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기금

2013. 1. 17. 17:53알아두면 조은글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중국 한(漢)나라 때 사람으로 말더듬이(訥辯)이었으나 시문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타기로 유명했다. 젊은 시절 뜻을 이루지 못해 빈한한 생활에 불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친구인 사천(四川)성 임공(臨?)현 현령 왕길(王吉)에게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다. 부호 탁왕손(卓王孫)이 두 사람을 연회에 초대했다. 연회에서 상여는 탁왕손의 딸 탁문군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래서 녹기금(綠綺琴)으로 <봉구황(鳳求凰)>이라는 소야곡(小夜曲/세레나데)을 연주해 문군을 향한 자신의 심정을 노래했다.

 

본명이 문후(文后)인 문군은 16세에 아버지 친구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1년도 채 안 돼 남편을 여의고 친정에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까 17세 생과부였다. 하지만 그 미모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의 미색은 문헌에도 나와 있다. "문군은 용모가 아름다웠다. 눈썹 빛이 마치 먼 산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뺨 가장자리는 마치 연꽃과 같으며, 살과 피부는 부드럽고 윤기가 도는 것이 마치 부용과 같아, 열입곱 나이보다도 앳되보였으며…"(文君?好, 眉色如望遠山, ?際常若芙蓉, 肌膚柔滑如脂. 十七而寡/문군교호, 미색여망원산, 검제상약부용, 기부유골여지, 십칠이과). 

 

※ 근현대 중국화가 유능창(劉凌滄)의 <문군무금도(文君撫聽琴圖)>

 

실상 그녀의 용모는 너무나 뛰어나 문군(文君)하면 곧 미인의 별칭이 될 정도였다. 중국 미인의 조건인 원산미(遠山眉; 먼 산을 보는 듯 둥근 눈썹), 연화협(蓮花頰; 연꽃 같이 붉은 뺨), 부용부(芙蓉膚; 부용 같이 부드러운 피부)라는 말도 그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상여가 일별(一瞥)에 흠뻑 빠진 것도 무리가 아닐 성싶다. 문군도 상여의 호감이 가는 인상과 뛰어난 재능에 마음이 기울었다. 특히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상여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여가 워낙 한미(寒微)한 처지였으므로 탁왕손이 두 사람을 맺어줄리 만무했다. 그래서 둘은 그 날 밤 성도(成都)로 도망쳐 버렸다.

 

낡은 신파극을 연상시키는 재력가 탁왕손의 어린 과부 딸과 가난뱅이 상여의 야반도주는 탁왕손의 불같은 분노를 자아냈다. 탁왕손은 찢어지게 가난한 상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여의 집이 얼마나 가난했는지는 "방안 살림살이라고는 네 벽밖에 없었다"(家徒四壁/家徒壁立)는 표현이 대변해준다[※ 徒: 다만(但/只). cf: 徒勞: 애만 씀. 徒勞無功: 애만 쓰고 공이 없음].  

 

※ 명대(明代) 화가 두근(杜菫)의 <聽琴圖>.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고사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사마상여가 녹기금으로 봉구황을 연주하며 탁문군을 유혹하는 장면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거문고 타며 문군을 바라보는데, 봄바람 불어 머리카락 날리네"(彈琴看文君  春風吹?影)라는 제시(題詩)가 쓰여 있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문군이지만 상여의 가난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곧 상여와 백년가약을 맺고 직접 생업의 일선에 나선다.

 

먹고살기가 힘들어지자 두 사람은 성도에 술집을 차리기도 한다. 문군이 직접 손님을 맞이하고 술을 따랐으며, 상여는 짧은 바지를 입고 손수 음식을 나르고 접시를 닦았다.

 

그래도 탁왕손의 태도는 요지부동, 냉담하기만 했다. 전혀 딸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친구의 간곡한 권유로 겨우 가난을 면하게는 해주었지만 여전히 딸과 사위의 내왕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 근현대 중국화가 안소상(晏少翔)의 <문군고주(文君沽酒)>

 

얼마 후 효왕이 죽고 무제(武帝)가 등극하자 상여의 집안에 볕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궁핍한 가운데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아 틈틈이 시(詩)와 부(賦)를 짓곤 했다. 그렇게 습작처럼 지은 <자허부(子虛賦)>가 무제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무제(武帝)는 그 글을 읽고 몹시 흡족해 하며 "나는 어찌하여 그 사람과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하는가"라며 애석해 했다.  당시 촉(蜀)에 양득의(楊得意)란 사람이 구감(狗監)이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제에게 "이 글은 고향사람 사마상여가 쓴 것입니다" 하였다.

 

양득의의 말을 들은 무제는 크게 놀라면서 당장 사마상여를 불러오게 하여 벼슬을 내렸다. 이리하여 사마상여에게 출세의 길이 열렸다. 

 

이 때부터 그는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탁왕손을 비롯하여 그의 집안에서는 상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 청대(淸代) 화가 호술(胡術)의 <문군당로(文君當爐)>

 

사람이 살다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느 때 상여에게 여자가 생겨 소실로 들어 앉히려는 움직이 있었다.

 

벼슬아치들이 소실을 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문군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문군은 온몸으로 저항했고 마침내 상여는 문군의 결기에 눌려 취첩을 단념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문군이 <백두음(白頭吟)>이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고 전해온다. <백두음>은 두 마음을 품은 남자의 변심에 단호히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여자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노래다.

 

하지만 <백두음>은 탁문군의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 한(漢)나라 때 민간에 떠돌던 작자 미상의 노래라는 것이 정설이다. 차라리 문군이 <백두음(白頭吟)>을 읊어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다고 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얘기가 될지 모르겠다.

 

상여와 문군의 애정사에 이 노래가 끼어 든 것은 아마도 두 사람의 갈등과 화해의 정점을 극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이 노래가 썩 잘 어울린다고 본 후세 사람들의 가필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의 공협현 성내에는 문군공원(文君公園)이 있고 경내에 문군정(文君井)이란 우물이 있다. 문군정은 당시 사마상여와 탁문군이 주점을 차렸을 때 사용하던 우물이었다고 전해온다.

 

다음은 <백두음(白頭吟)> 한 대목이다.

 

聞君有兩意   故來相訣絶
今日斗酒會   明旦溝水頭
(문군유양의  고래상결절
 금일두주회  명단구수두)

 

듣자니 님께서 두 마음을 지니셨다지요
이에 찾아뵙고 인연을 끊고자 하나이다
오늘 비록 술상 앞에 마주 앉아 있지만
내일 아침에는 도랑 가에서 헤어지리니
 

 

근현대 중국화가 서조(徐操)의 <탄금도(彈琴圖)> 단선(團扇). 사마상여가 녹기금으로 봉구황을 연주하며 탁문군을 유혹하는 장면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거문고 타며 문군을 바라보는데, 봄바람 불어 머리카락 날리네"(彈琴看文君  春風吹?影)라는 제시(題詩)가 쓰여 있다.

 

※ 한(漢)나라 이래 중국의 정통이념으로 군림해온 유교적 가치기준과 시비(是非) 표준(標準)에 반기를 들었던 '이단아' 이탁오(李卓吾)는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논한다>라는 글에서 사마상여가 탁문군과 자유로이 결합한 사실을 열렬히 옹호했다.

 

부모의 허락 없이 집을 뛰쳐나가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했던 과부 탁문군에 대해서는 '훌륭한 배필을 잘 선택했으며, 세상에서 시집을 잘 가는 방법'이라고 두둔했다.


심지어 그는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결합을 아름다운 부부애의 상징으로 숭앙받고 있는 후한(後漢)시대 양홍(梁鴻)-맹광(孟光) 부부에 견주기도 했다. 나아가 ≪주역(周易)≫의 구절을 인용해 '같은 소리에 서로 응하고'(同聲相應), 같은 기운에 서로 구하는(同氣相求)' 자연스러운 현상으로까지 평가하기도 했다. 

 

일찍이 명말(明末)의 관리이자 문인인 사재항(謝在杭)은  그의 저서 ≪오잡조(五雜俎)≫에서 이탁오를 "사람으로 거의 요물에 가까운 자"(此亦近于人妖者矣)라고 타매(唾罵)한 바 있었다.

 

청대(淸代) 고증학의 선구자 고염무(顧炎武.)는 "예부터 아무 거리낌없는 소인배로서 감히 성인에게 반기를 든 자로 이지(李贄)보다 더 심한 자는 없었다"(自古以來小人之無忌憚而敢於叛聖人者 莫甚於李贄)고 비난했다.  

 

이런 판국이었으니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애정행각에 대한 이탁오의 평가가 정통 유가로부터 격렬한 비판과 힐난을 들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조선조 광해군 때의 허균(許筠)은 그가 생전에 그토록 아꼈던 부안 명기(名妓) 계랑(桂娘, 일명 매창 梅窓)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애도시 <애계랑(哀桂娘)>에서 반첩여와 탁문군을 끌어들여 애달픈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凄絶班姬扇  悲凉卓女琴
(처절반희선 비량탁녀금) 

 

처절하구나 반첩여의 부채여

서글프구나 탁문군의 거문고여

 

여기서 반희(班姬)는 후한 성제(成帝)의 후궁이었던 반첩여(班??), 탁녀(卓女)는 탁문군(卓文君)을 가리킨다. 둘 다 당대의 재자가인(才子佳人)으로 남달리 가슴아픈 이력도 가지고 있다.

  
'반첩여의 부채'란 버림받은 여인의 불우한 신세를 상징하는 추선(秋扇)·추풍선(秋風扇)을 말한다. '탁문군의 거문고'는 문군이 사마상여와 만날 때 상여가 문군을 유혹하기 위해 탔다는 녹기금(綠綺琴)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탁문군의 거문고'라기보다 '사마상여의 거문고'라야 옳다. 여기서는 가인(佳人)의 허무한 죽음을 아파하면서 그에 견줄만한 인물로 두 여인을 거명했고, 각각의 인물과 인연이 있는 소품으로 '부채'와 '거문고'를 등장시켰을 뿐이다.  

 

※ 근현대 중국화가 임솔영(任率英)의 <문군청금(文君聽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