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度寺 柱聯

2019. 9. 30. 14:30篇額 ,柱聯外

靈鷲山(영취산) 通度寺(통도사) 柱聯(주련)

 

一柱門(일주문)

불지종가(佛之宗家)-절 중에서 종가집

국지대찰(國之大刹)-나라에서 가장 큰 절

異姓同居必須和睦(이성동거필수화목)

方袍圓頂常要淸規(방포원정상요청규)

각기 다른 성(姓)들끼리 모여사니 반드시 화목해야 하고

가사입고 삭발하였으니 항상 규율을 따라야 하네

 

大雄殿(대웅전)-전면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변시방중)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래일체동)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汪洋覺海玅難窮(왕양각해묘난궁)

부처님은 우주에 가득하시니

삼세의 모든 부처님 다르지 않네

광대무변한 원력 다함이 없어

넓고 넓은 깨달음의 세계 헤아릴 수 없네.

 

적멸보궁(寂滅寶宮)-후면(금강계단에서 보이는 주련)

示跡雙林問幾秋(시적쌍림문기추)

文殊留寶待時求(문수유보대시구)

全身舍利今猶在(전신사리금유재)

普使群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휴)

묻노니 쌍림에서 열반에 드신지 그 몇 해인가

문수보살 보배를 모시고 때와 사람을 기다렸네.

부처님의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있으니

많은 군생 예배하여 쉬지 않네.

 

尋劒堂(심검당)

學道如初不變心(학도여초불변심)

千魔萬難愈惺惺(천마만난유성성)

直頙敲出虛空髓(직책고출허공수)

拔却金剛腦後釘(발각금공뇌후정)

突出眼晴全體露(돌출안청전체로)

山河大地是空華(산하대지시공화)

도를 배우려는 뜻 처음과 같이 변함없고

천 만가지 어려움도 깨닫고 깨달았네

곧 바로 허공을 두드려 골수(骨髓)를 내고

뇌 뒤에 꽂힌 금강창(金剛槍)을 뽑아 버리니

돌연히 눈앞에 나타난 우주 전체

산하대지가 바로 공화(空華)인 것을

 

응진전(應眞殿)

有山有水乘龍虎(유산유수승용호)

無是無非伴竹松(무시무비반죽송)

曾昔靈山蒙授記(증석령산몽수기)

而今會坐一堂中(이금회좌일당중)

산수간에 용과 호랑이를 타고

시비없이 송죽을 벗하네.

일찌기 영산회상에 수기를 받은 분들이

지금 한 집안에 모여 있네.

 

毘盧庵(비로암)

聲前一句圓音妙[성전일구원음묘]

物外三山片月輝[물외삼산편월휘]

風吹碧落浮雲盡[풍취벽락부운진]

月上靑山玉一團[월상청산옥일단]

棒喝齊施猶未宗[방할제시유미종]

三玄三要絶孤踪[삼현삼요절고종]

擊目相傳起念刻[격목상전기념각]

소리 전 일구의 원음이 묘한데

물질 밖의 삼산엔 조각달이 빛난다

바람이 허공에 부니 뜬 구름이 다 흩어지고

달이 청산위에 뜨니 한 덩어리 옥이런듯

방과 할을 퍼붓더라도 오히려 종을 이루지 못하고

삼현과 삼요라 하지만 여기는 그런 자취마저 끊었도다

눈을 마주쳐 서로 전함은 생각 일어나기도 전일세

 

北極殿(북극전)

靈通廣大慧鑑明 [영통광대혜감명]

住在空中映無方 [주재공중영무방]

羅列碧天臨刹土 [나열벽천임찰토]

周天人世數算長 [주천인세수산장]

영통하고 광대한 지혜의 거울같이 밝아

공중에 계시며 비추지 않는 곳 없네

푸른 하늘에 늘어서서 이 땅을 비추시고

두루 천인을 살피며 수명을 늘려 주시네

 

명부전(冥府殿)

慈因積善誓救衆生 [자인적선서구중생]

當切歸依奚遲感應 [당절귀의해지감응]

掌上明珠光攝大千 [장상명주광섭대천]

手中金錫振開玉門 [수중금석진개옥문]

常揮慧鎰斷滅罪根 [상휘혜일단멸죄근]

業鏡臺前十殿調律 [업경대전십전조율]

자비의 인연으로 적선하고 중생구제를 서원하니

간절히 귀의하면 어찌 감응이 더디리오.

손바닥 위에 밝은 구슬 대천세계를 비추고

손안에 쇠지팡이는 지옥문을 열어주네.

항상 지혜의 칼로 죄의 뿌리를 잘라버리고

업경대 앞에서는 시왕(十王)이 법률로 다스리네.

 

황화각(皇華閣)

大護法不見僧過 [대호법불견승과]

善知識能調物情 [선지식능조물정]

百戰英雄知佛法 [백전영웅지불법]

再來菩薩說家常 [재래보살설가상]

永使蒼生離苦海 [영사창생이고해]

恒敎赤子有慈航 [항교적자유자항]

큰 호법은 절집의 흉 허물을 보지 않고

선지식은 능히 세상물정을 살필 줄 아네

백전영웅은 부처님 법을 알고

거듭 화현한 보살은 일상의 도리를 설해주네

길이 중생들로 하여금 고해를 여의게 하고

항상 친자식처럼 보살펴 잘 인도해 주시네

 

하로전(下爐殿) 만세루(萬歲樓)

四海浪平龍睡隱 [사해랑평용수온]

九天雲靜鶴飛高 [구천운정학비고]

千古金沙灘上水 [천고금사탄상수]

逍遙猶作誦經聲 [소요유작송경성]

天下溪山絶勝幽 [천하계산절승유]

誰能托千共同遊 [수능탁천공동유]

온 세상의 파도 잔잔하니 용이 숨고

온 하늘의 구름 고요하니 학이 높이 날도다

천고의 금사강 여울목 위에

조용히 들려오는 경 읽는 소리

천하의 산과 개울에 그윽히 퍼지니

뉘라서 능히 함께하지 않으리

 

범종루(梵鐘樓)

[전면 4연]

鷲背山高風萬里 [취배산고풍만리]

禪窓夜夜梵鐘鳴 [선창야야범종명]

喚得心神十分淸 [환득심신십분청]

檜樹蒼蒼山勢頑 [회수창창산세완]

뒤로 한 영축산의 높은 기상에 만리 바람이 불고

선방의 깊은 밤, 범종소리 울리니

돌이켜 얻은 마음은 더더욱 맑아지네.

회나무 우거진 사이에 산세는 불거졌고

[향좌측 3연]

葉間風雨半天寒 [엽간풍우반천한]

老僧出定忘聲色 [노승출정망성색]

頭上光陰似轉丸 [두상광음사전환]

나무잎 사이 빗방울소리에 하늘은 차갑구나

선정에서 깨어난 노승은 말없이 무표정이나

머리 위로 세월은 쇠구슬처럼 굴러가네.

[후면 4연]

玉鏡涵空波不起 [옥경함공파불기]

煙鬟繞坐雨初收 [연환요좌우초수]

牢籠景象歸吟筆 [뇌롱경상귀음필]

揮斥乾坤放醉眸 [휘척건곤방취모]

옥거울 안에 담긴 허공은 출렁임이 일지않고

안개를 둘러 쓴 산자락은 비를 처음 거둬가네

붓으로 들어 읇조림은 경관을 주무르듯하고

취한 눈동자는 하늘 땅에 휘둥그레.

[향우측 3연]

白首低徊氣尙秋 [백수저회기상추]

紅塵謝絶心如水 [홍진사절심여수]

鶴邊雲盡月千秋 [학변운진월천추]

흰머리칼 올라오나 기개는 오히려 가을이고

속된 세상 끊고나니 마음은 물과 같으니

학이 노는 곳에 구름이 걷히니 달은 천추에 빛나네.

 


금강계단(金剛戒壇)

 

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은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다. 이 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사후 가장 중요한 기록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은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 의하면 “선덕왕때인 정관(貞觀) 12년 계묘년(癸卯 643)에 자장율사스님께서 당에서 모시고 온 부처님의 두골(佛頭骨), 부처님의 치아(佛齒)등 사리(佛舍利) 100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며”라고 하였다. 계단은 2층으로 상층(上層) 가운데에 범종 모양을 하고 있는 석개(石蓋)를 안치하였다. 이 내용은 곧 통도사의 불사리 금강계단과 함께 부처님의 친착가사(親着袈裟) 봉안 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큰 못이었다. 창건주 자장스님께서는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셨다.

 

자장스님께서 당나라 오대산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승려로 화현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과, 불두골(佛頭骨),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등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

 

이 후 스님은 귀국하여 나쁜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울 위해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못을 메워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사찰에서 스님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스님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의 눈먼 용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


 

 

금강계단의 역사

 

금강계단은 연못을 메우고 건립한 통도사의 대웅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聖地)이며 가람배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금강계단의 금강이라는 말은 금강석(金剛石), 곧 다이아몬드를 의미한다. 어떤 물건이라도 금강석을 깨뜨릴 수 없지만 금강석은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다. 그래서 불경(佛經)에서는 이러한 금강석의 강인한 특징을 반야(般若)의 지혜를 표시하는 비유로 써왔다.

 

곧 반야의 지혜로 모든 번뇌, 망상과 미혹의 뿌리를 끊어 버리므로 그 반야의 지혜가 금강석과 같다는 말이다. 반야의 지혜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된다. 이 삼학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은 부처님의 행동을 닮아가는 연습인 계율의 실천에 있다. 계율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지 않고서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계율이란 그릇과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깨질 우려가 항상 있다. 그래서 계의 그릇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삼학의 결정체이며 반야의 화현(化現)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과 같이 견고함으로 그 사리를 모신 계단을 금강계단이라 한다.

 

자장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기 이전부터 철저히 계율을 몸소 실천한 수행자였다.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를 하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는 그의 철저한 계율의 정신은 문수보살로부터 사리와 가사를 받은 사실로 나타났고 이 불신(佛身)이 통도사에 안치됨으로써 통도사는 계율의 근본도량이 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함에 있어서 첫째 요건은 계율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래서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불문(佛門)에 들어서기 위해서 비구는 250가지 계율인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하고 재가신도는 오계(五戒)를 받아야 참다운 불자(佛子)로서의 일보를 걷게 되는 것이다. 비단 출가자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일상생활에는 항상 계율을 지키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승려는 승려대로 청정한 모습으로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하며 재가신도는 그 나름대로 철저한 윤리의식 속에 이 사회를 정토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계율이 단순한 금계(禁戒)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겠다는 보살계(菩薩戒)로 확산될 때 대승불교의 참된 이상(理想)이 이 땅에 펼쳐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라의 대국통 자장스님께서 이 땅에 금강계단을 설치한 참된 의미이다. 그래서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일은,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므로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오늘날 까지도 승려들의 유일한 정통을 잇는 수계(受戒)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금강계단의 초창과 중건사실 기록

중수 연대 화주(化主) 문헌(文獻)

초창 신라 선덕왕 15년(646) 자장율사(慈藏律師) 삼국유사

제 1 중수 고려 우왕 5년(1379) 월송대사(月松大師) 동문선 제73권

제 2 중수 조선 선조 30년(1603) 의령대사(儀靈大師) 계단원류망요록

제 3 중수 조선 효종 3년 (1652) 정인대사(淨仁大師) 계단원류망요록

제 4 중수 조선 숙종 31년(1705) 성능대사(性能大師) 계단원류망요록

제 5 중수 조선 영조 19년(1743) 산중제덕(山中諸德) 불종찰약사

제 6 중수 조선 순조 23년(1823) 홍명선사(鴻溟禪師) 금강계단중수기

제 7 중수 조선 헌종 4년(1838) 산중제덕(山中諸德) 불종찰약사

제 8 중수 조선 고종 9년(1872) 구봉화상(九鳳和尙) 불종찰약사

제 9 중수 서기 1911 구하선사(九河禪師) 금강계단 현판

제 10 보강 서기 19 박석 설치 및 석조담장

 

고려시대의 금강계단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초에 사리와 가사를 덮은 석종이 개봉된 사실이 있었다. 민간에 유포된 당시의 이야기로는 고려초의 관직을 뜻하는 안렴사(按濂寺)가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에 예를 표한 뒤 돌 뚜껑을 들어내고 사리를 들여다보니 처음엔 긴 구렁이가 사리를 보관한 석함(石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한다. 그 뒤로는 감히 돌 뚜껑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때인 고종 22년(1235)에 상장군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돌 뚜껑을 들어내고 예를 표했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공(庾公)이 마침 갖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한다. 그 후, 1264년 원나라 사신들과 여러 사람들이 와서 그 돌함에 예배드렸으며, 사방의 운수승(雲水僧)들이 몰려와서 예참했다 한다.

 

또한 원나라에 머물던 인도의 지공(指空)[지공·나옹·무학의 3화상 중의 한 분임]스님은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참배하는 것과 금강계단의 사리와 가사에 참배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으며, 또한 스님은 1326년 고려에 와서 금강산에 머물면서 계를 설하였고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을 참배하여, 가사와 사리를 친견한 공덕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지공스님은 고려에 들어올 때 『문수사리무생계경(文殊師利無生戒經)』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와 동일한 경전으로 생각되는 『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最上乘無生經)』목판본이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무생계경』이란 “모든 중생이 유무(有無)와 성상(性相)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하면 일체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법리(法理)를 증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1377년과 1378년에 계단은 큰 수난을 받았다.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 동해변에 왜적이 침탈이 빈번해질 때였다. 당시의 통도사 주지였던 월송(月松) 대사는 우왕 3년(1377)에 왜적이 내침하여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다가 다시 1379년 왜적이 사리를 침탈하려고 했을 때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나와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다.

 

조선시대의 금강계단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금강계단은 또다시 왜적에 의해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왜적은 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靈骨)을 탈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부산 동래에 사는 백옥(白玉)거사가 왜인의 포로로 잡혔다가 그 사리와 영골을 가지고 도망쳐 나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선조 36년(1603)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은 왜적의 침탈을 염려하여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 함에 넣어 은사이신 금강산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에게 보냈다. 그러나 휴정스님은 “온 국토가 침탈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동해변에 있는 이곳 금강산도 안전하지 못하다. 영축산은 문수보살께서 친히 계단을 설치하라고 부촉한 장소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믿음의 보배인 사리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 터를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라”고 하면서 한 함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함은 태백산(太白山) 갈반사(葛盤寺)에 봉안하게 했다.

 

사명대사는 휴정대사의 명을 받고 계단을 수리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전해오기까지 금강계단은 한국 불교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해 왔다.

  

 

사리신앙(舍利信仰)

 

사리는 불자가 존중하는 신앙(信仰)의 대상이다. 이 사리는 옛적부터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성취(成就)했을 때 나타나는 결정체라고 한다. 『통도사 사적기(通度寺 事蹟記)』「사리영이편(舍利靈異篇)」에 보면 사리의 영이함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四部大衆) 가운데 어느 누구든지 사리(舍利)를 첨례(瞻禮)하고 공양할 때에는 먼저 다섯 가지 법신(法身)의 향기가 산내에 드높아 내원(內院)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향기를 맡고 감탄하는 일이다.

 

둘째는 인연의 유무를 따라서 사리가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빛나면서 수정통(水晶筒) 가운데 붙어서 나오지 아니하며 혹은 절반만 있고 절반은 없으며 혹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때로는 순금색(純金色)이거나 또 순옥색(純玉色)이며 절반은 금이며 절반은 옥이며 또 크고 작음과 숨고 나타남이 같지 아니한 것이다.

 

셋째는 사람들이 첨례할 때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도 하며 우천(雨天)이 홀연히 개기도 하며 검은 구름이 깔리고 우레 소리를 내며 폭풍이 갑자기 비를 내려 수목(樹木)을 쓰러뜨리기도 하여 그 길흉(吉凶)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넷째는 사람들이 첨례하기 위하여 동구(洞口)로 들어올 때면 계단 석종(石鍾) 위에서 먼저 오색광명(五色光明)이 크게 천지(天地)를 비춰 훤히 산과 골짜기를 밝히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람들이 첨례(瞻禮)하여 향과 초를 태워 여러 가지로 공양하고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면 계단(戒壇)의 반상에 변신사리(變身舍利)가 모래알처럼 무수히 나타나는 것이다.

 

여섯째는 사리를 첨례하려는 사람이 몸과 마음이 부정(不淨)하여 하심(下心)하지 못하고 원문(院門)을 소란스럽게 하면 일원중(一院中)에 먼저 비위를 상하는 고약한 냄새가 나서 그 사람이 곧 광란(狂亂)하여 땅에 쓰러져 귀신의 말을 지껄이다가 결국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는 금강계단 석종 부도의 여의주석 반석 아래 움푹 파인 곳에 항상 물이 가득 차 있고 그 가운데 한 쌍의 푸른 달팽이가 매양 붙어 있는데 석종을 들 때 사람이 보면 사방으로 흩어져 간 곳을 알지 못하다가는, 사람이 없어지면 잠깐 사이에 들어와서 전과 같이 있는 것이 사시(四時)에 끊어지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여 항상 붙어 있으면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금강계단 위로는 모든 날 짐승이 그 가운데를 날아가지 아니하고 또 그 위에 오줌과 똥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의 사리에 대한 신령(神靈)스러움과 길흉변동(吉凶變動)이 사리영이편(舍利靈異篇)에 기록(記錄)되고 있다. 통도사에서는 이런 사적기(事蹟記) 기록 못지않게 지금도 간혹 사리탑 계단에서는 밤중에 광명이 뻗어 올라 대낮처럼 밝아 대중이 깨어나서 첨례하는 일이 있으며 그럴 때면 멀리 양산(梁山)에서는 통도사에 화재가 생겼다고 야단들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상노전(上爐殿)의 스님들이 혹시 예불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종소리와 목탁소리가 들리게 되니 이는 불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寂滅寶宮)만이 갖는 특별한 영이(靈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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