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27. 16:28ㆍ서예일반
[스크랩] 손과정의 서보에 대하여 서예이론 및 한문 원전 자료실
손과정 孫過庭의 서보 書譜에 대하여 Ⅰ. 서 론 노신(魯迅)은 <학문학사강요(學文學史綱要)>에서 말이란 풍파와 같다. 출렁거리던 파도소리가 오래 지나가면 그 자취도 아득해져 단지 귀와 입으로만 전해질 따름이다. 단지 부족한 것은 멀리 전달되고 후세에 이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 사물에 감동을 받아 이를 펴내면 노래가 된다. 노래는 감동을 주지만 그 일은 잊게되는 것이다. 언행을 기록하는 것은 일들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다. 언어만 믿으면 일들이 기억되지 않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줄을 묶어 문자를 만들었다2). 이런 문자는 부호로서의 형태[形]와 울림으로서의 소리[音]와 사상과 철학을 전달하는 의미로서의 의(意)로 구성되는데, 인간이 사물에 느낌을 받고 이것이 감정에 인연이 되어 노래하면 시가 되는 것이다. 詩經大序에도 시는 의지의 발로이다. 마음이 있으면 뜻에 있는 것이 말이 되어 시가 되며, 정이 속에서 움직여 말로 형용된다3).(詩者,志之所之也,在心爲志,發言爲詩,情動于中而形于言) 이와 같이 인간의 정감에 의해 시가 만들어지고 이것은 문자로 표현함에 서예가 되는 것이다. 이런 서가 예술로서 인식되기 시작하고 원시서예로부터 자각적인 서예술시대로의 轉移되는 시점이 前漢이다. 이 시점이 바로 草書가 출현하는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예는 실용적 의사전달 뿐만 아니라 사물의 형상과 서정을 나타내고 정신과 형태, 자질과 노력, 조화와 통일 등을 꾀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하나의 예술로 발전하게 되는 데4) 표현대상이 문자의 형체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그 선의 공능은 내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자의 결구로 정감을 창조하는 부호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선은 繪畵에서 처럼 자연의 사물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선이 아니다. 그러므로 심미의 형식감이 더욱 풍부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미의 형상을 연상하는 이런 종류의 매개체에서 벗어나 직접 서예 문자의 형식(선 결구 포국 먹색 등)이나 형체에 접근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 어떤 종류의 넓고 함축적인 정감의식을 발견하여 내재적인 결구와 외재적인 글씨5)가 의미 있는 형식적인 결구로 서로 결합하여 심미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서예술의 여명기라는 前漢에 이어 서의 형식과 표현방법이 다양화됨에 따라 글씨에 대한 관념도 실용에서 예술성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 후한6)이며, 위진시대에 들어서면서 사상, 철학, 예술 등 사회 전반적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는데 특히 서예는 <中和의 美>라는 서예미학 쪽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서예미학의 실현은 왕희지였는데, 위진시대에 숭상하였던 <중화의 미>에 대한 이상을 충분히 실현하였으며, 또한 후세 사람들이 진나라 글씨를 한 마디로 韻7)이라 개괄했다. 初唐에는 이러한 <중화의 미>를 계승해 발전했으나 차츰 法을 숭상하는 경향으로 흐른다. 그래서 당의 서예미학은 법을 숭상하는 가운데 해서가 발달하였고, 또한 서정 표현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검토되었다. 정이라는 것은 이미 서예미학에서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광범위하게 운용되었다. 이 방면에 비교적 많은 것을 논한 사람이 손과정, 장회관, 한유 등이다. 손과정은 서보에서 그 성정에 달하고 그 슬픔과 즐거움을 형상화한다는 말로 왕희지 예술 창작의 정감에 대한 변화를 거쳐서 정감을 글씨에 깃들이게 하는 서정 표현의 특성을 검토하였다8). 또 손과정은 人間의 情이 움직여 말[言]이 되고, 詩가 생기는 일이나, 人間의 情懷는 날씨가 좋을 때에는 명랑해지고 나쁜 날에는 鬱屈하듯이 결국은 天地의 근본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한 自然의 理法을 모르기 때문에 形式에 사로잡혀 잘못을 범하게 된다9). 여기서 손과정은 서예의 창작에 있어서 詩歌와 마찬가지로 서정을 발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와 동시에 손과정은 천지의 마음에서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손과정은 전기의 狀物說과 후기의 唯情說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이 과도기를 중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10). 이와 같이 손과정은 唐代 서예미학 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으며 이런 이론적 근거를 자신의 초서 필적으로 서보를 撰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본고에서는 이런 손과정과 서보의 서예적 가치 등을 고찰하고 초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본고는 제1장 서론에 이어 제2장은 손과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고 제3장은 서보의 특징을 논하고 제4장은 서보의 가치를, 제5장에서 결론을 맺는 것으로 구성한다. 또한 본고에서 인용한 번역문은 『예주상집』(포세신 저. 정충락 역)과 『중국역대서론』(곽노봉 선주), 『중국서예눈문선』(곽노봉 편주), 『서예기법대관-서보』(일신각 편집부),『서예필법강좌-서보』(중앙문화사)을 참고하였다. Ⅱ. 孫過庭이라는 인물 1. 손과정의 생몰 손과정 生歿에 관한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단지 서보의 두 곳에 적힌 기록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1] 志學之年, 留心翰墨, 味鐘張之餘烈, 挹羲獻之前規 極慮專精 時逾二紀 [2] 끝 부분의 垂拱三年 寫記 이상 두 문장에서 생몰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1]에서는 손과정이 「志學」의 歲, 15세부터 서에 심취(心醉)하여 한묵에 마음을 품어 수업을 하였다 하니 15세에 서에 정진하여 이기(二紀) 즉 24년을 지냈다 하였으므로, 손과정이 서보를 撰(저술)한 것은 39세~40세로 추측할 수 있으며11), [2]의 垂拱12)三年은 則天武后의 治定 3년에 해당하는 687년이다. 단 [2]의 진적을 보면 최초 垂拱元年이라고 쓸까하다가 수공삼년(垂拱三年)으로 개서한 흔적이 보이지만 정확히 알 수 없고, 정확한 것은 垂拱三年(687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므로 손과정의 생몰을 역계산할 수 있다. 서보 완성이 687년이고, 서예에 입문한 것이 15세[志學之年, 留心翰墨]이며, ‘24년[時逾二紀]간을 정진했다’ 하였으므로 648년경에 태어나 663년경에 서예에 입문하고 24년여를 정진하여 40세인 687년에 서보를 저술하고 수년 후에 歿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손과정 이름 손과정의 이름은 新․舊 唐書에는 보이지 않고, 唐代의 다른 공문문서에도 기록이 없다. 손과정의 출생이나 관직을 알기 위해서는 唐代의 서론에 나오는 기사나, 후대의 기록에 의할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1] 陳子昻의「率府錄事孫君墓地銘」및「祭文」 [2] 張懷瓘의 書斷 [3] 宣和書譜 (작자 미상) [4] 陶宗羲의 書史會要 [1]의 진자앙(656-695)은 손과정에 가장 가까운 年代의 인물이나 여기서 손군이 손과정 그 사람인지 의심은 있으나 그것을 확인할 문헌 등은 없다. [1]의 묘지명과 [2]의 張懷瓘의 書斷에서는 손의 이름을 虔禮. 字는 過庭이라고 하고 [3]와 [4]에서는 이름이 過庭, 字를 虔禮로 적혀있으나. 어느 것이 맞는지 속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현재에 서보를 부를 때 손과정 書譜라고 일반이 부르고 있어 본고에서도 손과정이라 한다. 기타 本貫이나 출생지 등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다. 3. 시대적 배경 서보가 탄생했던 시대적 배경은 왕희지의 書를 사랑했던 당태종(597~649)이 승하하고 고종(628~683)과 측천무후(624~705)의 시대로 우세남, 구양순, 저수량 등의 초당 대가들은 이미 사망한 후이고 왕희지의 전형적인 서예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이며 이러한 징조가 보이는 新書風에 대한 전통 존중의 사상을 준수하려는 것이 서보의 서론이었다. 당시는 개성을 존중하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이윽고 장욱, 회소, 안진경에 의한 서법이 일변하여 밀려나는 고법에 대한 신법, 즉 신고전주의 서예가 일어나고 있는 시기였다. 그래서 손과정은 왕희지 書에 대한 존숭을 나타내고 있다. Ⅲ. 서보의 특징 1. 서보의 구성 손과정은 서보에서 육편으로 써서 문장을 구성하겠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미완성인지 아니면 완성되었는데 분실한 것인지 확실치 않고, 현재는 이 서보서 만이 남아 서예이론의 대강을 개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부분에 있는 것으로 「현재 撰하여 6편으로 하고 분하여 상하 양권으로 한다」라는 부분이다. 그런데 서보는 卷上만 있을 뿐 권하는 없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부분에 「垂拱三年 寫記」야 말로 완전 완결의 의사표시이다. 중국의 주건신은 현존하는 서보를 완본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상하 양권, 육편으로 나누고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13) 제 1편 : 1행 夫自古之善書에서 48행 子敬之不及逸少 無或疑焉 까지 종요, 장지, 왕희지, 왕헌지 四賢의 書를 논하고 각각 평가를 하고 왕희지서의 일반적인 특질을 지적하고 가장 우수한 것이라고 稱揚한다. 제 2편 : 48행 余之學之年에서 146행 覩蹟明心者焉까지 書學의 근본적 요소를 구체적 場面에 넣어서 論한다. 翰墨의 道는 그것이 小道라 하더라도 인간 교육의 근본이며 그 묘는 신선과도 같다고 주장하며, 점획과 사전의 개념, 諸書體의 兼修, 精과 兼善의 대조적 입장, 五合, 五乖의 조건 등을 술하고 書藝 입문의 즐거움을 말한다. 제 3편 : 146행 代有筆陳圖七行에서 187행 非訓非經까지로 왕희지의 작이라고 전하여지는 筆陳圖 筆勢論에 언급하고 있으며 서예의 가치와 서가의 형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또 雜體書 등을 배척할 것을 술한다. 이상이 卷上으로 분류한 것이며 제 4편 : 187행 夫心之所達에서 228행 原夫所致 安有体哉까지 執使轉用이라고 하는 書의 기본적인 기법을 술하고 또 왕희지의 명적을 논했다. 제 5편 : 228행 夫運用之方에서 306행 斯皆獨行之士 書 表現의 내용적 전개와 구체적 현장, 三時三變(平正-險絶-平正)의 단계로부터 通會에 이르기까지 왕희지가 도달하고 있는 경지에 대해 말했다. 제 6편 : 306행 易日觀乎天文에서 369행 夏蟲哉 까지로 書의 절묘한 경지 즉 心手合一하여 외면적 규범을 止揚하고 독창성 넘쳐흐르는 경지를 확정한 후 세상의 知音이 없음을 슬퍼한다. 跋語 : 360행부터 끝 서보를 撰하게 된 의도를 말하고 전문의 발어로 했다. 이상 권하로 분류한 것이다. 2. 서보의 흐름14) <서보>는 無心 중에 몸과 마음이 합치되었을 때, 단숨에 씌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손과정은 장회관의 <서단>에서 「이른바 들이는 공은 적지만 선척적인 재주가 있다」라는 평을 받고 있듯이 마음의 섬광이 그대로 붓끝에 쏟아지는 천재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전체를 통람하면 처음은 신중했던 탓인지 약간 움직임이 모자란다. 중간 부분은 실로 붓이 잘 뻗어 필자의 본성을 발휘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스피드감이 넘치는 솜씨인데 그 안에 절도와 억양의 변화가 있어 전체를 잘 조화시키고 있다. 끝 부분은 글자도 커지고, 약간 거칠어지는 경향이 있다. 글씨는 중용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 부분을 그다지 칭찬하지 않는 듯하지만, 이처럼 써 나아감에 따라 운필의 흐름이 약동하고 기분이 점점 양양되어 가는 것을 보면 역시 단숨에 써낸 것으로 보여진다. 어쩌면 중간에서 잠깐 쉬기도 했겠지만 며칠씩 걸려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3. 용필과 선질15) <서보>의 점획에서 받은 느낌은 입체적이며 힘이 담겨 있고 싱싱한 데다가 윤기가 있다. 왕희지 이래의 이상적인 線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을 技法的으로 보면 날카로운 起筆과 경쾌하고 힘이 담긴 운필 리듬감을 강조해서 전체를 생동케 하는 頓挫節勢 등의 요소를 들 수 있다. 또 이 선의 윤이 흐르는 아름다움은 역시 붓과 종이의 질이 극히 좋았던 것에 연유한다고 생각된다. 다시 자세히 전체를 살펴보면 두 가지의 선을 교묘하게 나누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는 선이라 보기보다는 面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리는 굵은 점획이 다. 이것은 기필이나 轉折의 부분에서 필봉을 종이 위에 누름으로써 점획의 모서리마다 날카로운 陵角을 만들어 鈍重하게 되는 것을 막고 있다. 다른 하나는 가늘면서 붓끝을 안으로 감싸서 끈기와 둥근 맛을 지닌 선이다. 물론 모든 점획이 두 가지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중간적인 선도 많으나 이 두 가지의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점획을 교묘하게 전개해서 지면에 明暗, 遠近의 변화와 깊이를 나타내고 있다. 4. 단필과 절필16) 서보에는 특이한 용필이 두 가지가 있다. 단필과 절필이다. 서보에서 단필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으나 자세히 보면 서보 전편에 걸쳐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단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十七帖을 배운 사람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용필은 소위 筆斷한 後 起한다.’ 라고 하는 초서 용필의 비결을 보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十七帖만큼 극단적인 매듭을 붙여서는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다. 한자의 점획에는 기필, 수필, 전절 등의 부분이 있다. 이러한 곳에서는 필봉을 정리하기도 하고 탄력을 모으는 용필을 한다. 또 각 방향의 점획을 평균해서 나오므로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아도 붓끝은 저절로 일어나서 운필에 부자유가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초서의 경우는 기필이나 전절이 해행에 비해서 적기 때문에 써 나감에 따라 필봉의 종이에 대한 튀김이나 탄력이 약해진다. 그래서 굽은 곳 등에서 일단 붓을 떼는 것처럼 하고 다시 붓을 눌러 다음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단필이다. 十七帖과 같이 너무 단필이 많으면 해서와 같은 느낌이 되어 유려성을 잃고 만다. 반대로 절도 없이 이어 써서는 필세가 약해지고 만다. 때에 따라서 적당한 단필을 사용하면 흐름이 긴장되고 필세를 증가시킬 수가 있다. 생각건대 十七帖의 각자는 운필이 길게 늘어지는 것을 타이르는 심정으로 단필을 강조했을 것이다. 행초에 있어서 절필은 단필과 마찬가지로 필세의 이완을 막는 뜻을 갖고 있다. 단필은 전절 부분에서 응용되지만 절필은 필획이나 연면선 도중에 쓰인다. 그런데 서보의 경우는 약간 사정이 달라서 극단으로 많이 나타난다. 특히 중간쯤 이후가 심하다. 그런 이 절필이 어떤 뜻을 갖는 것인가는 진적이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 몰랐던 것이다. 말하자면 서예가들은 각본(刻本)밖에 보지 못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각본의 주요한 것은 천진본과 원우본이다. 원우본은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송대의 각본인데 각법이 간결창고한데다 일행의 자수가 진적본 보다 많다. 이 본은 뒤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진적본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어느 틈엔가 제멋대로 일행의 자수를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천진본은 진적을 방불케 하는 精刻인데 원래 卷子本인 것을 책으로 옮기기 위해 문자의 위치를 바꾸어 약간이지만 행이 비뜰어진 것을 수정하고 있다. 이리하여 절필의 위치가 바뀌어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진적본이 세상에 나오자 절필의 비밀이 명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적본에 절필이 나타난 상태에 다음 두 가지 특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첫째 한 행 안에 있는 절필이 符節을 합한 것처럼 일직선상에 있다는 점. 둘째 절필은 세로로 이어진 직선이 약 8분 간격으로 규칙적으로 나왔다는 것. 이상 두 가지에서 『절필은 마치 부채 면에 글씨를 쓸 때와 같이 용지가 접힌 눈금에 붓이 닿아서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처음에는 八分間隔의 접는 금에 맞추어서 쓰고 있었는데 앞으로 써 나가감에 따라 흥이 나서 글자가 접은 금을 뛰어 넘게 되고 여기에서 서보에 독특한 절필이 생겼다는 것이다. 절필은 서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법첩에도 나타난다. 5. 결체와 장법17) 용필법에 따라 변화하는 線質과 점획의 구성법 즉 결체와, 글자의 배열, 이른바 章法의 세 가지는 관련이 있는 인과간계를 지니고 있다. 초서의 字形은 붓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動態이지만, 대충 보면 역시 제각기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서보>의 글자 모양은 <十七帖> 등에 비하면 약간 세로로 긴 타원형에 가깝다. 세로로 길다는 것은 당나라때의 일반적인 특징이지만, 타원형에 대해서는 한마디 첨가해 둔다. 완성된 것은 타원형으로 보이지만 쓸 때는 부채꼴로 위로 벌어지는 모양으로 쓰려고 했던 것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연습이 충분치 못하고 완성된 글자 모양을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처음에는 신중히 작게 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용기가 생겨 급히 점획을 뻗쳐 아래를 벌리는 모양으로 되는 수가 많다. 이러한 경향을 막기 위해, 또한 실제로 <서보>의 글자를 살펴보아도 처음에는 많이 벌려 점획의 사이를 넓게 하고, 나중에는 점점 죄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부채꼴의 구성은 왕희지의 초서에는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서보>는 그것을 약간 세로로 길게 해서 달걀을 세워 놓은 모양으로 되었다. 중간부 부터 죄는 것은 다음 글자와의 연결을 손쉽게 하기 위한 것으로 章法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書譜>의 글자 구성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지만 한 자 한 자의 모양은 각기 다르다. 그것은 중심의 위치나 기울기에 따라 변화되었다. 예를 들어 중심이 왼쪽에 쏠리는 경우는 점획을 오른쪽으로 내달 듯이 해서 균형을 취해야 하고, 중심이 비슷한 경우는 당연히 그것에 적응된 구성이 필요하다. 초서의 운필은 旋回運動이 중심이다. 그 결과 같은 모양의 움직임이 겹쳐서 선의 교차가 예각을 이루어 단조롭게 되기 쉽다. <書譜>는 선의 교차가 직각에 가깝게 되어 있어 전체가 밝게 느껴지고, 구조적으로도 긴장감을 주고 있다. 그 외 <서보>의 주요 장법상의 특징을 보면 첫째 氣通으로 자간 행간이 서로 연관되어 기운이 막힘이 없어야 한다. 이에 <서보>는 이른바 獨草體로, 연면한 부분은 거의 없다. ―최고 긴 연면은 4자― 그러나 각 글자의 마지막 획에 충분한 여운이 있고, 적절히 사이를 두어 다음의 글자로 옮긴 것 등으로 미루어 기운이 매우 잘 통한다 하겠다. 둘째 비수․대소인데 肥瘦大小의 전개가 잘 되어 서로의 모양에 따라 훌륭히 호응함으로써 전체를 잘 정리한 깊은 맛이 있는 구성에 성공하고 있다. 또한 선이라 하기 보다 모가 나 있고 면과 비슷한 선이 있다. 셋째 윤갈 갈필은 상당히 많이 있으나 소위 번진 곳은 없다. 그러나 먹의 양이 많아 듬뿍 묻은 곳은 있어 보기 좋은 콘트러스트를 보이고 있다. 넷째 자간․행간인데, 자간은 너무 빽빽하지 않으나 행간은 밀도가 높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낱낱이 글자를 늘어놓은 것같이 보인다. 다섯째 행두․행미의 처리가 잘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계획적인 것이 아니고 임기응변의 결과라고 생각되지만, 좁은 곳에 작은 글자를 교묘히 써넣는다든가, 큰 글자를 여유를 갖도록 쓴다든가 해서 실로 멋지게 처리하고 있다. Ⅳ. 서보의 가치 서보의 서예적 가치는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측면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서예 계승론, 둘째 서체론, 셋째 서가론, 넷째 창작론, 다섯째 풍격론, 여섯째 학서단계론, 일곱째 의상미, 마지막으로 서예의 가치와 효용론으로 구분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1. 서예계승론 서보는 前代 書藝家의 평론으로 시작한다. ‘대저 잘 쓰는 사람이라고 하면 한․위시대에는 종요와 장지의 절필이 있고, 진말 시대에는 왕휘지, 헌지 부자의 묘필이 있다’라고 하여 서예의 계승 발전을 평론으로 시작한다. 종요와 장지 그리고 왕희지 왕헌지에 대한 평가는 진나라 이후로부터 줄곧 서학 이론의 쟁점이 되어왔다. 따라서 4인이 고금에 뛰어난 서예가이다. 이에 손과정은 評者들은 말하기를 이들「이 네사람(四賢)의 서가는 고금에 걸쳐서 특별히 뛰어난 서예가이다. 지금 사람이 옛사람에 이르지 못한 것은 옛사람은 질박했지만 지금 사람은 예쁘고 아름다움만 추구한다18).」 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질박하다든가 어여쁘다든가 하는 것도 시대와 함께 변천하는 것이다. 먼 옛날에 문자가 발명되고 그것으로 말을 기록하여 글씨가 생겼다. 무슨 일이건 시대가 흐름에 따라 순후한 것에서 경박한 것으로 소박한 것에서 꾸밈새 있는 것으로 변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서 고법을 잘 지켜 시대 감각을 잃지 않고 현대 풍일지라도 그 나쁜 면에는 물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위 文과 質을 갖춤으로서 君子가 된다. 구태여 雕宮(훌륭한 궁전)을 穴處(토굴)로 바꾸며, 玉輅(호화마차)를 椎輪(빈약한 마차)으로 바꾸어 탈 필요는 없다.19)」 라고 하여 질박과 연려(姸麗)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보고 고법을 배우되 고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현대풍이라도 나쁜 면에는 물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文質彬20) 연후에 군자라고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굳이 훌륭한 궁전을 토굴로 바꾸며, 호화마차를 빈약한 마차로 바꾸어 탈 필요가 있겠는가(?) 이러한 주장은 서예 창작에 있어서 법고창신과 서예의 운치를 주장한 것이다. 2. 서체론 篆書, 隸(楷)書, 草書, 章書 등의 서체의 공능이 서로 다르고 변화가 많지만, 그 아름다움을 이루는데는 각각 용필의 마땅한 바가 있다. 吏員이나 日常用의 書體로는 行書가 적합하고, 제액(題額), 비문(碑文), 게시문(揭示文) 같은 글씨는 眞(楷書)이 으뜸이다.(篆隸草章 工用多變 濟成厥美 各有攸宜) 또한 서체미에 대해서 「篆書는 아름다우면서도 맥락이 통하여야 하고(용필의 아름다움), 隸書는 간격이 정밀하여야 하고, 草書는 활발하면서도 유창하여야 하고(거침없이 흐름), 章草는 법에 맞으면서도 간편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 풍채가 뛰어나 글씨가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게 하여야 하며, 예쁘고 윤택하게 하여 온화함을 갖추어야 하며, 마르고 굳센 필획으로 힘있게 하여야 하며, 한가롭고 우아한 것으로 화목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 가히 자기의 성정을 이룰 수 있으며, 또한 내심의 슬픔과 기쁨까지도 형용할 수 있게 된다21). 」 라고 하여 서체의 서로 다른 공용으로부터 출발하여 서로 다른 심미안의 표준을 제시하고 나아가서 각종 서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예술 규약을 결합하였다. 동시에 그는 그들 상호간의 관계와 통일을 강조하기도 하였다22). 「초서를 배울 때 해서를 겸비하지 않으면 오로지 근엄한 데 빠지기가 쉬우며, 해서를 익히는 데 초서를 통화지 않으면 결국 필찰에는 적합하지 않게 된다. 해서는 점과 획으로 형태와 바탕을 이루고 筆鋒을 어떻게 전환시키는 가에 따라 성정이 표현된다. 이에 반하여 초서는 점과 획으로 성정을 이루고 있으며, 필봉을 어떻게 전환시키느냐에 따라 그 자태가 나타난다. 초서에 있어서 필봉이 전환하는 범칙이 어긋나면 글자를 이루지 못하지만 해서에 있어서는 점과 획이 법칙에 어긋나더라도 오히려 문채 있는 글을 기록할 수 있다. 이들이 비록 서로 복잡하게 엉키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23).」 라고 하였다. 여기서 손과정은 <사전>과 <점획>으로 해서와 초서의 상이점과 상통점을 분석하여 서론사의 유명한 논단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점획과 사전은 서법상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이고, <성정>과 <형질> 또한 통일적인 것이다. 즉 草書의 점획은 사전 가운데 깃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초서에 있어서 필봉이 전환하는 법칙이 어긋나면 글자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성정의 발로가 형질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손과정은 해서와 초서의 두 서체의 필법이 서로 상통한다고 하였던 것이다24). 3. 서가론 뛰어난 서가로는 종요와 장지가 빼어나고 그 뒤를 왕희지와 왕헌지가 이었다. 종요은 진서에 뛰어났고, 장지는 초서가 정묘했다. 그들의 二美이다. 그러나 逸少(王羲之)는 眞草 둘 다 겸했다. 王羲之 楷書와 鍾繇의 楷書와 비교하면 王羲之는 草書의 힘을 여분으로 갖고 있고, 草書에 대해 張芝와 비교하면 해서가 여분이다. 진초의 경우는 약간 뒤진 데가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본다면 王羲之가 뛰어나 있을 뿐만아니라, 各體에 있어서는 逸少가 優秀하다. 왕희지와 왕헌지를 비교할 때 專修와 兼習의 차이가 있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우나 왕헌지가 왕희지에 미치지 못함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이어 왕희지의 書蹟중에는 <落毅論> <黃庭經> <東方朔畵讚> <太師箴> <蘭亭集序> <告誓文> 같은 것은 모두 俗世에 傳해지고 있는 것으로 眞行草書의 최고의 작품인데 이들의 평은 다음과 같다. <낙의론>을 쓰면 감정이 풍부해지고, <동방삭화찬>을 쓰면 진기한 미에 감동된다. <황정경>에서는 마음놓고 허무의 경지에서 희열을 느낄 수 있으며, <태사잠>에서는 종횡으로 달리는 듯한 맛을 얻을 수 있다. <난정서>에 이르러서는 풍류가 있어 세속으로부터 떠나온 기분에 잠길 수 있고, 왕희지 일족의 誡誓 즉 <고서문>으로 부터는 참담한 감정의 유로가 보인다. 작품과 상황과의 상관관계를 말하자면 이른바 즐거울 때 웃음이 나오고, 슬플 때 한탄이 나오는 이치가 아니겠는가.25) 이것은 마치 사람이 즐거우면 웃고, 슬프면 嗟歎하는 것과 같이 쓸 때의 기분이 뜻대로 書에 나타난다. 王羲之의 書는 心思에 따라 用筆을 變更하고, 形體를 따로 구하지 않지만, 一見해서 道德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王羲之의 書는 文字의 演奏者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일가를 이룬 어떤 사람을 조종으로 하여 글씨를 배운다 하더라도 결국 이것은 변하여 여러 종류의 글씨체가 나오게 되는데 성격이 질박하고 곧은 사람의 글씨는 평직하나 굳센 맛이 없고, 강한 사람의 글씨는 굴하지 않으나 윤택한 맛이 없고, 지나친 긍지를 가진 사람의 글씨는 구속당하는 폐단이 있고 , 경솔한 사람의 글씨는 법도를 잃기가 쉽고, 온유한 사람의 글씨는 필획이 연약해지고 조급한 사람의 글씨는 너무 급한 느낌을 주고, 너무 조심스러운 사람의 글씨는 막히고 껄끄러운 데에 빠지기 쉽고 성격이 더딘 사람의 글씨는 결국 둔한 느낌을 주게 되고, 가볍고 자질구레한 사람의 글씨는 속기에 물들기 쉽다. 이것은 모두 스스로 그렇게 만드는 것이니 각자가 한쪽으로 좋아하는 바에 치우쳐 올바른 길에 어긋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26). 이것들은 모두 그 사람의 性情에 起因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쳐 나쁜 버릇이 되는 것은 獨學을 하기 때문이다. 獨學의 경우는 偏習을 조심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형성된 서가는 종요, 장지, 이왕 외에 後漢 시대의 師宜官(後漢靈帝期의 사람. 八分의 能筆家로서 高名)의 高名은 史牒에 나타나 있고, 魏의 邯鄲淳(魏文帝朝의 사람. 古文, 大篆, 八分, 隸書를 비롯하여 八體에 能했다)의 令範은 헛되이 謙緗에 나타났으나, 이 두 사람의 筆蹟은 傳해진 것이 없다. 이밖에 崔瑗(77~142)(座右銘의 著者로서 알려지고 있다 杜度의 師로, 章草에 能했으며, 草賢이라 稱하였다), 杜度(後漢章帝期 사람, 章草에 能했음) 이래 漢에서 六朝에 걸쳐서 羊欣(370~442, 楷, 行에 能했음. 古來能書人名의 著者 ), 蕭子雲(486~548, 草, 隸에 能했음) 등 書名이 높은 사람이 많이 나왔다. 그 외 많은 書家들이 있지만 대개가 浮華하고 外形을 論할 뿐 內面的인 道理를 解하지 못하고 昏迷하기 때문에 지금 이 書譜를 撰하는 데에는 取하지 않았다. 4. 창작론 “예술은 인간이 지닌 마음의 기술이다27).” 서예술은 마음의 기술이 문자를 통해 표출되므로써 창작되는 예술이다. 이런 서예술은 대단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루기 어려운 예술이다. 단순한 붓질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고의 예술이라 하는지 모른다. 이런 서예술의 완성을 위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첫번째는 붓글씨는 여가 선용의 하기 쉬운 놀이가 아니라는 것이며, 두번째는 인생을 걸어야 하며 세번째는 무엇보다 글씨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하고 네번째는 겸손해야 한다28).” 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자세로 學書에 임하고 이에 수반되는 기법적 이론들이 작가내부에 녹아서 흘러나와야 비로소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손과정은 서예술 창작에 있어 몇 가지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1)창작환경 글씨를 쓸 때 내재된 심정과 밖에 있는 사물의 영향을 받게 마련인데, 이것이 어떤 때는 어그러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합해지기도 한다. 이것이 합하게 되면 글씨는 유창하면서도 아름답게 되고, 이것이 어그러지게 되면 가을의 서리맞은 나무처럼 거칠고 시든 모양이 된다. 대략 그 원인들을 말하자면 각각 다섯 가지로 나타난다. 이를 손과정은 五合과 五乖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오합과 오괴는 정신이 고요하고 한가로워 아무일이 없을 때가 일합 이고, 은혜를 느끼고 영활한 지혜를 따르며 망련된 행동을 하지 않을 때가 이합 이고, 날씨가 화창하고 천기가 온유할 때가 삼합이고, 종이에 먹발이 잘 받아 서로 조화를 이룰 때가 사합이고, 심기가 편안하여 우연히 글씨를 쓰고 싶을 때가 오합 이다. 마음만 급하여 몸이 책상에 머물러 있을 때가 일괴이고, 마음이 내키지 않고 형세는 핍박을 받고 있을 때가 이괴이며, 바람은 건조하고 날씨가 뜨거울 때가 삼괴이고, 종이에 먹발이 잘 받지 않아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할때가 사괴이고, 정신이 태만하여 손이 나아가지 않을 때가 오괴이다.29) 좋은 時期의 到來를 기다려 얻는 것은, 優秀한 器才를 구하는 것과 같지 못하고, 器才를 得하는 것은 意志를 得하는 것보다는 못하리라30). 만약 五乖가 함께 모이면 마음은 막히고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반대로 五合이 함께 이르면 정신은 명랑하고 筆은 잘 뻗는다. 筆이 잘 뻗으면 마음대로 움직이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애써도 잘 되지 않는다. (2) 창작기법 1) 執使轉用 서의 도를 체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예의 창작에 있어서 서이론이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이론을 몰라도 서예를 창작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론의 효용은 무엇인가. 이것을 체계화시켰을 때 학문적 가치와 서예의 道에 다달을 수 있는 시간적인 부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서예의 창작에 관련한 몇가지 기법을 손과정은 밝히고 있으며 부족한 부분은 제현의 보충을 바란다는 단서까지 달고 있다. 書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말로는 나타내기 어렵다. 그러나 그 대요를 적어 彷彿시키는 것쯤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書譜는 그 정도이므로 讀者는 그 背後에 있는 것을 明察해서 書의 佳境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도 說明이 모자란 곳은 후일에 諸賢의 보충을 바라는 바이다. 지금 여기서 用筆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執․使․轉․用의 書의 基礎的인 技法을 說明하고 基本을 體得치 못한 사람을 啓蒙코저 함이다. 라고 하여 書論에 대한 序論의 설명하고 執․使․轉․用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집이라는 것은 붓을 잡는 위치를 말하는 것으로 손가락과 종이와의 거리 또는 필봉에서 멀고 가까운 것을 말한다. 사는 가로획과 세로획 또는 거기서 나타나는 공간들을 말한다. 전이라는 것은 갈고리를 할 때 꺾어지는 부분 또는 가로획에서 세로획으로 변하는 것들을 말한다. 용은 점과 획이 서로 마주보거나 등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바야흐로 이러한 필법이 여러 번 반복된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의 길로 귀착된다. 이렇게 온갖 교묘함이 섞여 종합적인 아름다움을 이룬다. 옛사람들이 아직 제하지 않은 부분을 들어 후학들로 하여금 법을 삼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근원을 탐구하여 보면 여러 가지의 지파가 나타난다.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문장은 간fir 하면서도 이치는 풍부하고 필적에는 마음이 통한 것이 나타나야 한다. 책을 보다가 명확해진 것을 붓으로 옮기면 막힘이 없다. 따라서 궤변과 이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31). 2) 운필법 초서는 형상에 생명을 부여해야 살아 움직인다. 형상의 생명운동 즉 운동감 생성은 초서의 결체, 운필의 속도, 장법, 방원곡직 등이 어우러져 있고 또 구체적인 문자의 象과 意가 서세 중에 통일되는 표현능력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차원 공간상에 표현된 시각예술로 하여금 시간예술에 가깝게 할 수 있다. 이에 손과정은 운필의 지속에 대하여 「아직 淹留를 悟하지 못하고, 勁疾을 쫓거나 迅速을 能하게 하지 못하면서 遲重을 꾀하는 일이 있게 된다. 대저 勁速은 超逸의 機이고, 遲留는 賞會에 致(遲留는 감상의 포인트)할 것이다. 마침내 그 速함에 反하고자 한다면, 언젠가는 會美쪽으로 이르고자 하여도 오로지 遲에 빠져 마침내는 絶倫의 妙를 어길 것이다. 速을 能히 하면서 速하지 않음은 소위 淹留이다. 遲에 因하여 遲에 趣함은 어찌 賞會라고 稱하겠는가. 運筆의 遲速을 體得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心이 閑暇하고, 手가 敏하지 못하면은 不可能한 일이다.」 라고 했으며 서세를 구성하는 골기에 대해서 衆妙를 具備함에 이르렀어도(大家의 妙味를 자신의 書에 받아들였다 해도) 骨氣가 있어야 한다. 이미 骨氣가 있고, 그리고 이에 遒潤이 加해지면 마치 松木의 가지가 霜雪을 견디어 더욱 勁하고, 花木에 있어서는 그 花葉이 鮮茂하여 雲日과 相暉하는것 같은 것이다. 만약 그 骨氣만이 많고, 遒麗의 趣가 少하면, 그것은 古木이 險厓(벼랑에)에 걸려 있고, 大石이 途上에 들어 누어 있는 것 같고, 體質은 있으나 姸媚의 姿態에 있어서 闕한 데가 있다. 또한 획의 구성에 있어서 누운 것이 있으면 서있는 것이 있어야 하고 뛰는 것이 있으면 노숙하게 걷는 등 변증법적 서예미학이 요구되는데 이에 손과정은 筆速이 느릿해도 항상 느린 것이 아니고, 速筆을 써도 항상 빠른 것이 아니다. 線質이 메마른 것 같으면서도 그 가운데에 潤氣가 있고, 진한 墨色에 섞여 연한 곳이 잘 나타난다32). 方圓을 規矩의 사이에 있고, 曲直을 繩墨의 밖에 遁(隱也, 回避)하고, 갑자기 顯하고, 갑자기 晦하고, 행하는 것 같이 당하는 것 같이 變化를 筆端에 구애받지 않고, 情調를 紙上에 合하여 心手가 떨어지지 않고 書法이란 것을 一切 잊어버리기 되면, 그 書가 王右軍 父子에 違背되고, 鍾繇나 張芝와 틀린 데가 있다 하더라도 이에 더 加할 것이 없을 것이다.33) 方圓曲直의 線을 긋고 모양을 만드는 데 있어 전혀 書法에 구애되지 않고, 그 붓의 움직임은 變有自在, 變化를 다한 態勢이면서도 統一이 있고, 心과 手가 一切가 되어 書法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은 技巧의 높이와 경지에 이르면 王羲之, 王獻之, 鍾繇, 張芝의 型에 맞지 않아도 훌륭한 書라 할 수 있다. 5. 風格論 '風格’의 함의는 연구자마다 주장하는 개념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작가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작가 개인의 사상과 예술적 개성의 총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며, 작가의 창작견해가 작품속에 녹아 독특한 예술형식을 통해 표현된 것이다. 이런 風格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창작개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34). 손과정의 서예 풍격론의 종지(宗旨)를 개괄한다면 그것은 <종합>과 <중용의 미35)>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각종의 풍격을 융회하고 아울러 장점을 취하라고 주장한다. 大家의 妙味를 자신의 書에 받아들였다 해도 骨氣가 있어야 한다. 이미 骨氣가 있고, 그리고 이에 주윤(遒潤)이 加해지면 마치 松木의 가지가 霜雪을 견디어 더욱 勁하고, 花木에 있어서는 그 花葉이 鮮茂하여 雲日과 相暉하는것 같은 것이다. 만약 그 骨氣만이 많고, 遒麗의 趣가 少하면, 그것은 古木이 險厓(벼랑에)에 걸려 있고, 大石이 途上에 들어 누어 있는 것 같고(딩구는 것과 같고), 體質은 있으나 姸媚의 姿態에 있어서 闕한 데가 있다(아름답고 어여쁜 맛은 없으나 글씨의 본질은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遒麗로서 優秀하고, 骨氣가 劣(부족한)한 것은 芳林의 樂花가 헛되이 照灼하게 依據하는 데가 없고(숲 속의 꽃이 다 진 뒤에 햇빛이 내리 비치듯 쓸쓸한 느낌이고), 蘭沼의 浮萍이 靑翠는 떠있으나 依託할 데가 없는 것과 같다(또한 연못에 뜬 부초가 아무리 푸르러도 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한쪽에 치우쳐 巧로 하는 것은 容易하나 盡善盡美라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다(이것을 보아도 편향된 기교는 배우기 쉬우나 완전한 기법은 배우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一家의 書를 傳習하여 배워도 배우는 사람의 性格(個性)에 따라 變하여, 여러 가지 모습의 多樣한 書가 되고, 각기 다른 書風이 이룩된다. 골기와 주윤이 융합된 미,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 즉 數劃 卽 上下左右의 線條를 몇 개 나란히 써도 그 線條는 하나도 同一한 것은 없고, 많은 점을 같이 늘어놓아도 그 形은 또 同一한 것은 없고(몇 개의 점획을 나열해도 그 형상은 다르며), 一點이 一字의 規(표준)를 이루고, 一字가 全體의 矩가 되고, 서로 어그러져 있는 것 같지만 서로 범하는 일이 없고, 和하여도 同하지 않아야 한다. 和而不同 違而不犯, 직과 곡, 어그러짐과 조화, 머무름과 보냄, 건조함과 윤택함, 진함과 옅음 등 중용의 심미적 이상을 숭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왕부자의 서가에 대한 풍격에 대해서도 王友軍의 書에는 晩年에 妙蹟이 많은데, 이는 晩年에 思慮가 圓熟하고, 志氣가 和平(생각이나 행동이 차분함)하여 사납지(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글씨는 격렬하거나 動하는 일이 없이 고매한 풍격을 지닌 것이 되었을 것이다(사람과 서가 다같이 風格을 自然히 高遠했기 때문이다)36). 王獻之 以後 이후부터는 외면에 너무 힘을 내고, 특히 풍격을 내세우려고 하나 그들과 희지의 큰 차이는 技法的 修鍊의 차이 뿐만아니라, 神情的인 면이 懸隔하기 때문이다. 書藝의 品位라는 것은 書者의 人品에 의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또한 서풍의 형성과 일가에 같이 전습해도 사람에 따라 품격이 다르게 형성되는 것이 書藝術이다. 마치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가 다른 것처럼 작가의 개성적 스타일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書藝術의 風格은 작가의 인격, 철학 등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을 잘 술하고 있다 하겠다. 6. 학서단계론 학서 태도에서 ‘스스로 겸손한 사람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배움에서 뛰어나며 단지 배우지 않고 능한 자는 없다’ 라고 하면서 세상에는 자기의 書를 鄙拙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그 運筆의 妙를 自負하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 自負하는 者는 이것을 誘導하여 進步시키는 일은 杜絶되어 있으나, 스스로 自鄙하는 자는 指導하여 熟達시킬 수가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타고난 天分이 있어서 아무리 배워도 進陟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나, 아직 배우지 않고 能한 사람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이것은 평소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여도 그 理致는 明白한 것이다37). 학서 자세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대자연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정회가 변하듯이 운필의 근본이 서자에 있으며 교본과 임모에 대하여 인간의 情이 움직여서 말[言]이 되고, 시가 태어난다는 것과, 人間의 情懷가 날씨가 좋을 때는 명랑해지고, 나쁜 날에는 우울해 지듯이 결국 天地의 根本과 결부되어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 運筆 表現의 根本은 自己의 心性感情에서 出發하지만, 교본으로서 이왕 필적 등은 자기 주변에 있으므로 거기에 규범을 찾아야 하고, 이것을 행함에 一毫라도 잘못하면 千里를 隔하게 된다. 라고 하여 교본으로 二王의 필적을 권하고 있으며 임모의 중요성을 일호라도 잘못하면 천리를 격한다 할 정도로 강조하고 있다. 이에 수련과정을 마음은 精함을 싫어하지 않고 손은 숙달함을 잊지 않는다. 만약 運用에 精熟을 다하고, 規矩는 胸襟에 숨어든다면, 자연에 容與徘徊하고, 意는 먼저 가고, 筆은 따라간다. 붓(翰)은 氣分爽快하고 生生하여 마음은 境界를 넘어 飛翔한다. 包丁의 目이 全牛를 보지 않았듯, 無心중에도 理致에 맞는 姿勢가 取해 진다면, 妙境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38). 또한 공자가 「熟廬 끝에 행동한다면, 그것은 時宜에 맞아 道에 벗어나지 않고, 말할 시기를 기다려서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다」고 말한 것과 같이, 書藝의 道는 긴 과정의 구조를 有함과 동시에 그 궁극의 경지로서 자유이면서도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무심의 경지를 지향하는 것이다39). 라고 하여 마음과 손이 익숙하게 되면 모든 조화가 여기서 나오는데 이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숙련된 된 뒤에 오는 것이다. 장자의 포정의 눈이 소를 보지 않고, 감각과 지각이 멈추어진 채 정신이 행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하는 무심에서 나와야 한다. 이런 단계가 法위에 있는 단계이며 행하는 대로 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는 예술적 단계이다. 이런 예술적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書藝의 理解는 少年보다 老年이 빠르지만, 실습에 의해 書法을 習得하는 것은 老年은 少年에 당하지 못한다. 書藝를 鑑賞하고 理解하는 것은 老年일수록 精妙하고 배움이란 젊은이가 더욱 힘쓰기가 용이하므로 書藝의 學習은 少年시대에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書를 배워서 점점 進步해 갈 때 삼 段階가 있는데 처음에 分布를 배움에 이르러서는 點劃의 構成등에 대해서 平正을 求하고, 이미 平正을 알면 險絶함을 추구하고, 이미 險絶을 能하게 되면 다시 平正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三段階를 통과해야 書學은 비로소 大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 關門을 통과함은 容易하지 않다. 거기까지 갔을 때, 書藝도 老熟하지만, 사람도 또한 함께 익어간다40). 이런 人書俱老의 경지는 孔子가 말한 五十에 天命을 알고, 七十에 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로서 無法이 有法이 되는 단계로 손과정은「意를 得하여 言을 忘하다」라고 하여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서예의 道는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두고 끊임없이 노력할 때 그 道를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서예의 道를 체득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7. 意象美 意象이라는 말은 서예술에 있어서의 풍부하고 심오한 예술적 언어이다. 왕희지가 거위가 움직이는 자태를 살펴보고, 장욱이 公孫大娘의 검무를 추는 것을 보고, 회소가 물소리를 듣고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본 것… 등등은 모두 의상을 탐색하는 방법이다. 다시 예를 들어 장욱이 짐꾼의 길이 다툼을 보았고, 정견이 협중의 사공의 노저음의 생동적인 자태를 세심하게 관찰할 때, 그들은 필법을 탐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참고할 만한 형상을 받아들이는 중에 서예의 의상을 탐구하였다41). 이에 대해 손과정은 대저 바늘을 매달고 이슬을 드리운 것과 같이 서로 다른 모양과 번개가 치고 돌이 떨어지는 기이함과 기러기가 날고 짐승이 놀라는 자태와, 난새가 춤추고 뱀이 놀라는 자태와, 언덕이 끊어지 산봉우리가 무너지는 형세와, 지형에 임하고 마른 고목에 의지하는 모양을 본다. 어떤 때는 무겁기가 산봉우리의 구름 같고, 어떤 때는 가볍기가 마치 매미의 날개와 같다. 인도할 때는 샘물이 흘러내는 것 같고 머무를 때는 태산이 안정되어 있는 것 같다. 필획이 가늘고 부드러울 때는 미치 초생달이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으며 필획이 많을 때는 마치 초생달이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 같으며 필획이 많을 때는 뭇 별들이 은하수에 줄지어 있는 것 같다42). 서예의 아름다운 형상을 외부의 물상에 비유하여 논하고 있어 서예에 문외한이라도 서예술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8. 서예의 가치 및 효용론 전한의 양웅은 ‘詩賦는 小道’라 장부가 할 바가 아니라 하지만, 글씨(書藝)는 人間 敎育(禮)과 學問의 根本이며, 또한 그것의 妙味가 神仙의 경지와 같아서 變化無雙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서예는 그 가치를 아는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손과정은「여름 곤충이 얼음을 모르는 이치와 같다」고 했다.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用筆이나 結構의 理致를 추구하여 蟲篆 및 그 밖의 書體도 익히며, 또 草隸書 등도 참작하여 마치 建築에 五材인 金木皮玉土의 類를 竝用하고, 음악에 金石絲竹匏土革木 등의 八樂器를 써서 節奏를 하는 것과 같으면, 會心의 書를 쓸 수 있을 것이다43). 이런 서예술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술이라면 그 효용은 크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없고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에 손과정은 다음의 예를 들어 옛날 惠候가 二王의 書를 좋아해서 僞物을 많이 所藏한 것과 같고, 葉公이 龍을 좋아해서 집안 아무 데나 용을 그렸다가 진짜 天龍을 보고 놀라 기절했다는 것과 같이, 鐘子期가 죽자 伯牙가 琴을 다시는 타지 않았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음악의 대가인 蔡邕은 잘못 鑑賞(채옹은 琴의 音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고사가 있음)하지 않고, 馬의 相을 잘 보는 孫陽(伯樂二馬를 判別하는 名人)이 馬를 함부로 보지 않았던 것은 그 鑑識力이 높아서 耳目에 滯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마솥 밑에서 타는 오동나무의 냄새와 묘한 奇音이 보통의 귀에도 들렸다고 하고, 櫪에 엎드려 있는 駿馬의 그 絶群함의 凡識을 아무라도 안다면, 伯喈(채옹의 字)도 稱할 것이 못되고, 伯樂도 尊敬할 일이 못된다. 라고 하여 종자기, 채옹, 손양 등 이들이 보통 사람과 같았다면 '존경할 일이 못된다'라고 한다. 이것은 서예술의 가치에 대해서 주장한 것이며, 또한 왕희지 고사를 들어 晉書의 王羲之傳에 나오는 故事로서 부채를 파는 老姥의 부채에 글씨를 써주어 처음에는 화를 냈었는데 나중에 懇請한 일, 門生의 書机에 글씨를 써주었는데 부친이 깎아 버려 아들이 고민한 일 등은 가치를 알고 모르는 차이이다. 라고 하여 서예술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모른다고 어찌 탓하겠는가? 하나를 알면 하나만 보이고 열을 알면 열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이에 대하여 書藝를 모른다고 해서 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莊子에「저녁에 나서 아침에 죽는 朝菌은 한 달에 晦朔이 있는 것을 모르고, 봄에 나서 여름에 죽고 여름에 나서 가을에 죽는 蟪蛄는 一年에 春秋가 있는 줄을 모른다」라고 하였고, 老子에도 「下士는 道를 듣고 大笑한다. 下士(愚者)가 크게 웃을 정도가 아니면 참다운 道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또 莊子 추수편에「夏蟲이 얼음에 대해서 모른다」고 責하지 말라고 하였듯이 書藝를 모르는 者를 책할 일이 아니다44). 입문하지 않으면 그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다. 여자는 자기를 즐겁게 하는 자를 위하여 단장을 하고,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는다. Ⅵ. 결 론 서이론이 서예술 창작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서예학을 전공하는 교육기관 즉 대학이 생기고 또한 교육하면서 서예술 발전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는 결국 이론을 체계화시키고 다시 보편화시켜 저변의 확대와 더불어 국민예술로 승화시켜 한차원 높은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론이 부재한 도제식 교육의 틀 속에서 개성의 발현이란 상상하기 어려우며 이론이 있다해도 이를 전습하지 않으므로 그 도를 터득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하겠다. 1300여년 전의 손과정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하면, 설령 알고 있어도 그 깊이가 없고 새로운 연구가 없어 무용지물만 늘어간다’ 고 하면서 서보 저술의 배경을 설명하고 ‘우리집의 子弟가 書를 배우는 데에 참고가 되고, 또 天下의 有識者와 親友의 省察을 같이하기를 원하는 바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서론을 체계화시켜 입문하는 자의 지침서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서예는 그 道를 터득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일가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붓을 들었다가 다시 그 위에 먼지가 쌓여간다. 이런 가운데도 진심으로 성심을 다해 열심히 하여 生前에 名筆로 평판을 높이는 書家도 있다. 그러나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死後에 오히려 眞價가 세상에 나타나 그 價値와 명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있고, 참으로 오랜 歲月이 지난 후에 그 名聲을 높이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權勢나 阿諂으로 聲價를 높인 者는 세상을 떠남으로써 名聲이 衰하기도 하였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오직 書藝術에 정진한다면 언젠가는 그 가치가 빛을 발할 것이다. 전통서예에서 강조하는 詩(文)․書의 기존 개념에서 詩와 文은 없어지고 문자조형만 전개되는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의 해소는 진실로 어려울 것 같으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서체의 중요성은 이미 없어진 상태이다. 그러나 일부이기는 하지만 文이나 詩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작시 모임들이 만들어지면서 불씨를 지피고 있어 발전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문화는 유기물과 같아서 그 시대의 산물을 먹고 자란다. 이런 문화가 먹고 자랄 새로운 양식을 누군가는 선구자적 혜안으로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항간에 일어나기 시작한 몇몇 文이나 詩에 대한 모임은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이와 같이 서예에서 문학성의 유무에 관계없이 초서는 서예의 진귀한 보물이다. 이를 보급 발전시키는 것은 서예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금부터 약 1300여년전 書譜라는 서론이 자필 초서로 저술되어 현재까지 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진리는 만고불변’인 것이다. 서보를 정독하면 서학의 달고 쓴맛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필자의 체험에 의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서보는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이런 선인들이 주창한 價値있는 書論을 익혀 이를 계승 발전시켜야 하며, 이런 바탕 위에 書藝術이 발전하고 또한 일가가 형성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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