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1. 17:12ㆍ나의 이야기
1. 갑자사화(甲子士禍)의 현장 정여창 묘역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1498)가 발생하여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전과 숙청이 시작되면서, 김일손이 졸지에 함양 청계정사에서 압송될 때 함께 있다가 연이어 압송된 인물이 김일손의 정신적인 벗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1450~1504)이다.
정여창은 다행히 참형은 면했지만 고향 함양은 말할 것도 없고 한양에서도 머나먼 두만강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유배지에서 홀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하다가 6년의 오랜 유배생활 끝에 병을 얻어 1504년 4월 객지에서 사망하고 만다. 친구와 제자들이 2개월 동안 운구하여 함양 승안산에 장례를 지냈으나, 4개월도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에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1504)가 발생하자 부관참시의 형을 받아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훼손당하는 능욕을 당하여 무오갑자 양 사화에 걸쳐 화를 입었던 것이다.
극악무도의 극치를 달리던 연산군 10년에 발생한 갑자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폐비윤씨 사건의 전모를 알아챈 연산군의 광기에 의한 신하들의 몰살에 가까운 숙청사건으로써 그 와중에도 세력을 키우려던 임사홍 등 간신배들의 농간으로 사림파뿐만 아니라 부관참시 당한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파들까지 화를 입게 되었다.
사림파들의 피해로서는 무오사화 때 간신히 사형은 면하고 유배를 당해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김굉필 등은 모두 사형에 처해지고, 이미 사망한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를 당했는데 이때 사형과 부관참시된 인원만 백여명에 이르렀다.
연산군의 광기를 보여주는 갑오사화의 처참한 현장인 정여창의 묘가 함양읍에서 멀지 않은 함양 수동면 승안산 자락에 그때의 참화는 잊은 듯 조선시대 사대부 분묘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정여창 묘역
1504년 사망 후 백년이 지난 1670년경에 세워진 신도비는 조선시대 석물치고는 석공의 정성이 담긴 귀부 위에 앉아 이수를 얹고 있는데, 그 앞으로 묘를 수호하는 석수, 망주석, 문인석까지 갖추어 잘 보존된 조선 중기의 사대부 묘역이다.
*2 정여창 묘 둘레석
특히, 묘의 둘레를 사각으로 감싸고 있는 둘레석의 앞쪽 가운데 태극문양을 새긴 정성스런 치장은 아주 드문 경우로 비록 어이없는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갈 수 밖에 없었지만 결국 사후에 제대로 이루어진 정여창에 대한 평가의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여창 묘역과 주변 정여창 관련 유적지 지형도
2. 정여창의 복권이 이루어진 남계서원
정여창이 1504년 역적으로 몰려 부관참시 당하고 난 후, 다행스럽게도 2년 뒤인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퇴위되자 사화의 희생자들은 신원되었으며, 50년이 지난 1552년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제자들이 남계서원을 세워 지금까지 정여창을 배향하고 있다. 1566년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아 국가에서 공인하고 지원하였던 사액서원(賜額書院:국가에서 공인한다는 뜻으로 서원의 편액을 내렸다는 뜻이며 편액의 관지에 賜額이라 되어 있다.)이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주요 47개 서원에 포함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서원으로서는 1543년에 세워진 풍기의 소수서원 다음으로 오래된 사액서원이다.
소수서원은 최초로 세운 서원인 탓에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은 뒤쪽으로 강학공간은 서원 영역의 앞쪽으로 배치되는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초기 체계를 갖춘 대표적인 서원으로서, 이후에 창건된 대부분 서원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남계서원이 풍기는 조선시대 장엄한 서원미의 정수를 맛보려면 아무 생각 없이 남계서원의 외삼문인 풍영루(風咏樓) 위풍에 빨려 달려가지 말고, 멀찌감치 도로에서 잠시 내려 그윽하게 조망부터 할 것을 권한다. 구릉을 이루는 지형의 가벼운 경사를 타고 배치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성리학이 지배했던 조선시대 서원과 선비들의 권위를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풍영루 앞으로 다가가면 치열하게 하늘의 뜻을 깨치며 세풍에 맞섰던 선비들의 기개와 아울러 음풍농월(吟風弄月:자연 속에서 시나 문장을 읊조리는 일로써 조선조 사대부 문화의 취향)을 즐기던 여유로운 선비들의 격조 높은 풍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남계서원 전경
*남계서원의 외삼문 격인 풍영루
남계서원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함양에서 3번 국도로 접근하여 남계삼거리에서 우측 남계서원으로 가는 도로로 빠져 약 300미터 북쪽으로 가면서 우측으로 남계서원을 보기를 권한다. 일두고택을 먼저 들렀다가 올 경우 구라사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아무래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비스듬히 바라보는 편이 반대보다 한수 위다.
더군다나, 그 다음 행선지로 남계서원 바로 옆 북쪽에 있는 김일손을 배향하고 있는 청계서원을 들른다면 순방향이 된다. ‘김일손’ 편에서 짚고 나왔듯, 청계서원은 1915년에 건립하여 고풍스런 멋이 없고 협소하여 다만 불꽃처럼 살다간 김일손의 생애를 잠시 떠올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그 다음 코스로 정여창 묘소에 들렀다가 마지막에 일두고택이 있는 개평마을로 가서 솔송주라도 한잔 하고 함양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지곡IC에서 고속도로에 올리는 방향이 좋을 듯하다.
3. 조선조 문묘5현에 배향된 정여창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의 오천년 역사시대에 걸쳐 문화와 정치의 중심철학이 되었던 불교와 유교의 심오한 학문적 접근은 전문가가 아닌 보통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할 분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불교와 유교를 근본정신으로 하여 만들어진 전통문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교양 수준의 이해는 필요할 것 같다. 그리하여 아는 만큼 보일 것이고 본 만큼 느낄 것이다.
사화에 휩쓸려간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경향이나 성취는 우리가 감당 못할 부분이므로 넘어가되, 조선 중기 유림 사회에서 몰아친 오현문묘종사(五賢文廟從祀)운동의 대강은 짚어보고 가야 다음의 이야기들이 이해가 될 것 같다.
정여창 사후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100년에 걸친 네 차례의 사화를 통하여 피 튀기는 권력투쟁 끝에 수많은 사림파 선비들이 죽어간 한편으로 계유정란 공신들로 세습되던 훈구파도 자연 소멸해버리고, 결국 선조대에 이르러 조정은 그 동안 사화를 피해 고향에 은둔하며 후진들의 양성과 학문정진에 전념하던 사림파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자 사림오현(士林五賢)으로 칭송되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공자의 사당인 성균관 문묘에 모시고 제사를 모시자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유학을 국교로 하는 나라에서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영광이었으며 후학들의 학문적 입지도 그만큼 단단해지게 마련이었다.
오현을 선정하는 문제로 훗날 당파와 엮여 후학들 간에 소모적인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아무튼 오현으로 칭송되었던 유학자들에 대한 당대 평가의 결과이므로 그들의 학문적 성취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유학사에서 정여창을 비롯한 그들의 위상을 이해하는데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논란 끝에, 광해군대 1610년, 위에 언급된 오현의 문묘종사가 결정되고 국가에서 시호를 내렸는데 이때 정여창에게 내려진 시호가 문헌(文獻)이다.
4. 일두고택
오현문묘종사를 통하여 정여창의 시호가 ‘文獻(문헌)’임을 설명하고 들어온 이유는, 남계서원에서 남계를 건너 지평마을에 있는 정여창의 생가에 들어서면 바로 만나게 되는 사랑채에 걸려있는 편액 [文獻世家(문헌세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두고택의 文獻世家편액
동방오현의 한분으로 추앙된 정여창을 기리는 후손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정여창의 생가의 공식명칭은 정여창의 호를 따서 일두고택(一蠹古宅)이라하는데, 일두고택이 있는 함양 지곡면 개평마을은 일두고택 이외에도 조선후기 고택들이 밀집되어 있어 개평한옥마을로 불리고 있다.
일두고택은 입구의 돌담에서부터 집안 구석구석 무엇 하나 허투루 놓여있는 법이 없이 그야말로 조선조 사대부 문헌세가답게 양반가의 정갈한 기품이 가득하다.
*일두고택 솟을대문
족보있는 권문세가 답게 솟을대문 위에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나라에서 인정하여 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종의 증표)가 다섯 개나 걸려있다.
*일두고택 솟을대문에 달려있는 정려
*일두고택 사랑채
‘정려문 아래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로 가는 일각문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넓은 사랑마당에 잘 다듬은 디딤돌과 소맷돌을 갖춘 사랑과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비교적 높은 축대 위에는 사랑채가 앉아 있고 안사랑채로 이어지는 쪽담 아래에는 두 그루의 구불거리는 노송이 사랑채 누마루에 기대어 심어져 있다. 수 백년은 됨직한 노송은 전통 건물의 고풍스러운 운치와 기풍을 더해준다. 사랑채는 대문채에 들어서면 위쪽으로 우러러 보게 되는 처마는 하늘로 비상하는 형상이다. 이 가옥의 사랑채 방문 위에 천장까지 닿도록, 소위 대문짝만하게 써놓은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집안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다른 사대부집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글씨의 크기에 위엄이 느껴진다. 대문채는 쪽마루를 두어 좌우 두 칸씩 네 칸의 방을 꾸미고 좌측 끝에 사랑측간를 만들어 놓았다. 이 집은 사랑채를 비롯하여 안채, 별당인 안사랑채, 사당, 곳간 등이 별도의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한옥의 미]에서 발췌)
*사랑채 누마루와 노송
사랑채에서 손님을 맞이하여 주연을 즐기며 음풍놀월하던 누마루는 사대부 한옥의 멋이 절정으로 집약된 곳으로 곁에 노송까지 드리워져 일두고택에서 최고의 기품이 품어내는 걸작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과 넘어 보이는 중문입구
손님들이 들락거리는 사랑채에서는 일각문 넘어 또다시 중문을 통해야 비로소 안채로 들어갈 수 있다.
*중문을 통과하여 안채에서 뒤돌아본 소담스런 풍경도 소홀함이 없다.
*개방적이고 경쾌한 느낌의 안채
일두고택의 배려 깊은 의도를 숨기고 있는 세세한 아름다움을 이곳에 다 나열할 수는 없고, 답사가기 전 공부를 하고 간다면 버릴 것 하나 없는 지리산 자락 한옥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일두고택의 사랑채를 보면, 이곳 함양에서 멀지 않은 거창의 수승대 부근에 있는 동계 정온(桐溪 鄭蘊:1569~1641) 고택의 사랑채를 떠올리게 된다.
동계는 조식의 문인으로서, 정여창의 남계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후편에서 주요 인물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잠시 동계고택 사랑채만 살펴보고 가자.
*동계고택 사랑채
정려가 달린 솟을 대문에서부터 사랑채의 구조, 당대 명망가들의 편액을 비롯하여 마당의 정원과 안채 등 정갈한 맛이 일두고택과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일두고택과 달리 특이하게 지붕 용마루 밑에 짧은 기와골을 덧낸 눈썹과 누마루 겹처마가 그야말로 화이불치(華而不侈: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다)의 품격 넘치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구조를 비롯하여 세세한 배려까지 너무나 유사한 점들에서 인근 지역의 명망가의 고택인지라 서로 참고하며 만들어왔음을 눈치채게 되는데, 서로 비교해보며 살펴본다면 명품한옥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눈이 더 밝아질 것이다.
다시 일두고택의 안채를 돌아 사랑채 앞에 서서
*일두고택 사랑채 앞 벽에 큼직막하게 써 붙인 [忠孝節義] 글씨
이 글씨는 정여창을 좋아했던 대원군이 방랑할 때 이집에 묵으면서 썼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훗날 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시행한 서원철폐령 때 정여창을 배향한 남계서원은 제외되어, 오늘날 고색창연한 서원의 정통미를 간직한 남계서원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원군의 낙관이 없으나, 편액으로 쓴 것이 아니고 한지 한 장 한 장에 한 자씩 쓴 글씨였기 때문에 낙관을 남기기 마땅찮아 그런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15사랑채 안에 걸려 있는 [百世淸風] 편액
‘백세청풍’은 ‘오랜 세월 맑고 깨끗한 바람이 분다’는 뜻으로, 중국 고대 백이(伯夷)·숙제(叔齊) 형제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뜻으로 전해오는데, 조선시대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장으로 고택에 현판으로 달거나 혹은 바위나 비석에 새겨 기념하여 많은 곳에 전하고 있다.
이 편액은 사랑채 [文獻世家]편액 좌측 대청마루방에 걸려있기는 한데, 계절에 따라 미닫이로 잠겨있을 때가 많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함안 채미정 인근에만 두 군데 百世淸風(백세청풍) 글씨가 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漁溪 趙旅)를 기려 세운 함안 채미정의 百世淸風 편액

*함안 채미정 부근 어계대 百世淸風 각자
위에서 보듯, 함안 인근 두 군데에 같은 문장이 비슷한 필체로 쓰여 있으니 같은 사람이거나 혹은 동시대 인물이 쓴 것이라 추정하고 있는데, 이곳 이외의 다른 곳에 있는 백세청풍 글씨를 보면 그 내막을 알 수 있다.

*예천 삼강강당에 걸려있던 百世淸風 편액(영남일보에서 벌려옴). 지금은 영남지방 고택 서원에 있던 많은 편액들이 그러하듯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 글씨는 청풍자 정윤목(淸風子 鄭允穆)이 직접 백이숙제의 사당에 가서 주희의 비를 보고 모사해와서 쓴 것이라고 전한다.
*불사이군을 지키기 위하여 조선조정을 거부한 야은 길재(冶隱 吉再)을 모신 금산 청풍서원 앞 百世淸風비 (블로그 [모실의여행이야기]에서 빌려옴)
*병자호란때 순절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의 고택터인 서울 청운동 百世淸風 바위각자
*병자호란때 주전론을 펴면서 남한산성에서 자결을 시도한 거창 동계 정온(桐溪 鄭蘊)의 재실인 모리재의 화엽루에 걸려 있는 百世淸風樓 편액(동계의 고택을 위에서 보고 왔다.)
이상에서 보았듯, 일두고택에 달려있는 百世淸風 편액 글씨를 포함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 백세청풍 글씨체가 마치 한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쓴 것처럼 한결같다.
우리나라에서 한 문장이 동일한 필체로 여러군데 남겨져 있는 글씨는 이것이 유일하다.
앞서 언급한 바, 백세청풍의 뜻은 중국 고대 백이(伯夷)·숙제(叔齊) 형제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뜻으로 전해오는데, 백이숙제의 사당 앞에 성리학을 정립한 주희가 [百世淸風]비를 새겨놓았는데 이 글씨의 탁본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같은 글씨체로 따라 썼던 것이다.
왕위찬탈이 일어난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훈구파들에 대항하며 성장한 조선시대 사대부의 주류를 이루는 사림의 성리학 선비들에게는 성리학의 최고 종장인 주희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다 죽은 백이숙제 사당 앞에 써 놓았다는 [百世淸風]이 여러모로 최고 매력적인 문장이었을 것이다.
하여, 백세청풍 글씨가 있는 곳의 대부분은 절의를 지킨 유학자들을 추념하는 곳에 남아 있다.
일두고택에 걸려 있는 [百世淸風]편액은 추사가 머물면서 썼다는 설이 있으나, 주희의 필체에다가 추사 특유의 서미는 찾아볼 수 없고 이 역시 글을 쓴 사람의 낙관이 없으니 명확한 증언이 없다면 글씨만 보고 추사의 글씨로 단정하기 어렵다.
일두고택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와 다시 사랑채 앞에 서면 이제는 百世淸風, 즉 오랜 세월 이 고택에서 불어오는 맑고 깨끗한 바람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조선시대 선비가문의 풍류에 흠뻑 젖었다가 맨 정신으로 속세로 빠져나오기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일두고택을 나서면 바로 앞에 일두가문에서 500년 전통으로 내려오는 명주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솔송주문화관에 들러 시음해보거나 한 꾸러미 사들고 두고두고 음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솔송주문화관
5. 일두의 또 다른 지리산 아지트, 악양의 덕은동
지리산 자락 함양은 정여창이 태어나고 묻힌 곳이며 사후에도 남계서원을 통해서 추모사업이 이루어진 곳으로 운명처럼 자연발생적으로 정여창 생애의 중심지역이 되었다면, 악양은 정여창이 1483년경 33세때 지리산 자락을 두루 둘러보고 스스로 선택하여 섬진강 어귀에 집과 악양정(岳陽亭)을 짓고 처자들을 데리고 은거하며 수양과 강학에 몰두했던 곳인데 바로 지금의 화개 덕은동이다.
운계 김명기(雲溪 金命紀:1576~1650)의 [운계집(雲溪集)]에 덕은동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덕은동(德隱洞)은 방장산의 남쪽이며, 작은 산으로 가려진 산이다. 덕은동은 본시 도탄(陶灘)인데, 일두 정여창선생이 거처하여 그 유덕이 갈무리되어 있는 곳이라 하여 덕이 숨은 곳, 즉 德隱이 되었다.’
남명 조식( 南冥 曺植:1501~1572)이 1558년 4월 당시 진주방면에서 쌍계사 쪽 지리산을 유람할 때 주 이동통로였던 섬진강 뱃길을 통하여 이곳 앞을 지나면서 [유두류록(]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도탄에서 1리쯤 떨어진 곳에 정선생 여창이 살았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선생은 바로 천령출신의 유종(儒宗:유학의 선비들이 우러러보는 큰 학자)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道學:성리학적 이론에 실천을 겸비한 학문)에 실마리를 열어주신 분이다. 처자를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내한을 거쳐 안음(安陰:함양군 안의면)현감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喬洞主: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인의 행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이후, 후세의 많은 선비들이 뱃길로 덕은동 앞을 지날 때면 의례 정여창에 대한 추념과 조식의 기록을 언급하며 선현들을 기리곤 하였는데 많은 지리산 유산기에서 볼 수 있다.
*악양정 구역
지금 덕은동에 남아 있는 악양정은 무오사화 이후 정여창에 대한 존창이 함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퇴락해진 것을 1899년 향내 사림의 발의에 의하여 정여창을 배향하기 위한 덕은사의 경내에 중건되었다.
*악양정
*악양정 편액
악양정에 달린 편액은 석촌 윤용구(石村 尹用求:1853~1939)의 글씨이다. 악양정 뒤편 德隱祠(덕은사) 편액도 석촌의 글씨인데 낙관에 尹자 이외에는 일부러 삭제한 것 같은데 모를 일이다.
석촌의 글씨는 판서를 지낸 탓에 주로 전라도 지방의 누정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사찰에는 동학사에 몇점이 있을 뿐인데, 순천 선암사 강선루의 앞에는 성당 김돈희(지리산자락 편액 참조)의 편액이며 뒤쪽 降仙樓 편액이 석촌의 글씨이다.
*석촌의 선암사 降仙樓 편액
악양에 정착한 정여창은 1490년 조정의 강력한 부름에 사직상소문까지 올리며 사양하였으나, 끝내 성종이 허가하지 않아 악양정을 떠나 한양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악양정은 그대로 유지하여 한양을 벗어날 때면 덕은동과 함양 생가를 번갈아 가며 지리산 자락을 떠나지 않았다.
지리산이 좋아 유람하며 칭송한 선현들은 많이 있지만, 지리산을 생활의 거점으로 삼고 은거 강학하면서 성리학적 세계관을 구축한 정여창은 단연 진정한 지리산인이라 할 수 있다.
6.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
다행스럽게도 정여창 사후 100여년 지난 1643년 당시의 덕은동 풍경이 담긴 그림이 전하고 있으니 바로 花開縣舊莊圖로서, 화개현에 있던 정여창의 구장(舊莊:옛별장)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조선 중기 국수(國手)으로 지칭될 만큼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허주 이징(虛舟 李澄 1581~1643)이 죽기 직전 정여창을 추앙하던 신익성(申翊聖:1588~1644)등의 부탁으로 그렸으나 현지를 직접 보고 그린 실사가 아니라 악양정에 관련된 기록을 읽고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신익성은 그림의 후기에 ‘비록 이징이 문자의 형용에 의거하여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정여창의 유적이 그 절경 속에 남아 천추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했다. 즉, 악양정에 대한 정여창의 정신적 면모가 잘 드러낸다고 보았던 것이다.
문자란, 정여창의 [악양] 이라는 시와 유호인의 [악양정] 시를 보고 상상해 그렸음을 의미한다.
정여창의 [악양]은 1490년 김일손과 지리산행을 악양에서 마무리하면서 진주로 떠나기 전 쓴 시다.
風蒲泛泛弄輕柔 바람결에 부들이 하늘하늘 가볍게 나부끼니,
四月花開麥已秋 4월이라 화개 땅에는 이미 보리가 익는 때일세.
看盡頭流千萬疊 두류산 천만 겹을 남김없이 다 둘러보고
孤舟又下大江流 외로운 배로 또 큰 강을 따라 내려간다네.
뇌계 유호인(㵢溪 兪好仁:1445~1494)은 정여창과 같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1490년 정여창이 악양정을 떠나 조정에서 같이 근무하며 자주 악양정에 대한 그리움을 자랑하는 이야기를 듣고 [악양정]을 썼으며, 서문에 그 내력을 다음과 같이 남겨놓았다.
‘악양정은 진주의 악양현에 있다. 정백욱(鄭伯勗:정여창의 자)이 사는 곳이다. 백욱은 젊어서부터 얽매임이 없어 천석고황(泉石膏肓:샘과 돌이 고황에 들었다는 뜻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처럼 깊음을 비유)의 병이 있었다. 일찍이 이곳에 별서를 짓고 정자를 만들어 그 이름을 악양정이라 하였다. (중략)
내가 우연히 문학의 일을 맡아보아 황공하게 옆자리에 앉게 되자 담론을 나누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이른바 악양이라는 곳의 일을 알게 되었다. 그 산천의 빼어남과 풍경의 아름다움이 또렷하게 앉은 자리에서 드러났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지겨운 줄 몰랐다. 다만, 정군이 병으로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만 차마 떠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
위 두편의 글을 참고삼아 이징이 상상하여 ‘화개현구장도‘를 그린 것이다.
*화개현구장도
아래의 덕은동 실제 모습과는 전혀 다르지만, 정여창의 마음에 간직한 풍경이다.
*덕은동 주변 최근 풍경
조식을 비롯하여 옛선비들이 섬진강을 거슬러 오려면서 바라보았을 덕은동 모습이다.
*도탄부근
앞서 인용한 조식의 ‘유두류록’에 쌍계사로 가기 위하여 도탄에서 배에서 내리며 “도탄에서 1리쯤 떨어진 곳에 정선생 여창이 살았던 옛 집터가 남아 있다.”하였고,
‘진양지’에 ‘도탄은 악양의 서쪽 20리에 있다. 일두 정선생이 세상을 피하여 천령으로부터 옮겨와 살던 곳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에서 짐작해보면, 도탄은 마을의 이름이 아니라 지금의 화개와 덕은동 중간쯤 있었던 섬진강 나루였을 것이다.
지금 주변 섬진강변은 퇴적사로 백사장이 되어있어 옛 나루터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덕은동 악양정 지형도
7. 정여창의 지리산행기
정여창은 지리산 자락 함양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지리산에 들어가 3년을 공부했으며, 지리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악양 덕은동에 터전을 잡고 살았으니 수십 차례는 지리산에 올랐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직접 남긴 지리산 유람록이 없다.
지리산행이 일상 같은 일이라 특별히 남기지 않았거나, 남겼는데 갑자사화를 당할 때 부인이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정여창의 문집들을 태워버렸을 때 같이 소실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1489년 김일손과 함께 장장 15일간 떠난 지리산행 기록이 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으로 남아 있으니, 산행을 통하여 정여창의 인품을 엿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정여창의 호는 일두(一蠹) 혹은 수옹(睡翁)을 사용했는데, 一蠹는 천지간의 한 좀벌레라는 뜻이고 睡翁은 졸기를 잘하는 늙은이라는 뜻이니 여기에서 겸양지심의 정여창의 인품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인품이 ‘속두류록’에 잘 드러난 다음의 구절이 있다.
‘나(김일손)는 함찬 걸음으로 먼저 가 시냇가 바위에 앉아 기다렸다. 정백욱은 힘이 부치자 허리에 끈을 묶고 한 승려에게 끌도록 하였다. 내가 그들을 맞이하며 말하기를 “스님은 어디서 죄인을 묶어오는 것이오?”라고 하니, 정백욱이 웃으며 말하기를 “산신령이 도망친 나그네를 붙잡아오는 것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정백욱이 예전에 이 산을 유람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익살스럽게 대답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향하여 가파르게 오르는 구간의 일화를 기록한 내용인데, 몇가지 중요한 내용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정여창이 지리산중의 승려들과 허물 없이 농담할 수 있을 만큼 잦은 지리산행을 통하여 친밀하게 이미 그들을 자주 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어디 승려뿐이랴. 앞편에서 살펴보았듯이 동행한 김일손과는 16살이나 연배에다가 훗날 동방오현에 배향될 만큼 학식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적이지 않고 동년배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정여창의 넉넉한 인품을 잘 보여주는 감명적인 일화이다.
*이 글은 아래의 참고문헌을 발췌 편집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참고문헌
1. 정우락 [남명이 악양에서 만난 두사람]
2. 이종묵 [섬진강 명현의 유적]
3. 정우락 [일두 정여창의 학문과 문화공간으로서의 악양정과 남계서원]
4. 최영성 [일두 정여창의 생애와 학문역정]
5. 최석기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록]
6. 서정호 [한옥의 미]
7. 하동문화원 [하동군지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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