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상적

2018. 6. 26. 16:29서예가

이상적(1803~1865)은 9대에 걸쳐 30여 명의 역과譯科 합격자를 배출한 우봉牛峰 이씨 집안에 태어났다. 아버지 이정직(李廷稷, 1781~1816)은 송석원시사에 드나들며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과 친하게 지냈던 시인이었으며, 장인 김상순도 설성雪城 김씨 출신의 역관이었다. 아홉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네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도 계속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그는 1829년부터 1864년까지 35년 동안에 12차례에 걸쳐서 청나라에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그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의 석학 옹방강翁方綱과 학술 토론을 벌이고 그에게 130본의 금석金石 탁본을 전해 주었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 이상적은 청나라에 갈 때마다 탁본을 가져가거나 가져왔으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다. 청나라의 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조선의 금석문을 모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엮으면서 이상적에게 제사題辭를 부탁할 정도로, 그는 이 방면에 조예가 깊어졌다.

이상적이 진심으로 따른 스승은 추사 김정희였다. 옹방강으로부터 "경술문장經術文章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고 칭찬을 받은 김정희의 영향으로 이상적은 청나라 문단에 소개되어 그들과 문학적인 교제를 했으며, 청나라에 오갈 때마다 김정희에게 필요한 서적과 금석문들을 구해다 주었다. 심지어는 김정희가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1843년에도 《만학집晩學集》8권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8권을 북경에서 구해다 보냈으며, 이듬해에는 하장령賀長齡의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120권을 부치는 등, 유배지에 있는 스승을 극진히 위로했다.

평소에 늘 보고 싶어하던 이 책들을 쓸쓸한 유배지에서 받아들고 너무나 감격한 김정희는 소나무와 잣나무 네 그루가 눈 속에서도 푸르게 서 있는 유배지의 숙소를 그리고, 세한도歲寒圖>라고 제목을 붙여 이상적에게 보내 주었다. 당파 싸움에 패배하여 몰락한 스승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고 따르는 제자의 절개에 감격하여, 해서楷書로 제발題跋까지 써서 주었다.

 

태사공이 "권세와 이득으로써 야합한 자는 권세와 이득이 다해지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했다. 그래도 또한 밀물 같은 세상 풍조 속의 한 사람이건만 스스로 초연하여 밀물 같은 권세와 이득의 풍조 밖에 있으니, 나를 권세와 이득으로 보았단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잘못이란 말인가? 공자께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다른 나무보다 나중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고 하였다.

 

스승 김정희가 자기를 그토록 알아주는 데 감격한 이상적은 공자묘孔子廟에 새긴 <중용설>의 탁본을  표구하여 보내며, 이렇게 답장을 부쳤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면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이렇게까지 분수에 넘치게 추어올리셨습니까? ……이번 길에 이 그림을 북경에 가지고 가서 표구해다가, 아는 벗들에게 두루 보이고 제영題詠을 청할까 합니다.

 

1844년(헌종 10) 동지사 이하응(흥선군)을 따라 북경에 간 이상적은 오찬吳贊의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김정희의 근황을 알리면서 <세한도>에다 제찬題贊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청나라 학자 16명의 찬을 받은 <세한도>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국보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중국의 성운聲韻에 정통한 그의 시가 국제적으로 이름을 얻게 되자, 헌종 임금이 그를 불러다 놓고 그의 시를 직접 낭랑하게 읊었다. 이어서 "문필이 중국 사람에 가깝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시집을 비각秘閣에서 새기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상적은 그 특혜를 사양했다. 교관들에게도 드문 은총을 일개 역관이 받았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적 자신이 편집하고 북경의 친지들이 추렴하여 간행해 준 문집이 바로 《은송당집恩誦堂集》이다. 이 문집은 인기가 있어서 여러 차례 인쇄했으며, 한 사람이 200부나 구입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역관의 신분으로 12차례나 중국에 오갈 정도면, 무역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적은 장사 보따리를 들고 다닌 게 아니라, 책보따리와 탁본 꾸러미를 들고 다녔다. 그러는 동안 중국의 학자 100여 명과 사귀었다. 이들이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책이 바로 《해린척소海隣尺素》10책이다. 원본은 경성대학 교수 후지쓰카가 1936년 은퇴하면서 동경으로 가지고 갔다가 1945년 동경 폭격 때에 불탔으며, 일부가 간송박물관에 소장돼 전할 뿐이다.

조선 사회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자신이 중국의 석학들에게 대우받는다는 물증으로 엮은 것이 바로 《해린척소》라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자기의 글재주를 인정하는 중국의 석학 · 시인들을 그리워하며지은 시가 바로 <회인시懷人詩>이다. 99수나 되는 <회인시>의 주제는 청나라 문물의 동경과 신분 상승의 욕구이니, 그는 <회인시>를 통하여 문학적으로 상승하려고 애쓴 것이다.

 

 

---《평민한문학사 ㅣ 범우문고 150》(허경진 범우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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