읍농악 멜러디는 1술령수, 2만대엽 정읍, 3 중대엽 정읍(태평가), 4속대엽 정읍,으로 불고있엇으나 (지금은단절)
4가지 정읍농악 멜러디로 한국민요와 가장 유사한 멜러디가 4 속대엽 정읍이다
백제가요 '정읍'이 왜 함경도 신고산 타령으로 함경도 민요로 남아 잇는 이유는 함경선 철도건설 엄청난 인부는 와세다대학생
정읍 김낙기 정읍농악대 소리가 그대로 입으로 불려 가사만 붙여진 것으로 본다
이 농악은 문화국 정부 미국통치시기 1948년 한국대표 음악으로 제주도 4.3 전투에 위문공연단으로 초청공연했다
홍범도 부하 독립군 나운규는 부산으로 안종화감독에게 찾아가 배운 기술로 항일의병 독립영화를 만들려고 구상하엿다
동경유학생 김낙기는 고향 원촌마을 이나무아래 솟대를 세우고 아리랑 .신고산타령 판소리등을 천둥소리처럼 부르며
일본 순경의 거스름을 보면 옷을 벗기고 구타햇다 농악과 일경구타 표현이 아리랑민요 영화 모델 김낙기고향의 현재모습
한국모든학교에서는 국어시간에 정읍사 "달아노피곰 돋으샤..." 라는 국문학 시로만 배워왔다
학교음악시간에는 대학에서는 전혀 배우지도 않는 한국전통음악의 기둥 중심체 새소리모방 소리를 모르고 있다
후백제시대 애국가로 사용하다가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 폄하정책으로 태산군 속현 정읍현에 음성서(音聲署)를 음성향(音聲鄕 현,삼산동 음성마을)에 설치하고 정읍이라고 부른다
태산군은 정읍 칠보면으로 조선시대 명나라 압력에 박연이 ‘페가망신곡’ 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것을 세조대왕과 성종때 유자광이 악학괘범에 위험한 한글로 기록하여 연산군시대
궁중음악으로 세조대왕의 유일한 후궁 근빈박씨가 최초의 인간문화재 형태로 궁중에 연산군
후원으로 공연을 하였으나 중종이 버리고 태인사람 영조대왕의 어머니 숙빈최씨 손다 정조대왕 순조대왕이 궁중악으로 사용 궁중악사들이 왕의 행차에 사용하엿고 1888년이후 애국가 군가 동요 유성기 산업에 주로 사용했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천일 김후진 권극평, 1895동학군 김개남, 1905 최익현 김기술 의병의 훈련지 현재의 모습 그역사를 이 나무가 증언한다
전라도 1905 소년동학군 김병로 김성수등이 한일합방후 일본유학 1919 3.1 운동 주동자로 함경도 독립군 상해정부를 세운 성역 이제는 일본총독이이 만든 서울에서 전라 함경배타 조작정서가 지금은 지역감정 전술로 변질되었 다
미국 도움으로 신익희 이시영 상해임시정부를 김구선생이 김일성을 찾앗다는 이유로 마치 김구선생 만을 성역화하고
독립의 주역 김성수를 친일로 부각하고 김병로 장덕수 백관수 신익희 이시영등을 폄하시켜 왜곡교육 되고 잇다
일본세력에 유별나게 반대하는 전라도 !! 임진난에서 부터 유달리 정읍 동학군까지 일본 식민지진출에 걸림돌이였다
조선말기에 대원군이 간신히 건저낸 이씨 왕권이 민비에게로 돌아가자 대원군은 동학교도를 선동했다
대원군 목적은 왕권이요 동학군의 목적은 양반의 꿈을 이루는 계급타파를 요구하였는데 그원인은 미국 링컨의 "노예해방" 소식을 선교사 등으로 이미 듣고 자유의 미국국민을 동학군은 동경했다
대원군이 충청도 경상도에 호소해도 오로지 전라도 정읍에서 만이 항일동학군이 일어나고
500년간 뛰어든 동학군의 세력은 전국을 울렸다
양반세력을 고수하려던 민비 추종세력 최익현(포천사람)도 대원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읍 동학군의 항일병영기지를 인수하여 1906년 항일군으로 나섰다
포천사람 최익현이 항일 운동을 경기도 고향에서 도 못하고 동학군 전라도 항일세력을 이용하려고 내려갔다
이처럼 항일세력 독립군은 전라도가 아지트로 일본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영조때 이인좌. 박필현의 난에도 정읍 도강김씨 김도연의 세력으로 진압하였고 전봉준(1894.1- 1895 .3 )동학군은 김개남과 같이 일어낫고,
권희덕 n 참고자료 ------------------------------------------------------------ 독립운동가 유학규 전북 정읍(井邑)사람이다. 1919년 10월경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의원이었던 조한옥(趙漢鈺)을 중심으로 윤철(尹喆)·이태훈(李泰勳) 등과 조선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기로 협의하고, 유만규(柳滿圭)로부터 5천원을 모금하여 윤철(尹喆)을 거쳐 조한옥(趙漢鈺)에게 전달하고 이를 상해(上海) 임시정부에 납부하였다. 정읍군 칠보산 승부리 집을 일본군이 수색 상평통보 동전 자루를 마루밑에, 또는 대나무 숲에 또는 감나무밑에 뭍어 숨겨 두었다고 속여 시간을 벌어 함경도로 돈이 점달 되어 온 가족이 고초를 당했다
윤철(尹喆)이 고일정(高一政)과 협의하여 도(道)에는 의정사(宜政使)를, 군·면에는 관장(管長)이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전북 정읍군(井邑郡) 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상해 임시정부 일원인 이영선(李英善), 어대선(魚大善) 등과 협의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인 이시영(李始榮) 명의로 독립공채(獨立公債)를 발행하여 그중 4천원을 유만규(柳滿圭)로 하여금 현금화할 것을 위탁하고 활동하다가 1921년 6월 7일 피체되었다.
1922년 3년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 집행유예 2년형을 받았다.
유학규는 독립운동의 인재양성을 위해 김성수 동학군 김기술 장군 친족 김낙기를 와세다대학에 정읍 거부 김상태와 보조 유학을 보냈다
1916 유학생 백관수 이광수 송진우 담양금성면대곡 학우
1918 미국 월슨대통령 평화원칙 자국독립선언
1919년 동경유학생 2 8 독립선언 일본강제 해산
1919년 3.1운동
1920 지청천장군 탈출 독립군
1922 지강내 사당패농악, 윤세만 내장사 절걸궁 농악단
1922 동경유학생 회령에서 연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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