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7. 14:09ㆍ성리학(선비들)
이제현
李齊賢
출생 | 12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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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67년 |
명문장가로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하고, 조맹부 서체를 도입했다.
1320년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했다.
저서로 《효행록》, 《익재집》, 《역옹패설》 등이 있다.
박학다식한 고려의 지성인
이제현은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로 당대의 명문장가로 평가된다. 정주학의 기초를 세운 학자로, 원나라와 동등한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적극 노력한 문신으로 유명하다.
이제현이 태어난 1287년(충렬왕 13) 고려에는 측근 정치가 득세하고 있었다. 개국공신 이금서(李金書)의 후손으로 그의 집안은 삼한공신을 배출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경주 향리를 세습했을 뿐 명문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李瑱)과 형제 두 사람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면서부터 그의 집안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진은 훗날 재상의 반열에 올라 신흥 명문가로서의 초석을 다졌다. 이제현은 이진의 네 아들 가운데 셋째 아들이었다. 열다섯 살에 성균관에 수석 합격했을 정도로 영민했다고 한다. 아내는 당대 대학자인 권부(權溥)의 딸이었다.
성균관 수석 합격에 이어 과거에도 연거푸 급제한 이제현은 권무봉선고 판관과 연경궁 녹사를 거쳐 1309년 사헌부 규정에 발탁되면서 본격적인 관리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1314년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는 상왕인 충선왕의 명에 따라 원나라 수도 연경으로 가서 만권당에 머물렀다. 만권당은 왕위에서 물러난 충선왕이 지은 일종의 서재였다. 이곳에서 충선왕은 유명한 학자와 문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고려의 학자로 이제현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현은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頫)같은 걸출한 문인들과 사귀면서 식견을 넓혔다. 또 충선왕의 요청으로 세 차례에 걸쳐 중국 대륙 안쪽으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시야를 크게 넓힐 수 있었다.
1320년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갑작스럽게 유배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고려 내부에서 충선왕의 아들 충숙왕을 몰아내려 했던 반역파와 고려의 독립을 저지하려는 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생긴 일로 추정된다. 이제현은 원나라 조정에 상소를 올려 충선왕의 유배를 풀어 줄 것을 주장했다. 충선왕이 풀려난 후 이제현은 1325년 첨의평리, 정당문학에 전임되어 재상의 지위를 확보했다.
1339년 충숙왕이 승하하자 충혜왕과 심양왕 고가 왕위를 둘러싸고 경쟁하게 되었다. 당시 정승이던 조적(曹頔)은 심양왕 고를 왕으로 내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충혜왕이 자신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는 소문을 거짓으로 냈고, 조적을 모함하는 방을 붙이며 기선을 제압했다. 이에 조적의 무리가 군사 천여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충혜왕은 직접 조적의 군사를 물리쳤고, 조적은 충숙왕비인 경화공주의 처소에 숨어 있다가 잡혀 죽고 말았다. 이 난을 진압한 충혜왕은 왕위에 올랐지만 조적의 잔당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원나라에 충혜왕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고, 충혜왕은 원으로 잡혀가 형부(刑部)에 갇혔다. 이제현은 이때 원나라로 직접 가 사태를 수습하고 충혜왕을 복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대표작인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동안 칩거하며 저술 활동만 하던 이제현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후 판삼사사에 임명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특히 문란해진 정치를 바로잡는 데 관심이 많았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뒤로는 정승으로서 국정을 총괄했는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도 남겼다. 하지만 1356년 반원운동이 일어나 기철(奇轍) 등이 죽자, 문하시중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고 이듬해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이 생길 때마다 왕에게 자문을 했다.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시켰을 때에는 남쪽으로 몸을 피한 왕을 배알해 왕의 수레를 호위하며 길을 따르기도 했다.
이제현의 묘비에는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는 원 간섭기라는 정치적 혼란기에 원과 고려를 넘나들며 활동했고,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정치적으로 화를 당하거나 유배되지 않았다. 경주 구강서원과 금천 도산서원에 제향되었고, 훗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