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1. 14:47ㆍ성리학(선비들)
동국18현東國十八賢 |
신라2현 : 弘儒侯 설총薛聰, 文昌侯 최치원崔致遠. |
고려2현 : 文成公 안유安裕, 文忠公 정몽주鄭夢周. |
조선조14현 : 文敬公김굉필金宏弼, 文獻公정여창鄭汝昌, 文正公조광조趙光祖, 文元公이언적李彦迪 |
文純公이 황李 滉, 文正公김인후金麟厚, 文成公이 이李 珥, 文簡公성 혼成 渾 |
文元公김장생金長生, 文烈公조 헌趙 憲, 文敬公김 집金 集, 文正公송시열宋時烈 |
文正公송준길宋俊吉, 文純公박세체朴世采. |
☞ 고려 이전의 4현을 소위 전조사현前朝四賢이라 한다. |
☞ 조선조 14현을 아조십사현我朝十四賢이라 한다. |
신라2현新羅二賢 :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
동배향東配享, 제1위第一位. |
설 총薛 聰 : 650년경~740년경 자는 총지聰智, 호는 雨堂 & 빙월당氷月堂. 홍유후弘儒侯로 추봉追封 |
본관은 경주慶州, 신라 경덕왕(742 - 765) 때의 사람이다. |
설총의 부친은 원효대사이며, 모친은 요석공주이다. |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와『삼국사기』의 열전에 의하면, |
설총은 천성이 명민하고 슬기로웠으며, 나면서부터 도를 깨달아 경서, 역사에 널리 통달했다고 한다. |
또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였고 |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하여 후생을 훈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 기록에 의해서 고려말, 조선 초에 설총의 이두창제설吏讀創製說이 제기되기도 했다. |
그러나 설총의 출생 이전에 이미 [진흥왕순수비]나 [서동요] [혜성가] [풍요風謠]등에 |
향찰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설총은 이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설총은 많은 글을 지었으나 세상에 전하는 것이 없고, |
다만 남쪽에 설총이 지은 비명이 있지만 글자가 결락되어 읽을 수 없다고 한다. |
또한 이 『삼국사기』 열전에는 신문왕을 풍간諷諫한 [화왕계]가 실려 있다. |
이 작품은 꽃을 의인화하여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하라는 우언寓言으로, |
유교주의적 정치윤리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
그리고 이 [화왕계]는 내용뿐 아니라 문체 또한 변려문騈儷文을 본받은 |
수준 높은 글로 되어 있어 당시 한문학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설총은 이두로 유교 경전을 해석하여 후학을 훈도 하였으며, |
동시에 우리나라 유학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
이러한 공로로 고려 현존 13년(1022)에 홍유후弘儒侯로 추증 되어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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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배향西配享, 제1위第一位. |
최치원崔致遠 : 857~? , 자는 고운(孤雲 & 해운海雲), 諡號는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 |
본관은 경주慶州, 신라 사량부 사람이다. |
6두품 출신으로 12세의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했는데 그 당시 부친 최견일崔肩逸은 |
"10년 안에 과거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로 격려하였다. |
그 후 7년 만에 18세(874)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고, |
이후 2년간 낙양洛陽을 두루 유람하며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
876년에 당나라 선주 표수현위宣州 漂水縣尉가 되었다가 |
그 후 회양 절도사 고변高騈의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
그러나 문창후가 문명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
879년 일어난 황소의 난을 토벌하면서부터 인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바로 이때에 지은 것이다. |
당시의 공적으로 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郞展中侍御史內供奉으로 |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
이 당시 고변의 종사관으로 지은 글과 시 등을 모은 것이 바로『계원필경桂苑筆耕』20권이다. |
문창후는 헌강왕 11년(885)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면서 여러 문인들과 사귀었고, |
또 중국 전역에 문명을 떨치었다. |
29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
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가 된 |
최치원은 귀국 후 의욕적으로 경륜을 펼치려 하였지만 |
신분의 한계와 혼란한 정치 상황 등으로 인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
이에 외직을 자원하여 대산군大山郡(지금의 전북 태인), 천령군天嶺郡(지금의 경남 함양)등지의 |
태수를 지내며 세월을 보냈다. |
그 후 진성여왕 8년(894) 임금에게 시무책 10여 조의 개혁안을 올렸고, |
이러한 공으로 6두품으로서는 최고의 관직인 아찬阿餐까지 오를 수 있었다. |
그러나 개혁안은 실행될 수 없었고 결국 40여세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은거의 길에 오른다. |
문창후는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산천을 유람하다 죽었다고도 하며, |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
최치원은 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
그는 어지러운 신라의 현실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
결국 6두품의 신분적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
당시 삼최三崔로 일컬어진 최승우崔承祐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종사했으며, |
최언위崔彦撝는 고려의 왕건에게 가서 자신의 뜻을 펼쳤으나, |
문창후는 이들처럼 역사적 전환기에 주동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은거하여
최후의 신라인으로 남게 된다. |
그러나 그의 문인들은 대거 고려정권에 참여하여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
최치원은 유학을 불교의 부수적인 학문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
이러한 유학에 입각한 정치사상은 그 후 최승로 등으로 이어져 고려의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는다. |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은 바로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
또한 한국한문학의 비조鼻祖로도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의 문장은 아름다운 수사에 |
정제된 형식미를 가진 변려체騈儷體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
최치원은 불교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도교와 노장사상 등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
그는 유불도의 삼교사상에 대하여 각자의 주체성을 인정하였고, |
이들 사상이 근본적으로 상통한다는 이로동귀異路同歸의 삼교회통三敎會通을 주장하였다. |
이 사상을 통해 모든 사상과 종교가 대립 갈등을 해소하고 대동 화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이러한 문창후의 삼교관은 우리의 고유사상이라 할 수 있는 풍류도風流徒를 탐구하는 데에도 |
적극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의 현묘지도玄妙之道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
고려 현종 11년(1020)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
다음해에 문창후로 증시贈諡되어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
조선조에는 서악서원西岳書院, 백연서원栢淵書院, 고운영당孤雲影堂,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
문창후는 많은 저술을 하였으나,『동문선同文選』에 실린 글과『계원필경桂苑筆耕』, |
『사산비명四山碑銘』등의 약간의 글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쌍계사 원본(제작시기 신라~고려)
채용신 作 무성서원. 경남 시도유형문화재 제187호. 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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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현高麗二賢 : 안유安裕, 정몽주鄭夢周. |
동배향東配享, 제2위第二位. |
안유安裕(=안향安珦) : 1243~1306.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 |
본관은 순흥이고, 초명은 유裕이었으나 나중에 향珦으로 고쳤다. |
그러나 조선 문종文宗의 이름과 같았기에 이를 휘諱하여 유로 바꾸었다. |
그러나 지금은 원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
號는 회헌晦軒으로 남송 주희朱熹의 호인 회암晦庵을 본뜬 것이다. |
고려 순흥 사람이다. |
18세 때인 원종 1년(1260)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을 시작으로 |
벼슬이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렀다. |
안향은 원종 11년(1270) 삼별초의 난 때에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고, |
이를 계기로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된다. |
그 후 충렬왕 1년(1275)에 상주판관으로 나간 일은 특히 유명한데, |
그는 백성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민풍을 쇄신시켰으며,
유학을 장려하였다. |
안향은 왕을 호종하여 여러 차례 원에 다녀왔다. |
충렬왕 15년(1289) 11월에는 충렬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돌아왔다. |
그 뒤 동왕 22년(1296) 12월에는 자신의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
동왕 29년(1303)에는 국학학정 김문정을 중국에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및 |
문묘에 사용할 제기와 육경六經, 제자, 주자서 등을 구해 오게 한다. |
또한 6품 이상의 관리는 은 1근을, 7품 이하는 布를 내게 하여 장학재단인 養賢庫를 설립하였으며, |
충렬왕 30년(1304) 5월에는 섬학전贍學田을 마련하여 인재를 기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
그리고 6월에 대성전이 완성되자 공자와 선성先聖의 화상을 모시게 하였다. |
충렬왕 32년(1306)안향이 서거한 후, 충숙왕 5년(1318)에 임금의 명으로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고, |
조선 명종때 다시 그의 화상을 그렸으니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
그리고 충숙왕 6년에 이러한 공로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
그의 문인으로는 백이정白頤正, 우탁禹倬, 권부權溥를 들 수 있으며, |
백이정의 문인으로 이제현李齊賢 등을 들 수 있다. |
곧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보좌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등 격변기의 역사를 이끌어간 |
무수한 신흥 사대부들은 바로 그의 노력에 의해 배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은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본떠 |
백운동 서원을 세워 안향을 제향하였다. |
그 후, 명종 4년(1549)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에 의해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라는 |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니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는 장단의 유생들에 의해 인조 21년(1643)에 세워진 |
임강서원에 제향되어 있으며, 곡성의 회헌영당에도 제향되어 있다. 충숙왕5년(1318년) 昨. 국보 제111호.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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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배향西配享, 제2위第二位. |
정몽주鄭夢周 : 1337~1392,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 |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
초명은 몽란夢蘭이었으나 몽룡夢龍으로 고쳤고, 뒤에 다시 몽주夢周로 개명하였다. |
고려 연일 사람으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
공민왕 6년(1357) 監試에 합격하고, 공민왕 9년(1357)에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
공민왕 16년(1367) 예조정랑 겸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다시 성균관 사예, 직강, 사성 등을 역임했다. |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김구용 등이 학관이 되어 경학을 강론했는데, |
특히 정몽주는 사서삼경에 두루 밝아 이치를 깊이 깨달았다고 평하였으며, |
이색 또한 정몽주를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원조로 극찬하였다. |
우왕 2년(1376) 정몽주는 성균관 대사성이었는데, 이인임李仁任등이 주장하는 |
배명친원排明親元 정책에 반대하여 언양彦陽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
당시 권문세족은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일본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했으나, |
정몽주는 오히려 이를 무사히 마치고 잡혀갔던 수백명의 백성을 데리고 온 일이 있었다. |
또한 명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가서, 명과의 국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
그리고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종군할 때에는 |
이성계와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였으며, 창왕 1년(1389)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하였다. |
정몽주는 성리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
당시 불교의 의식에 따라 상제喪祭를 치렀지만 그는 사서士庶에게『가례家禮』에 따라 |
사당을 세우게 하였으며, 서울에 오부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을 진흥 시켰다. |
정몽주는 고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
그러나 정몽주가 고려 왕실을 존속시키려는 온건개혁파의 입장이었음에 반해, |
이성계는 고려 왕실을 폐지하려는 역성혁명파였다. |
결국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던 정몽주는 이방원李芳遠의 문객 조영규에 의해 살해된다. |
태종 5년 권근의 요청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수문전대제학감예문춘추관사익양부원군 |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使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으로 추증된다. |
그리고 중종 12년(1517)에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에 의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묘의 비석도 이때에 세워졌는데 고려의 벼슬만 쓰고 조선의 추시追諡는 쓰지 않아 |
그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
태종 원년 신사년(1401)에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는 문충, 중종 12년에 문묘에 종사하였다. |
숭양서원崧陽書院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영모재, 임고서원 등에 그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다.
‘숭정기사모본’ 임고서원. 보물 제1110-1호. ‘가정 000고본’ 경기도박물관. 보물 제1110-2호. 인조7년(1629년) 김육金堉 昨. 98cm*169.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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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십사현我朝十四賢 |
동배향東配享. 제3위第三位. |
김굉필金宏弼 : 1454~1504.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喧堂 & 사옹). 시호는 문경文敬. |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
성종 11년(1480)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
이때에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장문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
성종 25년(1494)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이 된 후, |
벼슬이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이르렀다. |
그러나 무오사화(1498)때는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 하여 |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이배되었다. |
그 후 갑자사화(1504) 때는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
그는 어려서는 성품이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나, 점차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썼다. |
그 후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소학』을 배우게 되었다. |
김굉필은 소학을 매우 좋아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 라 하며 |
30이 넘어서야 다른 책을 접하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
『소학』을 수신의 기본으로 삼은 그는 '존양存養'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
거기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성誠, 경敬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사장詞章에 힘쓰는 |
당시 유학계에서는 새로운 학문적 경향이었다. |
그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는데, 특히 희천 유배시절에는 조광조에게 도학을 전수하여 |
성리학의 정통을 잇게 하였다. |
그가 배출한 많은 인재는 중종반정 이후의 사림의 개혁정치를 적극 추진하게 된다. |
그리고 이 후진들은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를 형성함으로써 한국 유학사에 큰 기여를 하였다. |
선조 원년(1568)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동왕 7년(1574)에 문경이라 증시贈諡되었으며, |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
도동서원道東書院, 인산서원仁山書院, 상현서원, 화곡서원, 옥천서원 등에 제향되었으며 |
저서로는『경현록景賢錄』,『한훤당집寒暄堂集』,『가범家範』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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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배향西配享. 제3위第三位. |
정여창鄭汝昌 : 1450~1504. 자는 백욱伯勖. 호는 일두一蠹). 시호는 문헌文獻. |
본관은 하동이다. |
부친을 일찍 여의고 혼자 독서하다가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수학하였다. |
성종 11년(1480)에 성균관에 유시를 내려 행실을 닦고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
성균관에서 정여창을 천거하였다. |
지관사知館事였던 서거정徐居正이 경연에서 진강하게 하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성종 14년(1483)에 성균관 상사上舍의 동렬同列에서 그를 이학理學으로 추천하였으며, |
이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
정여창은 경명행수經明行修로 여러 번 천거되기도 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
그 후 성종 21년(1490)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었으나 |
동궁(연산군)이 좋아하지 않았다. |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었는데, 당시 정여창은 백성들의 질고가 |
부렴賦斂에 있다고 보고 편의수십조便宜數十條를 시행하여 백성으로부터 큰 칭송을 들었다. |
그러나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종성鐘城에 유배되었으며 그 곳에서 생을 마쳤으며 |
그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 되었다. |
정여창은 성리학의 근원을 연구하여 진일보 시켰다. |
그의 학문은 심학心學에 근거한 이학理學으로 특히『중용』『대학』에 정밀하였다. |
그는 평생 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모두 소실되었고『일두유집(一蠹遺集)』정도가 전한다. |
철학사상을 볼 수 있는 주요 논문으로는 이기설, 善惡天理論, 입지론立志論등을 들 수 있다. |
이에 의하면 이기설에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으며, |
선악천리론에서는 선악이 모두 천리에서 나온 성이라고 하였고, |
또한 기氣보다는 이理를 중시한 주리론자主理論者였다. |
정여창은 입지를 중시하여, [입지론]에서는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아야한다"고 역설하였다. |
중종반정 이후 사림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
경현서원景賢書院, 도남서원道南書院, 남계서원南溪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 |
이연서원伊淵書院,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
저서로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남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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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배향東配享. 제4위第四位. |
조광조趙光祖 : 1482~1519.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 |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
개국공신 온溫의 5세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
부친이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으로 부임하자 그 곳에 따라갔다가 |
17세(1498) 때에 무오사화로 인해 이웃 고을인 희천熙川으로 유배온 김굉필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
중종 5년(1510) 29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
34세때에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추천으로 |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으나 사양하고, |
같은 해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을 시작하였다. |
중종의 총애를 받은 조광조는 불차탁용不次擢用을 거듭하여 4년여 만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조는 안팎의 많은 비판 속에 |
중종 14년(1519) 12월 훈구대신의 탄핵에 의하여 사사되었다. |
조광조의 개혁사상은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라 할 수 있다. |
♣ 지치주의至治主義 : 유학의 이념에 의해 천리가 구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 |
정치이념이자 실천운동. |
조광조는 중종 12년(1517) 정 5품인 교리校理로서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과 |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개혁 작업을 실행한다. |
그 첫 번째 작업은 바로 향약보급운동이라 할 수 있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는 것이다. |
이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향촌에 구현하고 동시에 향촌은 사림파가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
이를 기반으로 사장詞章 중심의 학풍을 변화시킴은 물론, |
『가례家禮』의 보급으로 조선의 풍습을 일변시켰다. |
동왕 13년(1518)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소격서昭格署를 폐지시켰다. |
그리고 같은 해 11월 종 2품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라 사실상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 |
두 번째 개혁 작업은 현량과賢良科의 도입을 들 수 있다. |
인재를 과거제도가 아닌 천거로 등용하는 제도로, 이를 통해 사림 세력 확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
조광조는 이러한 사림 세력을 배경으로 중종 14년(1519)에 훈구세력인 反正功臣을 공격한다. |
그는 반정공신의 수를 줄여야 한다며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였고, |
이로 인해 공신의 3/4에 해당하는 76인이 훈작을 삭탈 당하게 된다. |
결국 사림파의 독주에 불만을 느낀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고, |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
당시 조광조가 옥에 갇히자 성균관 유생을 비롯한 1천여 명의 유생들이 |
광화문에 모여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
조광조의 실패에 대해, 이황과 이이는 나라 다스릴 재주는 타고났으나 |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계에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평하였다. |
선조 즉위년(1567)에 사림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
죽수서원竹樹書院, 양현사兩賢司, 심곡서원深谷書院등에 제향되다. |
저서로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
서배향西配享. 제4위第四位. |
이언적李彦迪 : 1491~1553.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시호는 문원文元. |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게 되었다. |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
중종 25년(1530) 사간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자 |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
그 뒤 중종 32년(1537) 김안로가 몰락하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좌찬성左贊成에까지 이르렀다. |
을사사화乙巳士禍(1545)가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었으나, |
사림의 문초에 소극적으로 임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
그 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1547)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고, |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하다 명종 8년(1553)에 생을 마쳤다. |
이언적은 조선조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니, |
바로 주희朱熹의 주리론主理論을 조선조 정통 유학의 흐름으로 정립시킨 것이 그것이다. |
이언적의 이러한 학문은 스승에게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자적인 학문을 수립한 것이다. |
다만 호가 '회재晦齋'인 점에서 회암晦庵(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르려 한 점을 알 수 있다. |
이언적은 27세(1517)에 조선조 성리학사상 최초의 본격적 논쟁이라 할 수 있는 |
태극太極에 대한 개념 논쟁을 벌이게 된다. |
이언적은 영남의 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전개된 |
무극태극론無極太極論에 가세한 것인데, 그는 정통 주자학의 주리론의 입장에서 |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주장하였다. |
곧 태극의 이理가 기氣보다 선행하여 인륜도덕의 근원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에게 전수되어 영남학파 성리설性理說의 선구가 된다. |
이언적은 만년의 강계에서의 유배생활(1547~1553)동안 많은 저술을 하였다. |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와『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은 |
비록 주자의『장구章句』와『혹문或問』의 보충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
주자와 다른 견해를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
또한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는 주자의『중용장구』나『중용혹문』의 체제를 벗어나 |
구경九經을 중심으로 중용을 해석하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
♣ 구경九經 :『중용』 22장,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 |
修身, 尊賢, 親親, 敬大臣. 體群臣, 子庶民, 柔遠人, 懷諸侯. |
『구인록求仁錄(1550)』에서는 유학의 핵심개념인 '인仁'을 연구하였다. |
그리고 또 실천 규범인 예禮를 제시하였는데,『봉선잡의奉先雜儀(1550)』에서는 |
유학의 핵심개념인 '인仁'을 연구하였다. |
그리고 또 실천 규범인 예를 제시하였는데,『봉선잡의奉先雜儀(1550)』는 |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작이라 할 수 있다. |
선조 즉위년(1567)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원文元이다. |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어있다.
|
동배향東配享. 제5위第五位. |
이 황李 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 |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
12세에 숙부에게『논어』를 배웠고, 14세경 부터는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좋아하여 흠모하였다. |
20세 경에는 침식을 잊고『주역』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쳤으며, 이후 병을 항상 달고 다녔다고 한다. |
중종 22년(152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
33세경에 다시 성균관에 들어갔고, 이 무렵『心經附註』를 얻고 그 내용에 크게 심취하였다 한다. |
동왕 29년(1534) 3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
39세에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
그러나 중종 말년에 정국이 혼미해지자 낙향의 뜻을 세우던 중, |
43세 때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제수되자 성묘를 핑계로 낙향하였다. |
이후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하지 않은 것이 20여회에 이르렀다. |
46세 때는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
이 무렵에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다. |
그러던 중 자주 임관의 명을 받자, 중앙관직을 피하여 외직을 지망하였다. |
48세 때에 풍기군수가 되었는데, 전임군수인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
편액扁額, 서적書籍, 학전學田의 하사를 청하여 이루어졌으니 |
바로 조선조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
이 사액서원은 그 후 향약과 함께 사림들이 거듭 흥기 할 수 있었던 주요한 기반이 된다. |
명종 7년(1552)에 학교가 폐이廢弛함을 근심하여 文行이 있는 자를 師儒의 長으로 삼고자 했다. |
이에 이황을 발탁하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아 학문을 진작시키도록 했다. |
60세(1560)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간 기거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
68세에는 선조의 명으로 대제학 지경연에 출사하여, 성군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조목인 |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疎]를 올린다. |
그리고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리학을 10장의 그림으로 풀이한 "성학십도聖學十圖" 를 지어 올린다. |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 한다. |
조선조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체계적이고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
주자학을 집대성한 이황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
이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거의 독학으로 대성하였다. |
이황은 중종 38년인 43세 때에『주자대전朱子大全』을 입수하여 |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에 심독하여 자신의 학문을 완숙시켰으며, 또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
53세(1553)에는 정지운鄭之雲의『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였고, |
이로 인해 기대승奇大升과 7년 여에 걸쳐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 일어나게 된다. |
또한 54세에는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에 대해 논쟁하였다. |
57세에는『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하고, |
58세에는『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자성록自省錄』을 완성하였다. |
63세(1563)에는『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을 지었고, |
66세에는『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으며, 68세에는『성학십도聖學十圖』를 완성한다. |
이러한 이황의 학문은 후일 영남학파를 형성함은 물론 중국, 일본에 전파되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
실로 이황은 동양 삼국의 학자들에 의해, 주자를 이은 최대의 학자로 칭송되며
성인으로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
1970년 서울에 퇴계학 연구원이 창립된 이후,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소, |
대만 국립사범대학 내에 퇴계학 연구회가 부설되었으며, |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톤, 뉴욕, 하와이, 독일의 함부르크, 본에 퇴계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
1976년 이래 해마다 세계 도처에서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고 있다. |
선조 3년(1570) 영의정에 추증하고 동왕 9년(1576)에 문순文純이라 증시贈諡하였으며, |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
이후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이황을 종사한 서원은 전국에 40여 곳에 이른다.
金殷鎬 昨. 지본담채. 50cm*70cm. 이유태 작. 지본담채. 50cm*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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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배향西配享. 제5위第五位. |
김인후金麟厚 : 1510~1560.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 담재澹齋). 시호는 문정文正. |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대대로 호남의 장성에서 살았다. |
부친은 참봉 김령金齡이며, 모친은 옥천玉川 조씨이다. |
열 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소학』을 배웠으며, |
중종 26년(1531)에 성균사마시成均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
중종 35년(154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고, |
그 다음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
중종 38년(1543)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겸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 및 |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어 세자를 보도輔導하였다. |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 현감으로 나아갔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
그러나 채 1년도 안되어 인종이 승하하고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자 병을 칭탁하고 낙향하였다. |
그 후 成均館典籍, 成均館直講 등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
김인후는 인종을 지극히 사모하여 매년 인종의 기일인 7월 1일이 되면 |
집 남쪽 산골짜기에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한다. |
김인후는 조예가 초월하고 기상이 호매하여 도학, 절의, 문장을 겸비한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는데, |
도학道學에 관한 저술보다는 시문집을 더 많이 남겼다. |
그러나 그의 성리학적 성과는 유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또한 도학에 정통한 호남의 거유를 뽑자면 당연 김인후를 뽑을 수 있다. |
김인후는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이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해 논쟁을 벌이자, |
기대승의 설에 동조하였으며, 이로 인해 기대승이 主情論을 세우는 데 중요한 일조를 하게 된다. |
또한 노수신의 [숙흥야매잠해]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였는데, |
이황은 김인후의 뛰어난 견해에 미칠 수가 없다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
이 뿐만 아니라 김인후는 천문, 지리, 의약, 율력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
정조 20년(1796)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장성의 筆巖書院, 옥과의 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
大匡輔國 崇祿大夫 領議政 兼 令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司에 추증되었으며, |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
저서로는『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西銘四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
동배향東配享. 제6위第六位. |
이 이李 珥 : 1536~1584.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 석담石潭). 시호는 문성文成. |
본관은 덕수德水로, 부친은 증좌찬성贈左贊成 원수元秀이며, 모친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명종 3년(1548)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후, |
다음해에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 |
23세(1558)에 이황李滉을 방문하고, 그해 겨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한 후, |
전후 아홉 번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려졌다. |
29세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처음 벼슬을 시작하여 우찬성右贊成에까지 이르렀다. |
이이는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
자신의 사상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려 하였을 뿐더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이루었다. |
이이는 19세부터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교류해 왔는데, |
37세(1572)에 이르러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이루어진다. |
성혼은 기대승과 이항 사이에서 벌어진 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따르려고 하였다. |
성혼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이이에게 물었고 이로 인하여 논쟁이 시작되었다. |
이 논쟁을 두 사람의 호를 따서 '율우논변栗牛論辯' 이라한다. |
여기서 이이는 이황과 기대승은 물론, 서경덕, 노수신, 나흠순 등의 논평뿐 아니라 |
경전의 본의와 송 대 제유諸儒의 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하게 된다. |
이이는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제유諸儒의 설을 비판하였으며, |
특히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주장하고, |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한다. |
이 논쟁의 요지는 『성학집요』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모두 들어있다. |
이황이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여 주리론적 관점에 서게 되고, |
이이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주기론적 입장에 서게 된다. |
이러한 양자의 차이는 정치활동에도 연결된다. |
이황의 경우 정치 현실을 떠나 산림에 은거하려 한데 비해, 이이는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섰다. |
곧 34세에 올린 현실 개혁에 관한『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
39세에 지은 [만언봉사]와 십만양병설과 대동법의 시행 등을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과 심오한 학문은 많은 저술로 나타난다. |
그 대표적인 것으로 전술한『동호문답』[만언봉사] 외에도 |
40세에 지은『성학집요』45세 때 지은『기자실기箕子實記』 |
47세에 임금의 명으로 지은 [인심도심설]과 이 해에 지은 [김시습전]과 [학교모범] |
48세 때의 [시무육조]등을 들 수 있다. |
이황이 남인 중심의 영남학파를 형성한 데 비하여, |
이이는 서인 중심의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영남학파와 함께 쌍벽을 이루게 된다. |
인조 원년 계해년(162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
숙종 7년(1681)에 성환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으나 |
동왕 15년(1689) 일시 출향黜享되었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1694) 때에 다시 종사되었다. |
자운서원, 송담서원 귀암서원, 운전서원, 백록동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어있다. 오죽헌 박물관
|
서배향西配享. 제6위第六位. |
성 혼成 渾 : 1535~1598.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 |
본관은 창녕 이다. |
명종 6년(1551) 생원, 진사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명종 9년(1554)에 같은 고을의 이이와 사귀면서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
선조 1년(1568)에는 이황을 만나게 되고, 이후 깊이 존경하게 된다. |
같은 해 경기감사 윤현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에 봉해졌고, |
이후 벼슬이 좌참찬까지 이르렀으나 대부분 사양하거나 부득이 벼슬에 나아가더라도 곧 사퇴하였다. |
대신에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 놓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
성혼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임금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이후로 점점 미움을 받았다. |
왜란 중 유성룡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는데, 강화를 주장한 이정암의 입장을 옹호하다 |
선조의 분노를 사자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갔다. |
그는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에 해당하며,
학문적으로는 이이 사후에 사실상 기호학파의 주도자였다. |
그러나 성혼은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에 가까운 인물이라 하겠다. |
그는 자신의 학문을 이이와의 토론을 통해 체계화시켰다. |
성혼과 이이 사이에 벌어진 인심도심논쟁인 이 '율우논변(1572)'은 |
성리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이 논의는 성혼이 기대승과 이황과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지지하면서, |
이이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시작되어 1년에 9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계속하였다. |
파주로 돌아간 이후로 성혼은 조정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
그러나 그는 많은 참소를 당하였으니, 사후에도 기축옥사己丑獄事(1602)에 연루되어 |
관직이 추탈되기까지 하였다. |
인조 11년(1633)에 복직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간이라 시호하였다. |
숙종 7년(1681)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
동왕 15년(1689)에 출향 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다시 승무되었다. |
저서로는『우계집』과『주문지결朱門旨訣』『위학지방爲學之方』등이 있다. |
죽림서원, 물계서원 파산서원, 운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
동배향東配享. 제7위第七位. |
김장생金長生 : 1548~1631.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 |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
선조 11년(1578)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었으며, |
동왕 14년 부친인 김계휘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다. |
동왕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조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많은 공을 세웠다. |
동왕 30년(1597)에는 낙향해 있다가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수행하여 |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으며, 그 후 안성 군수가 되었다. |
계축옥사癸丑獄事(1613)때 동생이 관련되었다 하여 연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난 후 |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
그 후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직을 맡기도 하였다. |
정묘호란 때 (1627)에는 의병을 모아서 공주로 내려온 세자를 호위하였으며,
이 해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
김장생은 여러 차례 벼슬을 받기는 하였으나 나아가려 하지 않았고 |
또 나아가도 오래지 않아 사직하여 낙향하곤 했다. |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의 영수 격으로 그 영향력은 매우 컸다. |
그는 향리에서 줄곧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고, |
이에 그의 문하에는 송시열, 송준길, 장유, 최명길 등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
김장생의 스승으로는 이이, 송익필, 성혼을 들 수 있다. |
그러나 예학에 대해서는 송익필에게 영향 받은바가 크다. |
그는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에게 전수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으니, |
예를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격상시켜 독립된 학문으로 체계화시킨 것이다. |
조선의 오현중 예의 대표자로 손꼽히는데, '동방예가의 대성자'로 칭송되듯 |
그의 학문에서도 예학이 가장 월등하다 하겠다. |
이이와 성혼을 배향하는 서원을 세웠고, 1만 8천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
그리고 이이가 집필하다 마치지 못한『소학집주小學集註』를 완성하여 발문을 부쳤다. |
그는 많은 저술을 하였는데 중요한 것으로『경서변의經書辯意』『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
『가례집람家禮集覽』『전례문답典禮問答』등을 들 수 있다. |
인조 14년(1636)에 이조판서를 증하고 효종 8년(1657)에 문원이라 증시하였으며, |
숙종 43년(1717)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돈암서원遯巖書院, 도기서원道基書院등 10여 개 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
서배향西配享. 제7위第七位. |
조 헌趙 憲 : 1544~1592.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峰 & 도원陶原). 시호는 문열文烈. |
본관은 백천이다. |
집이 가난했지만 열심히 공부하였고, 어려서부터 매우 효성스러웠다. |
명종 20년(1565)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2년 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
선조 1년(1568)에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 파주목, 홍주목 등의 교수를 역임하여 |
사품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
선조 8년(1575)부터 호조좌랑, 예조좌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을 거쳐 |
경기도 통진의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
조헌은 언론이 과감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자주 임금의 노여움을 샀으며, |
이로 인해 파직되기도 했다. |
선조 5년(1572) 이후 교서관의 정자, 저작, 박사를 지내면서 |
불사봉향佛寺封香을 반대하는 글을 올려 임금의 진노를 사기도 했다. |
또한 동왕 20년(1587)에 일본 사신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고, |
동인의 영수 이산해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려 임금을 진노하게 했다. |
동왕 22년에는 지부상소持斧上訴를 하여 동인의 전횡과 시정의 폐단을 극론하다가 |
삼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길주 영동역에 유배되었으며, |
그 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
동왕 24년(1591)에는 풍신수길이 사신을 보내 '정명가도征明假道' 운운하자, |
옥주에서 상경, 지부상소를 올리며 3일간 대궐 밖에서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기도 했다. |
그리고 이해에 다시 왜의 사신이 오자 지부복궐소持斧伏闕訴를 올려 |
왜적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600여명을 모아 8월에 승군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
그러나 관군에 의해 의병이 강제 해산 당하자,
남은 700명의 군사로 왜병과 금산에서 전투중 전사하였다. |
이러한 공로로 조헌은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 등과 함께 임진 4충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
그의 생애로 미루어 보면, 절의가 매우 뛰어나서 도학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할 수 있다. |
그러나 그는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이물로 이이와 이지함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
조선 중기 개혁론의 기수가 된다. |
또한 후에 실학파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
선조 7년(1574)에 명나라에 다녀와 올린『동환봉사東還封事』에는 |
그의 개혁사상이 집약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를 따를 것을 건의하면서, |
시무에 급한 문제를 다룬 [팔조소]와 위정의 근본이 되는 문제를 다룬[십육조소]등이 실려 있다. |
그의 학문은 실천궁행으로 주장을 삼고 거경에 힘써서 근독공부謹獨工夫를 꾸준히 하였다. |
또한 천문 지리 등에 능통하였으며 경세의 대지가 있었다. |
선조 37년(1604)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
영조 10년(173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고종 20년(1883)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표충사, 문회서원, 우저서원, 상현서원 성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
1971년 금산의 순절지인 칠백의총이 성역화 되었다. |
저서로는『중봉집』이 있다.
|
동배향東配享. 제8위第八位. |
김 집金 集 : 1574~1656.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 |
본관은 광산, 부친은 문묘에 배향된 김장생이며, 모친은 창녕 조씨이다. |
8세에 송상현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었다. |
18세에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광해군 2년(1610)에 헌릉창봉으로 제수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
인조반정(1623) 이후 부여현감과 임리현령, 공조참의 등을 지냈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
그는 관직 생활보다는 부친 김장생과 함께 은거하여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한 기간이 더 길었다. |
효종 즉위년(1650)에 다시 등용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 공조참판工曹參判, 예조참판禮曹參判, |
대사헌大司憲등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
그러나 태학의 유생들이 벼슬에 더 있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리고 그의 덕을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
76세에 김상헌의 청으로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했다. |
80세에 좌참찬이 되었고, 81세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
김집은 부친에게서 예학을 전수 받아 이를 체계화시켰다. |
그는 관혼상제를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아 이후 예학의 방향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그의 예학은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삼고 있지만, 고례古禮를 보다 중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
그는 이이와 김장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송시열에게 전수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시켰다. |
문인으로는 송시열 외에도 송준길, 이유태, 유계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
고종 20년(188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와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돈암서원, 봉암서원, 창주서원, 문정서원, 부산서원, 월봉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
저서로는 고례에 입각해 당시 상례의 불합리한 점을 지적한 |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외에도『신독재문집愼獨齋文集』 |
『의례문해속儀禮問解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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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배향西配享. 제8위第八位. |
송시열宋時烈 : 1607~1689.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 |
아명은 성뢰聖賚, 본관은 은진이다. |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했으며, 후에 김장생과 그의 아들인 김집에게 배웠다. |
인조11년(1633)에 생원시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하였고, |
이로 인해 명성이 크게 알려졌다. |
인종 13년(1635)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가 되었으나 병자호란으로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자, |
낙향하여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
그는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춘추대의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여 |
효종과 의지를 일치시키기도 했으며, 효종으로부터 북벌의 밀지를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다. |
그러나 청의 압력으로 물러난 뒤, 충주목사,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
효종9년(1658)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
그러나 이듬해 5월 효종의 급서와 조대비의 복제 문제 등으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
현종 9년(1668) 에 우의정에, 1673년에 좌의정에 잠시 임명되기도 하지만 |
곧 사퇴하고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
비록 재야에는 있었지만 그는 조정의 공론을 좌지우지 하였고 |
대신들도 매사를 그의 의견을 물어야 할 정도로 사람의 중망과 함께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그러나 현종 15년(1674) 효종비의 상으로 인해 일어난 2차 예송에서 서인들이 패배하자, |
그도 덕원, 장기 등으로 유배되었다. |
그후 경신환국庚申換局(1680)으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
숙종 9년(1683)에 사직하고 괴산의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
숙종 15년(1689) 세자책봉은 시기상조라고 상소하였다가 제주에 유배되었으며, |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
송시열은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당대뿐 아니라 |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
우암은 일생동안 주자를 연구하였으며, 또 가장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평해진다. |
또한 춘추대의에 입각하여 존왕양이에 따른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
일생을 '명의名義' 두 글자를 위해 살다간 인물로 평해진다. |
그는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적용을 중시하여, |
현실 개혁책으로 군제변통軍制變通과 공안개정貢案改正, 서얼허통庶孼許通, |
사창제社倉制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
또한 그는 권상하, 김창협, 이단하, 송상민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
특히 권상하의 문인으로 한원진, 이간 등을 배출함으로써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
주류를 형성함은 물론, 그의 학맥은 조선말기의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
우암은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신원 되었으며, |
다음해에 문정이라 추시되었다. |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영조 32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어 송준길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
대로사大老祠,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 매곡서원, 초강서원 등 전국의 수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으로『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
『정서분류程書分類』『송자대전宋子大全』(215권 102책)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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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배향東配享. 제9위第九位. |
송준길宋俊吉 : 1606~1672.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시호는 문정文正. |
본관은 은진이다. |
어려서부터 이이를 사숙하였고, 20세 때에 김장생의 제자가 되었다. |
인조 2년(1624)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동왕 8년 세마洗馬에 제수된 뒤, |
동몽교관, 예안현감, 형조좌랑, 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
효종이 즉위(1649)하면서 송시열과 함께 발탁되어 통정대부에까지 이르러, |
송시열과 함께 효정의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결국 물러나게 된다. |
효종 9년(1658)에 대사헌. 이조참판 겸 좨주가 되었다. |
그러나 다음해에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인해 |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의 삼년설을 누르고 기년설을 관철시켰다. |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이후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다. |
사후 현종 14년(167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이듬해의 2차 예송에서 서인이 패하고 |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숙종 1년(1675) 관작을 삭탈 당했다가 |
숙종 6년(1680)에 갑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관작이 복직되었다. |
송시열과는 동족, 동문이며 학문의 경향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
정치적인 면에서도 대부분 의견이 일치되었으니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칭해졌다. |
그리고 송시열이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으로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데 비하여, |
인품이 원만하고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아 비교적 비판이 적었고 인간관계도 원만하였다. |
학문적으로는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고, 또한 예학에도 밝았다. |
일찍이 그의 스승인 김장생은 그가 동방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라 칭찬하였다 한다. |
문하에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는데 대부분 송시열의 문하에도 같이 출입했으며, |
송상민, 남구만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
숙종 7년 (1681)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영조 32년(175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숭현서원, 충현서원, 봉암서원, 돈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
저서로는『어록해語錄解』와『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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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배향西配享. 제9위第九位. |
박세채朴世采 : 1631~1695. 자는 화숙和淑. 호는 (현석玄石 & 남계南溪). 시호는 문순文純. |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는데, 증조부 응복은 대사헌이며,
조부 동량은 형조판서이며, 신흠의 외손이다. |
또한 박세당, 박태유, 박태보 등과는 친족간이며, 송시열 의 손자를 사위로 삼았다. |
1649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
효종 2년(1651)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문제를 두고 영남 유생이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
박세채는 이에 대해 이를 비판하는 글을 냈다가 효종의 꾸지람을 듣자, |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
효종 2년(1651)에 김집에게 수학하였으며, 동왕 10년(1659)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천거되었다. |
이해 5월 효종이 승하하고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하여 관철시켰다. |
그러나 2차 예송에서 패하자, 그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 원주 등지에서
6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
그 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1680)으로 다시 등용되어 벼슬이 대사헌과 이조판서 등을 거쳐 |
우참찬에 이르렀다. |
숙종 10년(1684)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막으려 하였으나, 결국 소론을 지지하게 된다. |
동왕 15년(1689)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
다시 갑술옥사(1694)이후 좌의정에 올랐으며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
그리고 이때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
그는 6년간의 유배생활과 기사환국 이후의 은거 생활을 통해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
우선 유배기간 동안에는 여러 경서의 난해한 곳을 풀이한『독서기讀書記』와 |
『춘추보편春秋輔編』을 비롯하여 '경敬'에 대한 여러 학자의 설을 정리한 |
『심학지결心學至訣』등을 지었다. |
그리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서는 윤증尹拯, 정제두 등 소론계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등을 통해 |
중국과 우리 나라의 도학의 연원을 밝혔으며,『양명학변陽明學辨』등의 글을 통해 |
양명학을 비판하여 도통수호에 전력하였다. |
또한 그는 예학의 대가로,『남계선생예설南溪先生禮說』『육례의집六禮疑輯』등을 통해 |
오륜의 근거를 밝히고 구체적인 예의 절차까지 탐구하여 예학을 한 차원 격상시켰다. |
이에 따라 17세기의 성리학은 예학적 전개 양상을 띠게 된다. |
오관서원, 자운서원, 반계서원, 비봉서원, 구봉서원, 문회서원 등에 제향되었으며, |
숙종 24년(1698)에 문순이라 증시하였고, 영조 40년(1764)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
저서로는 위에서 든 것 외에도『남계집』『가례요해』『성현유범』등 |
수백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하였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163호. 93cm*175cm. 17C 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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